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의 국민이 될 수 있을까?

2014-04-01     프레데리크 로르동
   
 

  국가, 국민에 관해서 오늘날까지 제시된 엄청난 수의 정의에다 추가하지 않고, 좀 더 개념적인 방법을 설정할 수 있다. 그것은 예를 들면, 부뤼흐 스피노자가 <신학 정치론>에서 강력히 개진한 “자연은 국민을 창조하지 않는다”(1)라는 말을 단초로 삼는 것이다. 그 말은 첫째로, 국가, 국민에 대한 본질주의적 또는 종족적 개념을 단호하게 거부한다고 지적할 수 있다. 둘째로, 그 말은 보다 유용한 의미를 갖는다. 즉, 그 어느 것도 이 분야에서는 영구히 고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국민을 만드는 것이 자연이 아니라 역사라면, 국민은 만들어질 수 있고, 해체될 수 있고, 또 재차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히, 다민족국의 국민이라는 개념을 가상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에릭 홉스봄(2)이 밝혔듯이, 그것이 바로 역사적으로 흔히 나타난 양상이었다. 그러므로 하나의 유럽 국민을 구상한다는 것이 분명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전혀 기상천외한 생각은 아니다.

스피노자는 “자연은 국민을 창조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면서, 합리적 계약에 가담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그것은 ‘사회 계약’의 여러 가지 형태의 토대가 되는 자발적이고, 자유롭고 투명한 연대의 모델에 따른다. 그러면 무엇이 국민을 만드는 것일까? “인간은 이성보다는 정서에 따라 행동하므로, 다수는 이성이 아닌 그 어떤 공유 정서로 행동하는 한 사람처럼 자연스레 서로 조화를 이루고 행동하고자 한다.” 정치 공동체, 국가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감정의 공동체들이다.

하지만, 이 발언에는 몇 개의 함정이 있다. 첫째로, 공유 정서란 단어의 단수 사용에 주의하여야 한다. 공동체에 응집의 원동력을 제공하는 공유 정서는 화합된 정서 또는 정서적 화합이다. 공유 정서는 느낌의 방식, 사고의 방식, 좋다 나쁘다, 옳다 틀리다, 합법적이다 불법적이다 식의 판단의 방식 등을 대상으로 삼는다. 따라서 공유정서는 공동체 윤리의 근본이다.

그러면, 어떤 곳으로 관련을 확대시킬까? 무엇에 대해 좋다 나쁘다 판단하는 것일까? 어떤 분야에 있는, 어떤 행동들에 대해서, 스피노자는 모든 것에 대해 판단하는 방식들이 공유되어야 된다고 절대 말하지 않았다! <신학 정치론>에서 그는 분명하게 정반대로 사상의 자유를, 즉 사상의 대립을 보장하는 입장을 취했다. 따라서 공유 정서의 전횡이나 전체주의나 다수에 대한 절대적 동질화 추구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엄격한 민족국가주의 관점은 단일성을 앞세우는 국민국가에서도 존재하는 내부의 문화, 윤리적 다채로움, 지형적 다양성과 결부된 문화적 다양성을 철저하게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유럽 차원의 공유 정서

  ‘공유 정서의 전체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공동체 감정의 본질이 필연적으로 다양과 공통의 연결고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공통의 하위에 다양을 두는 ‘위계적’ 연결고리이다. 그래서 순수한 지역적 하위 공유 정서들과 함께, 사회 계급적 공유 정서들이라 일컬을 수 있는 경제적 의미로 정의되는 사회 신분적 (하위) 공유 정서들이 공존한다. 국가는 오직 글로벌 공유 정서가 지역별 공유 정서들보다 우세할 때, 전체의 정서가 부분의 정서들을 누를 때만 건재한다.

유럽 국민을 구성할 수 있는 공유의 정서는 어떤 것들일까? 여기서 세운 가정은 이들 중 하나는 국민주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현 유럽연합 체제에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으며, 역으로는 이것이 지렛대가 되어 유럽연합이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실제로 자기 자신의 운명의 주체자로서 공동체가 밝히는 의지, 즉 국민주권을 현대정치의 토대로, 아니면 유럽대륙에서 역사적으로 발달한 유럽식 현대정치의 정의로도 삼을 수 있다. 스피노자의 글을 환언하면, 이 국민주권이 유럽사회 공동체들의 최초의 정치 정서, 정치적 감정의 초판이 된다고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국민주권 주장에 대한 사상은 너무나 널리 공유되어서 유럽의 정치적 구상을 이루고 있고, 따라서 충분한 공동 정서의 가능한 재료가 되지 않을까 가늠해 볼 수 있다.

