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반란이 혁명은 아니다

2014-04-01     장아르노 데랑스 & 로랑 제슬랭

  크림 반도 이탈 후, 우크라이나의 새 정부는 심각한 경제·인구·사회 문제들을 떠안게 되었다. 지난 20년간 올리가르히 체제는 가난과 원한, 공포만을 양산했다. 하지만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체제의 변혁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장아르노 데랑스 & 로랑 제슬랭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도네츠크의 레닌 광장 근처에 있는 돈바스 팔라스 호텔은 우크라니아 동부 지역의 최고급 호텔에 속한다. 리나트 아크메토프가 소유한 이 호텔의 하루 숙박비는 350유로(약 52만원)로, 우크라이나 근로자 한 달 평균 임금을 웃돈다. 이 나라 최고의 갑부 아크메토프는 최근 하야한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과 가까이 지내다가 지금은 키예프 봉기 이후 들어선 새로운 정권에 지지를 보내는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는 호텔과 여러 부동산을 포함해, 축구팀 샤흐타르 도네츠크와 광산, 제철소, 공장들을 소유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올리가르히(신흥재벌 과두지배집단-역주) 파벌들 중 상당수는 바로 이 광산업 지역에서 부를 축적했다. 도네츠크와 루한시크 오블라스트(구소련의 행정구역)에 속하는 이 지역은 이미 소비에트 연방 시절부터 광산업의 중심지였다.

우크라이나 전체 외화 수입의 4분의 1을 벌어들이는 돈바스 지역에는 현재 공식적으로 95개의 광산이 있다. 20년 전 230개에 비해 상당히 줄어들었다. 같은 기간 인구도 7백만 명 정도 감소했다. 1991년 말 독립 직후, 경제적 혼란이 찾아오고 국영 광산이 폐쇄되자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스스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프랑스 공산당 지도자의 이름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인근 도시, 토레즈(1)의 한 늙은 광부가 “이곳에서는 1미터만 파도 석탄이 나온다”고 말했다. 통나무로 대충 받쳐놓은 갱도에서 일하다보니 사고가 빈번하다. 한 달 200~300유로를 벌기 위해 광부들은 목숨을 걸고 땅 속으로 들어간다. 2010년 야누코비치 정권이 들어선 후에 이런 불법 광산들(kopanki)에 대한 정비와 조직화가 진행됐다.

우크라이나 독립광부노조 부위원장인 아나톨리 아키모친은 “불법 광산에서 캐낸 석탄은 싼값에 국영 광산에 넘겨진 후 시장 가격에 판매된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얻은 이익에, 국영 광산의 지불능력을 인위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제공되는 정부 지원금이 덧붙여진다. 아키모친 부위원장은 “그중 상당한 돈이 권력 측근들의 수중으로 흘러들어갔을 것”이라고 귀띔한다. 전문가들은 최근 몇 년간 전체 석탄의 10%가 이 불법 광산들에서 생산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 배후에는 아크메토프 등 민영화된 광산의 소유주들과 경쟁을 벌이던 전 대통령의 장남 알렉산드르 야누코비치가 있다.

“혁명? 아니올시다. 패를 새로 돌렸을 뿐이다.” 키예프 사회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사회학자 볼로디미르 이슈쳰코는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야누코비치가 망명을 떠나고 새 정권이 들어선 지 몇 주 지난 시점이었다. “현 정권은 경제적 자유주의와 개인적 치부라는 동일한 가치를 표방한다. 모든 반란이 곧 혁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마이단 광장의 운동이 근본적인 변혁으로 이어지고 이른바 혁명이라는 이름값을 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5월 25일 대선에 출마하는 후보들 중 그나마 가장 믿음이 가는 인물은 페트로 포로셴코다. ‘초콜릿 왕’으로 알려진 이 나라 최고 갑부다.” 11월 22일 이후 민중 봉기의 구심점 역할을 한 마이단 광장(독립광장)에서 시위자들이 총탄에 맞아 쓰러지던 그 순간, 다른 한편에서는 우크라이나의 통제권을 틀어쥔 갑부들은 정권 이양을 위한 기묘한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부자들이 계속 정권을 잡은 폐단

  지난 20년간 우크라이나는 특별한 형태의 발전을 경험했다. 이른바 ‘올리가르히 복수 체제’이다. 소련 해체 이후 민영화 과정에서 광산과 공장 등을 헐값에 사들여 엄청난 부를 축적한 사업가들 중 상당수가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석유와 가스를 사고팔던 이들이 장관이 되거나 공공기관의 대표가 되었다. 2004년 ‘오렌지 혁명’을 이끌었고, 2011년 8월 수감되었을 때 서구로부터 순교자로 칭송받기도 했던 전 총리 율리아 티모셴코 역시 가스 산업에서 큰돈을 벌어들였다.

