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약속> 김태윤 감독, "외압 있었다"

2014-03-04     공은비 기자

 <또 하나의 약속>은 국내 SNS상의 네티즌에게는 물론 로이터 통신 등 외신에서도 주목하는 영화이다. 하지만 국내 서울 중심가 영화관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고, 상영도 오전과 야간 시간대에만 배정돼 있어 실제로 이 영화를 보려면 꼼꼼히 체크해야 한다.

 이 영화는 국내 최대 글로벌 기업인 ‘삼성반도체’에서 노동자로 일하다가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딸 황유미, 그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맞서는 평범한 아버지 황상기씨의 실화를 담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삼성’이 그리고 관객들이 이 영화를 평범하지 않은 영화로 만들고 있다.

 영화의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메가폰을 잡았던 김태윤 감독을 만나 제작 동기, 작품 개봉 전후의 외압 여부, 실제 이 사건에 대한 김감독의 관점 등을 심층 인터뷰했다.

 - 영화제목을 당초 <또 하나의 가족>으로 정했다가 개봉하면서 <또 하나의 약속>으로 바꾼 이유는.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제목은 극장 쪽에서 안 받아주었다. 극장 실무자들이 벌벌 떨었다. 시사회를 하려고 극장 대관을 요청하면, 이미 영화 제목보고 “삼성 비판하는 영화 아니냐? 못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런 대답들이 반복돼 돌아오다 보니까 제목 하나 때문에도 영화 시사회 잡는 것 하나부터 너무 힘들었다.

 - ‘약속’이라고 단어 하나를 바꾼다고 달라졌는지.

 극장 측 태도가 조금이나마 훨씬 나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가족>이라고 했을 때 ‘삼성 비판하는 영화구나’라는 시각이 생기는데, 그에 따른 관객 반응이 갈렸다. “이 영화 꼭 봐야하겠다”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그런 영화 안 봐”하고 오히려 영화 자체를 보기도 전에 돌아서는 분들도 많았다. 우리나라는 삼성 팬이 더 많지 않나. ‘삼성이 한국 경제 살리고, 이건희 회장이 없었으면 우리 경제는 망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다. 오히려 제목을 바꿔서 좋았다고 하는 분들도 많았다. 어차피 영화 안에서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메시지는 살아있으니까. 그리고 아버지가 유미에게 한 ‘약속’을 생각하면 <또 하나의 약속>이라는 제목이 더 좋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굳이 앞의 리스크를 모두 가져가면서 ‘가족’을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 최근 삼성전자 홍보팀 직원이 사내 게시판에 올린 “영화가 너무 많은 오해를 만들었다”는 제목의 글을 올려서 이슈가 되었다. 글의 제목 그대로 “영화는 허구일 뿐”인 것을 강조하며 영화 속 이야기에 대해 부정하는 내용이었다. 영화 속 이야기들이 사실이 아니라고 진심으로 믿던데.

 삼성에 다니는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 자체가 딱 이 수준인 것 같다. 비난하는 건 아니다. 그들은 회사를 그냥 믿는 거다. 우리 회사를 믿고, 우리 회사는 직원의 안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얘기하고 그게 아닐 거라는 상상은 하지 않는 것 같다.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정말 잘 모르는 것이다. 삼성 반도체 다니는 직원들조차 현장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몰랐다고 한다. 영화 속 현장에서 일하는 오퍼레이터들이나 엔지니어들도 영화 속에서도 그런 ‘괴담’이라고 표현하지 않나. 우리 학창시절 생각해보면, “3학년 12반에 누가 어떻게 됐대” 그런 식의 괴담이 있다. 삼성 사내 직원들 사이에서도 그 수준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 처음 영화 제작 당시 인터뷰 때, “삼성 측에서 압력을 주는 부분은 없느냐”는 질문을 했는데 김감독은 그 때 “외압같은 건 전혀 없었다”라고 답했다. 지금은 개봉관 축소를 비롯해, 언론사 대표가 삼성 간부에게 사과문자를 보내고 영화 관련 기사를 내리는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이 불거졌는데.

