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즈 안에 국가는 없었다!

2014-04-28     이상엽<사진작가>

 세월호 침몰 사고는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48분경 대한민국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부근 황해상에서 발생한 여객선 침몰 사고다. 세월호에는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 325명과 선원 30명 등 총 476명이 탑승하였다고 알려졌다. 이 글을 쓰는 4월 26일 현재 사망 187명, 구조 174명, 실종 115명이다. 최초 실종자는 3백 명이 넘었고 이들에 대한 수중 구조는 실상 0명이었다. 그리고 실종이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이지만 누구나 그 사람들이 차디찬 진도 앞바다 선실 안에 있다는 것을 안다.

 

 국가란 무엇인가?

 

 
이제 현장에 내려간들 내게 취재를 요청할 언론사는 없다. 전국의 언론사가 모두 기자를 파견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갔다. 포토저널리스트였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기고하는 사진도 별로 없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현장을 보고 기록해야만 할 것 같은 무거운 책임감이 밤차에 몸을 싣게 했다. 진도대교를 지나 39km를 달려 해변이 나타나고 멀리 팽나무 숲이 인상적인 팽목항에 도착했다. 항구로 들어가는 도로는 차단됐다.
 
1km 정도 걷는 도로의 양쪽으로 무수한 앰뷸런스 차량과 관변단체, 봉사단체들의 천막들. 팽목항 터미널에는 상황대책본부가 차려지고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소름 돋을 정도로 무거운 분위기는 20년 취재 경험상 처음이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와 분노에 찬 고성만이 불현듯 침울한 정적을 깨뜨렸다.
 
현장에서 듣는 가장 인상적인 단어는 국가다. 삼풍백화점 붕괴나 성수대교 붕괴처럼 내 평생 여러 재해를 현장에서 봤지만 이번만큼 비참한 일도 없다. 사망과 실종자 수도 놀랍지만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국가의 실종이었다. 국가-국민 동일체라 생각해 온 이에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국가는 지배 권력의 조직이다. 땅이 있고 인간이 있고 나중에 국가라는 조직이 출현한 것이다.
 
이 조직은 지배 권력을 위해 유지되며 때론 폭력적으로 때론 유화적으로 국민들을 관리하고 통제한다. 현재 인류에게 국가 없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기에 국가란 공기처럼 당연한 것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국가가 요구하는 의무를 다했음에도 생명과 재산을 위협받는 상황이 개인에게 몰아닥쳤을 때 당신은 무엇을 떠올릴까? 그것을 신속하게 해결해주기는커녕 무능과 은폐, 기만과 공작이 대신 돌아온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의 일본 노작가 마루야마 겐지는 칠십의 거칠고 쉰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국가란 누구의 것인가. 독재국가는 물론, 이상적인 민주주의 국가 역시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특정 소수의 것이다. 더는 민주적일 수 없을 만큼 민주적인 국가라 하더라도 실제로 그 나라는 특정 소수의 사유물이거나 거의 사유화된 동산이며 부동산이다.” 그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지진해일로 인한 원전 사고의 주범인 전력회사의 보스 등이 그야말로 대표적인 특정 소수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이어서 “국가는 틀림없이 그들의 소유물이다. 국가를 소유한 자들은 당연히 특권적인 혜택을 계속 누리기 위해 온갖 대의명분을 쥐어짜낸다. 대표적인 것이 민족주의를 내세운 사상이다. 국가의 실체는 싹 가리고, 사실은 국민 취급을 못 받는 국민을 향해 국민이 국가를 사랑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감정이며 당연한 의무라고 설파한다”고 지적했다.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이야기들과 너무 겹친다. 혹시나 정권에 누가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정치권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관료들, 이 틈에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내보이려는 우익들까지 사태의 진실을 가리고 호도하려 한다.
 
 

재난을 보도하는 언론은 무엇인가?

 

 
하지만 개인은 국가에 저항하기 힘들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 무력하다. 그래서 비국가 민간 조직인 언론에 호소한다. 언론은 여론을 만들고 그것으로 국가를 압박하고 변화를 만든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일까? 아니다. 팽목항 현장에 존재하는 수백 명의 기자들이 있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피해자 가족들의 시선은 불신을 넘어 혐오하고 적대시한다. 기레기(기자 쓰레기를 줄인 속어)라는 말은 여기서 출발한다. 팽목항 터미널 건물 옥상을 점령하고 온갖 카메라와 송출장치를 설치하고는 사실상의 컨트롤 타워인 양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정부를 대변하겠다고 자처하거나 피해자 유가족 사이에서 조정자를 자임했다. 펜과 카메라는 종횡무진 고통을 후벼 파는 칼날이 된다. 계속되는 오보와 왜곡 진실을 더욱 은폐하고 멀어지게만 한다.
 
