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광받는 예술적 낮잠

2014-04-01     에블린 피에예

  “불면증으로 고생하면 깃털 매트리스를 숙면과 바꿀 거야.” 1938년 피에르 닥(1893~1975. 프랑스의 유머작가 겸 코미디언-역주)이 한 이 말은 불면증에 시달리는 프랑스인 3분의 1의 가슴을 울리는 것을 넘어 신경계에까지 와 닿는다. 이들은 끊임없이 향정신성 의약품을 복용하여 불면증을 치료하고자 한다. 향정신성 의약품은 중추신경계에 작용해 기분을 변화시킨다.

 프랑스인은 유럽에서 향정신성 의약품을 가장 많이 복용하는 반면 독일 사람들은 거의 그렇지 않다. 프랑스인은 벨기에인 다음으로 향정신성 의약품에 들어있는 최면제(또는 수면제) 성분에 열광한다. 최면제와 항우울제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불면증은 잠자리보다 근심 걱정과 더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2년에 실시된 연구 결과에서 보듯이, 잠을 잘 자는 사람의 비율이 점점 더 감소하고 있다는 점은 심히 우려할 만하다. 몇 년 전부터 중독성이나 부작용이 전혀 없는 치유법이 예기치 않게 큰 성공을 거두며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바로 예술적인 분위기에서 낮잠을 자고 휴식을 취하는 것으로, 지루함을 느끼는 관객이 잠 깐 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왜냐하면 예술적인 낮잠은 전적으로 예술 프로젝트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물론 라 크리에 극장이 자랑하는 이 독창적인 콘셉트는 문외한에게는 약간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사실 아주 단순하다. 관객은 조명이 약하게 켜진 방에서 콘서트를 하는 아티스트 주위에 누워 있거나 이야기나 소설을 들으며 누워 있다. 대부분의 관객은 누워서 이야기나 음악을 듣는 전례 없는 경험을 누리는 반면 혹자는 잠에 빠져들 수도 있기 때문에 베개를 가져오면 좋다. 따라서 거리낌없이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다.(1)

 

 예술이 낮잠을 돕는 역할

 이 같은 독창적인 콘셉트는 다양한 분야에서 실현되고 있지만 기본은 동일하다. 누워서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듣기. 모든 예술적 낮잠 휴식 프로그램의 목표는 똑같다. 이렇게 해서 2002년 툴루즈에서 시작되어 현재 파리 캐 브랑리 박물관에서도 함께 진행되는 ‘레 씨에스트 엘렉트로니크(Les Siestes Electroniques(전자 수면): 야외 공원이나 정원과 같은 편안한 공간, 편안한 분위기에서 대중에게 무료로 실험적이고 젊은 음악인들의 공연을 보여주는 페스티발-역주)’는 느림을 찬양하고 낮잠을 즐기는 음악애호가들에게 평온한 파동을 전한다.(2) 클로드 레벡은 같은 콘셉트로 2011년 라파예트 백화점에서 ‘기쁨의 찬가’라는 제목의 설치작품을 전시했다. 물론 당연히 부드럽게 조명이 깔린 방에 간이침대 스무 개를 놓고 동일한 제목의 작품이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가운데 백일몽을 꾸기 위한 명상의 장소를 제공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편지를 매개로 문학적 낮잠 휴식을 제공하는 마노스크 페스티발(Festival de Manosque: 진짜 잠드는 사람들을 위한 절대적 이완(3))에서부터, 현대창작 작품을 다루며 nappening(nap과 happening의 합성어)을 제안하는 툴루즈의 갸론 극장에 이르기까지, 문화 기관 및 유사 공간에서 사람들은 여유나 ‘명상의 덱 체어(transat contemplatif)’(4)를 점점 더 많이 누리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과연 무엇을 명상할 것인가, ‘여유를 가지기, 멈추기, 경주를 중단하기’(5) 그리고 ‘인생을 꿈으로 바꾸기’(6)와 같은 여러 대답이 돌아온다.

 

로마인들에게 소중했던 여가, 휴식(otium: 라틴어-역주)의 전형처럼 경제적 목적이 없고 어떠한 의무도 따르지 않으며 비즈니스(negotium)에 반대되는 이 같은 상태는 인간이 사심 없이 사색적인 여가를 누릴 의무가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일까? 칼 마르크스의 사위인 폴 라파르그가 ‘노동권’에 대한 반발로 냉소적으로 쓴 ‘게으를 수 있는 권리’(1880)가 순간적으로 구현되는 상황을 반길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개개인이 눈을 감고 성인을 위한 보육시설 분위기를 이용해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간 잠을 자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잠을 깨우는 작용을 해온 예술이 가벼운 최면제, 이완 보조제가 되어 포근한 분위기에서 최선의 경우 낮잠 휴식을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 공상으로 이끄는 소리에 의해 포근한 잠으로 더 쉽게 빠져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연구된, 중단의 기쁨이 여기에 있다. 난폭한 세상에서 한 순간 감미로운 즐거움이랄까?

 

예술문화 혁신은 그것이 발생하는 사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난폭한 세상’은 놀랍게도 분명하게 낮잠의 효용을 드러낸다. 단언컨대 기본적인 경향은 휴식에 대한 탐닉이다. 설령 그것이 일과 사생활을 구분 짓지 않고 일을 계속 하도록 요구하는, 신기술이 불러온 자유주의와 함께일지라도 말이다.

