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을 예찬하는 이유

[기획/혁명은 왜 일어나는가]혁명은 역사와 의식에 영원한 흔적 남겨

2009-05-05     세르주 알리미 | 프랑스판 발행인

혁명과 반혁명이 저지른 폭력, 함께 기억해야
변혁은 불만 폭발과 지배 권위 상실에서 비롯


 

 1789년 대혁명 후 220년이 흐른 지금도 혁명군은 움직인다. 그러나 프랑스대혁명 200주년 기념식 당시 프랑수아 미테랑은 마거릿 대처와 조제프 모부투에게 혁명의 종식을 확인하라고 권유했다. 그해 베를린 장벽이 붕괴했고,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을 선언했다. 자유주의가 영원히 세계를 지배할 것이며 혁명이라는 막간극은 완전히 끝났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위기는 또다시 소수 권력층의 정당성을 뒤흔들었다. 이에 대한 반응은 때로는 가볍고, 때로는 무겁다. 한 예로 <르피가로>는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폭동을 선동한다”며 상황을 유감스러워한다. “프랑수아 퓌레가 오판한 듯하다. 프랑스혁명은 끝나지 않았다.”(1)
 프랑수아 퓌레(프랑스의 역사학자)도 다른 많은 이들처럼 혁명의 기억을 몰아내고 유혹을 멀리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과거에 혁명은 ‘역사적 필요성’(마르크스)이나 ‘역사의 새로운 시대’(괴테), 또는 빅토르 위고가 찬양했던 ‘혁명력 2년’ 당시의 병사들이 써내려간 영웅서사시로 간주됐다.

혁명, 피의 이미지로만 기억 
 그러나 오늘날 혁명은 손 위를 흐르는 피의 이미지로만 형상화될 뿐이다. 루소에서 마오쩌둥까지, 평등주의적이고 폭력적인 유토피아가 개인의 자유를 짓밟고 전체국가라는 냉혹한 괴물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부활했고 혁명을 압도했으며 평화와 안정의 시기가 도래했다. 민주주의도 혁명의 유산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미국식·영국식 혁명의 유산으로 사회혁명이라기보다 정치적 성격이 강하며 ‘카페인 없는 커피’와 같다.(2)
 영국에서도 왕이 처형당했다. 그러나 영국 귀족의 저항은 프랑스 귀족보다 덜 격렬했고, 부르주아는 지배를 확고히 하려고 민중과 연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상류층에게는 불온한자들도 없고, 과격 공화파도 없는 영미식 모델이 프랑스 모델보다 더 우아하며 덜 위험한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파이낸셜타임스>의 기자와 인터뷰한 로랑스 파리조 프랑스 경영자총연합회 회장은 이렇게 다른 기업인들의 감정을 대변하고 있다. “프랑스 역사는 좋아하지만 혁명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혁명은 우리가 아직도 고통받고 있는 극단적인 폭력 행위였고, 그 때문에 우리 모두는 어떤 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는 영국처럼 성공적으로 민주주의를 적용하지 못했다.”(3)

 ‘편 가르기를 한다는 것.’ 구성원 모두가 제 분수를 알면서도 자신의 기업과 사주와 명성에 대한 결속력을 보여야 할 때 이런 극단적인 사회현상은 좋지 않다. 사실 혁명을 비판하는 자들에게, 혁명의 주된 과오는 역사에서 흔히 반복되는 폭력이 아니라 부자와 빈민의 갈등을 계기로 폭력보다 훨씬 더 드물게 발생하는 사회질서의 전복이다.
 1988년 조지 부시 대통령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기술 관료인 민주당 대선 주자 마이클 듀카키스를 비난하기 위한 결정적인 논거를 찾았다. “그는 우리를 계급으로 나누려고 한다. 계급은 유럽에는 맞을지 모르지만 미국에는 맞지 않는다.”

