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 부호들의 먹잇감이 된 동유럽 축구클럽

2014-06-03     발타자르 크뤼벨리에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중부 유럽과 동유럽의 정상화는 축구와도 연관이 있다. 서유럽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형성된 동유럽의 주요 축구 클럽들은 간혹 소수 권력이 불법으로 축적한 자산의 먹잇감이 되곤 한다. 축구 클럽들이 소수의 신흥 부호들에 의해 운영될 판이다.

동유럽의 대부분의 축구 클럽은 지리적, 문화적, 정치적 사건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했다. 프랑스의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나 영국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수도에 적을 두지 않은 클럽이라 이채롭고, 스페인의 아틀레틱 빌바오는 오로지 바스크 출신 선수들만 선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반면에 동유럽의 주요 클럽들은 국가 기관이나 구단 이름을 결정하는 직업 관련 협회로부터 명칭이 유래했다. 예를 들면 ‘군대 중앙 스포츠클럽(CSKA)’이나 ‘철도원’을 지칭하는 로코모티프 클럽 혹은 ‘내무부’를 뜻하는 디나모 클럽 등이 여전히 존재한다. 물론, 스테우아 부쿠레슈티(루마니아)를 비롯한 두클라 프라하(체코)와 혼베드 부다페스트(헝가리) 클럽처럼 군 기관 소속팀이지만 통상적으로 군 명칭을 쓰지 않는 지역 클럽들도 존재한다.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 베오그라드는 오랫동안 경찰청 소속팀이었으며, 폴란드의 이른바 콜레요시(Kolejorz, 철도원)로 불리는 레흐 포즈난 클럽은 오랫동안 폴란드 철도청 소속팀이었다.

이러한 특색은 옛 소련 국방부가 대주주로 있었던 CSKA 모스크바 클럽을 제외하곤 1990년대에 약화되었다. 다른 클럽들은 단순히 서포터들이 클럽 명칭에 굉장한 애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명칭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1993년, 크로아티아의 민족주의 대통령 프라뇨 투지만은 디나모 자그레브를 ‘크로아티아 자그레브’로 구단 이름을 바꾸려다 결국 실패한 적도 있다.

동유럽은 서유럽의 잘못된 관행을 따라할 정도로, 현대 축구의 규칙에 맞춰 적극적으로 변화했다. 선수 에이전트들이 동유럽을 좌지우지하며, 실질적인 스포츠 논리도 없이 선수 이적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클럽 간 예산 차이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부자 클럽들이 해외에서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고 있어, 경쟁 클럽들은 선수 이적을 통해 경제 이득을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선수 육성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행이 티켓 가격의 상승으로 이어지며 경기장 관람객 수가 현저히 줄었다.

더군다나 동유럽 축구 클럽들은 1990년대에 부를 쌓은 투자자들에게 대폭 개방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지도층(90년대에 부를 쌓은 투자자들)은 유럽 환경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꿰찼다. 이들 중 샤흐타르 도네츠 클럽 회장 리나트 아흐메도프와 유럽연합 축구협회(UEFA) 회장 미셸 플라티니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중부와 동유럽의 축구 클럽들을 UEFA 챔피언스 리그에 더 많이 참가시키기 위해, 이 대회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과거엔 때때로 신비감을 자아내기도 했지만, 현재는 비(非)정형적인 모습을 주로 보이는 이 같은 인물들이 현재 유럽 축구 시장의 절반가량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폭력적인 상황 속에서 현재 지위에 올랐다. 예를 들면, 아흐메토프는 테러로 사망한 아흐타 브라긴의 뒤를 이었다. 1995년과 2007년 사이에 6명의 로코모티프 플로프디프 클럽 구단주들이 저격을 당했다. 구단을 손에 넣은 신흥 갑부 대부분은 몇몇 소수를 제외하곤 현명하게 처신하고 있다. 물론 소수 인사는 축구 전문 언론 매체가 지향하는 경영방침, 즉 온건, 신중, 인내, 합리성을 중시하는 경영모델을 완강히 거부한다. 이들 소수는 수백만 유로를 들여 자서전을 쓰고, 자신들의 명성에 먹칠하는 스캔들과 발언들을 일삼는다. 미국 프로 레슬링(1)에 걸맞을 것 같은 이 독재자들은 한편으론 축구장 밖에 가십거리를 제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논쟁 예술의 현란함을 보여주며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고 있다.