물론 그 공유 정서의 충분조건 문제가 중추를 이룬다. (중략) 역사상 일어난 상호이견과 상호근접을 염두에 두면, 유럽차원의 국민주권 주장은 하나의 공유 정서를 창출해 내기에 충분한 추가적 진일보가 될 수 있다. 그 공유 정서는 그 자신이 다방면의 정치적 공유 하위정서들의 형성을 끌어낸다. 이 하위정서들은 각 기존 구 국가들의 공유 하위정서들을 지배하고, 신유럽국가의 공유 정서에는 지배당할 것이다. 그런 것들이 다름 아닌 다수원칙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감정의 조건들이다.

따라서 현재 각 유럽 국가들이 강력한 공유 정서로 자리 잡은 자신들의 고유특성들이 유럽 차원의 다수결에 의한 법률로 인해 거부되는 사태를 용인할 것인가가 쟁점으로 떠오른다. 만약 그 법이 가령 경제정책, 특히 통화정책과 같은 공동 정책분야와 관련된다면 그런 경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유럽중앙은행의 지위와 독립상실의 가능성, 인플레이션 목표의 존재와 정도, 공공 재정적자에 대한 통화자금 조달의 가능성 또는 불가능성, 균형예산 의무 등과 같은 통화정책의 요소들에 대한 재논의를 상상해 보자.

  독일과 통합은 난제

  고정관념과 고유한 통화정책 원칙들을 유로존 전역에 강요하는 독일이 성역으로 간주하는 이 분야에서 유럽이 다수결로 통과시킨 맘에 들지 않는 법률을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여기서 제기된 문제는 국가별 공유 정서들의 문제이다. 각국의 고유 특성이 유럽공동체 권한보다 각 회원국의 권한이 우선하는 장치들과 조화를 이루는 한 모든 것은 순조롭다. 그러나 그런 고유특성이 특히 경제정책과 통화정책의 경우 공동의 이해부문과 관련될 때 문제가 꼬이는 것이다.

국민국가 연방식의 국제성 형태를 포함한 중간적 국가형태가 실현성이 없다고 인식하지만, 그렇다고 유럽국가 가능성을 단념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바로 그것이 절대적으로 제기되어야 하는 매우 전형적인 구체적 질문 양식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장래의 정치 실험들을 파국적 운명으로 내모는 ‘평화’ 문제와 같은 손쉬운 총론, 일반론에 머무르게 된다. 그 질문에 모든 부정적 답변은 애초부터 유럽 정치통합이라는 사상을 거부한다는 것을 부연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경제정책은 유럽공동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는 동시에 적어도 중기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국가별 저항의 소지가 된다.

따라서 공동으로 결정한다는 현대의 민주적 주권 사상이 아무리 강력해도, 그리고 분명 강력하지만, 하나의 정치적 유럽을 건설하기 위한 충분한 공유 정서를 홀로 이끌어 내는 것은 아마 역부족일 것이다. 그리고 수세기에 걸쳐 유럽 역사를 통해 생겨난 문화적 공통성이 지지대 역할을 할 수 있어도 마찬가지이다. 유럽연합은 그렇지 않아도 ‘휴머니즘’에서 ‘기독교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동원한 지원군 격의 공통성들에서 가능한 정치적 공동체를 위한 감정의 힘을 찾아보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공동 정책에 대해서 유럽 차원의 다수결 원칙에 필수적인 감정 조건들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충분하지 않다.(중략)

유럽국가라는 문제를 단지 개념적으로 재고하겠다는 계획만을 개진하고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문제를 다시 생각하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고, 그중에서 선택을 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의 28개 국가 또는 유로존의 17개 국가 등 현 유럽 형태를 유지하고, 반면에 실질적 정치 통합을 포기하는 선택이 있다. 정의상 실질적 정치통합은 경제정책 문제를 내포하게 되는데, 경제정책의 가장 중요한 사항들이 회원국 한 나라의 거부권 행사에 노출되어 있다. 그 거부권 때문에 다수결 원칙에 의한 통상적 정치적 표결에 붙일 수 없다. 그런 형국에서는 유럽국가, 유럽정치통합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유럽이 전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야망이 축소된 협동조직 양식의 유럽을 의미한다. 그 유럽은 유럽주권 건설의 목적이 없고, 결과적으로 각국 국가주권에 대한 침해도 없다.

중요한 난제인 통화정책 문제에서 얻은 덜 비관적인 교훈은 유럽국가 건설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하고나 가능하지는 않다. 현재는 명백하게 독일하고는 아니다.

  글·프레데리크 로르동 Frédéric Lordon

경제학자. 저서에 <제도적 결함>. <유럽통화와 민주적 주권>, <해방의 연결고리>(2014년) 등이 있다. 이 기사는 저서 발췌문.

  번역·손종규

프랑스 렌느II대학 박사과정 수료. 번역가.

  (1) Spinoza, 정치론, Traité politique,Ⅵ, 1, dans Oeuvres Ⅴ,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Paris, 2005년(초판1re éd. : 1677년).

(2) Eric Hobsbawm,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 Nation et nationalisme depuis 1780’, <Gallimard>, Paris, 199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