국가라는 포획장치에 종속된 비평담론

2014-03-04     최승현

 국가라는 포획장치에 종속된 비평 담론

 
최승현 | 경희사이버대 연구원
 
 서구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를 영토화하는 작업은 어느 정도 마무리된 듯하다. “Deleuze and ~ ”이라는 이름을 단 스무 권이 넘는 논문집들, 그들의 사유를 꿰뚫어 보는 탁월한 저작들 -피어슨, 마수미, 하트 등으로 대표되는- 덕분이다. 그들이 이렇게 제도권 학문에 발을 들여놓는 데에는 이를 막아선 이들과의 투쟁이 필요했다. 현대 마르크스 이론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는 프레드릭 제임슨과 정신분석을 통해 마르크스를 되살리고 있는 지젝이 그들이다. 저자인 램버트는 이 전선(戰線)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는데, 그는 데리다의 제자답게 들뢰즈와 가타리를 옹호하는 편에 서기로 마음먹는다.
 
제도로서의 문학 비평
 
 이 책이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제도권에 편입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연대보다는 탈주를, 부정의 노동을 통한 정신의 획득보다는 체험 그 자체를 노래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램버트는 문학 비평가답게 비평으로 이 문제를 풀어간다. 미국의 비평계에서 정신분석적 문학 비평과 마르크스주의적 문학 비평은 이미 확고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러나 유럽을 중심으로 선진국에서 일어난 1968년의 학생운동은 이 쌍두마차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바로 들뢰즈와 가타리의 ‘소수자 문학론’이 그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보기에 이들은 연대가 절실한 미국 사회운동에 지극히 해롭다. 마르크스 운동 내에서의 차이, 곧 소수적 지향을 지시하는 이들의 주장에 젊은이들이 현혹되는 게 걱정되기 때문이다.
 
 만일 언어가 인간 인식능력의 극한을 드러내는 표지라면, 문학은 인간이 발명한 최고의 정신적 산물일 것이다. 단순한 글자 이해에서 알레고리를 지나, 심리 파악을 거쳐 신비한 정신의 획득에 이르는 이 과정은 “역사의 집합적 의미”를 아는 일, 바꿔 말해 정치적으로 문학 작품을 독해할 줄 아는 정신의 획득에 이르러 그 정점을 찍는다. 제임슨이 보는 마르크스주의 문학 비평의 진정한 과제 또한 동일하다. 작품을 읽고 우리의 진정한 삶을 막아서는 허위의식이 무엇인지를, 곧 나를 억압하는 자본가의 계략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문학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를 포함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 비평은 이런 허위의식을 부추길 따름인데, 그들의 문학관은 모호함과 난데없음(생성, 탈주)에 터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디로 가라는 거야?’ 들뢰즈와 가타리의 글을 읽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들고 만다는 게 제임슨의 생각이다.
그러나 저자인 램버트는 ‘생산’의 시각에서 이를 문제 삼는다. 오늘날 문학 비평 담론은 어디에서 생산되는가? 그것은 국가라는 포획장치에 종속된 대학에서 생산된다. 대학은 출판사와 언론을 통해 방언의 흐름을 절단하고 조정한다. 그들에게는 이미 생산된 것을 해석할 능력만 있을 따름인데, 이는 미국의 소수 민족 작가인 사이먼 오티츠(1941~)의 글을 대할 때보다 극명하게 드러난다.
 
문학은 저항의 한 형식이다. 만약 문학이라는 신체가 없다면 토착민들은 눈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때때로 ‘인디언’이라는 단어는 추상적 관념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문학을 통해 그 관념을 표현할 때, 우리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것인 표현의 유효한 신체성을 갖게 된다.
 
 램버트는 제도가 승인한 형식에 따르지 않는 토착어, 곧 신체나 다름없는 언어야말로 말하는 이들 자신을 온전하게 드러나도록 해준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어떤 해석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는 오티츠에게 낭만주의자라는 혐의를 뒤집어씌울 수 있냐고 묻는다. 마찬가지로 들뢰즈와 가타리 또한 제도에 대한 문학의 저항이 해석활동을 통해 이루어질 수는 없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스케치하는 문학의 비판적 기능은 정반대 측면에 있다. 그들에 따르면, 비평가의 위치는 ‘매개’의 비판적 지렛대를 조정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차라리 문학과정 그 자체에 온전히 빠져 들어가는 데 있다. 이제 문학 활동의 정체성은 ‘그것이 어떤 관점에서 정당화되는가, 즉 정치적으로 적용되기 위한 잠재력이란 어떤 것인가?’에 놓인다. 정녕 해석을 배제한 채 문학이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을까? 문학이라는 노동의 효과는 무엇일까? 제임슨이 염려하듯 그것은 단지 게으르고 무익한, 최악의 것이 되진 않을까? 그것은 자칫 사회적 의미나 적용가능성을 상실해버린 순수하게 형식적이고 무력한 활동, 순전히 기술적이고 형식적인 유희가 되고 마는 건 아닐까? 우리는 어쩌면 다시 한 번 표현의 문제로, 마르크스주의가 예전에 던진 질문으로 되돌아가 정말 문학이 작동하는 것인지 아닌지, 혁명의 대의로서 어떤 쓰임새를 갖는지 물어야 하지 않을까?
 
