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프레임에 갇힌 안철수

2014-04-28     정승일<사회민주주의 센터 공동대표>

 

‘새’ 정치를 선언하며 등장한 안철수 의원이 내세운 최고의 가치는 ‘정의’다.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란 ‘특권과 반칙이 없는 사회’, ‘민주적 공공성이 회복된 사회’라고 한다. 안철수와 김한길이 이끄는 새정치민주연합이 제시한 최고의 가치 역시 ‘정의와 공공성을 핵심으로 하는 참다운 민주정치’라고 한다.

정의가 바로 서는 나라에서 이명박 식의 시장만능주의는 사라져야 한다. 시장만능주의가 아닌 국가개입주의, 즉 민주국가에 의한 시장개입이 하나의 원칙으로서 선언되어야 한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서로 다른 두 갈래의 국가개입 경제론이 등장했다. 하나는 복지국가론이고, 또 하나는 정의국가론이다. 복지국가론이란 스웨덴식 복지국가를 만들자는 입장이고 보편적 복지와 함께 노동권을 강조한다. 경제민주화의 핵심으로 노동권 강화를 제시한다.
 
그에 반해 정의국가론이란 ‘반칙·특권 세력인 재벌과 모피아(경제관료)’를 해체하여 ‘반칙과 특권이 없는 공정·공평한 세상,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게 보편적 복지와 노동권 강화보다 훨씬 더 시급하고 소중하다는 입장이다. 경제민주화의 핵심으로 재벌그룹 개혁을 제시한다.
 
문재인이 2012년 대선에서 패한 이유
 
노무현 정부는 ‘반칙과 특권이 없는 세상’을 슬로건으로 삼았다. 그 정신을 승계한 문재인 대통령 후보는 2012년 내내 “반칙과 특권이 없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복지국가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면서, 보편적 복지와 노동권 신장보다는 재벌그룹 개혁을 역설했다. 대통령 선거의 슬로건으로 순환출자 규제와 출자총액 제한, 지주회사 규제, 금산분리 같은 재벌그룹 규제를 내놓으면서 박근혜 후보의 경제민주화 공약은 진정성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보편적 복지와 비정규직 차별 시정, 노동조합권 강화와 같은 복지·노동 정책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물론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복지국가고 경제민주화고 할 것 없이 특별한 쟁점이 되지 않았다. 박근혜 후보까지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를 하겠다고 하는 통에 미래 비전을 가지고는 후보 간 차별화가 어려워졌다고 판단한 문재인 캠프와 진보 언론이 미래 대결이 아닌 과거 대결, 즉 박정희-장준하 논쟁으로 선거판을 끌고 갔기 때문이다. 미래가 아닌 과거에 주력한 그 전략은 결국 문재인 후보가 패배한 핵심 요인이 되고 말았다. 먹고 살기 힘들어하는 많은 서민들이 “미래 희망을 좀 보여 달라”고 아우성치는데도 그 요구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재인 캠프와 진보언론에 내재된 자유주의 프레임의 한계였다. 박근혜 후보가 하겠다는 복지국가가 스웨덴 수준도 아니고 미국 수준도 안 되는 낮은 것인데, 그렇다면 문재인 쪽은 더 높은 수준의 복지국가를 미래 비전으로서 과감하게 제시하고 그에 관한 구체적인 그림을 보여주면서 박근혜 후보와 차별화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과감한 구상이 자유주의 사상의 프레임에서 나올 리 만무했다.
 
보수적 시장주의자 즉 신자유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볼 때 복지국가는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못하다. 왜냐하면 복지국가는 ‘개미처럼 열심히 땀 흘리고 검약하고 저축하여’ 부를 축적한 부유한 사람들에게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여 ‘그 돈을 게으른 베짱이 같은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유시장 자본주의야말로 가장 정의롭고 공정한 체제”라고 본다. 로버트 노직 같은 자유지상주의자들(libertarians)은 빈부격차가 아무리 커진다 하더라도 ‘정의롭다’고 말한다. 부유층에게 고율의 세금을 매겨 그 소득을 가난한 이들에게 재분배하는 것을 일종의 약탈, 강도질로 간주한다. 정당한 노력에 의해 쌓은 부를 강제로 약탈하는 날강도질이라는 것이다.
 
개혁적 자유주의 틀 속의 안철수
 
그렇다면 개혁적·진보적 자유주의를 말하는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낫지 않을까? 그들 역시 정의와 함께 복지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안철수와 문재인 역시 복지를 말한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보편적 복지와 복지국가는 여전히 ‘정의’와 ‘공정·공평’이라는 1차적 가치에 비해 후순위로 밀리는 2차적 가치에 지나지 않는다.
 
장하성과 최태욱, 최장집 같은 개혁·진보적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공정한 시장질서가 경제민주화의 핵심이라고 말하며 그리고 재벌그룹 개혁과 경제관료(모피아) 타도를 통해 공정한 시장질서가 구축되면 누구에게나 공정·공평한 정의로운 세상이 열릴 것처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재벌그룹과 관치 같은 ‘왜곡’ 요인만 없다면 본질적으로 공정하고 공평한 정의로운 체제라고 본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유주의 경제사상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의 경제관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장하성과 김광수, 정운찬 같은 개혁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왜곡’ 요인이 제거된 공정한 시장질서가 만들어지게 되면 누구나가 ‘자신의 노력에 상응하는 시장소득’을 얻으므로 빈부격차가 확실하게 개선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1차적 소득분배(시장소득)의 개선이 2차 소득분배(세금징수와 복지예산을 통해 이루어지는 소득의 재분배)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전형적인 주류 경제학, 자유주의 경제사상의 프레임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경제민주화, 즉 재벌그룹 개혁과 모피아 개혁을 통해 1차 소득분배의 개선이 이루어지게 되면 복지국가, 즉 2차 소득분배는 최소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더구나 그렇게 되어야 정의와 공정·공평이 이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번 지방선거판에서 안철수가 이끄는 새정치민주연합이 왜 새롭고 과감하며 감동적인 생활정치 이슈, 복지 이슈를 집중적으로 제기하지 않는지 그 이유가 설명된다. 더구나 지방선거판에서 재벌그룹 개혁과 모피아 개혁을 내세울 수도 없지 않은가!
 