 이제는 말 바꿔야겠다. 상황이 달라졌다. 영화 개봉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제작 시작 당시까지는 사실 주변에서 우려를 많이 했지만, 우리 제작진이 피부로 느낄 만한 뚜렷한 ‘외압’의 근거들이 없었다. 그런데 영화개봉 이후에는 ‘설마…’ 했던 일들이 일어나는 걸 보면서 생각이 변했다. 많은 분들이 보시고 분노하셨듯이 이건 ‘외압’이다. 극장들이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면서 스크린을 열어주지 않는 모습도 그런 ‘외압’의 일부다.

 - 영국 가디언지에서 <또 하나의 약속>을 “여전히 진행 중인 사건을 극화한 의미있는 영화”라고 평했다.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해서 영화로 만드는 것이 연출자 입장에서 부담스럽지는 않았나.

 오히려 반대다. 진행 중인 사건이라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이미 끝난 이야기면 그냥 그건, ‘재미있는 상업영화’다. 그런데 이 사건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현실’이고, 그래서 더 의미 있다.

 - 제작하고 개봉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김감독이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인식에서 변한 부분은 무엇인가.

 평소에도 생각했던 부분이지만 다시 느낀 건, 우리나라 사람들 스스로가 노동자인 줄 모른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무실에서 일하면 근로자인 줄 알고 현장에서 일하면 노동자라고 인식한다. 삼성의 그 홍보팀 직원도 사실 노동자인데 자신이 노동자인 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노동조합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굉장히 부정적이지 않나. 철도 노조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그에 동참까지는 않아도 최소한의 지지를 해줘야 하는데 “저 사람들은 나보다 돈도 많이 벌고 잘 사는데 왜 저러고 있냐. 욕심 많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거대 노조들이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분들의 처우나 다른 부분들을 돌보지 않는 것을 비롯해 여러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 문제는 차치하고 우선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파업하는 노조, 그 사람들을 본인들과 같은 노동자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거다. 우리나라 노조 조직률이 전체 노동자의 10% 밖에 안된다. 사실 50%만 돼도 이 정도 수준은 되지 않았을 것 같다.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모른다는 것 자체가 자기가 노동자인 줄 모른다는 것이다. 황상기 아버님이나 노무사님도 결국 “이번 사건을 포함해 열악한 노동환경에 관한 많은 문제들은 노조가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 백혈병 문제도 무노조 경영이 큰 몫을 했다는 것이다. 노조가 있었다면 노동자들이 일하는 환경, 근로 시간, 그에 따른 임금 등이 정상적으로 운영되도록 많은 방향이 바뀌었을 텐데, 그런 게 해결되지 않는 건 사실 노동조합이 없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거다.

 - 영화 중에 “정치는 표면이고 경제는 본질이다”는 대사가 나온다. 시나리오를 직접 썼는데 이 대사의 속내는 무엇인가.

 평소의 지론이다. 정치적으로 좌파 우파 나눠 인터넷을 비롯한 여러 공간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경우들이 많은데, 사실 유권자들은 그런 것(좌-우파) 때문에 투표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에는 자본의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는 게 현실이지 않나. 결국 ‘자본’이 모든 가치 위에 있고, 국회든 그 안의 정치든 ‘자본권력’에 휘둘린다. 사실 너무 직접적인 대사라 유치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보신 분들이 오히려 좋았다고 얘기 많이 해주었다. 확 와 닿았다. 사실 좌파니 우파니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구분지어 말하는 거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목소리가 크니까 크게 들릴 뿐이지, 실제로 그것보다는 먹고 사는 문제, 즉 경제논리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 아닌가.

 - 우리나라는 대기업 중심 경제체제이다. 삼성 같이 대표적인 대기업이 노동자 권익을 외면하는 것에 대해 기업의 비윤리적인 측면만 가지고 비난할 수 있을까? 정부의 규제 혹은 기업에 대한 감독 체계가 약한 부분도 주된 원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정부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대기업의 가장 큰 목적은 최대의 이윤 추구다. 그 과정에서의 발생하는 문제점을 견제·통제하고 노동자 편에 서서 법제를 마련해주는 게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인데 그게 잘 안 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반대로 얘기하면, 기업체를 잘 육성하는 것도 정부의 몫이고, 그 안의 노동자 권리를 보호해주는 것 역시 정부의 몫인데 한쪽(노동자 권익 보호)에 대해서는 직무유기인 것이다.

