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발칸의 봄은 찾아 온다
빈곤과 실업, 부패, 족벌주의, 무능력한 정치인… 보스니아 내전이 종식된 지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 총체적인 난국에서 벗어나려는 열망이 민족 간 분열을 초월해 분출하고 있다. 지난 2월 초 침묵을 강요당해왔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이제 시민들에 의한 직접 민주주의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20년간 우리는 잠들어 있었다. 이제 깨어나야 한다!" 매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국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시위대의 외침에는 이번 투쟁의 숨겨진 본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회적 갈등의 폭발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측되었다. 공식 실업률이 경제활동 인구의 40%를 웃돌고 민영화로 인민의 공공자산은 약탈당했으며 부패한 철밥통의 정치 엘리트들이 나라를 지배했다. 지배계층 뿐만 아니라 서방 외교관들까지도 갑작스런 투쟁의 움직임에 당황했다. 이들은 1995년 체결된 데이턴 평화협정 이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반 보호령 상태로 유지해왔다.
2월 5일, 6백여 명의 실업자들이 투즐라의 주청사 앞에 운집했다. 지난 십여 년 사이에 민영화되었다가 파산한 기업들의 노동자들과 젊은 시민들도 이에 동참했다. 이들은 즉각 부당한 민영화 정책의 재검토와 현 사태를 초래한 정치인들의 사임을 요구했다.
투즐라는 사회민주당(SDP)의 정치적 본향으로 과거 최대 산업중심지였다. 인구 15만 명의 이 도시는 내전 기간 동안에도 다양한 민족 공동체가 공존하며 "유고슬라비아" 문화를 보존해 왔었다. 하지만 주민 대다수가 근무하고 있던 국영기업들이 자치주 기관의 감독 하에 진행된 민영화 과정에서 헐값에 매각되었다. 최근 디타 및 폴리헴, 구밍, 콘주흐, 아이다의 새로운 기업주들은 자산을 팔아 치워 파산 신고하고 임금 지급을 중단하며 수천 명의 노동자들의 권리를 휴지조각처럼 팽개쳤다.
제니차와 모스타르, 사라예보, 프리예도르, 비옐리나 뿐만 아니라 고르니 바쿠프-우스코플레와 스레브레니차 같은 작은 도시에 까지 시위가 확산되었다. 2월 7일 투즐라와 제니차의 주정부 청사와 사라예보의 대통령 관저가 화염에 휩싸였다. 이 날 이후 저항의 진원지인 투즐라에서 주지사가 사임했다. 그 후 투즐라의 시민들은 매일 저녁 직접 민주주의 형태의 인민의회를 소집해오고 있다. 당국으로부터 정당한 교섭상대로 인정받은 인민의회는 민영화에 대한 개정사항과 임시 정부 구성을 논의한다. 마찬가지로 주지사가 사퇴한 제니차와 수도 사라예보에서도 인민의회 개최가 진행되고 있다.
사회민주당과 민주행동당(SDA)의 보스니아 민족주의자들은 조기 총선을 통해 정국을 수습하려 애쓰고 있지만 이는 기존 엘리트 세력의 권력을 공고히 해줄 뿐이다. 내전이 종식된 이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정치체계를 갖게 되었다. 이론적으로는 통합된 국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보스니아계·크로아티아계)과 세르비아계의 스르프스카 공화국으로 분리된 1국 2체제로 이루어져 있다. 게다가 연방은 다시 10개의 자치주로 나뉘어져 각각의 주는 교육과 경제, 보건, 치안, 사법 등의 분야에서 중앙 정부보다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 복잡하게 분할된 정치체계는 정치적 의사결정을 방해하고 변화의 가능성을 차단하며 무책임한 수많은 정치인들의 배만 불려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밀로라도 도디크 스르프스카 공화국 대통령은 이번 시위를 세르비아계에 대한 "위협"으로 규정하려 했다. 공식 매체들도 "반역자들"의 봉기로 폄하하거나 아예 뉴스로 다루지 않고 있다.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채널인 RTRS 공영 TV가 이제야 시위 문제를 언급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의 움직임은 전국 곳곳으로 퍼져나갔고 영향력이 막강한 내전용사 협회들은 정부의 “범죄 행위와 부패, 족벌주의”를 규탄하며 도디크 공화국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했다.
연방 자치주 폐지 요구가 높아짐에 따라 크로아티아계의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세력기반이 흔들리자 불안해했다. 헤르체고비나의 대도시인 모스타르는 여전히 크로아티아 지역과 보스니아 지역으로 분할되어 있지만 내전 이후 처음으로 시민들이 함께 거리로 나와 시위에 동참했다. 베드란 지히크 연구원은 “민족 간 증오심의 역사는 데이턴 평화협정에 의한 신화에서 비롯되었다. 오로지 현상유지에만 관심 있는 정권에 빌붙은 미디어들이 꾸며낸 신화일 뿐이다”고 지적했다. 보스니아 곳곳에는 “민족주의자 타도!”라는 새로운 슬로건의 벽보까지 등장했다.
이번 사태에 대해 서방의 외교단들은 이상할 만큼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보스니아의 평화협정 이행을 위한 국제사회 고위대표부의 발렌틴 인즈코 대표를 내세워 데이턴 협정의 책임자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만 시위대들은 바로 이 협정을 문제 삼고 있다. 인즈코 대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내전 이후 최악의 상황”에 빠져있다며 유럽연합군의 파병 확대를 언급했다. 그러자 모든 발칸반도 국가들과 유럽의 좌파 인사들은 “국제사회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민족주의 정치 엘리트들과의 관계를 청산해줄 것”을 호소했다.(1)
보스니아의 투쟁은 조심스럽게 주변국으로까지 이어져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에서 연대 시위가 일어났다. 경제 과도기와 연속적인 민영화 바람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같은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된 이후 가장 먼저 보스니아에서 반민족주의적 사회 저항이 일어났다. “발칸의 봄”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은 듯 하지만 이미 2월에 그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글· 장 아르노 데랑스 Jean-Arnault Dérens
언론인. 저서에 로랑 제슬랭과 공동저술한 <고라니 족이 사는 나라로의 여행>(2010년)이 있다.
번역· 배영미 petite0222@hotmail.com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졸
각주
(1) <An open letter to the International Community in Bosnia and Herzegovina>, Criticatac, 2014년 2월 14일, www.criticatac.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