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베가 능욕당한 국가를 구한다?

2014-04-28     김수진, 윤보라<서울대 여성학자>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난 지 10일이 흘렀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한국사회는 비통과 우울, 그리고 분노로 뒤덮여 있다.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우리를 혼란과 분노로 몰아넣은 사건은 또 있다. 사고 발생 뒤 나흘째부터 이 사건에 대한 ‘일베’의 목소리와 일베식 해석의 프레임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실종자 가족들을 ‘유족x’이라 조롱하고 희생자들을 성적으로 모독한 사실이 기사화되었고, 경찰수사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불과 1여 년 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극단적으로 폄훼한 일베 게시물에 우리 사회가 경악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일베를 두고 “인간이 아니요 악귀들”, “암덩어리 기생충”, “수구 꼴통이 길러낸 막가파”라며 성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누리당 국회의원의 아들이 페이스북에 “국민 정서 자체가 굉장히 미개하다”고 쓴 글이 알려지고, 같은 당 국회의원이 실종자 가족을 “외부 선동꾼”이라고 모는 확인되지 않은 주장을 SNS에 퍼나른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당사자들의 재빠른 사과로 급히 마무리 되었으나 패륜과 막장, 벌레라는 딱지로 일베를 진압하는 듯이 보였던 처음의 사태와 지금의 분위기 사이에는 미묘한 온도차가 있다.
 
국회의원 아들이 구사한 ‘미개 국민론’은 일베 사이트에서 이미 정련된 논리와 정확하게 조응하며, ‘선동꾼’ 추정 또한 일베가 중요하게 제기한 주제였다. 이들은 나름의 기준에 따라 자료와 지식을 수집하고 유통시키면서 특정한 논리와 이론을 구축하고 있다. 그리고 이 논리와 이론은 그들이 부정하고 혐오하는 ‘감성’에 기반해 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일베사이트의 폐쇄까지를 염두에 두고 제재 심의를 한다고 한다. 어떤 결론이 날 지 모르겠지만, 지난해 일베 때문에 몸살을 앓던 때와 결국 같은 문제에 봉착할 것이다. 몇몇 일베 유저를 구속한다고 해서 도려내고 잘라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베는 이미 우리 곁에 있다. 일베식의 생각과 언어, 그리고 정동(affection, 情動)은 한국 사회의 깊은 곳곳에 존재한다. 일베의 논리를 단순히 ‘루저들의 배설'로 치부하는 분석은 결코 사태의 본령에 가닿지 못한다. 우리는 일베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고,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이번 세월호 사건은 일베의 이념과 정동을 열흘이라는 짧은 시간에 압축적으로 보여주었다.
 
<유족들 만행 정리>, “이젠 연민이고 뭐고 극혐”
 
그렇다면 일베가 생각하는 세월호 사건은 어떤 모습일까? 한 장의 그림이 이를 요약해준다. 4월 18일, <현재 진도 세월호 침몰 현장 계급도>라는 제목으로 2,800여개가 넘는 높은 추천을 받은 이 일베 게시물은 금세 온라인 곳곳으로 퍼졌다가 곧 삭제되었다. 조선시대 왕족의 가마와 리어카를 합쳐놓은 이 탈 것의 가장 상단에 세월호 선장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고, 그 아래에 유족 부부가 왕관을 쓴 채 앉아 “우리의 슬픔은 어떤 것보다 크다”고 말하고 있다. 정부는 유족 부부에 씌어진 차양막 뒤에서 부채질을 하는 하인으로 전락한 채 “ㅅㅂ 내가 침몰시켰나…;;”라고 혼잣말을 한다. 탈것의 하단에는 페이스북과 트위터로 채찍질하며 대정부 비판 선동을 하는 네티즌이 서있다. 가장 앞에서 힘들게 가마를 끄는 이는 유디티(UDT)와 해경이다. 대기업은 뒤에서, 민간 어부와 미해군은 옆에서 이 거대한 탈 것을 힘들게 밀고 있다.
 
일베는 처음부터 유가족들을 경멸하고 조롱한 걸까? 사고 직후 일베 또한 실종자들의 무사귀환을 바라고 자식을 잃은 학부모들을 동정하기도 했다. 현 상황에 대한 일베의 논리는 사고 후 이틀간 공무원이 뺨을 맞고, 해수부 정책관이 멱살을 잡히고, 총리가 물을 맞고, 급기야 실종자 가족이 대통령을 욕하는 동영상이 속속 퍼지는 과정에서 신속히 정립되었다. ‘미개한 국민론’은 실종자 가족이 대통령 앞에서 무릎을 꿇은 4월 17일자 일베 게시물 댓글에 “너무 미개해서 아직도 저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하는게 거진 90% 먹히는 나라임”이라는 댓글에 이미 등장하고 있다. <유족들 만행 정리> 같은 게시글들이 올라오면서 이번 사건을 대하는 일베의 총론이 정해진다. “이젠 연민이고 뭐고 극혐이다.”
 
