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뉴딜' 그 불편한 진실
진정한 녹색뉴딜은 신자유주의를 극복해야
성장 위주 케인스주의와 전혀 다른길 가야
인간과 자연 공존 위한 '사유의 혁명' 필요
‘녹색’이라는 이름이 현 경제위기를 과연 해결해줄 수 있을까? 금융계에서 시작된 ‘대혼란’이 경제침체로 이어지면서 각국의 사회 전체, 특히 저개발국에 비극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급해진 각국 지도자들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 은행에 대한 구제금융, 자동차 산업 구제조치, 대규모 토목공사 등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미 새로운 뉴딜의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경제·사회 정책을 일컬었던 뉴딜은 이제 세계 각국의 경제 부흥 정책의 핵심적 개념으로 굳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이같은 뉴딜 유행의 바람을 타고, ‘녹색’이라는 수식어가 그 앞에 붙여졌다. ‘녹색 뉴딜’은 ‘청정’ 테크놀로지에 대한 공공 투자를 확대함으로써 기후 변화에 대처함은 물론, 재생 불가능한 자원의 문제를 해결하고 고용 창출 효과까지 거두겠다는 전략이다.
이는 공해, 에너지 안보, 수자원 고갈 및 생태계 파괴와 같이 곧 닥치게 될 위협에서 인류를 구할 긴급 대응책으로서 매혹적인 아이디어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녹색’이라는 수식어가 단지 부도덕한 권력의 야심을 포장하고, 야만적인 자본주의에 신선함을 부여하기 위한 이념적 외피로 이용돼선 안 된다. 멸 달 전부터 ‘녹색 뉴딜’이라는 말이 전세계 정치 지도자 들을 유혹하고 있다.
현재의 금융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선진 자본주의 국가뿐 아니라 아시아의 신흥국 정부들도 위기를 막고 침체된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모든 조처를 강구하는 중이다. 미국과 중국 정부는 공공 인프라 시설과 재생 가능 에너지 생산에 막대한 투자를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처가 가져다줄 사회적· 환경적 미덕에 대해서는 주의를 갖고 살펴봐야 할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시행된 신자유주의 정책과는 다른 정책 전환이 현재 분명히 일어나고 있지만 ‘녹색 뉴딜’이란 용어가 이 새로운 방향 전환을 지칭하기에 과연 진정으로 적합한 개념인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이 용어는 정확한 개념 정의조차 없이 각국의 정책 결정권자들 사이에서 유행어가 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1) 따라서 이 개념을 꼼꼼히 검토해볼 때가 되었다.
우선 ‘녹색 뉴딜’은 재정지출과 시장의 활성화를 통해 한 국가의 침체된 경제활동을 자극하기 위한 정부 조처의 총체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뉴딜’ 개념은 케인스가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가로 부상하기 전에 이미 존재했다. 물론 뉴딜에 관련된 정책들은 케인스의 이론을 통해 분석될 수 있다. 그러나 케인스의 이론과는 관계없이 ‘녹색 뉴딜’의 이름으로 채택된 정책들이 사회적 기준과 환경적 기준에 동시에 부합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우선 이 정책들은 실업률의 급속한 상승과 같이 현재의 경제위기가 초래하는 가장 치명적인 사회문제에 대응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환경 친화적인 정책으로의 대전환이 수반돼야 한다. 이는 석유 같은 화석연료에 의존하지 않는 경제체제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만 우리는 진정으로 ‘녹색 뉴딜’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대 못 미친 루스벨트의 ‘뉴딜’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의 뉴딜 정책이 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의 측면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하기는 힘들다.
폴 배런과 폴 스위지 같은 유명한 미국 경제학자들은 뉴딜의 근본적인 약점이 사회정책과 관련된 케인스적인 정책들이 그 규모에서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점에 있었다고 지적한다. 1930년대 어느 날 케인스가 백악관을 방문해 루스벨트와 열띤 논쟁을 벌인 일화가 있다. 당시 논쟁에서 케인스는 재정적자가 더욱 많이 증가하도록 내버려둬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자신의 균형재정 정책을 포기할 의향이 없었다. 현재 가치로 환산할 때, 미국 정부의 재정지출이 1929~39년에 102억 달러에서 175억 달러로 증가했지만 국내총생산은 1044억 달러에서 911억 달러로 감소했다.(2) 재정지출 증가율이 10년 동안 70%에 불과해 경기 회복에 도움이 안 된 것이다. 이 지점에서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에 대한 호된 비판이 제기되었다. 즉, 뉴딜 정책의 사회복지 지출이 사회 위기의 규모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군비증강 포기하고 민간투자 확대
루스벨트 시대와의 비교를 통해 2008년과 2009년, 도처에서 실시되는 다양한 경제계획을 판단하는 첫 번째 기준을 정할 수 있다. 이 기준에 비추면, ‘뉴딜’이라는 이름이 어떤 경우에도 군비증강 정책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뉴딜은 도리어 새로운 무기체계 획득 계획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4) 군 예산 감축에 대한 분명한 의지만이 루스벨트의 뉴딜과의 비교를 정당화할 것이다. 그런데 부시 행정부 시절 군비지출은 1년에 1조 달러 이상이었으며 이는 무려 국내총생산의 8%에 해당된다!(5) 새로운 뉴딜 정책에 ‘녹색’이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군비 확장이 아니라 야심찬 민간 분야 투자계획이 수반돼야만 그 의미를 갖는다.