 미국에서 계급이라니! 두려움은 선거 결과로 나타났다. 그로부터 20년 후 미국 경제가 이익의 불평등한 분배 만큼이나 불평등한 희생을 강제하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 현 미국 대통령이 민중의 분노를 예방하는 것이 긴급하다고 판단했을 정도로 계급은 금기의 대상이다. “이 위기를 통해 얻어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미국 경제가 우리 모두 힘을 합칠 때만 작동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윤을 실현하려는 투자가나 기업가 모두를 악마로 치부할 수 없다.”(4) 오바마 대통령은 약간 의심의 눈초리를 받긴 했지만 혁명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혁명은 단절이다. 기존 질서, 자본주의 사회와의 단절을 수용하지 않는 자는 사회당의 일원이 될 수 없다.” 1971년 프랑수아 미테랑의 선언이다. 이후 사회당 가입 조건은 훨씬 완화됐다. 사회당은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 국제통화기금 총재도, 파스칼 라미 세계무역기구 사무총장도 제명하지 않았다. 혁명의 사고는 가장 급진적인 정당들을 포함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갔다. 우파도 외관상 여전히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기존 질서’에 반해 얻어낸 사회보장제도의 파괴와 개혁의 동의어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말로만 떠드는 얼치기들 
 그러나 주요 혁명들은 폭력성을 빌미로 비난의 대상이 됐다. 비판론자들은 1792년 8월 튀일리궁 점령 당시 학살된 스위스 용병들이나 1918년 7월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살해된 러시아 황실 가족, 또는 1949년 정권 장악에 성공한 중국 공산당에 숙청된 장제스 군 장교들을 폭력적 혁명의 희생자들로 지적한다.

 그러나 그런 사건에 분노하기에 앞서 구체제 아래 베르사유궁에서 화려한 무도회가 열리는 동안 민중들은 기아에 허덕였고, 성직자들은 십일조를 갈취했다는 사실을 은폐해서는 안 될 것이다. 1905년 1월 니콜라이 2세의 군대가 페트로그라드에 운집한 시위대 수백 명을 학살한 ‘피의 일요일’도, 1929년 열차 보일러에서 산 채로 불태워진 광저우 및 상하이의 혁명군들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과거에 없애려고 했던 사회질서의 일상적인 폭력은 말할 것도 없다.

산 채로 불태워진 혁명군 이야기는 단지 중국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 아니다.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을 읽은 수백만 독자들도 이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사실 수십 년 동안 가장 위대한 문인들과 예술가들은 노동운동과 보조를 함께하며 혁명과 밝은 미래를 찬양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들은 정치경찰, 강제 노역, 우상화, 처형, 족벌주의와 같은 혁명의 실망스러운 비극을 과소평가하기도 했다.
 
 “성공하려면 혁명 들먹여라”
 반면에 30년 전부터 우리는 혁명만 말하고 있다. 심지어 학계와 언론계에서 성공하려면 혁명을 언급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혁명은 폭력의 분출을 의미한다. 우리 사회는 극히 취약하다. 공적 담론을 형성할 수 있는 자의 주된 책임은 이 폭력의 분출에 대비하는 것이다.” 막스 갈로의 주장이다. 퓌레는 모든 급진적인 변화의 시도를 전체주의나 테러리즘으로 규정했고, “또 다른 사회라는 사고는 거의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 돼버렸다”고 평가한다. 퓌레는 “우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살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린다.(5) 이 운명은 폭풍우가 쳐도 보호받는 그의 독자들의 기대에 부합한다.
 갈로와 퓌레 외에도 많은 이들이 혁명의 두려움을 전파하고 보수주의를 정당화한다. 한 예로 영화계를 포함한 언론의 선택을 생각해보자. 30년 전부터 언론은 자유민주주의 밖에서는 독재정권과 독재정권 간 결탁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점을 밝히려 했다. 따라서 뮌헨협정과 히틀러와 체임벌린의 악수처럼 부자연스러운 다른 연합보다 독-소 협정을 훨씬 더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히틀러와 체임벌린은 적어도 민중전선을 증오한다는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 계급에 대한 두려움은 페라라의 귀족들과 루르의 철강업체들에도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제3제국과 무솔리니의 정권 장악에 힘을 보탰다.(6)
 