 이번 영화 속에서 삼성을 절대악으로 그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에 ‘이 실장’ 역할을 맡았던 배우가 나한테 “연기 톤을 어떻게 잡아야 합니까? 악마처럼 해야 됩니까?”라고 물었다. 그 질문에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회사에서 주는 임무를 충실하게 이행하는, 회사를 충실하게 믿는 그런 사람’으로 표현해 달라”고 답했다. 회사에서 하는 결정이 다 옳다고 충실히 믿으니까 당연히 회사에서 오더가 떨어지면 무조건 충실하게 해야 하는 걸로 믿는 것이다. 회사에서 주입한 대로 만들어진 거다. 삼성이 “대한민국을 실제로 누가 먹여 살리나, 삼성이 한다”고 교육시키는 것으로 들었다. 삼성 직원들 만나면 모두 평범한 이웃, 친구들이다. 내 친구의 남편이고 아내다.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절대악으로 그릴 수 있겠나. 그냥 회사에 충실한 것뿐이다. 회사가 그 사람들을 그렇게 교육시키고, 만들어낸 거다.

 - 이 영화에서는 현실적으로 나서기 힘든 상황에서 나서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피해자 가족들을 비롯해 노무사, 변호사, 증인 등. 현실적으로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래도 이 영화는, 결과적으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오히려 반대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그렇게 도와주는 사람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얻은 결실이라는 건, 반 정도 승소한, 단 한 명에 대한 보상인 거다. 이게 정말 씁쓸하다.

 - 이번 영화, 연출자로서의 영화인생에 중요한 변환점이 되었을 텐데.

 황상기 아버님의 웃는 모습이 나에게는 중요한 지점이 됐다. 내가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이 영화를 어떤 식으로 풀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었다. 그런 고민 과정에서 황상기 아버님이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을 보고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딸도 잃고 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저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을까. 만약에 중간에 합의를 했으면 지금 저렇게 환하게 웃으실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합의하셨다면 지금처럼 환하게 웃지 못하셨을 것이다. 평생 어두운 그림자를 가지고 사셨을지도 모른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나는 어떻게 살아온 거지?’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는 영화를 왜 하게 됐을까?’ 하는 근원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됐다. ‘돈을 위해서 한 건가, 명예를 위해서 한 건가? 분명 처음 내 마음은 그런 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하면서 이 영화를 꼭 만들어야하겠다고 생각했다. 돈을 주면 주는 대로 원하는 방향에 맞춰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들다 보니까 알게 모르게 영화에 대한 열정도, 내 마음도 식어갔던 것 같다. 내가 감동받았고, 내가 다루고 싶었던 소재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원초적인 생각을 다시 하게 된 것이다. 그 생각을 황상기 아버님을 취재하면서 가졌다. 분명 이전 작품과 지금 작품이 다르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것 같다.

 - 영화 제작과정이 많이 힘들었겠지만, 그만큼 행복한 일이었을 것 같다.

 영화 만들고 황상기 아버님, 노무사님, 피해자 가족분들이 “영화 잘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인사하셨는데 사실 내가 오히려 고마웠다. 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제일 큰 수혜자는 나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제작비 같은 재정적인 부분들이 힘들었던 것이지, 영화를 만드는 마음은 제일 행복하고 신났었다.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 <또 하나의 약속> 스태프들, 충무로에서 소위 가장 ‘잘 나가는’ 스태프들이었다. 촬영 감독님은 <타짜>, <도둑들>, <베를린> 등을 작업하신 분이다. 만약 내가 충무로의 흔한 상업영화 시나리오로 함께 작업하자고 제안했다면 거절하셨을 것 같다. 촬영감독은 일 년에 두 편밖에 찍지 못한다. 원하는 감독들이 많아 작품을 고르고 골라서 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런데도 유명한 감독도 아닌 내가 이 시나리오를 드렸을 때 흔쾌히 해주시겠다고 하셨다. 그 외에도 많은 스태프들이 그랬다. 그분들이 아니었으면 이번 영화는 만들어지지 못했다. 스태프들을 비롯해 제작두레에 참여해 작은 돈부터 한 마음으로 모아주신 많은 분들께,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다. 이 영화를 만든 건 그분들이다. 그리고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김태윤 감독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고 2006년 영화 <잔혹한 출근>을 연출하면서 충무로에 데뷔했다. <인사동 스캔들>(2009)과 <용의자X>(2012) 등의 시나리오를 작업했다.

 인터뷰·공은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