두 번째 기준은 공공정책의 가장 창조적인 부분과 관련된다. 정부는 환경파괴의 정도가 완화되는 경제로 전환한다는 의도를 확실히 보여줘야 한다. 우리가 ‘녹색 투자’ 혹은 ‘녹색 지출’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소 이론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재정지출의 준거를 ‘내재적(intrinsic) 생산성’에 두도록 본질적인 원칙을 정해야 한다. ‘내재적 생산성’이란 투자에 대한 이익 산출 능력이 아니라 지구상의 삶과 생물다양성(biodiversity)의 보전에 구체적으로 기여하는 것을 말한다.(6) 이 말은 우리가 막대한 군비체제의 생산을 포기해야 할 뿐 아니라 역설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기존의 투자 개념, 즉 삶의 수준 향상을 도모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건강과 자연환경에 부정적인 효과를 내는 투자와 지출에는 작별을 고해야 한다는 뜻이다.
세 번째, 진정한 ‘녹색 뉴딜’은 신자유주의 정책과 근본적인 단절을 요구한다. 현재의 경기 후퇴 국면에서 각국 정부는 어쩔 수 없이 케인스주의 정책을 도입하면서도 경제 전략의 신자유주의적 근본은 수정하지 않으려 한다. 만약 이것이 확인된다면, 이들의 공공투자 효과는 매우 제한적일 것이다. 국고의 상당 부분을 사기업인 은행과 보험회사를 구제하는 데 퍼붓는 정부 당국의 성향이 이러한 예가 될 것이다.
독일의 에너지 정책 주목할 만
세계화된 경제의 핵심적인 문제 중 하나는 금융 부문이 실물경제의 수도꼭지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케인스는 이미 이를 경계하고 반대했다. 최단기간에 최대의 이익 도출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 이 금융 시스템이 경제 전반에서 지배적인 입지를 점하고 있는 한, 환경 친화적인 경제는 허황된 꿈에 불과하다. 네 번째, ‘녹색 뉴딜’이 환경 보전과 양립할 수 있는 경제체제로의 이행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허황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현재 진행 중인 거시 경제정책은 총수요를 늘려서 성장을 다시 촉진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는가? 아니면 반대로 수요를 안정화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는가? 자본주의 경제는 항상 에너지 소비의 무한정한 증가를 과시해왔다. 그런데 이런 에너지의 과소비가 화석연료를 재생 가능한 에너지로 대체하는 추세 속에서도 지속될 수 있는지 자문해봐야 한다. 생태학적 측면에서 보면, 오직 ‘정상(定常)상태’(stationary state) 경제 혹은 ‘순환적 흐름’(circular flow) 경제만이 지구의 천연자원 고갈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7) 이러한 의미에서 현재의 경제위기는 하나의 역사적 기회이기도 하다. 세계 각국이 성장을 향한 미친 경주에서 동시에 감속하려고 동의할 리는 거의 없지만 어쩌면 우리가 현재 겪는 것과 같은 고통이 우리를 새로운 대안에 눈을 돌리게 하는 기회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앞에서 우리가 정의한 ‘녹색 뉴딜’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 하나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유럽에서 약간의 의미심장한 성과를 기록한 나라는 독일이다. 독일 경제는 화석연료에 전적으로 의존하다가 점차 태양열, 풍력, 지열 등 다른 에너지의 사용을 늘리고 있다. 이러한 이행을 위해 독일 정부는 몇 년 전부터 어떤 측면에서는 녹색이며 동시에 케인스의 이름에 걸맞은 장려 정책을 채택했다.(8)
이를 통해 독일에서 재생 가능한 에너지의 소비는 지속적으로 연평균 1%의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2007년, 대체에너지는 독일에서 전체 전기 사용량의 14.2%를 차지했다. 이에 비례해서 화석연료 사용량은 줄어들었다. 독일은 온실가스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인 걸 자랑할 만하다. 독일의 에너지 전문가 헤르만 쉐르의 말을 따르자면, 베를린은 교토의정서에서 정한 온실가스 감소 목표를 초과해 달성했다. 따라서 독일 시스템을 더욱 가까이 관찰하고 얼마나 이것이 하나의 모범사례가 될 수 있는지를 판단해볼 필요가 있다.
독일 시스템은 3개의 기본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에너지 회사는 대체에너지 생산자의 에너지를 구입해야 한다는 것을 법적인 의무 사항으로 규정해놓았다. 이 법규는 에너지 공급자가 원자력 혹은 석유 관련 다국적기업에 종속되는 정도를 완화해준다. 둘째, 재생 가능한 에너지의 가격은 생산자가 아니라 정부가 정한다. 물론 이 가격은 항상 생산비보다 높아야 하며 에너지원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이 가격 수준은 충분히 긴 기간(일반적으로 20년) 동안 보장된다. 마지막으로 비화석 에너지 생산이 초래하는 부가 비용은 전기 특별소비세를 통해 기업을 포함한 모든 소비자에게 이전된다. 이것은 하나의 분배 시스템으로서 모든 국민이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선택한 책임을 나누어 진다는 뜻이다.
