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르본대 철학교수, 왜 레지스탕스가 되었나

2014-04-28     에티엔 클라인<에너지 학자>

그냥 보면 정수가 짝수보다 더 많은 것 같고, 이는 명명백백해 보인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정수 두 개 중 하나는 2의 배수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같은 명명백백함엔 오류가 있다. 왜냐고? 왜냐하면 모든 정수와 모든 짝수 간에 완전한 논리적 대응을 만들기가 쉽기 때문이다. 각 정수에 그 배수를 대응해보면 된다. 1과 2, 2와 4, 3과 6……. 이로써 실제로는 정수와 배수의 개수가 같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수는 무한하다. 이를 ‘가산 무한(countable infinite)’이라고 한다. 가산 무한은 일종의 무한한 원자다. 우리의 잠들어 있는 상상력을 일깨우는.

이 놀라운 결과(집합의 일부가 집합만큼 클 수 있다)는 그럴듯함이 진실에 부합하지 않으며, 언제나 좋은 징표는 아니라는 점을 알려준다. 매우 놀라운 발견이라 이를 발견한 사람조차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이는 바로 ‘무한’ 개념을 명확히 하고자 했던 19세기 수학자 게오르크 칸토어의 경험담이다. 그때까지 ‘무한’은 수학에서 부정적 형태로만 나타나고 있었다. 무한은 ‘끝나지 않음’에 지나지 않았는데, 정확한 정의는 아니었다. 연구를 하던 중 칸토어는 정사각형의 세로 선분보다 정사각형에 더 많은 점이 있다는 것이 사실인지 의문이 생겼다. 그런데 그에 대한 답은 점의 개수가 정확히 같다는 것.

이 같은 결론으로 인해 그는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왜냐하면 이 결론은 그의 사고를 넘어서면서 가장 확실한 생각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칸토어는 세로 선분이 정사각형에 속하므로 정사각형에 더 많은 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이 발견으로 혼란에 빠진 칸토어는, 본능은 이 발견을 거부했지만 이성은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증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1877년 6월29일 동료 수학자 리하르트 데데킨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당혹스러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보고는 있지만 믿지는 않는다….”(1)

칸토어의 수학에서의 무한에 관한 연구, 그리고 이 연구가 야기한 고통은 오늘날 다시 생각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70여 년 전인 1944년 2월 17일 열정을 다해 이에 대한 연구를 했던 한 남자가 아라스 요새에서 독일군에 의해 총살당했기 때문이다. 그때 막 40세가 된 장 카바이에스는 뛰어난 철학자-논리학자였으며, 무모한 레지스탕스 투사로 레지스탕스 조직의 수장이기도 했다. 그는 맨손으로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파리 고등사범학교(ENS)를 수석 졸업한 카바이에스는 교각, 변압기, 기차, 공장을 폭발했다. 장-피에르 멜빌의 레지스탕스 영화 <그림자 군단>(1969)에서 폴 뫼리스가 맡았던 배역의 실제 인물이다. 카바이에스를 매우 잘 알고 있던 인식론자, 조르주 캉길렘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폭약을 휴대한 수리철학자’였다.

 수학적 사유로 레지스탕스 선택

  여기서 ‘폭약’은 본래의 의미뿐만 아니라 비유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사상이 급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철학의 임무는 경험했거나 심사숙고한 양심의 우월성을 개념의 우월성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생의 철학과 개념의 철학 중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가 프랑스 철학계의 중심 화두였다.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육체이면서 개념의 창조자인 주체가 이 두 가지 방향의 철학에 모두 관여하기 때문에 카바이에스는 주체의 문제를 다루는 길을 열고자 했다. 그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삶, 주관적인 삶, 유기적인 삶, 또 한편으로는 사고(思考), 창조적 능력, 추상적 능력에 대해 자문했다. 따라서 앙리 베르그송, 레옹 브렁슈빅과 같은 상징적인 철학자들이 주름잡던 프랑스에서 육체와 사고, 생명과 개념 간의 관계가 철학의 미래에 대립과 갈등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은 전혀 놀랍지 않다.

이처럼 카바이에스는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철학에 있어서도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했다. 그는 철학은 과학과도 이성과도 유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철학은 절대적으로 증거의 쇠락을 거부하고 엄정성의 산물이 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문학보다는 수학에 더 가깝다. 철학적으로 탐구한다는 것은 입증하는 것이지 자신의 주관성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다. 지성의 정신상태를 솔직히 보여주기보다는 오히려 개념의 문제인 것이다. 진실에 대한 추구는 결국 약간의 망각을 전제로 한다.

1903년 5월 15일 프랑스 남서부 위그노(프랑스 칼뱅파 신교도-역주) 집안에서 장교의 아들로 태어난 카바이에스는 애국주의와 엄격한 신교 가치 속에 성장했다. 홀로 공부했음에도 그는 1923년 파리 고등사범학교 입학자격시험을 통과했다. 수학 디플롬을 받은 뒤 1927년 철학교수 자격도 취득했다. 그 이듬해 세네갈 부대에서 소위로 병역을 마친 후 여러 번에 걸쳐 독일에 머무르면서 나치 정권의 세력 확대를 관찰하고 분석했다. 독일의 위대한 여류 수학자, 에미 뇌터와의 협업으로 리하르트 데데킨드와 게오르크 칸토어가 주고받은 서신을 수록한 책을 출간했다. 그 일부가 위에 서술되었다. 1931년 노년의 에드문트 후설을 만났고, 독일 철학계의 신성 마르틴 하이데거의 강연을 참관했다.