 

이제 직장에서의 낮잠 휴식을 옹호하는 로비 활동이 시작되고 있다. 2013년 11월 16일 Atlantico 사이트가 명시한 바와 같이 일터에서의 낮잠이 ‘여전히 프랑스에서는 터부시되는 행위’일지라도 ‘전 세계 도처에서 행해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주의를 향상시키고 사회심리적 위험을 감소시키고 결근을 줄이고 근로사고를 예방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낮잠 휴식은 잠을 깨우는 각성효과가 있다’(Slate.fr, 2013년 9월 29일). 낮잠 휴식의 장점을 이해하기 시작한 구글, 허핑턴포스트 같은 몇몇 기업은 일터에서 잠을 잘 수 있도록 회사 내에 수면실을 설치했다.

 

뿐만 아니라 그간 낮잠이 금기시되어 왔던 프랑스에서도 새로운 시도가 진행 중이다. 프랑스 텔레콤 오랑주(프랑스 텔레콤의 이동통신브랜드-역주)는 리용에서 calm space와 calm chair를 실험 중이다. 편안한 조명과 음악이 흐르는 공간에서 직원들이 안락의자에 앉아 긴장을 풀고 자살을 불러일으키는 우울한 기분을 해소한다. 밝고 환한 파동에 의해 호흡이 리드미컬해진다. 더 나아가 이제는 직장에서의 수면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기업도 등장했다. 한 달에 900유로면 낮잠을 잘 수 있는 박스인 calm space를 빌릴 수 있다. 아직은 헌법에 낮잠 휴식이 명시되지 않았지만(중국은 헌법에 낮잠 휴식 규정이 있음), 상황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 이제 곧 금기가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벨기에, 일본, 미국의 ‘낮잠 바’(마사지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함) 또는 파리의 센 강변에 설치된 ‘Zzz’ 개장을 반기면서 현재 진행 중인 낮잠 휴식 확대 방안을 확대해나갈 것이다. ‘Zzz’는 파리시청의 후원 하에 ‘휴식용 오두막’(최대 8명 수용. 예약 필수)으로 쓰이는 ‘재해석된 해상 컨테이너’다(lesberges.paris.fr/places/zzz 참조-역주).

 

그러나 이 같은 급속한 낮잠 휴식 확대 분위기(논리적으로, 성공적인 낮잠 교육 과정의 시행과 함께 정점을 이룰 것이다) 속에서 더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은 이미 진행 중인 긴장완화, 스트레스 중화(neutralization)에 관한 연구다. 문제제기, 불화, 근심걱정, 욕구 등과 같은 근원적인 자극 유발 요인들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예술적 낮잠 휴식을 통해 대중은 더 이상 작품을 칭찬하거나 비판하는 주체,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비평적 견해를 지닌 존재가 아닌, 위험이 따르지 않는 ‘포기, 단념’의 매력을 자기자신을 위해 실험하기 위해 온 개인들의 작은 그룹이 된다. 모두가 ‘휴식’에 몸을 내맡긴다. 휴식을 취하는 육체의 고요한 향연이 빚어내는 감미로운 행복, 반목하지 않는 이웃 간의 잔치, 문화적 찰랑거림이 불러일으키는 공동 수면에 의한 평화, 이 모든 것이 열정을 안전하게 보호하면서 지적 또는 신경 소모를 적게 한다. 그리고 이 지적, 신경 소모는 직장에서의 수면 휴식으로 회복된다.

 

물론 여기서 수익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휴식을 취한 직원의 업무 효율성은 제고될 것이며, 이에 따라 그의 평안한 행복을 돕는 관리자에게 일종의 친근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것이 누워서 감상하는 콘서트 및 이와 유사한 공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닌지 자문해볼 수 있다. 일시적인 안락한 내적 조화를 경험하기 위해, 철야, 근심걱정, 갈등 상태를 내버리러 거기에 온 것이다. 정치, 사회의 장에서 경험했던 것과는 정반대되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평화, 사랑, 선(禪)에 대한 추구는 사람들이 느끼는 피로와 무기력의 숭고한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정신을 이상화(理想化)한다는 이유로 집단 행동이 정당화된 무위(無爲), 무기력이 되는 사회에서 말이다.

 

1859년 이반 곤차로프가 발표한 소설의 주인공, 오블로모프는 곧 전 세계적으로 무기력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는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기다란 소파, 무위도식을 사랑하며 품위 있게 꿈을 꾼다. 그리고 몇 년 후 러시아는 정치적 격변의 시대로 들어선다.

 

글·에블린 피에예 Evelyne Pieiller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조승아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2013 마르세이유-프로방스 – 유럽의 문화 수도(Marseille-Provence 2013 – Capitale européenne de la culture)’, 라 크리에 극장의 프로그램에서 발췌, 2013년 10월 19일.

(2) ‘레 씨에스뜨 엘렉트로니끄@파리 2012(Les Siestes électroniques@Paris en 2012)’ www.quaibranly.fr

(3) 2013년 프로그램에서 발췌. 편지문학이 ‘문학과 그 반향을 기념하고 고독한 문학 창작과 열광하는 대중과의 만남간의 연결고리를 구축’하는 것을 상기시킨다. 문학적 낮잠 휴식은 열광적인 반향을 불러오고 있다. « Chaises musicales » à Montreuil(Seine-Saint-Denis), « Siestes littéraires » à la Médiatique de Châtenay-Malabry/ Théâtre Firmin-Gémier, « L’art de la sieste » à Chalon-sur-Saône, etc.

(4) 라 파스렐 극장(Théâtre de la Passerelle) bar의 낮잠 휴식 촉진책의 명칭.

(5) 2013년 8월 29일 Chalon-sur-Saône 도서관.

(6) 2013년 8월 25일 카바레 콩탕포랭의 뮤지컬 시에스타(Sieste musicale du Cabaret Contemporain), La Bellevilloise, Paris

(7) 2011년 2월 1일 파리 ’20 minu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