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당과 결별한 브르타뉴 좌파

2014-03-04     장아르노 데랑스

 

  사회당의 전통적인 표밭 브르타뉴는 오랫동안 사민주의 중도좌파의 실험장 같은 구실을 했다. 하지만 지난 해 가을 브르타뉴인들은 ‘붉은 모자’를 쓰고 다양한 형태의 반정부 투쟁을 벌였다. 생산주의(생태적 관점에서 생산을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역주)와 자유주의에 기초한 농업 모델에 위기가 찾아오면서 불안감이 확산된 결과이다.

  프랑스 정부는 2014년 1월 1일부터 3.5톤 이상의 화물을 적재한 상업용 트럭에 에코택스(환경세)를 부과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2013년 10월 27일 수천 명의 시위대가 캥페르와 브레스트를 잇는 RN164 고속도로의 퐁드뷔 근방에 세워진 측정 장치를 쓰러뜨려 버렸다. 붉은 모자를 쓰고 흑백의 브르타뉴 깃발을 흔드는 시위대와 진압 경찰 사이에 벌어진 충돌은 흡사 게릴라전을 방불케 했다.

  지난해 10월 29일 장마르크 에로 총리가 에코택스 도입을 유보하겠다고 발표했음에도, 11월 2일 “브르타뉴에서 살며 일하며 결정하자”라는 단체의 호소를 듣고 쏟아져 나온 시민 2만여 명이 캥페르의 거리를 뒤덮었다. 11월 30일에는 더 많은 인원이 카레 근처 크랑퓔 초원에 운집했다. 측정 장치들이 파괴되고 과속 감시 카메라들이 파손됐다. ‘붉은 모자’ 시위대는 감시 카메라 파손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비판 입장을 발표했다.

  아머럭스 사에서 생산한 이 붉은 모자가 저항의 상징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1675년 여름 루이14세가 네덜란드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을 때 들고 일어난 브르타뉴인들 역시 ‘붉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봉기의 진원지는 대부분 바스 브르타뉴(브르타뉴 서부), 그 중에서도 카레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반란자들은 세금 인상과 영주의 지배에 저항했으며, 인지세 폐지와 농민법 제정을 요구했다.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가들은 이 반란을 프랑스 대혁명의 ‘전조’로 해석한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고유한 정체성을 지켜온 지방 주민들이 중앙집중적인 왕실에 대항해 일으킨 최후의 반란으로 본다.(1) 16세기에서 17세기 초까지 브르타뉴는 많은 인구와 부를 자랑했지만 해상무역의 부진으로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675년 농민봉기는 바로 이 시점에 발생한 것이다.

 캥페르와 카레의 시위대 속에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농부, 해고 위기에 처한 노동자들뿐 아니라 ‘과도한 세금에 숨을 쉴 수 없는’ 수공업자들도 있었다. 이들을 단순한 ‘푸자드주의자(편협한 권리를 주장하는 중소상공인들-역주)’로 간주한다면 사태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좌파당 공동 대표 장뤽 멜랑숑은 이들을 “주인의 권리를 위해 시위에 나선 노예들”이라고 비판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모르비앙 지역 공산당 소속 상원의원 미셸 르 스쿠아르네크는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멜랑숑의 경멸을 용납할 수 없다”며 분노했다. 역사학자 장자크 모니에는 별도로 집회를 조직한 일부 노조의 무분별한 행동을 비판하고 나섰다. “모든 힘을 단일한 시위 속에서 결집할 수 있었다. 노동자, 노조, 좌파의 힘은 정치적 회유의 위험을 피할 수 있을 만큼 충분했다.”

 브르타뉴 중심부 크레즈 브레즈에 있는 작은 도시 포에르의 크리스티앙 트로아데크(47)는 “1675년처럼 우리는 다시금 저항의 중심에 있다”며 뿌듯해 했다. 기자 출신의 트로아데크는 코레프 맥주 양조장을 인수하고, 매년 수십만 명이 찾는 크랑퓔의 비에유 샤뤼 페스티벌을 기획했다. 2001년에는 카레 시장으로 선출됐다. 이 ‘붉은 모자’ 시위대의 대변인은 피티스테르, 코트 다르모르, 모르비앙이 교차하는 지역에 숨어있는 이 작은 도시를 정치적 거점으로 삼는 데 성공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도 있었을 농촌 코뮤니즘의 긴 전통을 간직한 크레즈 브레즈 지역은 예로부터 연대와 상호부조의 고장이었다.

