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 실업청년들의 분노

2014-04-01     피에르 돔

 쓸쓸한 도시, 우아르글라. 영화관 르세드라타의 문은 굳게 닫혀있다. 영화 상영을 중지한 지 이미 20년이 넘었다. 연극이나 공연을 볼 수 있는 극장, 문화센터, 시립도서관, 녹지 등과 같은 시설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 흔한 축구 경기장 하나 없다. 알제나 오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맥주나 값싼 위스키를 파는 노점 따위도 없다. 여기저기 움푹 팬 길, 돌무더기가 되어버린 요새(ksar), 온통 위성 안테나로 뒤덮인 집들이 흉측한 몰골로 늘어서 있을 뿐이다. 인터넷 카페에 가면 그나마 사람 사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할 일 없는 젊은이들의 유일한 안식처이다. 오래된 보수 여당인 민족해방전선(FLN)도 지부 건물에 카페를 하나 열었다.

 인구 20만의 우아르글라는 알제에서 남쪽으로 800km 가량 떨어진, 광대한 면적의 우아르글라 주의 주도이다. 이 도시는 언제부터 중앙정부의 눈 밖에 났을까? 분명 오래 전부터일 것이다. 주요 도로와 인접한 길 일부만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다. 그마저도 곳곳이 갈라져 있다. 나머지 길들은 흙먼지로 자욱하고, 심지어 땅이 내려앉은 곳도 많다. “우리더러 이곳에서 이렇게 썩으라는 거다. 바로 근처에서 솟아나오는 석유로 수십억을 벌어들이면서!” 마브룩이 분을 삭이며 말한다. 검은 피부의 남부 출신인 29세의 이 젊은이는 지금껏 “한 번도 일해 본 적이 없다”며 안정적으로 정해진 직장을 다녀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간단한 기술자 양성과정을 이수한 후에 결혼했다. 두 사람은 현재 마브룩의 부모 집에서 살고 있다. “당신 아내는 어떤 일을 하느냐”고 묻자, “안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물러서지 않고 “그럼 일을 찾고는 있느냐?”고 질문을 던졌다. 마브룩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찾지 않는다. 내가 일을 하지 않으면 아내도 일을 하지 않는다. 여자만 일을 하면 남편 체면이 깎인다”고 얼버무렸다. 마브룩은 부모님의 도움과 매달 며칠 정도 일해서 번 돈으로 생활한다. 공사장에서도 일하고 시장에서 물건을 팔기도 한다. 한나절 일하면 500디나르(약 7,500원) 정도를 손에 쥘 수 있다.(1)
 
 금요일을 제외한 매일 아침, 마브룩, 오마르, 타하르, 압델말렉, 타렉, 칼레드, 함자는 다른 10여 명의 친구들과 함께 문 닫은 극장 건너편 카페테리아 세드라타의 플라스틱 테이블에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몇 시간이고 얘기를 나눈다. 그들 중 직장에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 고등학교를 중도 하차했다. 그들이 꿈꾸는 건 오직 하나다. 우아르글라에서 80km 떨어진 하시메사우드의 대규모 유전 시설에서 국영기업 소속 정규직으로 일하는 것.(2) 하시메사우드는 알제리 제1의 유전으로 전체 석유 매장량의 71%를 차지하고 있다. 하루 생산량만 40만 배럴에 달하며, 1년으로 환산하면 160억 달러의 수입을 벌어들이고 있다.(3)
 
 “외국 회사에서는 일하고 싶지 않다.” 오마르가 말을 잇는다. “월급도 적게 주고, 3개월, 6개월, 3년 등 내키는 대로 일을 시키고 쫓아낸다. 어떤 보상도 실업 급여도 없다.” 사막에 사는 이들에게 80km는 어느 정도의 거리일까? 한 차례 모래 바람이 불어온다. 철저한 보안 속에 외국인 출입이 금지된 단지 내에서 일을 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은 그들도 잘 안다. 섭씨 50도를 오르내리는 속에서 하루 12시간을 일해야 한다. 대신 보수는 상당히 좋다. “파이프라인 용접 일을 하면 8백만 상팀은 쉽게 벌 수 있다!” 칼레드가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8백만 상팀, 즉 8만 디나르면 한화로 한달 120만 원 정도다. “내가 아는 어떤 기술자 보조는 1200만 상팀(약180만 원)을 번다!” 함자는 하시메사우드에서 3년 동안 한 하청 회사에서 제빵사로 일했다면서 “3백만 상팀(45만원) 정도 받았는데, 보수가 너무 적어서 일을 그만 뒀다”고 말했다.
 
