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세계, 마르크스, 그리고 사회주의

2014-04-28     알렝 그레쉬<르몽드 디플로마티크>기자

 막심 로댕송은 마호메트의 전기(1)를 포함해 이슬람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한 저명한 동양학자이다. 1966년 첫 출간된 그의 저서 <이슬람과 자본주의>(2)가 얼마 전 재출간되었다. 이 책은 이슬람교, 경제발전 그리고 자본주의 사이의 관계를 다루면서 오늘날 시사성이 강한 여러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이슬람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뒤쳐져’ 있거나 ‘후진국’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슬람교가 사회정책이나 나아가 사회주의를 채택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닌가?

로댕송은 이들 국가에는 서구사회의 규범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고유의 규범이 있고, ‘복잡한 아랍국들’은 코란의 말씀을 잘 해석하는 것을 통해 발전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그는 사회과학적 분석과 교조적이지 않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길잡이 삼아 질문에 대한 답을 시도했다. 여기 재출간된 <이슬람과 자본주의>의 서문 일부를 싣는다.

  막심 로댕송은 <이슬람과 자본주의>에서 이슬람교와 자본주의의 관계뿐만 아니라 이슬람교와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분석했다. 이슬람교는 부의 분배에 우호적인가? 이 질문은 유토피아적 혁명은 말할 것도 없고 혁명 가능성 자체가 희박하고 급진적 사회 정책을 실현하려는 어떠한 야심도 이슬람교에 없는 만큼 꽤 기괴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처음 출간될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는 1967년 6월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의 아랍 민족주의가 최고조에 달했던 때였다. 나세르주의, 바트주의(단일 아랍사회주의 국가건설을 기초로 세워진 바트당의 이념), 아랍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다소 급진적인 좌파 이념이 아랍세계를 주도하고 있었다.
 
군 장교, 지식인, 언론인, 공무원, 도시 중산층은 해석의 차이로 서로 싸우고 나아가 죽이는 일까지 있었지만 모두 좌파이념을 표방했었다. 이집트, 알제리, 시리아, 이라크, 남예멘에 변혁이 시작되었고 이들 국가의 왕정은 혁명의 물결에 사라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이들 국가는 전제정치에 더해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단죄되었다. 국가독립을 확고히 하겠다는 의지와 사회 변혁으로 외세 지배의 시대를 종식시키겠다는 의지를 결합시켜 국가를 통치했다. 농지개혁을 실시했고 국가주도 경제발전 특히 중공업 발전에 전력을 다했다. 그리고 부의 재분배, 평등 교육, 모두를 위한 건강 정책을 과감히 실시했다. 한마디로 당시 제3세계 국가의 하늘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던 혁명의 시대였다. 라틴아메리카의 쿠바혁명군에서부터 인도차이나의 ‘해방지역’, 남부 아프리카의 게릴라까지 혁명군은 사회주의, 나아가 공산주의의 밝은 미래를 약속했다.
 
아랍국가 국민들은 대부분 종교적 믿음이 강하고 농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이들에게 혁명이념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종교를 이용해야 했다. 로댕송이 지적한 것처럼, 민족주의적인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대중이 종교에 대해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이슬람교의 계율과 종교의 권위를 비이슬람적인 사회주의 정책을 가리는 깃발로 이용해서 대중선동을 할 수 있다.
 
사회주의가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그때에는 혁명에 대한 야심이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조직들조차 ‘이슬람 사회주의’를 표방해야 했었다.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시리아 무슬림형제단의 지도자인 무스타파 알 시바이가 쓴 <이슬람 사회주의>를 보면 “신께서 모든 형태의 협력과 연대를 명령했다. (…) 예언자께서는 완벽한 의미의 사회연대 제도를 확립하셨다”라고 쓰고 있다. 그리고 휴머니즘과 도덕에 기반한 이슬람 사회주의의 사회연대 원칙은 오늘날 존재하는 다른 사회주의와 확실히 구분된다. “이슬람 사회주의가 실현되면 우리는 이상사회를 건설하게 될 것이고 어떤 사회주의도 이슬람 사회주의의 고귀함에 근접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상 사회에 도달할 것인지, 그리고 왜 사회연대 원칙이 실천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알 시바이의 논지는 로댕송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몇몇 이슬람 분파에서는 부의 축적을 제한하는 형태로 소유권을 철저히 제약하는 것을 계획하기도 했었다. 이 계획의 근거는 “이 세상의 재산은 우리를 신으로부터 멀게 하고 죄에 이르게 한다”와 같은 여러 코란 구절에서 찾은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자들도 반동세력들과 같은 방식으로 종교를 이용할 수 있다는 말인가? 로댕송은 아니라고 말한다. “반동적인 해석은 과거의 유산, 보수적인 계율 해석, 그리고 이러한 해석이 갖는 힘에서 이득을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혀 종교와 상관없는 일에도 종교를 내세우는 것이다.” 여기에 종교지도자들의 보수성도 빠트릴 수 없는데 사우디아라비아의 영향력이 커지고 이슬람교의 와하비즘화가 확산되면서 더욱 이슬람교가 더욱 보수화되고 있다.
 
사우디는 무엇보다 그 어느 나라보다도 계율을 반동적으로 해석하고 있고 수십억 달러의 오일머니를 써서 수만 명의 설교자들을 전 세계로 내보내 특히 여성에 대하여 시대역행적인 규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친서방정책이 뒤섞인 완고한 시각을 심어놓았다. 1960년대 나세르주의에 대한 공격 그리고 1980년대 아프카니스탄 반군 게릴라 단체인 무자헤딘 지원 등이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몇몇 이슬람 분파들 사이에 있었던 전략적인 제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로댕송은 “이슬람 세계는 역사를 통해 배운 것 때문에 오늘날 경제발전을 위해 대중을 움직일 수 있는 요소가 이슬람교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고 게다가 경제발전은 필연적으로 기존 체제를 변화시키고 파괴하기 때문에 더더욱 보려 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1) Maxime Rodinson, <마호메트>, 파리, 2010년(초판 1961년)
(2) Maxime Rodinson, <이슬람과 자본주의>, 파리, 2014년
 
글·알렝 그레쉬 Alain Gresh
언론인. 블로그 ‘누벨 도리앙(Nouvelles d'Orient)’ 운영자
 
번역·임명주 myjooi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