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의 극단 민족주의자들

2014-03-04     엠마뉘엘 드레퓌스

 극우파가 유럽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물론 그들 중 상당수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섰다. 우크라이나에서도 이러한 세력이 명백히 활개를 치고 있다. 스보보다당, 그리고 한층 극단적 성향의 프라비 섹토르는 부패한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 정권에 대한 민중의 저항운동을 이용하고 있다.

  키예프 시내 한복판에 세워진 바리케이드를 지키는 시위자들이 급조한 화롯불 주위에 삼삼오오 모여 몸을 녹이고 있다. 주위에는 우크라이나 및 유럽 각국 국기들과 우크라이나 정체성의 정신적 아버지로 불리는 시인 타라스 셰브첸코(1814~1861)의 초상화, 그리고 관점에 따라 위대한 애국자 혹은 나치 협력자 취급을 받는 스테판 반데라(1909~1959)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아울러 그루체스코보 거리에서 벌어진 충돌로 목숨을 잃고 영웅이 된 다섯 시민의 얼굴도 눈에 띄었다.

  저항시위의 진앙지인 마이단, 독립광장이 정부의 격렬한 진압과 일부 시위자들의 과격한 대응에 휩쓸려 피로 물들기 2주 전인 지난 2월 초의 모습은 위와 같았다.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온 시위지지자들이 광장을 점령하고 있었다. 르비브, 테르노필, 이바노 프란키브스크 등 민족주의의 본거지뿐만 아니라 루간스크, 도네츠크 등 줄곧 러시아에 동조해온 동부 산업지대 대도시의 시민들도 이곳에 모였다. 다양한 연령대의 여자들이 보초를 서는 남자들에게 검은 빵과 베이컨이 담긴 쟁반을 가져다줬고, 홍차와 양배추 수프, 그리고 장작 타는 냄새가 그윽하게 퍼졌다. 주중에는 수천 명의 시위자들이 모이는 광장에 일요일이면 수만 명의 사람들이 집결하여 야당 지도자들의 연설을 듣고 기도를 하고 국가를 불렀다.

 시위가 발발한 것은 지난 11월 말이다.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유럽연합과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을 중단하기로 하자 이에 시민들이 반발한 것이다.(1) 이후 독립광장의 모습은 변해갔다. 초기에는 그저 친유럽파 수천 명의 시위장이던 광장은 진압이 전개될수록 각계각층의 우크라이나인들이 투기적이고 부패한 정치 체제를 향해 벌이는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비단 야누코비치 체제만이 아니라 이러한 사태 가운데 우왕좌왕하는 야당들도 저항의 대상이었다.

  그러다가 몇몇 민족주의 단체들이 소수였지만 눈에 띄는 모습으로 시위에 동참을 하고, 급기야 민주적 가치를 표방하지도 않고 친유럽적 성향을 띠지도 않은 극렬세력들이 등장하면서 저항은 상반된 반응을 유발했다. 한편으로는 러시아 정부가 이들의 존재를 이용했다. 어찌 보면 우크라이나 정부도 저항운동의 신뢰성을 훼손시키기 위해 이들을 이용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극우파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시위를 정치적으로 이용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등장했다(물론 이 시위는 기본적으로 그 어떤 정치적 범주화도 통하지 않는 민중운동이다).

 극우주의에 나치 협력의 그늘이

 우크라이나 극우주의는 현재 우크라이나 영토의 대부분 지역을 폴란드와 러시아가 분할점령하고 있던 1920년대부터 확산된 민족주의 운동으로부터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다. 아울러 초창기부터 여러 가지 영향을 복합적으로 받았다.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수용하기도 했고, 반데라를 비롯한 일부 지도자들은 독일 나치와 부분적(실리적 또는 이념적)으로 협력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벌어진 유대인과 폴란드인 민간인 학살에 우크라이나군이 동참하기도 했다. 정치학자인 안드레아스 움란드 키예프-모힐로 대학교 교수에 따르면 “반데라에 대한 그 어떤 객관적 역사연구도 이루어진 바가 없다. 소련 사료편찬자들로부터 나치와 손잡은 파시스트라는 평을 듣던 그가 이제는 우크라이나 역사학자들에게 거침없는 추앙을 받고 있다. 시위대 가운데 반데라를 추종하는 이들은 순진하고도 편향적인 관점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기에 문제가 된다. 하지만 반대로 러시아에서처럼 그를 파시스트로 간주하는 것도 역시 편파적이며 저의가 의심된다.”

