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사박물관은 평화·공존의 장

2014-04-01     윤정란

박물관의 기능적인 역할은 전시, 교육, 체험 등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할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박물관의 설립 목적이 중요하며, 이에 따라 전시, 교육, 체험 등의 콘텐츠가 어떠해야 할 것인지가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사박물관이 어떤 방향으로 설립되어야 할 것인가? 그것은 한국 역사 속에서의 여성의 삶이 종합적으로 기억되고 재현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전통시대 이후 세계 여성들의 삶은 가족제도의 변화뿐 아니라 정치, 사회 분야로 진출하면서 새로운 삶의 지표를 마련하고 전진해 왔다. 한국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서구와는 다른 방향에서 한국 여성들은 새로운 세계로 가는 교두보를 만들고 구축해 왔다.   

19세기 말 이후 한반도는 제국과 식민이라는 세계 체제에 편입되면서 오늘날까지 식민, 분단, 전쟁 등의 인류 역사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험을 했던 공간이었으며, 오늘날까지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성들은 제국과 독재 권력에 저항하며 새로운 공존과 연대라는 새로운 세계의 지표를 마련했다. 한편으로는 제국과 독재 권력으로 수많은 여성들이 비극적인 삶을 살아왔다. 이 여성들은 한반도의 평화, 나아가 세계 평화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여성들은 삶의 주체로 서기 위해 오랫동안 법적 지위 개선을 비롯하여 사회 각 분야에서 목소리를 내면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므로 한국여성사박물관의 19세기 말 이후 콘텐츠는 여성, 평화, 공존 등의 세 가지 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대한여자독립선언서’로 시작되는 ‘공존과 연대’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 22세의 ‘이소사’라는 여성동학군은 국권과 개인 권리의 침탈에 맞서서 저항했다. 그녀는 말을 타고 선두에 서서 동학군을 이끌고 장흥부를 공략했다. 그 다음 해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의병들이 곳곳에서 이에 저항하며 일어났다. 단발령을 문화 폭력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때 ‘윤희순’이라는 여성은 ‘안사람 의병가’ 를 만들어서 여성들도 의병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녀는 “안사람 만만세로다”를 외치며 ‘안사람 의병가’를 통해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를쏘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 없이 소용있나”라고 주장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을 때, 여성들은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된 도리에는 남녀의 차이가 없는 것인데…, 여자는 어떻게 참여해야 할지 방법을 논하지 않아서 우리는 폐물로 참여하겠다”고 하면서 이 운동을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대시켜 나갔다.

1910년 일제의 강제적인 병합으로 헌병과 경찰들에 의해 한국인들이 감시와 통제를 받았다. 이 때 여성들은 비밀리에 송죽결사대를 만들어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이 단체는 점조직으로 되어 있었으며 단체 조직원이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되면 그곳에서 지부를 만들어 점차 조직을 확대시켜 나갔다. 이러한 활동은 1919년 여성 3·1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

19세기 말 이후 지속된 여성들의 활동은 1919년 2월 <대한여자독립선언서>로 여성의 권리와 우리 민족의 권리를 선포하였다. 이는 그동안 지속되어 왔던 여성들의 기존 체제에 대한 저항과 새로운 세계관을 천명한 것이었다. 제국주의는 총과 칼을 들고 들어와서 식민지인들을 위협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문명화라고 주장하고 강제하였다. 당시 우리 여성들은 이러한 세계관에 저항하고 ‘공존과 연대’라는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였다. 국가와 국가의 공존, 그리고 여성과 남성의 공존, 나아가 제국에 대한 불의한 세계관에 맞서는 식민지 국가 간의 연대, 남성과 여성의 연대 등을 주장했던 것이다. 3·1만세운동 이후 우리 여성들은 국내에서, 간도에서, 노령에서, 미주에서 수많은 여성항일단체를 만들어 이를 실천하였다. 이러한 유산은 해방 이후 한국여성들의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졌다. 1970년대는 여성 노동자들에 의해 민주화운동이 촉발되었으며, 이는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 이어 거대한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19세기 말 이후 시작된 제국에 대한 저항운동이 오늘날 한국의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는 ‘공존과 연대’를 표방한 것이며, 미래의 비전을 제시한 것이었다.   

