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국주의 망령에 시달리는 르완다

2014-04-28     토마 리오<아프리카 전문가>

세계 곳곳에서 1994년 르완다 대학살 20주년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는 동안, 르완다 정부는 식민통치 이전부터 존재해 온 전통 군사훈련기관 개혁을 단행하였다. 지방 행정의 말단부터 정부 최고위급까지 전쟁 숭배가 다시금 르완다를 잠식하고 있다. 게다가 르완다 정부는 이러한 전통을 세계 각국에 퍼져있는 르완다 교민 사회에까지 확산시키려고 한다.

르완다 정부는 국가 재건과 국민 통합을 위한 주요 수단 중 하나로 ‘이토레로’라는 전통 기관을 활용한다. 이토레로는 벨기에 식민통치 시대 이전부터 존재해온 전통 군사훈련 및 교육 기관으로 전투 무용과 공격 전개 전야제, 높이뛰기, 격투, 지역사회사업, 경제 문제 등을 가르친다. ‘인토레’(‘선택 받은 자’라는 뜻)라 불리는 이토레로 회원들은 수십만 명에 이른다. 현 집권당 르완다 애국전선(RPF) 체제 아래 교육받은 인토레는 이토레로의 교육 및 군사, 정치, 경제 전문학교를 구성하고 있다. 2009년부터 2013년 사이 1500만 명(2010년 인구통계)의 르완다인 중 백만 명이 넘는 르완다인이 이토레로에 입문했고 교육을 수료한 이들 중 일부는 르완다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다른 일부는 해외의 르완다 교민 사회를 담당하기도 한다.
 
르완다 정부는 이토레로 개혁이 식민통치 시대 이전의 국가 수호 전사들의 정신을 되살리는 동시에 1994년 투치족 대량학살로 몰고 간 이데올로기를 타파하기 위함이라고 단언한다. 이 이데올로기는 지금까지도 르완다의 영토와 민족 통합을 위협하고 있다. 곳곳에서 사회정치적 분열을 조장하여 대량살상을 야기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르완다 망명자 조직과 난민 조직이 보여주듯이, 르완다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2) 특히 르완다는 콩고민주공화국(DR콩고) 내전에 개입했다는 비난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
 
후투 정부에 반대하는 중도 후투족과 80만 명에 이르는 투치족을 죽음으로 몰고 간 대량학살 후 20여 년이 지난 현재, 르완다 정부는 이토레로의 군사문화 부활을 통해 대량학살이라는 과거 기억에 기대어 있는 현 정부 권력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한 국가적 움직임을 이끌어내려고 한다. 이렇게 전쟁 숭배 문화가 되살아나면서 DR콩고의 키부와 남부 아프리카에서 활동하고 있는 반정부 인사나 집단을 대상으로 한 범죄와 탄압 활동 또한 늘어나고 있다.
 
식민통치 시대 이전, 중앙 정당이 니이기냐(Nyiginya, 투치 왕족-역주) 왕조의 통치를 받을 당시, 이토레로는 왕실 군대의 사관생도를 육성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 조직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벨기에 식민 통치 기간 중, ‘천개의 언덕 국가’ 르완다의 토착 정부를 장악하기 위해 벨기에 정부가 선별한 투치족의 자녀들이 이토레로에서 교육 받았다. 유럽 식민통치 국가들이 효율적으로 간접 통치 정책을 펴고 다수의 후투족으로 구성된 르완다를 착취하기 위해 소수의 투치족을 이용한 것이다.
 
 벨기에의 식민통치에 이용된 이토레로
 
1973년부터 1994년까지 지속된 제2공화국 당시에는 쥐베날 하비야리마나 대통령이 자신의 정당 국민발전혁명운동당(MRND)의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고양하고 ‘대중’을 선동할 목적으로 ‘인토레 양성’을 활성화시켰다. 이 당시 이토레로는 하비야리마나 후투 정부의 소위 ‘발전’ 정책에 반대하는 투치족에 적대적인 정책을 수립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비야리마나가 인토레를 통해 이데올로기를 넓게 확산시킨 사실을 고려했을 때, 르완다의 정치적, 군사적 동맹이었던 프랑스 정부가 대량학살을 일으킨 르완다 정부의 인종주의적 성격을 모를 리 없다고 판단된다.(3)
 
같은 시기, 1959년 첫 집단학살 후 우간다로 피난한 인토레 출신 투치족 난민들은 투치족 망명자의 아들로 우간다 정보국장이 된 폴 카가메가 조직한 르완다 애국전선(RPF)의 전투에 합류했다. 카가메가 이끄는 RPF은 결국 르완다 정부군(FAR)과 인테라함웨(후투족 극우 반군)가 1994년 4월과 7월 사이 자행한 종족대학살을 종식시키고 정권을 장악했다.(4)
 