프랑스의 맹수들(신흥 부호들)은 1980년대 클로드 베즈(보르도 축구클럽 구단주)와 베르나르 타피(마르세유 축구 클럽 구단주)에 의해 주로 구현되었다. 이들의 명성은 자신들이 소유한 축구 클럽을 크게 능가했다. 몽펠리에의 구단주 루이 니콜랭은 멸종 위기에 처한 마지막 남은 프랑스 맹수 중 하나다. 니콜랭은 언론과의 인터뷰 도중 돌출 행동, 즉 상대팀 주장을 “귀여운 타르루즈(tarlouze, 게이)”라(2) 지칭해 유명세(?)를 탔다. 매스컴이 들끓자, 그는 성의 없는 사과 발언을 했다. “나는 ‘타르루즈’란 단어를 사용하기 10분 전에야 겨우 알았다. 여기저기서 ‘타르루즈’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 울림으로 남아 있던 ‘타르루즈’를 마이크 앞에서 내뱉은 것이다. 사과는 드리지만, 나는 동성애 혐오자가 아니다. 동성애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 같은 이성애자들에겐 여자들이 더 많이 생길 테니까.”(3)

1990년대 초반 공산국가들의 붕괴 이후, 중부 유럽과 동유럽의 축구 관람객들은 축구장에서 니콜랭처럼 돌출행동을 하는 지도자들을 발견하게 된다. 크로아티아 축구계의 핵심 인사인 자드라브코 마믹도 그런 지도자 중 한 명이다. 1959년 벨로바르에서 출생한 이 기업인은 임업 회사와 양조장을 운영해 큰 돈을 벌었다. 마믹은 발칸 전쟁 때 자신의 회사 지분을 무기상에게 팔아넘긴 뒤, 디나모 자그레브 축구 클럽 내에서 축구선수 에이전트로 활약하며 밑에서부터 치고 올라가 구단주 자리까지 꿰찬 인물이다.

마믹은 클럽 구단주 활동과 병행해, 자신과 재정적으로 엮여 있는 자신의 클럽-크로아티아챔피언컵에서 최다 우승 경력-선수들의 여러 계약을 직접 챙기고 있다. 선수 에이전트로 역시 활약하고 있는 그의 아들 마리오가 관리하는 선수 중엔 디나모 자그레브 축구 클럽 선수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이 같은 이익 충돌이 서포터들의 불만을 자아내고 있지만 마믹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면 험하게 굴게 뻔했다.

2010년 말 언론 인터뷰 때, 모든 질문에 답변할 준비를 하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마믹은 한 기자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자 미소를 띤 채 쏘아붙였다. “넌 이 나라 최고의 거짓말쟁이와 최고의 조작자 중 한 명이야. 넌 쓰레기이고 괴물이야. 넌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살지.” 기자가 그에게 답변을 채근하자 그는 인내심을 잃고 폭발했다. “내 아들은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고, 일도 잘하고 있다. 이 무뇌아 얼간이 녀석아. 내가 디나모를 떠나는 날, 널 뒈지게 패줄 것이다.” 이에 굴하지 않고 대담한 기자가 계속 채근하자, 이번엔 완전히 평정심을 잃은 마믹이 고함을 질렀다. “고통 받는 국민들에게 거짓말하지 마! 넌 그럴 권리가 없어! 너 같은 인간들 때문에 내가 퇴폐적이고, 폭력적인 바보 취급을 당하는 거야!”(4)

크로아티아에서 동쪽으로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른바 ‘지지’로 불리는 조지 베칼리가 스테우아 부쿠레슈티 클럽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비교적 부유한 루마니아 목동 집안 출신인 베칼리는 1998년 루마니아군과의 토지 거래를 통해 큰돈을 벌었다. 그러나 그가 상당한 차익을 실현한 이 거래는 많은 세무조사와 법정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일각에서는 그의 부동산 소유권의 유효성과 도심 한복판에 있는 땅을 헐값에 팔아넘긴 군의 정당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베칼리는 남이 뭐라 하건 전혀 개의치 않고 스테우아 부쿠레슈티 클럽의 지분을 사들였고, 이후 전 군대 클럽의 구단주 후보들을 한 명씩 제치고, 2003년 2월, 클럽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 그는 2007년부터 공식적으로 자기 지분의 대부분을 조카들에게 물려줬다.

루마니아에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는 최고 명문 클럽의 구단주 자리는 베칼리에게 정치적 견해를 낼 수 있는 최상의 공명상자를 제공한 셈이다. 실제로, 이 사업가는 2004~2012년까지, 중도 정당으로 출범한 차세대 기독교 민주당을 이끌면서 세계대전 이전의 파시즘을 연상시키는 국수주의 정당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인종차별과 동성애 혐오 발언을 일삼는 데다 기자들을 학대하는 버릇도 있다. 또 그는 잠시지만 유럽연합 의원직도 지냈다.

2007년, 자신의 클럽이 헝가리어권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도시, 클루지나포카에 연고를 둔 CFR 클루지 클럽과 경기할 때, 베칼리는 ‘헝가리 프리메이슨’이 자신의 경쟁 팀에 재정지원을 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승부욕을 불태우기 위해 이 같은 의구심을 드러낸 그는 “만약 루마니아 챔피언컵에서 헝가리인들이 승리를 하면 루마니아는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외쳤다.(5) 그는 또한 자신의 클럽엔 경쟁클럽과 달리 루마니아 출신 선수들만 뛰고 있다고 강조했다. 결국 루마니아 챔피언컵은 클루지 클럽이 차지했고, 베칼리는 안토니오 세메도를 영입한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그는 클루지 클럽의 흑인 공격수 세메도를 맞이하는 환영사에서 “난 유색인종을 좋아하진 않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세메도는 우리가 헝가리인 클루지 클럽에 그냥 놔두기엔 너무나 훌륭한 선수이다”(6)라고 따뜻한(?) 말을 했다.