이처럼 우크라이나의 부호들은 비즈니스와 국가기관 사이를 오가며 경력을 쌓아왔다. 앞으로 나서기 싫어하는 인물들은 정치인들의 선거에 뒷돈을 대는 방식으로 이해관계를 구축했다.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 재임 기간(1994~2005)동안 형성된 이런 시스템 속에서 권력자들은 경쟁과 이해득실에 따라 끊임없이 이합집산하는 모습을 보였다.

돈바스 팔라스 근처에는 아크메토프 소유의 두 회사 메틴베스트와 디텍의 본사가 입주한 웅장한 건물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건물 옥상에는 알렉산드르 야누코비치가 우크라이나 석탄 수출을 위해 스위스에 세운 홀딩회사 마코의 간판이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며칠 후에 이 간판은 슬그머니 철거됐다. 돈바스의 주인과 대통령 측근들 간의 동맹 관계가 깨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1990년대부터 도네츠크 파벌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적 대표로 간주되어 온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은 2010년부터 자신의 보호자들과 다소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는 정부 요직에 믿을 수 있는 최측근들을 - 우크라이나인들 표현에 따르면 그의 ‘패밀리’ 구성원 - 앉히기 시작했다. 가령, 야누코비치의 개인 은행가로 불리던 세르히 아르부조프는 2010년 말 중앙은행 총재로 임명됐다. 그는 위기가 최고조에 달하던 1월 28일 미콜라 아자로프의 뒤를 이어 총리로 지명되기도 했다. 대통령 아들의 친한 친구였던 비탈리 자카르셴코는 2010년 12월 재정부 장관 자리에 올랐고, 2011년 11월에는 외무부 장관에 임명됐다. 정권 초부터 야누코비치의 총애를 받던 디미트로 리르타시는 러시아 가스 수입을 독점해오다 화학과 금융 분야에까지 손을 뻗쳤다. 하지만 말로는 좋지 않았다. 자카르셴코는 러시아로 망명하고, 피르타시는 3월 13일 빈에서 체포됐다.

이들 ‘패밀리’ 안에는 세르히 쿠르셴코 등이 포함된 ‘젊은 올리가르히’ 그룹이 형성되기도 했다. 이 새파란 젊은이(1985년생)는 액화가스 시장의 18%를 장악한 우크라이나 가스 회사의 소유주로서 100억 달러 매출을 달성하면서 경영계의 샛별로 떠올랐다. 쿠르셴코는 2012년 오데사 정유공장을 인수하고 자신의 고향 축구팀 메달리스트 하리키우의 주인이 되었다. ‘패밀리’의 주요 멤버였던 빅토르 프숀카 전 검찰총장의 아들과 가깝게 지낸 덕분이었다. 쿠르셴코의 오데사 정유공장 인수는 석유 시장의 큰 손이자 우크라이나 3위의 갑부인 이고르 콜로모이스키에게 공개적으로 도전장을 내미는 것과 같았다. 안나 바비네트 기자는 “쿠르셴코가 정권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공정한 경쟁이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패밀리’가 몰락하자, 쿠르셴코와 프숀카 부자는 러시아로 망명했다. 그의 라이벌 콜로모이스키는 2014년 3월 2일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오블라스트의 지사로 임명됐다. 같은 날, 돈바스산업연맹 소유주인 철강업계의 거물 세르히 타루타는 도네치크 지사가 됐다. 그는 오렌지 혁명에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정치색을 지나치게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타루타와 아크메토프는 결코 친구가 된 적이 없다. 하지만 수차례의 충돌 끝에 이 지역을 통제하기 위한 합의에 도달했다.” 도네치크 대학 교수 발렌틴 코코르스키의 설명이다. “타루타의 지사 임명 전에 아크메토프의 동의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과거 두 사람은 상당히 오랫동안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아크메토프는 타루타를 궁지로 몰아넣어 회사를 포기하도록 압박을 가한 적도 있었다.

올리가르히 체제의 드문 장점 중 하나는 러시아 자본의 영향을 차단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2) “하지만 우크라이나 경제, 특히 돈바스 지역의 경제가 러시아 없이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건 환상이다.” 코코르스키 교수가 계속 설명한다. “우크라이나의 가공산업은 대부분 러시아 시장을 대상으로 한다. 더욱이 대부분 유럽연합과 다른 표준을 사용한다. 올리가르히들은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과 러시아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가령, 아크메토프의 사업은 돈바스에 근거지를 두고 있지만 러시아와 여러 유럽 국가들(불가리아, 이탈리아, 영국)까지 진출해 있다. 그는 이곳에 수많은 페이퍼 컴퍼니와 상호출자회사들을 소유하고 있다.