일베의 시각에서 실종자 가족은 자신의 슬픔만 앞세우고 국가기관을 무시하고 공적인 노력을 무시하며 나아가 청와대까지 ‘진격’할 수 있는 비이성적인 존재들이다. 같은 날 게시된 <유족충이랑 김치년 공통점>을 보자. 이 게시물은 화난 실종자 가족으로부터 뺨을 맞는 정부 관리의 사진과 함께, ‘유족충’과 ‘김치년’의 공통점을 시사하는 상황을 나란히 제시하였다.
 
이에 따르면 유족은 자기 자식을 구하려고 목숨을 걸고 있는 잠수부를 욕하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 정부 관리를 때리며 심지어 대통령을 욕해도 자식이 죽었기 때문에 이성을 잃은 게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는 여자가 도둑질을 해도 생리증후군 때문이므로 문제가 없고, 다른 남자와 바람을 펴도 그것은 남자친구가 잘못해줬기 때문이므로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유족과 여성의 공통점은 두 존재 모두 비이성적이며 이익 추구를 위해서는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타인이나 공적 질서에 떠넘기는 데 있다는 것, 요컨대 시민적 공공윤리가 부재하다는 주장이다. 아무런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유족과 여성은 일베의 세계에서 이렇게 만난다.
 
일베가 구사하는 논리는 일견 일관되어 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혐오는 혐오할만한 속성에 대해서 가해진다. 이런 점에서 고(故) 박지영 씨와 ‘김치년’ 은 같은 한국여성이라 하더라도 전혀 다른 존재이다. 이들은 사비를 털어 승무원 박지영씨의 장례식장에 근조화환을 보내는 한편, 젊은 여성들이 이 승무원의 이름도 정확히 모른 채 SNS의 말만 믿고 정부만 일방적으로 비판한다고 주장한다. 일베가 볼 때, ‘팩트(fact)’도 정확히 모르면서 선동 (당)하는 여성들은 무식하고 개념 없는 우중(愚衆)의 세계에 속해있다면, 박지영씨는 죽음을 통해 이 우중의 세계로부터 성스러운 국가의 세계로 (아마도) 옮겨간 존재이다.
 
일베의 세계에서 혐오의 요소들은 호남, 좌파, 여성의 속성이 서로 겹쳐지고 호응하는 곳에 존재한다. 이 혐오받아 마땅한 존재들은 무식함과 무지함으로 국가질서 전복을 꾀하고, 특정 사건이 터지면 무조건 트집을 잡는다. 자신들의 막무가내식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거짓 유언비어까지 마다하지 않은 채 선동하며, 자신의 처지와 감정을 앞세우다가 다시 선동당한다. ‘미개한 국민’은 이렇게 완성되었다.
 
일베 팩트주의, 능욕당하는 국가 구출을 주장
 
그동안 일부 지식인들은 일베를 얕은 사고력을 가진 반(反)지성적 집단이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일베에 모여든 이들은 오히려 ‘좌파’를 반지성주의라고 공격한다. 일베가 구사하는 혐오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이념은 ‘팩트’이다. 이들은 ‘좌파’가 선동과 감성에 의존하는 반면 자신들이야말로 ‘팩트’에 근거한 이성적 판단을 보유하고 있다고 믿는다. 일베가 집착하고 있는 ‘팩트’라는 단어는, 세계에 대한 이성적인 태도와 전문가들만이 판정할 수 있는 진리의 담지체라는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게시물을 작성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의 좌표를 일베에 보고하고, 일베에 와서 분탕치는 이들을 저격하는 일련의 일베식 실천 모두가 팩트에 입각해야 한다. 일베에게 ‘팩트’란, 언제나 완전무결하며 진실을 말해주는 최종심급의 심판자이다.
 
그런데, 일베가 처한 딜레마는 팩트주의에 의존하면서도 자신들이 구축한 완전무결한 판타지의 세계를 온존시키려면 조작과 자작을 피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 딜레마의 근본적 원인은 ‘팩트’란 언제나 불완전하다는 사실에 있다. 해석을 동반하지 않는 ‘사실’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실은 언제나 그것을 둘러싼 서로 다른 입장과 감성을 지닌 주체들에 연루되어 있고, 이 상이한 주체들이 가하는 해석의 차이, 나아가 적대를 피할 수 없다. 해석과 감성에서 온전히 분리해낸 흠집없는 완전무결한 팩트의 세계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일베가 해경, 해양수산부, 중앙재해대책본부 같은 정부기관의 책임 문제를 두고 보이는 태도는 팩트주의의 딜레마를 잘 보여준다. 실종자 가족들과 많은 사람들이 이번 사고를 대처하는 정부의 말과 행위에 대해 불신을 쌓아가고 있을 때, 일베는 거꾸로 능욕당하는 국가권력을 이 미개한 국민으로부터 구출해야 할 대상으로 전환시켜 갔다.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하기를, 바로 적대적인 세력 ‘좌파’들이 노무현을 감싸는데 일베라고 못할 게 뭐있느냐고 말한다. 해경의 교신기록 편집 의혹은 김어준 출처, 한겨레발(發) 보도라는 점에서 간단히 무시될 수 있다. 따라서 정부의 잘잘못을 사실에 입각해서 따지는 노력은 이제 끼여들 여지가 없다. 결국 일베의 팩트주의는 자신의 불가능성을 스스로 폭로한다.
 
