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는 사진으로 무엇을 말하나

2014-04-01     권정관

 ‘비정상의 정상화’에 대한 반발인가? 기이한 ‘비정상’이 연출되고 있다. ‘다른 길’을 표방한 ‘실패한 혁명가’ 박노해의 사진전이 성황이었다. 27일 간 유료 관람객 3만 5천이라는 보도이다. 사진전으론 극히 이례적이다. 같은 기간 사진 에세이집 <다른 길>도 베스트셀러 상위에 랭크되었다.

 정상/비정상의 클리셰를 위협할 정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패자를 비정상이라며 배제하는, 승자에 대한 감정이입으로서의 정상이 오히려 비정상이기에, 이 비정상을 파괴하고, 배제되어 오던 비정상을 ‘진정한 예외상태(비정상)’로 도래시키자는 벤야민의 역사철학적 알레고리도 음미해 봄직하다. 비정상(예외상태)으로 배제되었던 ‘실패한 혁명’을 “살아 있는 실패”(<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98)로, 혹은 ‘진정한 예외상태’로 도래시키는 것이야말로 박노해가 꿈꾸고 관람객들이 호응하는 ‘다른 길’이 아닐까?

 문제는 혁명가-시인의 ‘다른 길’이 왜 하필 ‘비변증법’적인 사진이냐는 것이다. 박노해의 사진적 전회가 궁금하다.

 실재를 사칭하는 재현으로서의 사진은 이미지의 인정투쟁이 승리를 거둔 종언 매체라 할 만하다. 이는 자본주의의 승리를 역사의 종언으로 간주하는 것과 등가적이다. 자본 지배의 화신인 상품물신은 마술환등에 불과하다는 마르크스식 언명은 자본주의의 사진적 기제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자본과의 인정투쟁에서 패배한 혁명가의 사진이란 어떤 사진이어야 할까. 자본의 승리가 한때의 동지들을 수거해 간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전향과 변절을 통해 자본의 승리에 편승한 자가 아니라면, 그것은 적어도 재현적 사진은 아니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하물며 실패한 혁명을 살아 있는 실패로 전유하고자 하는 자의 사진에 있어서랴. 패배 이후에도 여전히 혁명가를 자임하는 박노해의 <다른 길>이 자본의 의미망에서 “잊혀지고 삭제돼가는” “삶의 터무늬[地文]”를 찍어낸 지표(index, 실재의 흔적이나 자국)로서의 사진인 것은 그 때문이다.
 
  닮음과 상징은 재현 이편의 이미지들이다. 이들은 회화나 조각들에도 있다. 그러나 사진은 재현 이전에 우선 지표이다. 실재와 재현의 간극에 개재하는 사이-존재로서의 지표는 재현 이후에도 재현의 ‘등 뒤’에 들러붙어 온갖 ‘뽀샵’에도 끝내 지양(혹은 분절, aufhebung)되지 않는 실재의 흔적이다. 자본에 영합하는 비변증법적 대중매체로 지탄 받기도 하는 사진이 박노해의 <다른 길>에서 자본의 간교한 종언 테제에 저항하는 ‘끝나지 않는 변증법’으로 작동하는 이유다.
 
 “터무늬 없는”(<그러니>214) 재현적 사진은, 하이데거식으로 말하면, ‘세계 자체가 상(像)’이 되도록 만듦으로써 존재망각을 획책하는 종언 매체다. 스펙타클의 전도된 현실이 그 연장선 상에 있음은 물론이다. “인간들과 그들의 관계들이 사진용 어둠상자에서처럼 뒤집어져서 현상할”(<독일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적 위험을 지적한 마르크스의 맥락에서 보자면, 스펙타클의 전형은 “돈의 민주주의”(164)로 화한 상품물신이다.
 
 화폐와 사진의 이 기막힌 공모성! 상품물신은 이제 디지털 가상현실까지 주조하여 세계를 포획했다. 거꾸로이기는 가상현실 역시 매한가지인데, 현실의 메타코드가 개념인 터에, 가상현실은 역으로 개념(알고리듬)의 메타코드이기 때문이다. 자본은 이제 가상현실의 이 고도화된 추상게임 안에서 자신의 흔적을 완벽히 지워내면서 세계를 마법화하고 있다. 이 ‘터무니없는’ 디지털 가상현실을 정초한 게 바로 ‘터무늬 없는’ 재현적 사진이다.
 
 “나의 시작은 나의 패배였다”(<참된 시작>14)는 자백을 받아낸 자본의 승리가 환각과 마법의 승리에 불과하다면, “나의 패배는 참된 시작이었다”(17)는 어떻게 가능할까? 자본의 헛배만 불려줄 터이므로, “미래의 먹이로 오늘 네 삶을 던져주지 마라”(<그러니>153)는 박노해의 충고는 정당하다. 이는 자본주의 발전론자에게만 타당한 것이 아니다.
 
