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 사진가의 렌즈 속 페티시즘
2014-03-04 박평종<사진평론가>
디지털 카메라의 보급으로 아마추어 사진가가 크게 늘었다. 유명 관광지는 말할 것도 없고 도심 한복판과 산책로에서도 카메라를 손에 든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거리를 걷다 보면 사진 찍는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길을 돌아가야 할 때도 많다. 휴대폰에 장착된 카메라로 거의 ‘모든 것’을 찍는 이들도 있다. 거리에서, 집에서, 식당에서, 카페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의 모습은 일상의 풍경이 됐다. 그리고 이 사진들은 문자 메시지처럼 타인에게 전송된다. 사진은 일상 언어가 되어가는 것 같다.
이처럼 사진을 폭넓은 소통의 언어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사진으로 ‘작품’을 하려는 이들도 있다. 한 카메라 업체의 통계에 따르면 200만 원 이상 고가의 DSLR 카메라를 소유한 사람이 국내에 300만 명을 상회한다고 한다. 그들은 ‘사진작가’를 지향하는 이들로 분류되는 모양이다. 업계는 그 정도 고가의 카메라를 구매한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예술행위’를 하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보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서울 인구의 30%가 사진작가를 꿈꾸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 기준은 지나치게 통속적일 뿐만 아니라 문제를 단순화시키고 있다. 고가의 카메라는 없어도 사진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이고, 수백만원대의 카메라를 ‘단지’ 컬렉션만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의지가 있다고 해서 모두 사진작가가 된다는 보장도 없다. 그밖에도 ‘사진작가’와 ‘카메라’ 사이에는 매우 복잡한 함수관계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위의 관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마추어 사진가들은 고가의 장비를 선호한다. 그리고 그 장비가 자신이 갖고 있지 못한 능력을 대신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카메라 업계가 통찰한 바일 것이다.
고가의 장비를 선호하는 아마추어들
물론 성능이 뛰어난 카메라를 갖고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훌륭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가능성은 좀 더 높을 수 있다. 하지만 법칙은 아니다. 몽블랑 만년필로 쓴 글이 모나미 볼펜으로 쓴 글보다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어쨌든 장르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본질은 같다. 중요한 것은 물리적인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진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진가들은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갖고 있는 엄청난 장비에 놀라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런데 그 고가의 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천편일률적이다. 그래서 또 한 번 놀란다. 그런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저가의 보급형 카메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늘 아마추어 사진가들은 고가의 장비가 없으면 좋은 사진이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할까? 자신이 없어서 장비에 의존하려는 것일까?
사진의 완성도를 카메라의 성능에 의존하던 때가 있었다. 그 때는 촬영의 기술과 카메라의 기능을 습득해야만 했다. 셔터만 누르면 사진이 완성되는 전자동 카메라도 있지만 그 경우 사진의 품질은 매우 낮았다. 게다가 촬영자가 원하는 ‘효과’를 얻어낼 수도 없었다. 그러나 요즘의 카메라는 다르다. 가전제품처럼 매뉴얼만 읽어 봐도 손쉽게 카메라를 다룰 수 있다. 심지어는 매뉴얼조차 필요 없다. 카메라 조작법도 쉬워졌지만 사진의 품질은 그보다 훨씬 좋아졌다. 노출을 맞추지 않아도 카메라가 ‘알아서’ 최적의 노출을 결정해 준다. 초점 맞추기도 거의 저절로 해결된다. 설혹 실수가 있더라도 포토샵이라는 ‘해결사’가 있다. 해상도 역시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과거에는 35mm 소형 카메라의 경우 전지(20x24인치) 크기로 확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 작은 크기로 인화했다. 하지만 요즘은 웬만한 DSLR 카메라는 전지 크기까지는 넉넉히 확대할 수 있을 정도의 해상력을 갖추고 있다.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도 과거 소형 카메라 이상의 해상도는 된다. 한마디로 카메라의 성능은 상향평준화 됐다. 실제로 원로 사진가 강운구는 최근 휴대폰 카메라로 찍은 사진으로 전시를 했는데 품질은 나무랄 데 없었다.
이런 조건에서 ‘작가’를 지향하는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고가의 카메라에 집착하는 모습은 기이해 보일 정도다. 그들은 사진보다 카메라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혹 카메라 제조업체의 ‘과대광고’에 현혹되어 값비싼 카메라만 있으면 ‘저절로’ 훌륭한 사진이 나온다고 믿는 것일까? 원론적인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진을 사람이 찍는지, 카메라가 찍는지 말이다. 플루서 방식으로 얘기하자면 사진은 장치, 즉 카메라가 찍는다. 그 점이 전통적인 이미지인 그림과 기술 이미지인 사진의 차이다. 그리고 ‘카메라’라는 장치는 프로그램에 묶여 있다. 카메라를 작동시키는 주체는 사람이지만 사진은 카메라의 프로그램에 따라 생산되는 셈이다. 따라서 사람에게 주어진 선택은 프로그램의 한계 내에서만 가능하다. 이 지점에서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사진가는 카메라에 종속될 수밖에 없으며, 결국 사진의 질을 결정하는 궁극적인 요인은 카메라, 좀 더 정확히는 카메라의 프로그램이라는 것이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 논리는 창작의 본질을 간과하고 있다.