이제 이들이 신봉하는 팩트주의가 한계에 부딛힐 때, 우파들도 선동 못할 게 뭐있는가라는 말이 절로 흘러나온다. 그리고 “팩트 없는 선동으로 활개치고 다니는” ‘좌좀’(좌파좀비)들을 떠올리며 가상의 사건과 상황을 상상하고 괴벨스의 선동론을 실천한다. “문장 한 줄로도 가능”한 선동 앞에서 쩔쩔매는 ‘좌파’를 묘사하는 이 가상의 시나리오는 통쾌한 재미를 준다는 이유로 베스트글로 등극한다. 그 글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실상 조작도 상관없다.
 
이들은 이 조작을 단지 일베식 표현의 자유가 묻어난 웃음일 뿐이라며, 유머라는 방패 뒤로 안전하게 숨는다. 팩트주의와 팩트의 본래적 불완전성 사이에 드리워진 간극을 향락의 언어와 조롱의 웃음으로 메운다. 이도 저도 안 되면, ‘드립’(유머)이고, 이 드립은 재미가 있는 한 절대 일베 안에서 기각되지 않으며, 일베식 이데올로기를 안전하게 전파하는 무기가 되어 준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경악하는 이들의 포르노그라피적 상상력은 성역이나 금기 없이 무한대로 뻗어나갈 수 있었다.
 
스스로 패륜아임을 감추지 않고, 웃음과 조롱으로 무한대로 뻗어나가는 일베의 상상력은 아이러니하게도 비장함의 미학 앞에서 멈춰서서 그곳에 매혹됨을 감추지 못한다. 이들이 매혹되는 비장함은 어떤 상상된 국가, 비극을 무결점의 완전체로 승화시킨 국가로부터 출원한다. 이 비장한 국가의 체현자인 박근혜 대통령은 비극적 서사의 주인공으로 호출되고, 천안함 사건의 군인은 웅장한 음악과 함께 영웅으로 설파된다.
 
그러므로 일베가 단지 타인의 고통에 공감을 못하는 감성적 소통의 무능력자들이라고 단정해서는 안된다. 이들이 세월호 사고의 유족들에 대한 감정이입을 ‘감성팔이’ 라고 부르며 거부하는 것은 감성의 주파수를 다른 곳에 맞추겠다고 하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이로써 팩트주의-완벽한·비장한 국가-탈팩트주의의 원환적인 폐쇄적 구조가 완성된다.
 
‘일간베스트 저장소’는 증오와 혐오의 정치에 불을 지피는 우파적 주체화의 공장·저장소이다. 일베는 이 공장·저장소에서 자신들의 신념인 팩트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감성의 언어를 집요하게 구사한다. 일베의 이념이 진정으로 기반하고 있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팩트주의가 아니라 정동의 은밀한 관계이다. 따라서 일베의 이념은 우파적 이념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것과 무관해 보이는 표면에도 거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표면, 노골적인 향락의 언어와 정동의 언어는 생각보다 힘이 세다. 이 언어는 일베 저장소 바깥 어느 곳에서도 가공될 수 있을 만큼 규칙성과 체계성을 갖고 있고, 이미 많은 이들을 사로잡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처한 어려움은 일베의 언어가 펼치는 에너지가 공동체와 시스템, 그리고 국가를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을지에 대한 토론의 가능성을 봉쇄한다는 것이다. 이 봉쇄된 공간에서 반복되는 것은 선이냐 악이냐의 이분법과 순응이냐 전복이냐라는 프레임이다. 우리가 이 봉쇄된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글·김수진
서울대학교 여성연구소 책임연구원. 저서 <신여성, 근대의 과잉>, 논문 <아이디주체와 여성의 정치적 주체화: ‘나꼼수-비키니 시위’ 사건을 중심으로>외 다수.
 
글·윤보라
서울대학교 협동과정 여성학전공 박사과정. <온라인 외모관리 커뮤니티와 20-30대 여성들의 정치 주체화: ‘2008 촛불’ 맥락을 중심으로> (석사논문), <일베와 여성혐오: “일베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