  소련 치하에서 잠시 휴지기를 가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움직임이 다시 등장한 것은 우크라이나 사회민족당이 창설된 1991년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 사회민족당은 외국인 혐오 성향과 극단적 민족주의를 보이는 소수 정당이었고, 그 미미한 영향력마저 서부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 현 당수인 올레 탸니보크가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이 1998년이다.

  2000년대 들어서 우크라이나 사회민족당은 중요한 변화를 맞는다. 2004년 제6차 전당대회에서 거추장스러운 파시즘을 벗어 던지고 ‘스보보다’(‘자유’라는 뜻)로 당명을 바꾸었고, 당 로고도 신(新)나치즘의 상징인 늑대발톱 모양 대신 좀더 중립적인 상징물을 택했다. 고르셰닌 연구소의 올레크시 레셴코 연구원은 이러한 외적 변화들을 두고 “유권자들을 안심시키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지만 동시에 다른 나라들의 눈에 비친 스보보다당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마련된 조치”라고 지적한다.

  스보보다당은 위상을 높이기 위해 유럽의 다른 극우정당들과 접촉을 확대해나갔다. 2004년 전당대회에 프랑스 국민전선 당수 장마리 르펜을 귀빈으로 초청한 것도 그러한 맥락이다. 또한 스보보다당은 우크라이나 내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던 당내 민족주의 성향과 반데라의 흔적을 점차 축소해나가기 시작했다. 그 대신 유럽 각국 극우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일반적인 담론을 택했는데 ‘체제’에 대한 과격하고 매서운 비판에 그 초점을 맞춘 것이 특징이다.

  비록 이러한 리모델링에도 불구하고 탸니보크는 당의 출신 성분과도 같은 외국인 혐오와 반유대주의를 여전히 노골적으로 드러내곤 했다. 2004년 그는 “유대인·모스크바 마피아 조직”이 우크라이나 정권을 주도한다는 발언으로 원내 교섭단체 ‘우리의 우크라이나’에서 퇴출되기도 했고, 2005년에는 대통령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우크라이나 유대인들의 범죄행위를 종식시키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2012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스보보다당은 약 10.5%의 득표율을 기록하고 37명의 국회의원 당선자를 내면서 많은 이를 놀라게 했다. 2백만 명 이상의 지지자들 덕분에 스보보다당은 전통적으로 민족주의를 비교적 쉽게 흡수해온 서부뿐만 아니라 기타 지역에서도 고른 성적을 거두면서 전국적 정당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반체제적 담론으로 지지 얻어

 스보보다당의 반체제적 담론은 선거 승리에도 크게 기여했다. 중도 우파 야당인 바트키브치나당 소속 의원이자 시위대가 점거한 독립광장 소재 건물 ‘우크라이나의 집’을 지휘하는 이반 스토이코는 “기성 정치권에 실망하고 획기적 변화를 갈망하던 유권자들이 스보보다당의 수사법(修辭法)과 민중친화적인 모습, 그리고 현장에서 보여준 수많은 활약상에 매료되었다”고 말한다. 민간 연구소인 라줌코프 센터의 부소장인 유리 야키멘코는 스보보다당이 획득한 10%의 표 가운데 “5%는 골수지지자들의 표이며 나머지 5%는 다른 정치세력에 대한 반발을 보여주기 위해 스보보다당을 지지한 유권자들의 표”라고 분석한다.

 한편 스보보다당은 사회적 차원을 가미한 경제 정책 프로그램도 발표했는데 안드레아스 움란드는 “아마도 프랑스 국민전선의 조언을 따랐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내용을 보면 일부 기업의 재국유화, 법인세 누진세율 도입, 정치·경제체제에서 소수의 권력독점을 저지하는 방안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조치들에 적극적인 부패방지대책까지 추가되면서 소규모 사업자들과 중산층을 위시한 일부 유권자 계층의 마음을 강력하게 사로잡은 것이다. 이들은 특히 경제위기, 그리고 야누코비치 집권 후 심화된 족벌정치로 피해를 본 계층이다.