타루타는 어떨까? 그는 아조프해 연안의 그리스 소수민족 출신이다. 그의 고향인 마리우폴 항구는 아크메토프의 사업 본거지이기도 하다. 그는 이곳에 아조프스탈과 일리치 제철 콤비나트, 아조프마치의 객차와 기관차 공장을 소유하고 있다. 이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은 전량 러시아로 수출한다. 타루타는 지사에 임명된 후 주요 경제인들을 만나기 위해 마리우폴을 방문했다. 지역신문 <프리아조프스키 라보치> 대표 니콜라이 토카르스키는 회합에 참여한 후, “성과 있는 만남이었다. 누구도 우크라이나의 분열을 원하지 않는다”고 평했다. 이 신문의 소유주는 아크메토프의 SKM 홀딩이다. 토카르스키는 도네츠크 오블라스트 의회에도 진출했다. 그는 ‘무소속’ 의원임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올리가르히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 러시아의 행보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독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이 신문은 우크라이나 ‘영토의 단일성’을 주장하는 동시에, 키예프의 새 정권에 협력하는 아크메토프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현 정부는 거의 해체되다시피 한 국가 기구의 파탄을 막기 위해 올리가르히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다. 특히 장기적인 분쟁이 국가 이익에 치명적인 피해를 가져올 것을 염려한 정부는 ‘러시아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아크메토프와 타루타는 사태 진정을 호소했다. 아크메토프는 “돈바스 지역의 용감하고 성실한 주민들은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한 후 폭력의 유혹에 절대 굴하지 않을 것임을 결의했다.

  ‘판자집에는 평화, 궁전에는 전쟁’의 구호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서는 3월 한 달 내내 친 러시아 시위대와 공권력 사이에 공공기관 건물 점거를 둘러싸고 기묘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처음엔 시위대에 점거된 건물들은 며칠 후 경찰에 의해 다시 탈환됐다. 3월 9일 루한시크 지역 행정부 건물이 점거됐을 때는 3백여 명의 경찰관들이 건물을 지키는 대신 시위진압용 방패를 들고 환호성을 내지르는 2천여 명의 주민들 사이로 건물을 빠져나오는 광경이 연출됐다. 주민들 중에는 여성과 퇴직자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경찰들 중 상당수는 그들을 내쫓기 위해 몰려온 시위대와 공모의 미소를 주고받았다. 도네츠크 곳곳에서 이런 장면이 연일 반복됐다. “경찰들은 더 이상 누구의 명령을 따라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의 상관들은 옛 권력에 복종했다.” 도네츠크의 유명 블로거 데니스 카잔츠키의 설명이다.

치안권력 내부의 명령계통이 모호한 상황이다. 중앙행정부의 관리들이 새로 임명됐지만 제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는다. 바비네트 기자는 “부패 전력과 관련한 자료들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검찰은 기자들이 제공하는 정보에 의존하고 있다”고 전한다. 3월 13일 국회에서 국가경비대 창설이 표결됐지만, 알렉산드르 투르치노프 임시 대통령의 말에 따르면 현재 우크라이나 군인들 중 작전 투입이 가능한 병력은 6천 명에 불과하다. 국가경비대 병력 중에는 극우파 단체 프라비 섹토르 등 가장 급진적인 민족주의자들도 포함될 예정이어서 안보 위협에 적절히 대응하기보다 동부 지역 주민들의 경계심만 자극하는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다. 실제로 3월 14일 하르키우에서는 프라비 섹토르 조직원들과 친러시아계 주민들 사이에 유혈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사실상 국가 분열 상태로 접어든 우크라이나의 ‘혁명’은 벌써부터 실패의 길을 향해 가고 있는 듯하다. 러시아 국경에서 30여km 떨어진 루한시크의 지역당(전 여당-역주) 책임자 알렉산드르 트카셴코는 “순금 변기까지 갖춘 전 대통령의 호화 저택 이미지에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우리는 어렸을 때 ‘판자집에는 평화, 궁전에는 전쟁’이라는 오래된 구호를 배우며 컸다. 하지만 부패가 이 나라 전체를 갉아먹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동부 주민들 역시 서부 주민들과 함께 올리가르히와 부패에 대항한 공동 투쟁을 전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파시스트의 위협’이라는 허깨비를 흔드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폭발은 동부 지역 친 러시아 주민들의 이탈을 더욱 부채질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로부터 몇 주도 채 안 되어 우크라이나 사태는 왜곡된 공포심과 민족주의적 감정에 휩쓸려 내전 직전에 이르고 말았다.

  글·장아르노 데랑스 & 로랑 제슬랭 Jean-Arnault Dérens & Laurent Geslin

  언론인

  번역·정기헌

(1) 모리스 토레즈(Maurice Thorez)는 1930~1964년 프랑스 공산당 서기장이었다.

(2) Sławomir Matuszak, ‘The oligarchic democracy: the influence of business groups on Ukrainian politics’, Center for Eastern Studies, 바르샤바, 2012년.

(3) Emmanuel Dreyfus, ‘우크라이나 극단 민족주의자들(En Ukraine, les ultras du nationalism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