 브르타뉴 문화 부흥의 중심지 카레에는 최초의 디완 학교(브르타뉴어 학교)가 있다. 철저한 지방분권주의자 트로아데크는 자녀들을 모두 브르타뉴어 교육 네트워크에 속한 학교에 보내고 있다. 좌파를 자임하는 트로아데크 시장은 무엇보다 인맥을 중시하는 인물이다. 그는 바에서 사람들과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것을 즐긴다. 2008년에는 카레의 조산원 폐쇄에 대항한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상트르 브르타뉴의 공공 서비스 축소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그의 방법론이나 권위주의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있지만, 지역 주민의 목소리를 충실히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브르타뉴 서부 지역 주민들은 작년 한 해를 악몽으로 기억한다. 2013년 상반기 2억 유로의 수익을 거둔 유럽 최대의 생선 가공 업체인 노르웨이의 마린 하베스트는 2013년 6월 4일 카레 근처의 샤토지롱(일레빌렌)과 풀라우앙 공장 폐쇄 결정을 발표했다. 일자리가 드문 이 지역 주민에게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10월 11일에는 랑폴-기밀리오(피니스테르)의 가드 사 도축장이 문을 닫는 바람에 9백여 명의 직원들은 순식간에 직장을 잃고 말았다. 노동자의 힘(FO) 노조 대표 올리비에 르 브라는 “모를레에서 랑디비지오까지 지역 전체를 먹여 살리던 공장이었다”고 말했다. 모르비앙에서 시작하여 거대 식품가공업체로 성장해온 가드 사는 2008년부터 브르타뉴 농업협동조합 중앙회(CECAB)의 관리를 받고 있다. 동유럽의 싼 인력을 고용하는 독일 도축업체와의 경쟁에서 밀린 CECAB는 결국 수익성이 좋은 야채 통조림 분야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에코택스 도입 결정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다양한 세력들이 정부의 결정에 반발하고 나섰다. 공산당(PCF)에서 우파 대중운동연합(UMP)까지, 브르타뉴 민주연합(UDB)에서 심지어 집권당인 사회당(PS) 브르타뉴 지부까지 망라했다. 에코택스의 개념 자체를 반대하는 이들도 있고, 부과 방식을 문제 삼는 이들도 있었다. 공산당 브르타뉴 지부 부위원장이자 운송 부문 책임자 제라르 라엘레크는 “브르타뉴는 프랑스 영토 외곽에 반도의 형태로 존재하는 지역이다. 그렇지 않아도 수출이 힘든데 에코택스 때문에 이중의 부담을 떠안게 됐다”고 우려했다. 한편, ‘붉은 모자’ 시위는 코트 다르모르와 모르비앙을 포함하는 피니스테르 지역, 즉 서쪽 지역에 집중된 반면, 지난 수개월간 똑같이 일자리 관련 문제들이 불거졌던 일레빌렌 지역까지 확대되지는 않았다.

 에코택스 측정 기구를 쓰러뜨리기 위해 달려든 이들 중 상당수는 티에리 메레가 이끄는 프랑스 농업경영인지역연맹(FDSEA) 피니스테르 지부 소속이었다. 톨레에서 야채를 재배하는 메레 지부장은 현재의 위기 속에서도 농업 발전을 위한 ‘브르타뉴 모델’을 고수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나는 우리가 수출하는 닭들을 먹지 못한다. 하지만 마그레브(북아프리카) 지역 사람들은 뼈가 입 속에서 녹는 맛을 즐긴다”고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생각에 현재의 위기는 경제 위기다. “유로화 강세 때문에 우리가 생산하는 닭들의 해외 시장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 정부가 증세나 규제 강화 없이 우리가 일하도록 내버려뒀으면 좋겠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샤톨랭(피니스테르)에 근거지를 둔 세계적인 냉동닭 생산업체 두(Doux) 그룹이 2012년 7월 법인회생 절차에 들어가자 이 지역 닭 가공 분야는 큰 타격을 받았다.(2)

