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들의 자막 넣기, 새로운 '위키' 스타일

2014-04-28     멜라니 부르다<보르도3대 영화학과 교수>

 

4월 7일부터 프랑스에서는 영화 및 드라마 전문 채널 OCS를 통해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 새 시즌이 방송되었다. 미국 현지에서 방송된 뒤 24시간 내에 프랑스에서 전파를 타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OCS가 얼굴 없는 네티즌 자막팀에 대적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저 열정으로만 뭉친 이 자막팀이 기록적인 시간 내에 자막 삽입본을 제공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법적으로는 위법 행위지만 사실 이는 널리 행해지고 있는 관행이다. 미국 드라마를 중심으로 인기 있는 외화 시리즈가 미국 현지에서 방송된 뒤 곧바로 인터넷에서 다운 받아볼 수 있다면, 프랑스 방송국에서 신규 시즌의 방영 결정을 내릴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다만 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이나, 덴마크어 등 현지어를 몰라 <여 총리 비르기트> 같은 드라마를 볼 수 없는 사람이라면 남은 건 언어 문제를 극복하는 일뿐이다.

다운로드가 가능한 인터넷 동영상이 꽤 손쉽게 업로드되는 만큼, 여러 언어권에서 자막을 제작하는 일 또한 그리 만만치 않은 작업일 것이다. 하지만 네티즌들이 많이 찾는 드라마 회차는 본 방송이 끝난 후 몇 시간 뒤면 자막 전문 사이트에서 자국어로 된 자막 파일을 구할 수 있다. 프랑스어, 헝가리어, 러시아어, 크로아티아어, 스페인어, 이란어 등 각기 자국 언어로 된 자막 파일을 다운 받아 동영상 파일에 결합하여 영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이로운 상황은 전 세계 곳곳에 있는 열성팬들의 열정 덕분에 가능해졌다. 팬들이 제작하는 자막 번역 작업을 의미하는 ‘팬서빙(fansubbing)’ 서비스 덕분에 전 세계 <왕좌의 게임> 시청자들은 4월 6일 미국의 HBO 채널에서 시즌4를 새롭게 방송한 직후 거의 그 즉시 이 드라마를 볼 수 있게 됐다. 2011년 맨 처음 방영을 시작한 판타지 장르의 미 외화 시리즈 <왕좌의 게임>(1)은 2013년 가장 많이 불법 다운로드된 방송으로 뽑혔으며, 이는 제작자들도 자랑스레 여기는 부분이다.(2)

  팬서빙으로 더욱 빨라진 자막

  ‘팬서빙’ 문화는 198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의 자막작업과 함께 맨 처음 태동했다. 그 당시 일본 애니메이션 팬들은 해당 애니메이션이 방송될 때 이를 녹화해두었다가 A4용지에 자막을 제작한 뒤, 비디오테이프 케이스 안에 이를 집어넣어 다른 팬들에게 배포하곤 했다. 이 작업을 통해 일본 애니메이션 팬들은 일본 국내용으로 제작된 문화 상품을 국경 밖으로까지 알리며 문화 사절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오늘날에는 이 열성팬들이 자국에서 방영되지 않는 드라마와 영화를 다른 국내팬들도 볼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아마추어 자막 제작자들은 해를 거듭하며 더욱 조직화되어 갔고, 작업 결과물을 보다 개선하고 널리 공유하기 위해 전문 역량을 발전시켰다. 프랑스에서 미드 시리즈의 자막 제작자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은 ‘U-sub.net’이라는 사이트이다. 이곳에서는 미국 드라마뿐만 아니라 일본 애니메이션 자막 제작자도 찾아볼 수 있다. 5년 전 당시 프랑스에서는 방영되지 않았던 <배틀스타 갤럭티카(Sky One-Sci Fi Channel, 2004~2009)>와 <스타게이트 SG-1 (Showtime-Sci Fi Channel, 1997~2007)>의 자막을 제작하던 두 자막 제작팀의 주도 하에 만들어진 이 자막 커뮤니티는 규모가 점차 커져서 오늘날 백여 개 이상의 자막팀을 보유하고 있다. 회원 수 27만의 ‘Seriessub.com’이란 사이트에서는 미드를 비롯하여 현재 방영 중이거나 방영이 종료된 전 세계 766개 드라마의 자막을 무료로 제공한다.