과시욕을 품은 사회적 욕망의 표출
우리는 창작의 주체가 창작자, 즉 사람이며 그가 사용하는 창작 도구는 단지 수단에 불과함을 잘 알고 있다. 그 때 창작 도구는 창작 주체의 의식에 따라 움직인다. 그런데 말을 잘 듣지 않는 도구도 있다. 예컨대 사람의 신체에 직접 연결된 도구(펜, 붓, 악기)는 의식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지만 카메라나 비디오, 컴퓨터와 같은 장치들은 프로그램에 따라 작동한다. 이 장치들이 내 맘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여기서 문제는 프로그램을 통제할 수 있는 주체만이 이 장치들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이 장치들의 프로그램을 펜이나 붓처럼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을 때만 진정한 창작이 가능하다. 사실 카메라는 아주 단순한 장치다. 수백만원짜리 고가의 카메라나 싸구려 자동카메라나 구조는 같다. 빛을 통과시키는 작은 구멍과 그 구멍을 통과한 빛의 이미지를 고정시키는 감광판만 있으면 된다. 그 밖의 복잡한 다른 프로그램들은 단지 어플리케이션에 불과하다. 있으면 편리하지만 없어도 무방한 것들이다. 물론 고해상도의 데이터가 필요한 경우는 다르다. 하지만 컴퓨터를 워드 프로세스의 용도로만 쓰는 사람에게 고성능 슈퍼컴퓨터가 필요 없듯이 기념사진의 용도로 해상도 2,000만 화소가 넘는 캐논 5D Mark III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사실 기계를 용도에 꼭 맞춰 구매해야만 하는 법은 없다. 게다가 우리는 기계의 성능이 사람의 필요를 초과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용도 이상의 성능은 일종의 ‘덤’과도 같다. 또한 기계 마니아에게 카메라는 창작의 도구가 아니라 수집 대상이기도 하다. 이왕이면 좋은 카메라를 갖고 싶은 욕망을 탓할 이유는 없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진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이 필요 이상 고가의 카메라를 구입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는 없다. 좋은 ‘예술작품’은 좋은 ‘생각’에서 나오지 좋은 ‘카메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한편 고가의 카메라에 대한 소유 욕망을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볼 필요도 있다. 300만이 넘는 사람들의 욕망은 이미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욕망은 카메라 업계의 결론처럼 ‘예술’에 대한 욕망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욕망에 가깝다. 200만 원 이상의 고가라는 상징성 탓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한 사회학적 분석과 검토가 따라야겠지만 없어도 생활에 불편이 없는 물품에 200만 원을 지출할 수 있는 가구는 제한되어 있다. 이 액수는 공식적인 5인 가구의 월 최저생계비보다 높다. 상층계급이나 적어도 중상층 계급에 속하지 않으면 구입이 쉽지 않다는 얘기다.
진정 '사진 작가'가 되려면 자신의 욕망을 냉정히 생각해야
본래 카메라는 고가의 물품이었다. 일제 강점기의 카메라 가격은 집 한 채 값에 버금갔고, 70~80년대까지도 카메라는 상층계급의 전유물이었다. 당연히 사진을 직접 찍을 수 있는 사람도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보급형 자동카메라가 등장하면서 사진은 점차 계급의 경계를 넘나들기 시작했다. 디지털 카메라는 이 현상을 가속화시켰다. 이제 카메라가 특정 계급의 전유물이던 시대는 지났다. 그런데 카메라가 고가의 물품이라는 신화는 아직 남아있다. 말하자면 카메라는 여전히 상층계급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이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는 카메라 제조업체의 입장, 요컨대 값싼 보급형 카메라의 판매 수익만으로는 거대한 산업 복합체를 유지할 수 없는 이른바 ‘자본의 논리’가 함께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고수익을 창출하기 위해서 고가의 카메라를 개발해야 하는 구조 말이다. 어쨌든 상층계급의 전유물이던 카메라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그렇게 중간계급에게까지 확산된다. 이는 마치 고가의 소위 ‘명품’ 브랜드를 소유하고자 하는 중간계급의 욕망과도 다를 바 없다. 부르디외의 논지에 따라 이를 상층계급의 상징체계를 취하고자 하는 중간계급의 열등감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습게도 카메라는 이제 점차 일상의 가전제품이 되어가고 있다. 수백만 원 대에 구입한 고가의 카메라도 불과 몇 년 후면 골동품이 돼버리는 시대다. 반대로 값싼 휴대폰 카메라의 성능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조만간 4,000만 화소 이상의 휴대폰 카메라가 나올 것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그 때는 다시 그 이상의 성능을 지닌 고가의 카메라가 출시되고, 앞에서 언급했던 ‘작가’를 지향하는 아마추어 사진가들은 끊임없는 ‘카메라 놀이’의 순환 속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카메라에 대한 페티시즘(Fetishism)에 사로잡혀 가짜 욕망을 진짜로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진정 ‘사진작가’가 되고자 한다면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냉정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카메라에 대한 페티시즘에서 먼저 벗어나야 한다. 세상에 쉬운 예술은 어디에도 없다.
글 박평종
중앙대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파리10대학에서 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학에서 미학과 현대사진 등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흔적의 미학>(2006), <사진의 경쟁>(2006), <한국사진의 선구자들>(2007), <매혹하는 사진>(2011)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