이처럼 성깔 있는 구단주들은 기자들을 자극해 자신들의 명성-전혀 명예스럽지 못한 명성이긴 하지만-을 쌓음으로써, 서포터들에게 자신들이 범접할 수 없는 숭배의 대상임을 보여주려 노력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들은 클럽 관리 직원들을 갑작스럽게 해고하거나 채용하길 밥 먹듯이 하고 있다. 이전에 철의 장벽지대였던 동유럽은 온갖 괴상한 짓도 허용하기 때문에 동유럽에 진출한 프랑스인들의 주의가 필요하고, 프랑스 법률도 이에 대한 대처가 필요했다. 2005년 6월 이후, 마믹은 자신의 클럽이 크로아티아 챔피언컵에서 연속 9번이나 우승했지만, 12명의 감독을 갈아 치웠다. 이에 비해 같은 기간 동안, 프랑스에서 ‘감독의 무덤’으로 불리는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클럽에선 5명의 감독이 교체됐다.

루마니아의 베칼리 또한 요행을 바라고 일시적으로 사람을 고용하기로 이골이 난 위인이다. 2010년 8월, 빅토르 피투르카가 스테우아 부쿠레슈티의 감독 취임 59일 만에 감독직에서 물러나자, 구단주는 일리에 두미트레스쿠에게 감독직을 맡기며 “무보수로 감독직을 맡은 아주 좋은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 달 후, 두미트레스쿠는 ‘이슬람 광신도’로 몰려 금세 해고되었다. 이후, 베칼리는 스테우아 클럽의 장기적인 안목을 보고 마리우스 라카투스를 영입했지만 그 또한 이듬해 3월에 감독직을 사임했다. 그러자 클럽 구단주는 “이 팀은 내가 만든다. 우린 민주주의에 살고 있지 않다”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이후 그는 소린 시르투를 시즌 4번째 감독으로 영입하며, “난 시르투에게 3개월을 주고 지켜보겠다”고 했다.(7) 그러나 시르투는 5월 5일, 계약 연장에 실패해 팀을 떠났다. 이 같은 구단주들의 방식은 인기보다는 근심을 키운다. 디나모나 스테우아의 서포터들은 팀의 승리와 무관하게 보이콧을 통해 정기적으로 구단주들의 운영에 항의하거나 때론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곤 한다.

세계와 유럽 축구 당국이 스포츠의 결집력과 인도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는 가운데, 축구산업계는 막후에서 벌어지는 일에 자신의 동료들처럼 입 다물고 있지 않고 자신들에 맞서며 축구산업을 가로막는 대표적인 인물들을 내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언론계에서는 저 구단주들에게 멋지게 한 방 먹이기 위해 ‘좋은 먹잇감’을 찾는 데 혈안이지만, 세상물정에 훤한 저들은 걸려들지 않고 있다.

2010년, 블라트코 마르코비치 크로아티아 축구연맹 회장은 “크로아티아 국가대표팀에 동성연애자가 설 자리는 없다”고 천명했다. 이 같은 발언이 신문 판매를 늘릴 절호의 기회라 생각한 기자들은 꼭 필요한 마믹의 반응을 신문에 게재하기 위해 즉각 그에게 인터뷰를 시도했다. 그러나 디나모 자그레브 클럽의 구단주는 이런 지적을 했다. “당신들은 과연 정상적인 이야기에 관심이 있을까? 아님 이런 이야기에만 관심이 있을까? 당신들이 쓴 기사 중 90%는 다 헛소리다. 어쨌든 당신들이 축구연맹 회장 발언에 대한 내 의견을 원하는 것 같으니 말해 주겠다. 내 클럽에서도 게이 선수들은 뛸 수 없다. 난, 게이가 공차며 몸싸움, 태클, 헤딩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게이는 축구선수보다는 무용수, 예술가, 작가 혹은 기자가 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8)

글․발타자르 크뤼벨리에 Balthazar Crubellier

번역조은섭 chosub@hanmail.net

(1) <미국 레슬링의 영광과 망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5월호

(2) 2009년 31일, 오세르와 몽펠리에 경기 후에 카날플뤼스와 가진 기자회견

(3) 일간 <미디 리브르>, 2009년 11월 30일

(4) 즉석 기자회견, 자그레브, 2010년 12월 22일

(5) 기자회견, 부쿠레슈티, 2006년 11월 15일

(6) 기자회견, 부쿠레슈티, 2008년 10월 31일

(7) 기자회견, 부쿠레슈티, 2010년 8월 13일, 9월 29일, 5월 6일, 10월 20일

(8) 기자회견, 자그레브, 2010년 11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