 과거 농민연맹 대변인을 지낸 바 있고 현재 지방 의원(유럽 생태 녹색당)으로 활동 중인 르네 루아이는 반대로 ‘브르타뉴 모델’이 한계에 봉착했다고 본다. 그는 “공동농업정책(CAP)과 정부 보조금은 이제 수명을 다한 생산주의적 기준을 인위적으로 유지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브르타뉴에서 에코택스의 장점을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많은 분량의 원료 운송에 대해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을 유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여러 차례에 걸쳐 ‘생태 농업’으로의 전환을 약속했지만 1월 14일 국회에서 가결된 농업미래법 속에는 이윤 경쟁을 지양하려는 노력이 담겨 있지 않다. “갈수록 경영이 중요해진다. 농민들은 파산을 면하기 위해 빚을 내서 생산 규모를 늘리고 적시 공급 요구에 응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충격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10년쯤 후 브르타뉴의 3만4000여 농업인들 중 절반만 살아남을 것이다.”

 소피 페드롱은 조그만 코뮌 트레멜루아르(코트 다르모르)에서 낙농업을 하는 오빠와 동업을 시작했다. 생존을 위한 전략이었다. 그녀는 현재 돼지 100마리를 기르고 있다. 그녀는 “축사 개축을 위해 12년 만기 대출을 받았다”고 했다. 남매는 77ha의 농경지를 소유하고 있음에도 매년 르 구에상 협동조합으로부터 700톤의 사료를 의무적으로 구입해야 한다. 대신 돼지를 판매할 때는 트리스칼라이아라는 다른 협동조합을 통한다. “한 회사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고 어느 정도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설명이다. 일은 고되다. 하지만 이곳 같은 ‘소규모’ 농장의 수익은 시장 가격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는 “사람들은 동물의 복지는 염려하면서 농업인들의 복지에는 무관심하다”고 비판한다.

 농업부 장관 스테판 르폴의 법령 발표로 이런 움직임은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2013년 12월 31일부터 돼지 사육 시설 허가를 받기 위한 최소 사육 마리수가 이전의 450마리에서 2천 마리로 늘었다. “이제 대부분의 사육 시설은 공공기관의 조사나 환경영향평가, 공중보건과 환경 보호 담당 국가 기관의 허가 없이도 규모를 확장할 수 있게 되었다.”(3) 아울러, 2015년까지 생산 규제 완화 방안으로 우유 생산 쿼터를 폐지하기로 함에 따라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집중화 경향이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웨나엘 쥐스톰의 농장은 앵쟁자크-로크리스트(모르비앙) 근처 블라베 강변에 있다. 그는 2009년 유기낙농으로 전환하는 정반대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다른 농장이 규모를 확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생산방식을 전환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 버티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농장에서는 매년 우유 20만 리터와 요구르트 30만 개가 생산되어 로리앙, 플뢰뫼르, 라네스테르의 학교 급식에 공급된다. “제품 부가가치를 높이고, 유통 경로를 단축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유지해나가고 있다. 조합이 강요하는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길은 존재한다.” 이 예가 모든 농식품 산업 분야로 일반화될 수는 없겠지만 다른 모델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지난 1월 10일, 중국 기업 시누트라가 카레에 분유 공장 건설을 위한 첫 삽을 떴다. 최소한 이 공장은 2015년부터 250명의 직원을 고용하여 12만 톤의 분유를 생산하게 될 것이다. 원료가 되는 우유는 소디알 협동조합이 이 지역 700여 농가를 통해 확보하기로 했다. 트로아데크는 생산 쿼터 폐지 덕분에 해결책을 찾았다고 믿는다. 그는 시누트라 투자 유치 과정에도 적극 참여했다. 세계 시장에 대한 개방 정도에 미래가 달려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하지만 브르타뉴의 협동조합들은 세계시장 공략을 위해 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 가령, 새 유럽연합 회원국의 값싼 노동력과 경쟁해야 할 처지가 됐다. 설상가상으로, 대형 유통 체인은 생산자들에게 적시 공급을 강요함으로써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런 경향은 브르타뉴 서쪽 지역이 특히 심하다. 농업 경영자들이 에코택스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규제완화를 위한 투쟁