서구 자본주의의 품 안으로 뛰어든 나머지 역사의 종언에 명분을 준 현실 사회주의자들의 진보적 역사관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유물론자임을 내세우나, 결국엔 현실 저편을 지향하는 목적론자들일 수밖에 없는 그들 역시 오늘의 삶을 미래의 먹이로 던지며 현실을 말소하는 ‘터무니없는’ 관념론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방법은 하나다. “앞선 과거”, 곧 재현의 ‘등 뒤’에 들러붙어 은폐되어 오던 지표를 전위로 내세우기가 그것이다. “승리를 쟁취한 자의 등 뒤에는” “시한폭탄이 장착되어 있습니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등 뒤를 다시 한 번 돌아보십시오”(<사람만이>135)라고 그가 주문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박노해의 신체 연관에서 ‘등 뒤’는 존재 사건이 일어나는 시적 장소이다.
 
탈코드 순간의 비결정 공백
 
필립 뒤봐의 <사진적 행위>에 따르면, 사진에는 ‘찰칵’ 하고 렌즈를 여닫는 간극에 ‘코드를 잃은 한 순간’이 있다. 이 순간 사물로부터 그 재현물로 이행하는 실재성의 전이가 사진적 지표이다. 터 무늬를 기호적으로 ‘뽀샵’한 ‘터무니’가 재현 이편의 언어적 상징이라면 ‘터 무늬’는 실재에서 재현으로의 이행 자체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므로 지표는 실재와 결별하는 재현-이미지와는 다르다. 회화가 그러하거니와, 사진에서도 디카나 ‘뽀샵’에서처럼 대상과의 접촉 없이도 만들어질 수 있는 게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지표는 재현도 실재도 아닌, 실재에서 재현으로의 이행 자체(재현과 실재의 간극에 입지하는 사이-존재)이다.
 
열려 있으라/그것은 쉽습니다/적이 없어지니까요/시장판에서 거침없이 경쟁하면 되니까요 //신념을 지켜라/그것은 쉽습니다/닫히면 단순해지니까요/끼리끼리 옳으면 되니까요//참이 아닙니다/열림도 닫힘도 그 중간도/양극단을 품은 긴장된 떨림이 아니라면/치열한 찢김과 피투성이 떨림이 아니라면//열리면서도 닫힌/닫히면서도 열린/열리면서도 닫힌!
박노해, ‘열리면서도 닫힌’(<사람만이>47)
 
 “눈을 떴다 감는 기술/최근 우리들의 四一九에서 배운 기술”(김수영, ‘사랑의 變奏曲’)이 혁명의 기술이라면, 렌즈를 여닫는 기술에 의해 코드의 간섭 없이 자동생성되는 사진적 지표도 혁명의 기술이다. 열림도 닫힘도 아닌, 안이면서도 밖이고 밖이면서도 안인, ‘안의 바깥’으로서의 지표는 일종의 예외상태이다. 인간의 몸 속으로 파고든 에일리언처럼, 자본주의의 대안(예외적 초월성)으로 외재하던 현실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 잡아먹힌 이른바 ‘역사의 종언’은 가치로서의 사회주의가 자본주의 안에 내재적 초월성(예외상태/안의 바깥)으로 기입되는 사건이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소멸된 게 아니다. 실패한 혁명이 ‘살아 있는 실패(living-dead)’로 내재하며 완전함(역사의 종언)을 가장하는 자본주의적 전체성에 틈을 내는 것, 이것이 박노해식 혁명의 기술이다.
 
 그는 사이-존재로서 제3항적 지표를 삼족오에 빗댄다. “두 발 속에 또 하나의 발이 있어 내일을 여는 겁니다/사람들은 아직도 이렇게 묻습니다/아직 사회주의자입니까?/‘예!’ ‘아니오!”’(<사람만이>111) 긍정도 부정(否定, negative)도 아닌 부정(不定, indefinite).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유령. 고구려의 삼족오를 통해 오늘의 ‘종언 이후’를 열 듯이, <다른 길>은 “앞선 과거”를 통해 “삶의 전위”를 연다. ‘앞선 과거’는 “아직과 이미 사이”(23)에 기입된 비결정 영역이다.
 