아마추어 자막 제작자들은 효율성의 극대화를 위해 보통 팀을 이루어 자막을 제작한다. 자막 제작 과정에서는 멤버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이 정해져 있다. 일단 드라마나 영화의 동영상을 입수하여 인터넷에 올린다. 이 일은 ‘업로더’가 맡는다. 이어 나머지 사람들이 일을 분담하는데, 방송 회차별로 한두 사람의 번역가가 번역 작업을 진행하고, ‘인코더’가 화면의 대사와 자막 싱크를 맞춰준다. 이어 ‘에디터’가 사용된 글자 폰트를 확인하며, 네다섯 명 정도의 교정자가 자막을 보고 교정 작업을 진행한다. ‘코랑탱(Corentin)’이란 일본 애니메이션 자막팀은 ‘Substation Alpha’나 ‘Aegisub’ 같은 프리웨어 자막 프로그램을 사용한다.(3) 인코딩 단계에서는 ‘Virtualdub’이라는 프로그램을 쓴다. 각각의 자막팀은 시리즈 하나만을 전문적으로 작업하며, 대개 각 회차의 시작 부분에 자막팀의 이름이 삽입된다. 자막팀은 자막 게시판 상에서 직접 구성이 되기도 하는데, 코랑탱에 따르면 “팀원들이 실제로 오프라인에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한다. 대개 이메일이나 인터넷 메신저를 이용하여 작업하는 게 보통이다. 타이틀 옆에 ‘ASAP(As soon as possible)’란 문구를 붙여 속성으로 제작한 자막이 최초 유포된 뒤에는 종종 보다 완성도가 높은 새로운 버전의 자막이 제시되기도 한다.

이 같은 열성팬들의 역할은 함께 방송을 즐겨보는 다른 팬들의 입장에서도 특히 중요하지만, 공적인 영역에 있어서도 꽤 비중 있는 영향을 미친다. 이들의 작업으로 드라마의 수용 조건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들은 원어 영상에 자막이 삽입된 형태를 제안하는데, 이는 사실 영화팬들의 고유한 모델이었다. Seriessub.com 게시판에서 회원들이 올린 게시판 내용을 살펴보면, 모두들 프랑스어나 영어 자막이 달린 원어 영상을 선호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참고로 프랑스에서는 외화 대부분이 더빙본으로 제공-역주)

  팬서빙에 곱지 않은 시선들

  그런데 프랑스 국내 TV채널을 통해 방송되는 미국 드라마는 방영 과정에서 이상해질 때가 많다. 한 드라마의 여러 회차가 같은 날 밤 한꺼번에 연이어 방송되기도 하고, 그나마도 엉망으로 섞이면서 서사 구조가 깨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09년부터 CBS에서 방송된 드라마 <굿 와이프> 역시 이런 경우였다. 현지에서 방송된 것과는 다르게 M6 방송국에서 짧게 편집되어 방송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부 드라마의 자막은 ‘보다 대중적’으로 만든다는 이유로 표현이나 어조가 지나치게 완화되면서 괴상한 형태가 되었다. 동성 커플인 제나와 가브리엘 사이의 레즈비언적 암시로 유명했던 드라마 <여전사 제나> 역시 프랑스어 버전에서는 두 주인공 사이의 관계에 있어 모든 모호한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드라마 내용의 일부가 삭제되기도 했다.

자막 제작자들은 문화 전달자로서의 역할도 담당하는데, 간혹 드라마의 줄거리 이해에 필수적인 정보를 명시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막 제작자들은 자막 안에 괄호 처리를 하여 이 같은 정보를 집어넣기도 하고, 자막 파일이 제공되는 웹 페이지상에 보다 길게 상세한 내용을 소개하기도 한다. 가령 미식축구 관련 드라마인 <프라이데이 나잇 라이트>(NBC, 2006~2011)에서는 일부 스포츠 용어에 관한 설명을 달아주어야 했고, <웨스트 윙>(NBC, 1999~2006)은 백악관 은어나 보다 넓게는 미 정계 문화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다. 법정 드라마 <굿 와이프>는 법률의 교묘하고 미묘한 측면을 잘 표현해 주어야 했다. 뉴올리언스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트레메>(HBO, 2010~2013)는 카트리나 사태 이후의 정치적 맥락과 현지의 전통적 측면, 특히 뉴올리언스의 음악적 배경에 대한 부연 설명을 곁들여야 했다.

상당한 시간이 요구되는 이 까다로운 작업이 전문 자막 제작자나 팬 커뮤니티 내의 다른 회원들에게 늘 좋은 평가를 듣는 것은 아니다. 일부 자막팀들은 서로 같은 드라마의 자막을 제작할 때 소셜 네트워크나 인터넷 게시판상에서 서로 언쟁을 벌이기도 한다. 이에 코랑탱 팀은 자막 작업의 중단을 선언하기도 했다. 팀의 아마추어 근성에 대해 끊임없이 지적했던 온라인 회원들이 팀을 존중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4) 게다가 방송 콘텐츠 유통 업체에서 ‘팬서빙’ 활동을 바라보는 시선도 그리 곱지 않다. 자기들에 앞서 외화를 국내에 유포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또한 이 같은 관행에 조금씩 적응이 되어가고 있다. 프랑스의 TF1, Canal+, OCS 같은 채널들도 이제는 미국에서 본방송이 나간 다음 날 곧바로 자막이 달린 해당 회차를 내보내기 때문이다. 프랑스 방송사들은 이렇듯 전문 인력이 제작한 자막과 함께 신속하고 적법한 방식으로 해외 드라마를 방송함으로써 열성팬들의 자막 제작 활동을 차단하고 있다.