‘정신대’ 문제, 한반도의 평화와 세계의 평화로

19세기 말 이후 한반도는 다섯 번의 대규모 전쟁을 경험했다. 1894년 동아시아 패권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일본이, 1904년에는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한반도에 수많은 피해를 발생시키고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까지 박탈해 버렸다. 이후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였다. 2차 세계대전으로 한국인들은 전시 체제하에서 징병, 징용 등으로 전쟁의 희생물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가장 끔찍하고 잔인했던 것은 ‘정신대’ 문제였다. 수많은 우리 여성들이 전장으로 끌려가 엄청난 성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이후 이 여성들의 삶은 너무나 비참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으로 수많은 여성들이 이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지만 여성들의 비극은 계속되었다. 특히 1948년 4·3항쟁 속에서 여성들의 비극적인 삶은 되풀이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은 더 큰 비극을 만들어냈다. 1990년대 초반 한국여성들은 전쟁의 희생물이 된 여성들의 비극을 기억하고 더 이상 이러한 비극이 이 땅, 나아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운동을 전개해 왔다. 전쟁의 폭력에 앞장섰던 가해자들에게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지금까지도 이 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정신대’로 시작되는 이 공간은 한반도의 평화,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외치는 기억과 재현, 그리고 미래를 이야기하는 소통의 공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여권통문>에서 시작된 여성시민권리선언

1898년 9월 <여권통문>이 선포되었다. 4백 명의 청중이 모여든 가운데 여성들은 선언문을 낭독했다. 이 선언문은 여성들의 참정권, 직업권, 교육권 등을 선포한 것이었다. 이천만 동포 형제가 구습을 버리고 개명한 신식을 수행하고 참여하는데 여성들도 함께해야 한다고 주장한 참정권, “어찌하여 병신 모양으로 사나이의 벌어주는 것만 먹고 평생을 심규에 처하여 그 절제만 받으리오”라고 하면서 여성들도 반드시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당장에 여학교를 설립해서 이를 위한 모든 학문을 가르쳐야 한다고 선포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여학교 설립이라고 하며 남성들만 할 수 있는 상소를 고종에게 올렸다. 또한 이 여성들은 독립협회 활동을 함께 하면서 만민공동회에 참가하는 등 여성으로서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후 많은 여학교가 설립되었다.

1905년 일제에게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여성들의 사회참여는 정치운동으로 바뀌었다. 여성들의 정치 사회참여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이러한 여성들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여 임시헌장에 여성들의 권리를 명시하였다. 임시헌장 제3조에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귀천 및 빈부의 계급 없이 일체 평등으로 함”, 제5조에 “대한민국의 인민으로서 공민의 자격 있는 자는 선거 및 피선거권을 가진다”라고 규정했다. 1945년 해방 이후 과도입법의원에 참여한 여성들은 제헌의회 구성 중 여성 22명이 참여해야 한다며 여성할당제를 요구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이후 여성의 정치 참여가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지속적으로 발전을 거듭해갔다.

여성의 직업은 3·1만세운동 이후 다양한 분야로 진출함과 동시에 여성노동자들이 생겨나면서 여성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강주룡의 을밀대 고공시위는 여성노동운동의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해방 이후 여성들은 직업권을 주장하고 정년 연장 등 다양한 요구를 하면서 그 범위를 확대해 갔다. 여성교육도 마찬가지로 기술교육 등 범위를 점차 확대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은 사회의 변화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여성들의 희생과 요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또한 가족에서의 변화도 이루어냈다. 예를 들면 호주제 폐지를 비롯해 여성에게만 일방적이었던 법적인 문제도 해결하였다. 아직도 가야할 길은 많이 있지만 이것은 여성들이 주장하고 이를 위해 많은 실천운동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직업권, 교육권, 참정권을 주장했던 <여권통문>은 오늘날 여성들이 가족의 변화, 사회의 변화를 이루어낼 수 있도록 새로운 세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준 것이었다.

한반도를 뛰어 넘어 세계와 소통해야

19세기 말 이후 한국 여성들은 기존의 전통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세상,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였다. 공존, 평화, 여성이라는 새로운 비전이었다. 지난 해 11월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가 부산에서 열렸을 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마리클 랩슬리 성공회 신부의 설교는 우리의 현실과 역사를 되돌아보게 했다. 지구촌 110개국의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그는 “한반도의 남북이 군부대화한 병영, 거대한 무기고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안전보장이사회 회원국 가운데 5개 상임이사국이 무기를 생산하는 나라들이며, 이 무기의 주요 고객이 개발도상국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여전히 한반도에는 전쟁 폭력이 그대로 상존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한국여성사박물관으로 공존을 통한 연대, 여성의 비극을 낳은 전쟁이 아닌 평화, 개인의 권리를 천명하고 이를 획득해 내기 위해 실천했던 여성 시민권리 운동 등을 종합적으로 기억하고 재현해서 한반도 나아가 세계와 소통하는 공간을 만들어내자. 이는 여성 뿐 아니라 세계 인류의 비전을 제시해주는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글·윤정란
한국 근현대여성사를 전공했으며, 주요 저서로 <한국 기독교 여성운동의 역사>, <서북을 호령한 여성독립운동가, 조신성>, <조선왕비 5백년사>, <조선왕비 독살사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