 질문을 바꿔보자. 문학에서 표현된 바는 관념의 생산에 복무해야 하는가. 표현이 그 자체로 삶을, 소수자가 되었거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노동자의 삶을 드러낼 수는 없는가. 그리고 노동자라는 인간을 정의해 줄 새로운 언어를 생각해볼 수는 없는가.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를 통해 이 길을 발견한다. 카프카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에는 원숭이에서 인간이 되는 일에 성공한 피터가 나오는데, 여기서 인간이란 “침 뱉기와 술 마시기, 굴욕적인 웃음”을 가진 존재로 정의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 동물’과는 반대편에 선 이 인간의 특성, 곧 말하기의 가능 조건인 침 뱉기, 인간이라는 동물의 정신병적 내면을 말하는 술 마시기, 그리고 타인과 나의 굴욕을 공유하는 능력으로서의 사회성. 이를 통해 저자인 램버트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이에 -인간의 생성, 되기- 주목하는 것이 그렇게도 비정치적이냐고 묻는다.
 
지젝의 정치적 무의식
 
 교육이 학교·선생·제자로, 의료가 병원·의사·환자로 이루어져 있듯이, 정신분석 치료는 닫힌 공간과 분석가 그리고 환자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는 한 명의 환자만 분석가에게 말하는 규칙이 준수된다면 그 수는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다. 분석가에게 환자의 말은 동일한 기호로 변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정신분석의 해석기계는 단 하나의 간단한 공정에 따라 작동한다. 언표행위의 주체를 위해 언표주체를 부정하기가 그것이다.” 언표주체인 환자가 한 말은 그것을 해석할 권리를 가진 분석가에 의해 언제나 부정당한다. 환자가 지시했던 언표대상이 부정되어야만 치료가 되기 때문이다. ‘말의 의미화, 기표의 사슬화, 침묵의 발화, 충동의 무화’.
램버트가 보기에 지젝의 자동화된 해석 기계는 부정이라는 단순한 방법을 통해 작동한다. 지젝은 늘, 자신의 주장과 텍스트를 대립적인 관계로 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편지가 언제나 그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사실은 정확히 그것이 유실될 가능성에 의존한다.” 즉, 해석이라는 행위는 늘 오독에 기대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지젝의 자동기계에 따라 도착증 환자로 취급된다. 그들은 욕망을 무한한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자본주의적인 삶의 태도를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말았다. 지젝에게 욕망의 자유로운 향유는 대타자(법)와의 관계 속에서나 가능하다. 그러나 램버트가 보기에, 지젝은 자신의 무의식 속에 다음과 같은 물음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욕망이 권리의 담론을 통해, 심지어 인권과 같은 언어를 통해 틀을 갖출수록 욕망을 보장하는 자유라는 정치적 의미에 권력이 축자적으로 매달리는 사태를 통제할 새로운 형식과 치안 메커니즘을 발명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렇다면 이것이 욕망 자체의 본성을 왜곡하는가?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치료가 그에 대한 저항을 통해 생산된다고 말한 바 있다. 아무리 정신분석에 해를 끼치고자 해도, 결국 합법적 진료와 불법적 진료를 구분하는 작업을 강화해 줄 뿐이라는 것이다. 정신분석에 대한 저항이 제도를 안착시켜 준다는 이 역설을 돌파할 방법은 무엇인가. 램버트는 이런 물음을 통해 문학의 법정(法廷)이 아닌 전장(戰場)에 우리를 초대한다.
 
글·최승현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양학부 연구원. 고려대학교 교육학과에서 들뢰즈의 배움에 관한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아시아의 교육열 현상과 기술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영국의 들뢰즈 연구자인 키스-안셀 피어슨의 『바이로이드 생명』(1997)을 번역 중이다.
 
 
( 램버트, 최진석 역(2013), 『누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두려워하는가?』, 서울: 자음과 모음, 81쪽
재인용.
(1) 같은 책, 89~90쪽.
(2) 같은 책, 168쪽.
(3) 같은 책, 174쪽.
( 4)같은 책, 2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