이러한 ‘팬서빙’ 활동은 그 성격상 가장 눈에 띄는 것일 뿐, 사실 팬커뮤니티가 벌이는 수많은 활동 중 한 가지에 불과하다. 가령 드라마 내용에 대해 실시간으로 코멘트를 다는 경우도 있는데, 2013년 6월 2일 방영된 <왕좌의 게임> 시즌3의 9회는 피가 난무하는 마지막 반전 장면 때문에 트위터에서 해시태그(주제어) ‘#rewedding(피의 결혼식)’으로 역사상 가장 많은 트위터 멘션이 쏟아졌다. 게다가 방송을 본 시청자들은 SNS와 블로그가 결합된 마이크로 블로그 플랫폼 ‘텀블러’ 기반의 개인 웹페이지에 자신이 만든 속칭 ‘움짤’ gif 파일(5)을 올려 다른 팬들과 공유한다. 해당 방송사의 시청자 게시판이나 그 외 다른 인터넷 게시판 상에서 드라마의 줄거리와 논리를 두고 설전을 벌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수천 개의 ‘팬픽’이 올라오는 사이트도 있다. 영화나 드라마의 등장인물과 작품 속 무대를 다시 차용하여 새로운 전개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해당 작품에 관한 모든 정보를 모아두거나, 서사 재료를 모아 통합적 스토리텔링(6)을 구축하여 다른 팬들과 공유하고 코멘트를 주고받는 ‘위키’ 스타일의 사이트도 찾아볼 수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드라마 <로스트>(ABC, 2004~2010)에 관한 ‘로스트페디아’로, 여기에는 작품에 대한 해석과 설명에 관한 글이 7천 개 이상 올라와 있다. 이 밖에 <배틀스타 갤럭티카>의 위키 사이트에도 작품에 관한 모든 통합적 스토리텔링이 다 올라와 있다. 또한 팬들은 간혹 운동가로 변신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영화 <해리 포터>의 열혈 팬들은 ‘해리포터 동맹’을 결성하여 여러 가지 지지 운동을 벌인다.(7)

과거에는 콘텐츠를 제작하고 이를 공유하던 팬들의 관행이 팬들 사이의 웹진이나 팬덤 내부에서만 머물렀던 반면,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 활동 범위가 더 넓어지면서 새로운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심지어 일부 팬들은 팬의 영역을 넘어설 정도이다. E. L. 제임스가 쓴 로맨스 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도 원래는 <트와일라잇> 사가에서 영감을 얻은 팬픽이었다. 스웨덴에 거주하는 <왕좌의 게임> 팬 엘리오 가르시아 씨는 이 작품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가 되어 이제는 관련 상품을 제작하는 회사들에 조언을 제공해줄 정도이다. 이 시리즈의 작가인 조지 R. R. 마틴 또한 그에게 조언을 구한다. “한 단락을 작업하던 중, 그에게 메일을 보내 내가 전에도 이 얘기를 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곧바로 “네, 4권 17페이지에서요”라고 대답해주었다.”(8)

(1) 티보 에네통, ‘홍염과 칠흑’,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년 9월호

(2) 그레구아르 플뢰로, ‘<왕좌의 게임> 불법 다운로드에 자부심 느끼는 HBO 방송국’, 2013년 4월 3일

(3) 베르나르 랑, ‘누구나 사용 가능한 프리웨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8년 1월

(4) 가령 ‘치욕의 자막’(http://lessoustitresdelahonte.tumblr.com) 같은 곳이 이에 해당

(5) 재미있게 이미지 조합을 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 이미지 파일 형식

(6) 통합적 스토리텔링은 헨리 젠킨스 박사가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이라 칭한 것에 포함되며, 여러 가지 미디어 플랫폼을 기반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풀어놓은 뒤, 하나의 통일된 이야기의 장을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7) 헨리 젠킨스, ‘아바타와 노는 반체제 운동가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9월호

(8) Laura Miller, «Just write it! A fantasy author and his impatient fans», The New Yorker, 2011년 4월 11일 ; ‘팬들의 극성에 맞선 작가», 2014년 2월 17일, www.courrierinternational.com

 글·멜라니 부르다 Mélanie Bourdaa 보르도3대학 영화학과 조교수, 모나 콜레 Mona Chollet 언론인. 문화 비평 공간인 <Peripheries>의 발행인.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미래를 심는 사람> 등의 역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