실업청년들 '분노의 날' 행진
 
마브룩, 칼레드, 함자와 다른 친구들은 알제리의 정치인들과 언론이 매일 같이 떠들어대는 수백만 청년 실업자 문제의 당사자들이다. 알제리 전체 인구 3,800만 명 중에서 30세 미만은 57%에 달한다(프랑스는 36%). 알제리 국립통계청(ONS) 자료에 따르면, 알제리의 실업자 수는 120만 명이며 그 중 70%가 30세 미만이다. 알제리 공식 실업률은 프랑스와 비슷한 9.8%다. 이상하리만치 낮은 수치다. 비고용 현실의 중요한 부분이 통계에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제리 여성의 83%(프랑스는 34%)는 공식적으로 구직 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통계상에 실업자로 분류되지 않는다.
 
 학생들도 실업자수 통계에 포함되지 않는다. 최근 10년 간 교육의 질은 고려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대학을 신설한 덕분에 학생 수가 급증했다(약 1,500만 명). 정부는 적당히 학업을 마치고 졸업한 후 취직에 어려움을 겪는 젊은이들을 위해 1998년부터 ‘예비고용’ 시스템을 도입했다. 시청과 주정부 등 모든 공공기관들은 그들에게 의무적으로 무슨 일이든 시키고 국가 예산으로 매달 15,000디나르(약22만5,000원)의 급여를 지불해야 한다. 무라드가 설명한다. “시청에 아는 사람이 있다. 오전에 출근해서 한 시간쯤 앉아 있다가 나온다. 어차피 할 일도 없다. 월말이 되면 15,000디나르를 받는다. 나이는 스물여덟이다. 부모님 집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생활비가 거의 들지 않는다.” 알제리의 실업자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싶다면 우선 실제로 직장을 다니는 사람 수를 계산해볼 필요가 있다. 그 수는 108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28%(프랑스는 40%)에 해당한다. 하지만 ‘예비고용’ 단계에 있는 젊은이들의 수를 제외하면 그 비율은 25%까지 떨어진다.
 
 2011년 2월 ‘아랍의 봄’이 한창일 때, 마브룩과 친구들은 실업자 운동을 조직했다. ‘시스템’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 최초의 운동이었다. 이름 하여 실업자 권리수호 전국연합(CNDDC)이다. 타하르가 오랫동안 대변인 노릇을 했고, 압델카데르가 회장을 맡았다.(4) 그들에게 2013년 3월 14일은 영광의 날로 기억된다. 수천 명의 시위대(주최 측 추산 1만 여명)가 주청사 앞에 운집했다. 즉각적으로 의원들과 지역 유지들이 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나섰다. 그들은 이 젊은이들이 외국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부화뇌동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2013년 9월 28일, CNDDC가 다시 ‘분노의 날’을 조직했을 때 거리로 나온 인원은 몇 백 명에 불과했다. 헬멧과 곤봉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아르글라 주지사 알리 부게라는 언론을 통해 시위대에게 다음과 같이 고했다. “우아르글라 주의 젊은이들은 내 자식이나 마찬가지다. (중략) 실업자들은 도시의 이미지를 바꾸게 될 거대 프로젝트를 통해서 해결책을 찾게 될 것이다.”(5) 타하르의 반응은 어땠을까? “마치 아버지라도 되는 양 구는 게 지겹다. 무의미한 약속만 남발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국부의 공정한 분배다. 그리고 우아르글라 주민을 우선적으로 고용하도록 정한 법을 준수하기를 원한다.”
 
청년 고용에 무관심한 정부
 
 2004년부터 각 기업은 신규 고용 시 우선 국립고용청(ANEM)을 통해야 한다. 고용 기준에 적합한 현지 구직자가 있을 경우 우선 채용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우아르글라 주 고용청의 한 직원은 상사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 “하시메사우드 유전에서 높은 보수를 받고 일하고 싶은 북부의 실업자들이 대거 우아르글라 주로 허위 전입신고를 한다. 심지어 기업들이 우리를 통하지 않고 직접 북부 출신들을 고용해도 별 제재를 받지 않는다”고 털어 놓았다.
 
