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릴 로시] 앵글로 색슨법이 대륙법을 밀어낸다면

국제형사재판소의 두가지 대립 모델

2014-04-28     시릴 로시<국제형사재판소 법률자문위원>

국제형사재판소에 회부된 21개의 사건 대부분이 프랑스어권 국가들과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ICC 내부 규정과는 반대로 재판에서 영어 사용이 점점 더 일반화되고 있고 그 결과 영미법 (관습법)의 중요성 역시 함께 커지고 있다.

국제형사재판소 설립을 위한 로마규정(Rome Statute of the International Criminal Court)에 의거해 2002년 창설된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집단학살, 반인도적 범죄, 전쟁 범죄를 다루는 유일한 상설 재판소이다. 현재 콩고민주공화국, 우간다,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수단, 케냐, 리비아, 코트디부아르, 말리 8개 국가가 관련된 21개 사건에 대한 조사가 개시되어 있고 2012년 첫 판결이 내려졌다.(1)

ICC의 재판절차는 영국과 미국에서 채택하고 있는 영미법계(관습법)와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대륙에서 채택하고 있는 대륙법계(로마법)의 혼용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영미법계의 당사자주의(Adversarial system, 소송의 주도권을 당사자가 가지고 원고와 피고가 서로 대립하여 공격, 방어하는 재판형식)의 주요 특징인 판사가 아닌 대립 당사자들의 증거제시, 구두증거 채택, 반대심문과 같은 규정과 대륙법에 기초한 규문주의(Inquisitorial system, 법원이 스스로 절차를 개시하여 심리, 재판하는 형식)의 특징인 피해자의 재판참여, 공판준비절차 등의 규정을 조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영미법계의 규정이 재판에서 지배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유는 ICC의 선구자격이며 로마규정 협상의 기초가 되었던 유고 국제전범재판소(ICTY, 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the Former Yugoslavia),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ICTR)와 같은 국제형사재판소의 관례 때문이다. 여기에 재판에서 영어가 우선적으로 사용된다는 점도 불균형 심화에 한몫을 하고 있다. ICC에 회부되어 있는 사건 대부분이 프랑스어권 국가와 관련되어 있고 프랑스어도 ICC의 공식 언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합리적이지 못한 현상인 것은 분명하다.

판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것을 비롯해 국제형사재판소의 재판절차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이를 보면 현 재판절차가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대륙법계 규정에 좀 더 힘을 실어준다면 재판절차가 개선될 수 있을까?

대륙법계 재판절차의 가장 큰 장점은 영미법계와는 달리 진실을 찾고 구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반론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의 주장은 이렇다. 영미법계에서는 오로지 대립 당사자들이 제시한 증거만을 근거로 판결을 내린다. 검사가 증거를 수집해 제시하면 변호인 측은 이에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검사가 혐의를 뒷받침할 만한 충분한 증거를 찾지 못하면 해당 혐의는 배제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내려진 판결은 당연히 상대적인 사법적 진실일 수밖에 없고 당사자들이 제출한 증거에 따라 재판마다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2005년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의 두 명의 판사가 몇 주 간격으로 내린 두 개의 판결 결과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ICC는 1994년 4월 14일과 17일 르완다 무부가 교회에서 자행되었던 민간인 학살에 관련된 두 명의 피고인에게 판결을 내렸다. 2005년 3월 14일에 내려진 첫 번째 판결에서는 피고인 뱅상 루타가니라와 유죄협상(피고가 혐의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검찰이 가벼운 죄로 기소하거나 형량을 낮추는 제도)을 통해 피고가 범죄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4월 28일 같은 혐의로 기소된 미카엘리 무히마나에 대한 판결문에는 반대로 루타가니라가 적극적으로 학살에 참여했다고 적혀 있다. 한 사건에 두 가지 사법적 진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적인 진실은 무엇이란 말인가?

만약 대륙법계 재판절차를 따랐다면 두 판결이 더 근접한 결과를 낼 수 있었을까? 대립 당사자들의 전략과는 상관없이 한 명의 판사가 직접 두 사건의 증거를 수집해서 심리를 했다면 실수의 가능성을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다른 예는 ICC에 직접 관련된 것으로 재판소는 2012년 12월 18일 전 콩고민병대 마티유 엔구졸로 추이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판결문에 “유죄가 아니라고 판결을 했다고 해서 재판정이 피고인이 무죄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명시했다.

대륙법계의 두 번째 특징은 형사소송에서 피해자가 차지하는 위치다. 영미법계에서는 피해자는 증인으로서만 재판에 참여할 수 있을 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없고 만약 배상을 받고 싶으면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길밖에 없다. ICC는 피해자의 참여(68-3조), 재판소의 배상 권한 부여(75조), 이를 위한 기금 조성(79조) 등 새로운 규정을 도입해 쇄신을 꾀하고 있지만 피해자의 재판 참여에 대한 구체적인 방식은 아직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영미법계의 재판관들이 피해자의 역할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조치로 인해 재판이 지체되고 재판소 업무에 과부하가 걸릴 소지가 있다.

대륙법의 세 번째 특징은 영미법에서는 낯선 이전 판결 즉 판례를 성문화해서 주로 판례에 근거해 판결을 내리는 것이다. 판례를 성문화하면 달라지는 것은 무엇인가? 매년 재발행되는 형사법과 형사소송법을 통해 물론 완벽하지는 않지만 법의 현 상황과 그에 대한 해석을 총체적으로 접할 수 있다. 관습법을 채택하고 있는 국가에서는 법률정보가 한 곳에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정보를 찾기 위해서는 대형 법률회사에서나 가능한 막대한 재원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법의 가치는 법이 민주적인 도구인지 아닌지로도 평가받을 수 있다. 게다가 기술의 발달로 지금은 종이에 인쇄된 법전 말고도 디지털 기술을 통해 법률 조회가 가능한 시대다.

하지만 대륙법계 전통의 결여로 판례를 디지털화한 국제형사재판소는 아직 없다. 현재는 단순한 메타데이터(속성정보)를 조작해 기존 데이터베이스에서 키워드, 날짜, 소송명 등으로 검색할 수 있을 뿐이고 분석 작업은 불가능한 실정이다. 몇 년 전부터 국제형사재판소법 해설서가 발행되고 있다.(2) 이러한 움직임은 장기적으로 대륙법의 중요한 가치 중의 하나인 판례 성문화에 기여할 것이고 프랑스어권 시민들이 국제형사재판소법에 좀 더 손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륙법계 재판관들에게는 국제형사재판에서 대륙법 규정을 적용할 수 있는 방식을 모색하고 대륙법의 장점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글·시릴 로씨 Cyril Laucci

 번역·임명주 myjooim@gmail.com

 (1) 국제형사재판소는 2012년 7월 10일 전 콩고민주공화국 민병대 지도자 토마스 루방가에게 소년병 강제징집죄로 14년 형을 선고했다.

(2) <Code annoté de la Cour pénale internationale>(국제형사재판소법 해설), Brill, 레이덴(네덜란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