 또한 스보보다당은 비록 완화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당 정체성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민족주의적 성향에 힘입어 결실을 거두기도 했다.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집권한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의 지지자 일부를 포섭하는 데에 성공한 것도 그 덕분이다. “유셴코 집권기는 민족주의를 꽃피우게 한 가장 풍요로운 시기였다”고 키예프에서 활동하는 프랑스 학자 소피 람브로스키니는 말한다. “공공 정치공간에서 자유로운 발언이 가능해진 때가 이 시기였다. 그런데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유셴코에게 크게 실망하면서 스보보다당이 어부지리로 득을 보았다.”

 게다가 야누코비치 대통령 치하에서 추진된 여러 정책들도 우크라이나의 언어와 정체성 수호를 중시하는 일부 유권자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2012년 여름에는 러시아어를 제2공용어로 삼을 수 있는 권한을 각 지역에 부여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지역언어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고, 드미트로 타바슈니크 교육부 장관은 “우크라이나어 사용의 확대는 쓸모없다”면서 교육과정에서 비중을 축소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중심축을 재정비하기는 했지만 스보보다당은 여전히 극우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의 기본 목적은 민족정체성 발전을 위한 투쟁이며, 그 당연한 귀결로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종식되기를 바란다. 대외정책 측면에서 이러한 투쟁은 특히 우크라이나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시키고, 핵무장화를 추진하고, 모든 형태의 포스트소비에트 협력조직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을 통해 드러난다.

 대내적으로 스보보다당은 우크라이나의 ‘탈(脫)소비에트화’를 우선과제로 내세우고 있다. 전직 우크라이나 사회국민당 간부들과 소련 정보기관 국가보안위원회(KGS) 요원들을 숙청 또는 배제하고, 거리와 광장의 이름을 바꾸고, 소련 시절 영웅들의 동상을 철거하는 작업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스보보다당은 또한 크림 반도의 자치국 지위를 철폐하고 우크라이나의 정체성 고취를 위해 민족주의 운동을 체계적이고 적극적으로 숭상하며 신분증에 개인의 인종 또는 종교를 명시하는 제도를 부활시키는 등의 방안을 제시했다.

 스보보다당, 유럽연합 정치적 이용

 민족국가들이 모여 이루는 유럽(Europe of nations)을 지지하는 스보보다당은 최근 들어 유럽연합 가입도 찬성하고 있다. 이러한 실리적 변화는 진정으로 동참을 원해서라기보다 선거를 염두에 두고 다른 야권세력들과 ‘성스러운 연합’을 일시적으로 도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러시아와 거리를 두는 수단으로 유럽연합을 이용하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이민이 부차적 문제로 밀려난 오늘날에도 스보보다당은 이민을 비판하고 이를 제한하는 방안을 내놓는 유일한 정당이다. 외국학생들의 대학등록을 제한하고,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거나 ‘인종적으로 우크라이나인’인 경우에만 우크라이나 국적을 부여하는 제도 등을 스보보다당이 제안했다. 스보보다당은 외국인을 혐오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그러면서도 모든 종류의 혼합을 배척한다. 스보보다당의 간부인 유리 레브첸코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가족적 가치, 그리고 민족국가들로 이루어진 유럽을 다문화주의로부터 수호할 것이다. 서로 다른 문화들을 뒤섞는 다문화주의는 있을 수 없다. 우리나라를 한번 보라. 이민자들을 통해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기는커녕 게토들만 생겼을 뿐이다. 이질적 문화들을 한 마을에 공존하게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가능하지가 않다.”

 스보보다당은 반유대주의의 잔재를 벗어버리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우크라이나 유대인공동체협회의 요세프 지젤스 회장이 “스보보다당이 유대인들에게 가하는 위협은 전혀 없으며, 당의 진짜 적은 러시아인들”이라고 단호히 말할 정도다. “물론 스보보다당이 주요 정당 가운데에서는 유일하게 반데라와 추케비치를 추종하고 있고, 그 점이 유감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스보보다당이 반유대주의 정당은 아니다.” 하지만 스보보다당이 보여준 파행도 더러 있다. 2012년 11월 스보보다당의 이고르 미로크니첸코 의원은 미국 여배우 밀라 쿠니스가 우크라이나 출신이 아니라 ‘지도브카(jidovka)’일 뿐이라고 발언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지도브카’는 유대교를 믿거나 유대인의 후손인 여성을 낮춰 부르는 속어이다.