르완다 역사는 여러 번의 극단적인 단절을 겪었고, 단절에 따른 과도기마다 새로운 국가 질서정립이라는 문제가 불거졌었다. 식민통치 시대(1897~1962)에는 ‘진화’가 거론되었다. 이는 벨기에의 간접 통치 정책이 벨기에가 지명한 투치족 관리들과 합작으로 만든 봉건 제도에서 ‘후투족의 부상’으로 대변되는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제1공화국(1961~1973)은 이렇게 민주주의적이라는 미명 하에 ‘후투족 혁명’ 이데올로기 발판을 토대로 수립되었고, 이 기간 중 1963~1964년 첫 투치족 대량살상이 일어났다. 하비야리마나 정권의 제2공화국(1973~1994)은 종족 간 적대를 부추기는 인종주의적 개발 이데올로기를 양산했고, 이는 결국 온 국가를 투치족 대량학살 비극으로 몰고 갔다.
 
대량학살에 종지부를 찍고 정권을 장악한 투치족 카가메 정부는 르완다의 미래를 위한 결정적 요소로 현대적 형태의 전통을 전면에 내세웠다. 또 하나의 새로운 국가 질서가 등장한 것이다. 카가메는 어마어마한 수의 전범자를 재판하기 위해 전통적 사법기관인 가차차(Gacaca)를 다시 설치하면서 이미 전통으로 회귀를 이행한 바 있다.(5)
 
2008년, 르완다 개발 4개년 계획은 이토레로를 중점적으로 활용할 4개의 전략 분야를 지정했다. 지방 행정, 학교, 공공 기관 및 사설 기관, 그리고 결속력 강화와 르완다 문화의 세계화를 위한 르완다 교민 사회이다. 같은 해, 친정부 잡지 <르완다>는 이토레로 재활성화를 둘러싼 논란에 대한 기사를 게재했다. 이 잡지는 극히 드문 반정부 신문 중 하나인 <우무코>가 독자들에게 “이토레로는 하비야리마나 체제 당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집권당의 이상을 옹호하기 위한 하나의 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6)라며 이토레로 재활성화를 거대한 조작극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토레로는 국가주의 강화 도구
 
한편 르완다 정부는 “이토레로는 모든 르완다인을 위한 학교였으며 국민 통합, 애국심, 용맹, 인정, 르완다 정신 등의 국가 가치와 문화를 전파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7)며 식민통치 이전의 이토레로 개념을 강조한다. 그러나 르완다 국가유산 전승의 본질은 철저히 망각된 것으로 보인다. 하비야리마나 시대의 ‘인토레 양성’ 활성화나 현 카가메 정부의 이토레로의 현대적 개혁 모두 실제로는 정권을 장악한 권력이 르완다의 새로운 국가 발상에 용이하게 이용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하비야리마나는 인종주의 확산을 위한 도구로, 카가메는 국가주의 강화를 위한 정치적 도구로 이용했다는 점일 것이다.
 
현재 시점의 카가메 정부의 이토레로 고양은 군사주의적, 국가주의적 르완다 체제에 필요한 정치적 집단을 양성하기 위한 문화적 기반 확보를 의미한다. 정부는 ‘르완다의 국가적 단일성, 애국심, 국민정신, 국가성장과 보호, 르완다 국민들의 위엄과 용맹, 르완다의 국민이라는 자부심’을 이토레로 부활의 목표로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8) 르완다 정부가 국민들을 정부 편으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반대세력을 억제하고 아프리카와 전 세계에 퍼져있는 르완다 디아스포라를 감시하기 위해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각국의 르완다 대사와 망명자 조직을 통해 캐나다, 영국뿐 아니라 전 식민 통치국이었던 벨기에까지 이토레로가 퍼져나갔다. 르완다는 프랑스에서 주 프랑스 르완다 대사의 중개를 통해 르완다 젊은이들을 매년 르완다 남부 가코의 군사 캠프에서 실시되는 이토레로 연수에 참가하도록 선동하고 있다.
 