 박노해는 아시아 여러 지역에 이미 살고 있지만, “잊혀지고 무시되어” 아직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의 삶을 세계 자본주의 체제 안에 지표하고자 한다. 그것이 “참된 진보”(111)다. 사진 <맨발의 입맞춤>에는 “만족(滿足)이란, 발이 흙 속에 가득히 안기는 것”이라고 캡션을 붙였다. 정보적(informative)이기보다는 다분히 수행적(performative)인 캡션이다. 터무니를 터 무늬로 지표하듯, ‘만족’이란 언어를 아예 사진으로 지표화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오스에서 찍은 <할머니의 목화 실 잣기>에는 “이 땅의 역사와 이야기의 전승자”라는 코멘트가 붙어 있다. ‘할머니’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야기의 전승은 역사의 기록과 대비된다. 전자는 수행적(performative)인 데 반해, 후자는 정보적(informative)이다.
 
사진적 재현의 매개성
 
‘수행’으로서의 박노해의 ‘다른 길’은 실재에서 재현으로의 이행 자체를 뜻하는 사진적 지표이다. 길은 지나감이나 과정 자체이다. 목적과 연루된 길은 엄밀한 의미에서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노해가 혁명가로서의 치열한 자기 성찰과 더불어, 현실 사회주의의 목적론을 비판하는 것은 그들이 자본주의의 발전론과 ‘같은 길’을 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수단 없는 목적성’을 추구하는 ‘관념론자들이다. 그가 ‘길이 끝난 곳에서 새로 열린 길’을 강조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목적으로의 지향이 끊어진 지점에서 새로 열린 길이란 길 자체, 곧 지나감 자체이다. 그 지나감 자체가 ‘다른 길’이다.
 
 지나감 자체인 사진적 지표는 규약된 코드 안의 고정된 의미와 엮여져 있지 않은 탈코드적 이행이다. 의미의 텔로스(telos, 목적)로 귀착되지 않는 이행 혹은 지나감은, 아감벤식으로 말하면, ‘목적 없는 수단’ 혹은 ‘순수 수단’이다. 이 목적 없는 수단이 진정한 유물론이다. 반면에 목적이나 의미와 엮여 있는 재현 혹은 이미지는 수단 없는 목적이 된다. 그 점에서 “길 道는 머리 首를 창으로 꿰들고 열어가는 것”(<그러니>262)이라는 진술은 압권이다. “길을 잃거든 네 빳빳한 목을 쳐라!/ 그러면 평화다”(263)라고 그는 말한다. 뿐인가. 오체투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이미 목적지”(<다른 길>322)이다.
 
 목적 없는 수단은, “정치란 매개성을 드러내보이는 것, 수단 그 자체를 그대로 눈에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아감벤, <목적 없는 수단>127-128) 마찬가지로, 다른 길, 곧 대상과의 물리적 접촉으로서의 사진적 지표는, 상품물신의 스펙타클을 투명한 재현으로 자연화하는 사진의 매개성, 곧 무매개적 투명성을 가장하는 사진적 재현의 매개성을 드러내주려는 박노해식 사진의 정치이다. 그러나 그의 ‘사진’은 저 80년대의 <노동의 새벽>이 이미 외삽하고 있다는 점도 아울러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없어, 선명하게/없어,/노동 속에 문드러져/너와 나 사람마다 다르다는/지문이 나오지 않아/없어, 정형도 이형도 문형도/사라져 버렸어/…/물 건너간 수출품 속에 묻혀/지문도, 청춘도, 존재마저/사라져 버렸나 봐
박노해, ‘지문을 부른다’, <노동의 새벽> 중에서
 
단기간에 압축성장한 한국 산업자본주의가 민주화의 대세를 경제자유화로 전유하며 신자유주의로 이행해 간 과정이 노동배제/자본지배의 과정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금융자본주의와 주주자본주의를 핵심기제로 하는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한국의 재벌들은 오늘날 경제발전에 묻어 있는 노동자의 지문을 깡그리 지워내면서 자신들만의 자본의 왕국을 ‘터무늬 없는 사진적 재현’으로 자명화하고 있다. 자신에게 묻어 있는 노동의 지문을 끊임없이 지워내고자 하는 자본의 사악한 속성이다. 자본의 투명한 사진적 재현에 삶의 터무늬를 찍음으로써 자본의 매개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다른 길>은 노동자의 ‘지문을 부르고 있는’ 30여 년 전의 시와 원격통신하고 있는 사진 에세이집이다. 박노해의 ‘다른 길’은 이미 30여 년 전에 시작되고 있었던 셈이다.
  
글·권정관
문화평론가. 저서에 <지식의 충돌>, 역서에 <불멸의 작가, 위대한 상상력> 등이 있으며, <독학의 존재론-은둔과 유목 사이에서> <진정 조세희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백낙청에게 물어보지 못한 것> 외 다수의 평론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