 스보보다당은 지난 2월 16일까지 웅장한 키예프 시청 청사를 점거하는 등 독립광장 시위에서 상당한 활약을 보여주었지만 현장에서의 장악력은 그다지 신통치 못했다. 하기야 그건 다른 야당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최근 우크라이나 정부가 동원한 폭력과 이러한 정치적 공백이 맞물리면서 활동방식과 이념적 성향이 여러모로 의심스러운 새로운 조직들이 출현하기에 좋은 토양이 조성됐다.

 그루셰스키 거리에서 벌어진 격렬한 시위를 배경으로 탄생한 조직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프라비 섹토르(‘우파 진영’이라는 뜻)는 전국적으로 수천 명의 조직원을 거느리고 있으며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국민들의 실질적 지지를 누리고 있다. 스보보다당에 실망한 극우파, 훌리건, 빈민층 등이 프라비 섹토르의 지지자들이다. 이처럼 프라비 섹토르는 상당히 광범위한 계층의 사람들을 규합하고 있는데 이들의 공통분모는 우선 극단적 행동을 선호한다. 지도자 안드레이 타라센코가 ‘노조의 집’(3) 건물에 위치한 본부에서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설파하는 이데올로기에 동조한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신파시스트인 프라비 섹토르

  “러시아 정부의 선동과는 달리 우리는 외국인을 혐오하지도 반유대주의를 표방하지도 않는다”고 프라비 섹토르는 주장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그저 “민족주의를 지향하며 백인 기독교로 이루어진 유럽의 가치를 수호하고 민족의 소멸과 탈(脫)종교화를 배격할 뿐”이라고 말한다. 프라비 섹토르는 십자가를 사라지게 하고 부르카 입은 여학생들을 학교에 들이는 다문화주의를 거부하면서도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 가입은 바라지 않는다. 이들은 유럽연합을 ‘신이 사라지고 가치가 전복된 자유주의적 전체주의 체제’라고 여긴다.

  프라비 섹토르는 어느 야당도 지지하지 않는다. 특히 시위자들에게 진정할 것을 촉구하고 정부와 협상을 벌인 스보보다당을 더더욱 못마땅해 한다. 그런 프라비 섹토르가 직접 정당을 출범시킬 가능성도 있다. 이것이 실현된다면 탸니보크 스보보다당 당수는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이다. 진압세력과의 충돌 당시 시민들에게 자중을 호소한 뒤로 반체제 연설가로서 그가 누리던 위상이 심각하게 손상된 터에, 이제는 자신의 당보다 더 우측에 위치한 정당, 그 전력과 투지가 여실히 증명된 정당과 타협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스보보다당이 지난 수년간 거둔 성공과 프라비 섹토르를 위시한 신(新)파시스트 집단들이 독립광장 시위에서 수행한 역할은 우크라이나 사회의 깊은 불안을 보여준다. 이는 우선 정체성의 불안이다. 독립 후 22년이 흘렀건만 우크라이나는 온 지역과 온 국민을 적극적으로 아우르는 편향되지 않은 역사를 여전히 쓰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갈리치아 지역에서는 해방자로 여겨지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돈바스 지역에서는 파시스트 취급을 받고 있다. 그 반대도 벌어지고 있다. 또한 정치적 불안도 존재한다. ‘오렌지 혁명’(4)에 실망하고 분노한 우크라이나인들 가운데 일부는 등을 돌리고 극단적 투표를 택했다. 이는 이념적 지지가 아닌 원망의 표출이라 볼 수 있다. 독립광장에서 벌어진 시위는 시민들의 놀라운 집단행동으로 역사에 남을지 몰라도 현재로서는 아무런 건설적인 정치적 전망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다.

글 • 엠마뉘엘 드레퓌스(Emmanuel Dreyfus)

번역 • 최서연 qqndebien@naver.com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르몽드세계사2>(공역)(2010) 등이 있다.

(1) 세바스티앙 고베르, ‘우크라이나, 유럽이냐, 러시아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년 12월 참조.

(2) 로만 추케비치(1907~1950),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또 다른 중요 인물로 베어마흐트(독일 국방군)의 우크라이나 부대(일명 ‘나이팅게일 부대’)를 지휘했다.

(3) 독립광장의 대표적 건물로 화재 발생으로 퇴거조치가 이루어졌다.

(4) 비켄 슈테리앙, ‘동쪽의 눈속임 혁명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5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