이처럼 독일은 공해물질을 이산화탄소를 방출하지 않는 에너지원으로 대체하는 역사적인 이행을 실행하기 위해 비교적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녹색’ 시스템의 특성에 대한 비판의 여지는 거의 없다. 이 정책의 지지자들은 이런 시스템이 또한 사회적 차원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장점으로 내세운다. 왜냐하면 이것이 고용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연구에 의하면 신에너지 산업(태양열 집열판, 풍력발전시설 등)과 관련된 고용의 60%가 정부의 촉진 정책에서 직접적으로 유발된 것이었다.(9)
‘제로성장’까지 감수할 의지 필요
‘녹색 뉴딜’을 자처하는 정부는 ‘군사적’ 케인스주의와 결별해야 한다. 오직 지구상의 생명 보호를 분명한 목적으로 하는 장려 정책과 투자만이 이 ‘녹색 뉴딜’의 칭호를 받을 수 있다. 이것은 원자력 에너지 생산이 종식돼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폐기물이나 온실가스 문제의 악화를 초래하는 모든 투자도 종식돼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대체에너지 생산에 필요한 특별한 지출은 전체 국민이 부담해야 한다. 지구의 생존은 각 개인과 연결되는 이슈이기 때문이다. 또 재생 가능한 에너지의 사용은 새로운 고용을 창출하고 공공의 복지를 개선해 줄 것이다. ‘녹색 뉴딜’은 ‘사회적 뉴딜’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오로지 케인스주의적인 규범에 입각한 정책은 아무런 지속적인 해결책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케인스 이론은 지구상에 광적인 성장기가 막 시작될 무렵에 나온 이론이기 때문이다. 부의 축적을 목표로 자원을 낭비하는 시스템으로서 자본주의 경제는 앞으로 사라져야 할 운명을 안고 있다. 그 대신 지구를 고갈시키지 않고 보전하는 ‘정상 상태’ 경제로 대체돼야 한다. 이러한 이행은 물론 전 지구적으로 실행되고 저개발국의 이익을 존중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아직까지 이것은 유토피아적으로 비친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녹색 뉴딜’이라는 개념도 유토피아적으로 비쳤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글/피터 커스터스 Peter Custers
아시아연구국제연구소(IIAS·International Institute for Asian Studies) 연구원. <세계화된 군국주의에 대한 문제제기- 핵과 군비 생산, 그리고 비판 경제 이론> (Questioning Globalized Militarism: Nuclear and Military Production and Critical Economic Theory)의 저자.
번역/김태수 asticot@ilemonde.com
<각주>
(1) Antoine Reverchon, ‘녹색 성장의 지구적 도전’(Le pari mondial de la croissance verte), <르몽드>, 2009년 2월 3일.
(2) Paul A. Baran & Paul M. Sweezy, <Monopoly Capital: An Essay on the American Economic and Social Order>, 1964, 159~160쪽.
(3) 위의 책 160쪽.
(4) 군사적 케인스주의에 관한 최근의 분석은 다음을 참조. Peter Custers, ‘Military Keynesianism Today ? An Innovative Discourse’, 2008. www.economischegroei.net/file/214.
(5) 이는 국방부 예산(2009년 기준 5120억 달러)과 관련된 지출을 동시에 감안한 수치임. Chalmers Johnson, ‘The Economic Disaster Which is Military Keynesianism. Why the US has Really Gone Broke’, http://mondediplo.com/2008/02/05military.
(6) 경제학에서 ‘생산성’과 ‘비생산성’의 개념에 관한 비판적 관점은 Peter Custers, <Questioning Globalized Militarism: Nuclear and Military Production and Critical Economic Theory>, 2007, 6장 참조.
(7) ‘정상 상태 경제’의 개념에 대해서는 Herman E. Daly et Kenneth N. Townsend, <Valuing the Earth: Economics, Ecology, Ethics>, 1993. 특히 13장, 15장, 19장 참조. 혹은 John Stuart Mill,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Books IV, V, 1988, VI장 참조. 1930년대 경제공황기에 제기됐던 정체적 금융에 대한 아이디어는 Alvin H. Hansen, ‘Recent Trends in Business Cycle Literature’ in Alvin H. Hansen, <Full Recovery or Stagnation?>, 1938, 111쪽 참조.
(8) 독일 사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Success Story: Feed-In-Tariffs Support Renewable Energy in Germany’ 참조. www.e-parl.net/eparlineages/general/pdf/0806.
(9) 윗글.
(10) 산업혁명을 동반했던 화석에너지 자원으로의 이행에 관해서는 Clive Ponting, <A New Green History of the World: The Environment and the Collapse of Civilizations>, 2007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