1937년 소르본느 대학교에서 레옹 브렁스빅의 지도 아래 ‘공리적 방법 및 형식주의’ 및 ‘추상적 집합론의 형성에 대한 고찰’이라는 두 개의 논문에 대한 공개심사를 받고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의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부르바키(2)가 새로운 수학적 사유방식을 고안하기 시작했을 때 카바이에스는 대략적인 추산을 일삼는 수리철학을 뿌리 뽑고자 하는 야망을 불태우고 있었다.

1939년 9월 입대해 용맹을 떨치다가 1940년 6월 11일 벨기에에서 붙잡혀 포로가 되었지만, 프랑스 클레르몽 페랑으로 도망쳐 전쟁 중 그곳으로 자리를 옮긴 스트라스부르 대학교로 갔다. 그러자 대학교의 한 고위관계자는 이렇게 외쳤다. “하지만, 카바이에스. 이건 탈영이잖소!” 포로라는 사실을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군인의 의무이거나 도덕적 명령인 것처럼 말이다. 카바이에스는 교수로서 가르치는 동시에 루시 오브락, 엠마뉘엘 다스티에 드 라 비주리와 함께 리베라시옹 쉬드라는 레지스탕스 단체를 조직했다. 카바이에스는 카리스마로 조직원을 결집했다. 그는 또한 리베라시옹 신문 창간에도 기여했다. 1941년 소르본느 대학교의 과학철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리베라시옹 노르라는 레지스탕스 단체에서 활동했다. 이후 1942년 거기서 나와 교육단체인 코오르를 창설했다.

그와 함께 활동했던 레지스탕스 동료들은 카바이에스는 한 정당이나 정치적 노선에 대한 충성심이 아닌 ‘논리에 의해’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카바이에스는 주체는 자신이 마주한 필연성에 대해 별로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것에 대한 투쟁은 불가피하며 따라서 필연적인 것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그리고 ‘투쟁’이란 복도에서 분노를 속삭이거나 복수심으로 가득한 편지로 우편함을 채우는 것이 아닌, 손에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이다.

  게슈타포에 당당히 맞선 무명 죄수 5호

  여러 번에 걸쳐 독일군에 잡혀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쳤으나 마지막에는 그렇지 못했다. 카바이에스는 가장 파괴적인 행동과 가장 추상적인 고찰, 어느 것 하나 포기하지 않았다. 그에게 이 두 가지는 대등하게 함께 가는 것이다. 성찰에서 행동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성찰을 앞선다. 사유는 개념의 표현이 아니라 개념의 과정, 연속이다. 1942년, 카바이에스는 외로운 감옥에서 <과학의 논리와 이론에 관하여>(3)라는 놀라운 저서를 집필했다. 종전 후 출간된 이 책은 철학계를 뒤흔들었다.

억압에 대한 증오로 더욱 대담해진 그는 온갖 위험을 감수했다. 1943년 게슈타포에 체포된 카바이에스는 고문 끝에 사형 선고를 받고 5개월 후인 1944년 2월 처형됐다. 재판관들이 레지스탕스 활동 동기에 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의 아버지는 장교 출신으로 아버지로부터 애국심을 배웠다. 그리고 계속된 저항운동을 통해 패배의 고통이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또한 내가 칸트와 베토벤의 나라인 독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살아오면서 이 같은 독일의 대가들의 사상을 실천해왔다는 것을 나의 이야기를 통해 입증할 것이다.”(4) 카바이에스의 철학적 기준들이 가장 직접적인 경로로, 그리고 최소한의 고통도 없이 그를 이끈 결론과 그의 출신, 교육, 투사의 기질이 그에게 부여한 결론은 동일하다. 그는 모욕과 억압을 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지하감옥에서 카바이에스의 사체를 발견한 이들에게 그는 단지 ‘무명 죄수 5호’일 뿐이다. 아마도 ‘무명(수학에서는 ‘미지수’를 뜻함(inconnu라는 프랑스어는 ‘무명, 신원미상’이라는 뜻. 수학에서는 여성명사 inconnue가 미지수를 뜻함-역주)’이라 불린 사실이 그에게 있어 영광스러운 칭호이자 가장 아름다운 묘비명이라는 점을 간수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르주 캉길렘이 쓴 비문은 거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일반적으로 철학자에게 있어 윤리학을 집대성한다는 것은 침대에서 편안히 죽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카바이에스는 전투에서 죽고자 할 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함으로써 논리학을 집대성했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윤리학을 자연스럽게 일구어냈다.”(5)

이 같은 위대한 인물에게 있어 깊이 있는 철학자로서의 업적과 숭고한 투사로서의 업적을 분리하고자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바로 이 경우에 그가 이룬 업적은 그라는 인간 그 자체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의 업적을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도 있다. 카바이에스는 혼란스러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한을 숭배하는 자의 이름으로 있는 힘을 다해 그가 부르짖은 실천적인 의무에 걸맞은 반열에 올랐다.

 (1) <수학 철학>에 실린 칸토어와 데데킨트가 주고 받은 서신의 서문에 카바이에스가 언급했다. Hermann, Paris, 1962년

(2) 1935년 프랑스 수학자들이 니콜라 부르바키라는 가명으로 비밀 단체를 조직, 새로운 수학교육을 지향하며 펴낸 세미나 노트가 현재 40여 권에 이른다.

(3) 카바이에스, <과학의 논리와 이론에 대하여>, Vrin, Paris, 1997년(초판 1947년)

(4) 카바이에스의 누이가 전한 말 (<장 카바이에스> Gabrielle Ferrieres, Seuil, Paris, 1982년)

(5) 조르주 캉길렘, <장 카바이에스의 삶과 죽음>, Allia, Paris, 1996년

  글·에티엔 클라인 Etienne Klein

원자력에너지 및 대체에너지 위원회(CEA) 연구팀장. 저서로 <마조라나(Majorana)를 찾아서. 절대적 물리학자>(2013) 등이 있다.

  번역·조승아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