 ‘붉은 모자’ 운동에 대한 경영자들의 참여 배경에는 로카른 연구소가 있다. 카레에서 15km 정도 떨어진, 크레즈 브레즈의 험준한 시골에 위치한 이 연구소는 1994년 이 지역 대부분의 기업과 루아르-아틀랑티크 지역의 기업들까지 포괄하는 “브르타뉴 제품” 라벨을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1991년 설립 당시부터 지역 의회의 지지를 받은 로카른 연구소는 재계와 정계, 좌우를 망라하는 ‘브르타뉴의 놀라운 단합’을 가능케 한 거점 중 한 곳이다. 과거 로리앙 시와 브르타뉴 의회를 이끌었던 장-이브 르 드리앙 국방부 장관이 자주 드나들던 이곳은 다양한 로비를 위한 효과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클럽 데 트랑트, 파리의 디네 셀티크 등의 모임에 가면, 벵상 볼로레 등과 같은 재계 인물들, 전 TF1 방송사 사장 파트리크 르 레, 슈퍼마켓 체인 E.르클레르 사장 미셸에두아르 르클레르 등을 만날 수 있다.(4)

 12월 말 금요일, 코트 다르모르 지역 중소기업총연맹(CGPME) 대표 장피에르 르 마는 ‘러시아의 재부상과 유라시아’라는 제목의 컨퍼런스를 시작하기에 앞서 ‘붉은 모자’ 운동에 대한 ‘중간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어서 연구소 설립자 조 르 비앙의 강연이 시작됐다. 1950년대 공산당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르 비앙의 러시아의 인구에 대한 강연은 ‘위대한 러시아’에 대한 예찬으로 끝났다. 주요 참석자 중 한 명인 모스크바의 은행가는 지도를 가리켜 가며 우크라이나의 ‘부재’를 증명하고, 페미니스트 펑크 단체 푸시 라이엇이 벌인 ‘신성 모독 행위’를 비난했다. 몇몇 대기업 사장들은 그의 말을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강연은 자연스럽게 브르타뉴 기업들이 ‘유라시아’가 제공하는 사업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로카른 연구소는 고용청과 지역의회의 지원 하에 젊은 학자들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퇴역군인들과 함께 한밤중에 숲속을 행군하는 ‘단합대회’까지 열린다. 일각에서는 로카른 연구소가 ‘오푸스 데이’ 혹은 ‘젊은 브르타뉴’, ‘프랑스의 봄’ 등의 지역 정체성 수호 조직들과 연루되어 있다고 비판하지만,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무엇보다 경제적 자유주의의 신성불가침한 원칙들을 주입하는 데 있다.

 로카른 연구소는 규제완화를 위한 싸움을 선두에서 이끌고 있다. 연구소장 알랭 글롱은 세계가 “힘과 직관의 충돌”을 특징으로 하는 “심각한 동요”의 시대에 진입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예상에 따르면, 브르타뉴는 2032년 어려운 시기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2032년은 브르타뉴 공국이 프랑스 왕국에 통합된 지 500주년이 되는 해다. 우연히 산출된 연도가 아닌 셈이다. 하지만 그에게서 사이비 종교의 교주 같은 면모는 찾아보기 힘들다. 동물 사료 수입으로 재산을 모은 그는 지주회사 글롱-샌더스를 설립하여 현재도 35%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이 회사의 대주주는 프랑스 식물성 기름 시장의 리더 소피프로테올이다. 이 회사의 사장은 루아레의 농장주이자 농업경영인전국연맹(FNSEA) 회장을 맡고 있는 그자비에 뵐랭이다.

  글롱은 이 지역이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요건의 99%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1%가 부족한 것은 세금, 노동권, 실업 수당 분담금 등 정부가 부과하는 장애물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브르타뉴의 문제는 바로 프랑스”라고 단언한다. 그는 지역 정체성 수호도 중요하지만 규제완화 정책을 일반화하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대중운동연합(UMP) 소속 코트 다르모르 지역 의원 마르크 르 퓌르도 그와 같은 생각이다.

 그는 망설임 없이 “실업자 구제에 바탕을 둔 프랑스 모델보다 저임금으로 거의 완전고용을 달성하는 브르타뉴 모델을 선호한다”고 말한다. 거대 농업협동조합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는 그의 지역구는 브르타뉴 전체 평균보다 낮은 실업률을 기록하고 있다. 브르타뉴의 실업률 역시 프랑스 전체 평균보다 낮다. 주저 없이 붉은 모자를 썼던 르 퓌르는 브르타뉴는 “로제르(인구밀도가 낮고 청년들의 이농으로 실업률이 낮아진 남부 도시-역주)의 반대”라고 말한다.