 사정이 이러하니 어떻게 국가 기관에 신뢰를 보낼 수 있을까? 거의 방치 상태에 있는 우아르글라 고용청을 한 번 둘러본 것만으로도 정부가 얼마나 시민들에 대해 무관심한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 결과로, 모든 알제리 사람들은 법은 아무 쓸모가 없으며 모든 것이 연줄(maârifa)에 달려있다고 믿는다. 대학 교정에서 만난 석유화학 전공 학생 파리드가 심드렁하게 말한다. “우아르글라로 주소를 옮기고 싶은가? 하시메사우드에 일자리를 얻고 싶은가? 국가로부터 대출을 받았는데 갚을 수가 없다.(6) 전혀 문제 될 것 없다! 연줄만 있으면 뭐든지 가능하다!” 옆에 있던 다른 학생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예들을 제시한다. ONS가 최근 실시한 고용 조사 결과에 따르면, “실업자들 중 73.8%가 일자리를 찾기 위해 개인적인 인간관계를 동원했다.”
 
 중요한 문제가 하나 더 있다. 교육 문제이다. 수십 년 전부터 석유산업 관련 기술교육기관은 대부분 부메르데스, 스킥다, 오랑 등 북부 도시에 집중되어 있다. 남부 사람들이 북부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한다고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런 차별은 피부색 차이와 역사와 관련이 있다. - 알제리 흑인들은 매우 심각한 인종차별을 받는다. 독립전쟁 기간 동안 ‘진정한 민족주의자’ 노릇을 하지 않았다는 의심에 항상 시달려온 남부 사람들은 독립 50주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도록 강요받는다.
 
 알제리 국영 석유회사 소나트라크는 1년 전 하시메사우드에 용접과 시추 관련 기술자 양성기관 두 곳을 신설했다. 수용 가능 인원은 190명. 이것만으로는 역부족이다. 결국 정부가 남부 젊은이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시행한 사업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여러 도시에 경찰학교를 신설하기로 한 계획이다. 2013년 4월 우아르글라 대학에서 ‘지역 고용, 구체적 현실’이라는 표어 아래 개최된 컨퍼런스에 참석한 국가안보총국(DGSN) 인력자원부 책임자 모하메드 브네르는 “매년 16,000 명을 신규 고용하겠다”고 선언했다.(7) 타렉이 분통을 터뜨린다. “일자리를 찾는 우리에게 고작 한다는 말이 경찰관이 되라는 건가! 어이가 없다!”
 
 카페 세드라타의 아침 회합에 여성이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없다. 이 도시의 어떤 카페를 둘러봐도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여성은 눈에 띠지 않는다. 우아르글라는 다른 곳보다 더 남성 중심적인 도시다. 압델말렉이 설명한다. “여자 친구가 내 활동을 지지하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카페에 우리와 함께 앉아있는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다. 모든 친구들이 그녀를 쳐다볼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눈빛으로.” 투픽이 거들고 나선다. “상관없다. 우리가 여자 친구를 대변하면 되니까.” 대화가 뜸해지자 하나둘 담배를 꺼내 피워 문다. 하루에 두 갑을 피운단다. 한 달에 담뱃값으로 최소 4천 디나르(약 6만 원)를 쓴다는 말이다. “실업자에게는 사실 큰돈이다!” 압델말렉이 겸연쩍게 웃었다.
 
글·피에르 돔 Pierre Daum
 
번역·정기헌
 
(1) 알제리 법정 최저임금은 월 18,000 디나르(공식 환율 기준 약 27만 원), 일 720 디나르(약 10,800 원)다. 급여 중앙값은 3만 디나르(약 45만 원)다. 대학 교수는 월급으로 약 8만 디나르(약 120만 원)를 받는다.
(2) Ghania Mouffok, ‘사하라 여성노동자들, 가난한 남성의 표적이 되다(Femmes émancipées dans le piège de Hassi Messaoud)’,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6월호[한국어판 8월호]
(3) 알제리의 석유 일일 총생산량은 160만 배럴로, 세계 17위 산유국이다. 국가 예산 수입의 70%, 수출의 97%를 석유 생산에 의존한다.(출처: OPEC, BP Statistics)
(4) Adlène Meddi & Mélanie Matarèse, ‘Chômeurs: le régime fantasme sur un scénario à la arouch(실업자 문제: 아루크 식 시나리오에 환상을 품는 체제)’, <El Watan Week-end>, 알제, 2013년 3월 22일.
(5) <El Watan Week-end>, 2013년 9월 27일.
(6) 1998년부터 정부는 창업 계획이 있는 실업자들에게 5만 유로를 대출해주는 제도를 시행 중이다.
(7) <Liberté>, 알제, 2013년 4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