공정한 시장질서와 무한 경쟁질서는 한끝 차이
 
반칙과 특권이 없는 시장 경제란 누구나 공정한 룰을 지키면서 경쟁하는 시장이고, 따라서 누구나가 ‘경쟁적 시장에 참여 또는 진입할 기회’를 동등하게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공정한 시장 경쟁 질서를 가로막는 시장 ‘왜곡’ 요인, 즉 반칙·특권 세력은 무엇일까?
 
단지 재벌과 모피아만이 아니다. 학벌 좋은 자들의 특권과 반칙, 공무원 및 공공부문의 특권과 반칙, 대기업 정규직과 그 노동조합의 특권과 반칙, 의사·변호사들의 특권과 반칙 등 모든 특권·반칙 세력이 문제로 된다. 이들 모두가 시장의 공정성과 합리성을 저해하는 시장 ‘왜곡’ 요인으로 간주될 수 있다.
 
따라서 자유주의의 옹호자들 중 일부는 재벌과 노동조합, 공무원(행정고시), 의사(의사고시), 변호사(사법고시) 등 일체의 독점과 특권을 비판하면서 그것들 모두를 해체하여 ‘완전 경쟁 시장’ 논리에 맡겨야 한다고 한다. 그들은 재벌그룹을 깨야 하고, 민주노총 등 노동조합을 깨야 하며, 공무원과 공기업의 철밥통 일자리 역시 특권이므로 그것 역시 깨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려면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공무원과 교사, 공기업 직원의 숫자를 줄여야 한다. 특권적 법조인을 양산해온 사법고시 제도를 없애고 그 대신 시장 논리에 따라 공정·공평하게 법조인을 양성하는 미국식 로스쿨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실제 노무현 정부는 이 모든 것을 ‘반칙과 특권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국정과제로 수행하려 했다.
 
기회의 평등, 결과의 불평등
 
자유주의는 ‘기회의 평등’ 즉 ‘공정한 경쟁 질서’를 1차적인 것으로 중시하면서 ‘결과의 평등’ 즉 소득재분배와 같은 복지정책을 2차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후순위로 놓는다. 그런데 말이 좋아 공정 경쟁이지, ‘누구도 특권이 없는 공정한 경쟁질서’를 조금만 뒤집어 놓으면 이른바 ‘무한 경쟁’이 된다.
 
‘공정 시장’ 자본주의와 ‘자유 시장’ 자본주의 간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안철수와 문재인 이 그 정신을 계승했다고 공언하는 김대중·노무현 민주 정부는 공정한 경쟁 질서를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면서 자유주의적 시장개혁을 추진했고 그 결과 시장이 더욱 경쟁적으로 되어 더욱 무한경쟁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결과의 불평등’이 더욱 심해졌다. 이명박 정부는 그걸 더 극단적으로 밀어붙였으며 박근혜 정부 역시 그것을 계승하고 있다.
 
공정한 시장질서의 이름으로 시장이 더욱 경쟁적이 된 결과, 결과의 불평등 즉 소득분배의 불평등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빈곤층-부유층,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 간에 결과(성과와 소득)의 분배에 있어 불평등의 정도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시장 정의(market justice)는 더 고취되었을지 몰라도 사회정의(social justice)는 땅으로 추락한 것이다.
 
지방선거, 4년 전 한명숙 패배 반복되나?
 
2010년 6월의 지방자치 선거에서 오세훈 후보에 맞서 서울시장 후보로 나섰던 민주당의 한명숙 후보도 “반칙과 특권이 없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복지국가보다 중요하다”고 자주 발언하였다. 당시는 무상급식이라는 보편적 복지 이슈가 선거판을 휩쓸고 있었고 그 덕택에 야권이 전국적으로 승리했다. 그런데도 한명숙 후보는 유별나게 무상급식 이슈를 외면했으며 서울시장 선거에서 야권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패했다.
 
다가오는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야권은 4년 전 무상급식에 필적할 만한 감동적이며 과감한 생활정치 이슈를 치밀하게 준비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자유주의 프레임에 갇힌 한국의 야권 정치가 또 다른 패배를 예고하고 있다.
 
청해진해운 침몰 여객선에서 도망친 선장은 1년 계약직(비정규직)이었고 따라서 애당초부터 책임과 명예, 권위를 가지고 승무원들과 함께 승객들의 탈출을 지휘할 권한이 없었다. 이렇듯 비정규직 노동 문제가 나라 전체의 안전을 위협하고 온 국민이 슬퍼하는데도 야권은 그런 ‘부차적’, 2차적인 문제에 집중하지 않는다. 자유주의의 가치관이 지배하는 야권 정치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글·정승일
서울대 물리학과를 다녔으며, 1980년대 내내 철학과 정치경제학, 민주화운동에 몰두했다. 1991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베를린 훔볼트대학 사회과학부에서 석사학위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정치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베를린사회과학연구소와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 금융경제연구소,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등에서 근무했으며,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 및 운영위원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Crisis and Restructuring in East Asia>, <쾌도난마 한국경제>(공저), <역동적 복지국가의 길>(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