이토레로 개혁은 DR콩고와 캐나다에서 활동하고 있는 르완다 망명자들과 RPF 사이에 이데올로기 전쟁에도 불을 붙였다. 이 두 국가는 르완다 디아스포라 활동이 특히 두드러지는 곳이다. 캐나다에서는 2011년 르완다 정부가 급파한 고위 간부들이 이토레로 운동을 일으켰다. 이토레로의 출현은, 르완다와 DR콩고 출신 캐나다인으로 구성된 캐나다 르완다 회의(CRC)에 강한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르완다 정부는 즉각적으로 이 반정부 협회를, 대량학살 이데올로기를 국제사회에 퍼트리는 조직으로 규정하였다. CRC의 회장 엠마누엘 하키지마나가의 선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CRC는 “이토레로의 본래 목적이 르완다 정부에 반하는 인사들과 전범자 증인들의 안전(9)을 위협하는 모든 활동에 인토레들을 가담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영국에서 이토레로 창립은 영국 거주 르완다인 협회 연합과 영국 정보국의 개입으로 취소되었다. 르완다 격월간지 <우무부지치>의 2011년 6월 27일자 기사는 이토레로의 본 목적이 르완다 망명자들을 상대로 한 테러 행위에 가담시킬 영국 현지 르완다 젊은이들을 훈련시키는 것임을 영국 정보국이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실제로, 런던에 거주하는 두 명의 르완다인을 상대로 한 ‘즉각적 생명 위협’이 접수된 것으로 알려졌다. 2011년부터 2014년 사이 카가메 정부는 해외 망명 중인 반정부 인사들을 제거해왔다는 의혹을 수차례 받았다. 이 의혹은 2014년 1월 1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살해된 파트릭 카레게야 사건으로 더 이상 의혹이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한편, 2010년 유엔이 발간한 한 보고서로 DR콩고에는 르완다 정부의 키부 전쟁 개입(10)을 강력하게 비난하는 여론이 일게 되었다. 이 보고서(11)는 1994년과 2003년 사이 카가메 정부와 연계된 무력 집단이 자행한 콩고 전쟁을 ‘제노사이드’에 버금가는 전쟁 범죄로 묘사하고 있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2년 8월 2일 학생 258명과 디아스포라 관리 요원을 위한 이토레로 개관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르완다 대통령과 국무총리 피에르 다미안 하부무레미는 키부 내전에 개입한 르완다를 향한 DR콩고의 비난에 대해 “콩고의 모든 주장은 거짓이다. 르완다가 M23(콩고민주공화국 동북지역 반군-역주)을 지원할 이유는 전혀 없으며, 오히려 그 반대로 르완다는 콩고의 평화를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13)는 입장을 재차 밝혔다.
 
2013년 7월과 8월 사이, 170명의 새로운 인토레가 가코에 징집되어 교육을 받았다. 이와 동시에 이토레로는 경제, 교육과 같은 르완다 공공 분야 전체에서 세력을 강화하고 있다. 종족 간 대량학살 종식하고 정권을 장악한 카가메 정부가 그 후 20년 동안 유지해 온 헤게모니를 영속화하려 한다는 사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관료 및 군사, 교육 기관에 만연하고 있는 옛 왕조 시대 군사 문화의 부활은 여전히 수많은 르완다인들 사이의 깊은 골을 메우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대량학살을 주도한 다수의 구정부군 및 주요 인사들이 망명하고 있는 프랑스에서 특히 활발한 조직은 카가메 정부의 정책에 대한 극단적으로 치우친 해석을 지속적으로 퍼트리고 있다. 이러한 물리적, 이데올로기적 전쟁은 르완다의 뼈아픈 과거의 망령을 되살리고 있다.
 
르완다를 둘러싸고 극단적으로 상반된 두 개의 발상이 다시 떠오르고 있다. 한쪽은 다수 후투족이 이끄는 하위 국가(후투와 투치) 연합을 제안하고 있으며, 다른 한쪽은 해묵은 분열과 대립을 청산해야 한다는 주장 아래 정치적 국가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현재는 대학살을 초래한 이데올로기 청산이라는 과제가 카가메 정부의 애국적 정당성에 가장 큰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러나 국제 사회 정치인들과 기자들은 카가메 정부가 내세우는 발상의 범죄적 측면, 전쟁 유발 가능성의 측면에 더욱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각 세대마다 관련자의 상반된 이해관계에 의해 그 형태를 달리하여 불투명하고 모호한 채로 남아있는 문제를 명확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글·토마 리오 Thomas Riot파리 아프리카 세계 연구소(IMAF) 객원 연구원
 
 번역·김수영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Boniface Rucagu, <이토레로 국가 위원회>, 지방행정부(Minaloc), 2012년 7월/ <이토레로 프로그램 전략>, Minaloc, 2012년 7월
(2) ‘끝없는 탈출, 콩고 동북부 강제이주의 악순환’ Human Right Watch, 뉴욕, 2010년 9월
(3) Gabriel Périès, David Servenay, <검은 정쟁, 르완다 제노사이드 원인에 관한 조사>, 라 데꾸베르트 출판사, 파리, 2007년
(4) Anne-Cécile Robert, ‘르완다 제노사이드, 그 이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0년 7월
(5) Colette Breackman, ‘힘겨운 르완다 재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6년 7월
(6) <우모코(Umoco)> 기사 인용, <르완다> 314호, 키갈리, 2008년 1월 22~28일
(7) Boniface Rucagu, <이토레로 국가 위원회>
(8) Boniface Rucagu, <이토레로 국가 위원회>
(9) L’Aut’Journal, 몬트리올, 2011년 8월 4일
(10) Sabine Cessou, ‘아직 끝나지 않은 내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1월
(11) <콩고민주공화국, 1993~2003>,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 제네바, 2010년 8월
(12) Michel Galy, ‘대량학살을 둘러싼 논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1월
(13) Rwanda Broadcasting Agency, 994호, 키갈리, 2012년 8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