 “실험할 권리”라는 말이 지역주의 좌파에서 자유주의적 경영자들, 사회당원들 사이에서도 회자되고 있지만 각자가 말하는 내용은 다르다. 2013년 12월 13일 체결된 ‘브르타뉴를 위한 미래 협정’의 내용을 들여다봐도 모호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이 협정안은 지역경제사회위원회(CESER)와 지역의회에서 가까스로 통과된 터다. 우파와 생태주의자, 지역주의자는 반대표를 던졌다. 지역주의자들은 이 협정이 대수롭지 않은 조처들을 모아놓았을 뿐이라고 비판한다.

 브르타뉴 민주연합(UDB) 지역의회 대변인 에리 구르믈랑은 “더 나쁜 것은 브르타뉴가 실제로는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면서 특별대우를 받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협정은 국가와 지역 간 계약일 뿐이다. 이미 투입 예정이던 예산을 배정하겠다는 재확인에 불과하다.” 한편, 에로 총리는 협정에 서명하면서 브르타뉴를 지방분권화의 “선도 지역”으로 만들자는 제안을 하며 한 발짝 더 멀리 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브르타뉴는 과연 프랑스 대통령의 ‘행정명령권’ 지방 분권화 정책의 실험장이 될 것인가? 브르타뉴의 특수한 지리적 입지, 강한 집단정체성뿐 아니라 좌파 지지 성향 등을 보건대 가능한 일이다. 브르타뉴는 2007년 대선에서 세골렌 루아얄 후보에게, 2012년 대선에서 프랑수아 올랑드 후보에게 가장 높은 지지를 보낸 지역이었다.

 브르타뉴가 1970년대 초반부터 좌파 쪽으로 기운 것은, 오늘날에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브르타뉴 경제 모델’을 사회당이 지지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 농업 현대화에 앞장 섰던 기독교농업청년회(JAC) 활동가들 중 상당수가 사회당 지역 간부가 되었다. 노동자들을 포함한 서민 계층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온 좌파의 영향력은 농식품 산업의 발전으로 더욱 확대되었다. 브르타뉴의 투표율은 항상 전국 평균을 상회하며, 국민전선에 대한 지지율은 상당히 낮은 편이다.

 사회당은 코트 다르모르, 피니스테르, 일레빌렌 등의 도의회를 비롯해 중대 도시들 대다수의 의회를 장악하는 등 브르타뉴 지역에서 상당한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으면서도, 놀랍게도 이렇다 할 정치적 기획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일부 사회당 의원들은 오랫동안 브르타뉴의 지역주의 문화를 상징하는 조직으로 기능해온 사회당 연구정보지역사무소(BREIS)가 ‘붉은 모자’ 시위 당시 한 번도 회의를 소집하지 않았다며 불만을 표시한다. 2008년 지방선거에서 좌파는 브르타뉴 서부 지역의 모를레, 랑데르노, 샤톨랭, 두아른네즈, 캥페를레 등 상당수 코뮌에서 고배를 마셨다. 이런 전통적인 표밭에서의 패배는 사회당으로서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사회당은 1970년대 대규모 대중 운동의 사회적 힘에서 자양분을 얻었다. 플로고프 원자력발전소 건설 반대 운동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2014년 대중은 사회당 총리가 추진하는 노트르담데랑드 신공항 건설에 격렬히 반대하고 있다. 트로아데크는 2월 18일 신공항 건설 반대 시위에 주민들의 동참을 호소하고 나섰다. 로카른 연구소의 ‘동료’들과의 결별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다. 3월 8일 모를레에서 처음으로 ‘붉은 모자’ 운동 대표자회의가 개최될 예정이다. ‘붉은 모자’는 사회민주주의 좌파와 민중의 결별을 알리는 상징이 되었다.

 글·장아르노 데랑스 & 로랑 제슬랭 Jean-Arnault Dérens & Laurent Geslin

번역·정기헌

 (1) Arthur de La Borderie, Boris Porchnev, Emsav Stadel Breizh(ESB), <Les Bonnets rouges(붉은 모자)>, Yoran Embanner, Fouesnant, 2012년(초판-1975년).

(2) Tristan Coloma, ‘Quand les volailles donnent la chair de poule(닭들이 우리를 소름 돋게 할 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7월호.

(3) Nolwenn Weiler, ‘Le gouvernement relance les porcheries industrielles(돈육 산업 진흥에 나선 정부)’, 2004년 1월 7일, www.bastamag.net

(4) Clarisse Lucas, <Le Lobby breton(브르타뉴의 로비)>, Nouveau Monde éditions, 파리, 201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