100년 전 이런 사태를 예견한 듯이 발터 벤야민은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에서 “파시즘은 대중이 무너뜨리려 하는 소유구조는 그대로 둔 채 새롭게 형성된 프롤레타리아 대중을 조직화하려 한다. 파시즘은 대중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대신 대중이 자신을 표현할 기회를 부여하는 데서 구원을 찾으려 한다”고 했다. 마루마야 겐지 역시 화답하듯 “국가는 아예 당신이 어른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국가는 교육·미디어·대중문화·저명인사를 동원해 국가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어리석음과 노동의 정신에 반하지 않을 만큼의 현명함을 가진 어중간한 국민을 만든다”고 했다.
 
지금 팽목항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진기자와 피해자 가족들의 취재 문제에 있어서 특히 초상권이 문제가 되고 있다. 초상권 문제는 재산권이 아닌 인격권이라는 측면이다. 이미 기자협회와 사진기자회는 재난보도 가이드라인과 윤리를 제정한 바 있다. 기자협회는 “영상 취재는 구조활동을 방해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공포감이나 불쾌감을 유발하지 않도록 근접취재 장면의 보도는 가급적 삼간다”라고 했으며, 사진기자협회는 윤리규정을 통해 “우리는 공적인 이익을 위한 사안을 제외하고 개인의 명예와 사생활을 침해할 우려가 있는 사진취재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사진기자들은 경쟁하듯 문제 있는 사진을 찍어 전송했고, 매체를 통해 지면화되었다.
 
 

사진취재 윤리강령을 준수했는가?

 

 
기자들의 대다수 심리 안에는 공리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사진 정보가 다수에게 이익이 된다는 생각, 따라서 더 참혹하고 비참할수록 그 가치는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들은 사진을 촬영하고 지면화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피해자 가족들은 윤리적 절대주의 입장에 선다. 특히 나의 비참한 얼굴이 사회 이익과 상관없고 오히려 내게 깊은 상처만 남긴다는 것이다. 프라이버시는 침해할 수 없는 영역이며 사진촬영에 대해서는 승낙을 얻어서만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자신들의 사정을 열심히 이야기하고 사진 찍혀봐야 언론화되지 않고 도리어 정부 방침을 홍보하는 전도된 증거로서 보도되고 있다는 것이다. 선동하는 불순 외부세력 또는 종북으로까지 몰리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타협점은 있을까? 베트남전의 즉결처분 사진으로 전쟁의 방향을 틀어버린 에디 애덤스는 전투현장에서 공포에 얼굴이 일그러진 18세 해군병사의 사진을 찍으려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남이 내게 해주기를 기대한 만큼 나도 남을 대하라." 이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근대적 인간관계의 윤리는 오늘의 그 무엇도 아닌 제도 자체가 되어 버렸다.
 
 

증거 사진은 어디에 있는가?

 

 
예술사학자인 존 탁은 그의 에세이 <증거, 진실 그리고 위계>에서 “사진은 그 자체로 아무런 정체성이 없다. 일관된 역사도 없다. 사진은 제도라는 공간의 장을 가로질러 명멸하는 빛의 깜박임일 뿐이다”라고 했다. 사진기자들이 팽목항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거대한 재난의 본질적인 문제를 증거하고 그 진실을 사진에 담았다고 한들 그가 속한 신문이나 방송이라는 제도, 국가라는 제도 안에서 규정될 뿐이다. 결국 사진과 동영상을 취재하는 수백 명의 인력들이 만들어 내는 시각 정보는 중립적이지 않다. 기록수단으로서의 사진은 이곳 팽목항에서도 공식적으로 권위를 부여받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으로 현장의 모든 것을 보았다고 인정해 버린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증거되지 않은 현장의 모습과 사진은 지천으로 널려있다. 이 사진들은 국가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장이 아닌 SNS 같은 낮은 위계의 장에서 사건을 바라보았다. 존 탁의 이야기처럼 “사진은 역사의 증거가 아닌 역사 그 자체”이다.
 
글·사진 이상엽 (진도 팽목항)
다큐멘터리 사진가.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이사로 있다. <레닌이 있는 풍경>(산책자) 등의 책을 쓰고 <변경>(류가헌) 등의 개인전을 열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비롯해 신자유주의가 낳은 사회의 풍경을 7년째 찍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