 공화국은 ‘민중 의지’의 산물
 좀더 논의를 진전시켜보자. 현명한 교수들로부터 그토록 존경받았던 레옹 블룸은 소련식 혁명의 거부를 명확히 이론화했다. 블룸의 친구 중 한 명은 소련식 혁명을 ‘타타르 소스가 뿌려진 블랑키즘’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블룸은 보통선거가 유일한 수단인 사회 변화의 한계에 대해 고찰했고, 1924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현 사회의 지도자들과 대표자들이 자신들의 본질적인 원칙들이 심각하게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합법성을 포기하지 않을까 의심할 수밖에 없다.”
 사실 1936년 프랑코의 쿠데타, 1953년 이란의 모사데크 실각, 1973년 피노체트의 쿠데타 등에서 이런 위반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레옹 블룸은 “프랑스 공화국은 헌법을 통해 합법적 제도가 된 선거가 아니라 기존의 합법성에 저항하는 민중의 의지에 의해 건설됐다”(7)고 강조했다. 

  이제 보통선거는 다른 집단적 개입 형태를 비하하기 위한 근거가 됐고, 모든 정치 활동의 시작과 끝이 됐다. 특히 공공서비스 파업은 거의 인질극과 동일시된다. 보통선거에 대해 블룸이 제기한 문제들은 여전히 시의성을 잃지 않았다. “오늘날 보통선거가 정말로 완전한 현실인가? 사주와 지주가 돈과 거대 언론을 내세워 유권자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는가? 모든 유권자들이 정말로 자유롭게 투표권을 행사할까? 순전히 자신의 생각에 따라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투표할 수 있을까? 유권자의 해방을 위해 바로 혁명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8) 그러나 블룸은 네덜란드·프랑스·아일랜드에서는 선거가 사주, 언론, 돈의 압력을 해소했다고 속삭인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가 이런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들을 가졌다.” 이는 스페인 내전의 여파로 프랑스에 망명한 어느 스페인 공화파 투사의 말이다. 보수주의자들과 그들의 끈질긴 복종 교육의 문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요약한 것이다. 혁명은 비록 실패하고 명예가 훼손됐더라도 역사에 남으며 인간의 의식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사실 혁명은 마침내 대중이 운명을 딛고 우위에 서는 이 드문 순간을 구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이 보편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사실 포템킨의 반란군들도, 중국 팔로군 대장정의 생존자들도, 시에라 마에스트라의 게릴라들도 ‘혁명력 2년’ 당시 병사들의 행동을 재현했다. 이에 대해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이렇게 설명한다. “프랑스혁명은 어떤 정부도 결코 망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민중의 힘을 드러냈다. 훈련조차 받지 않은 신병들로 급히 구성됐지만 유럽 각국의 최고 엘리트 군대들의 강력한 연합을 이겨낸 군대의 기억만으로도 어떤 정부도 민중의 힘을 망각할 수 없을 것이다.”(9)
 
   아시아보다 남미에 주목
   이는 단지 ‘기억’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 정치용어와 세계 법률체제의 절반은 프랑스혁명이 만들어낸 법전의 영향을 받았다. 1960년대의 ‘제3세계주의’를 떠올리는 사람이라면 유럽에서 이 사상이 인기를 끌었던 이유가 ‘제3세계주의’가 담고 있는 어떤 인정의 감정에 기인한 것은 아닌지 자문해볼 수 있다. 계몽주의 시대의 혁명·평등·해방의 이상이 일부이긴 하지만 베트남·알제리·중국·칠레를 통해 남반구 국가들에서 재탄생한 것처럼 보였다.
 제국은 이상을 실현하기엔 너무 커버렸고, 옛 식민지들이 제국이 못다 한 과업을 이어받았다. 혁명은 계속됐다.

 그러나 현 상황은 다르다. 중국이나 인도의 해방, 국제 무대에서 양국의 급부상은 세계 곳곳에서 호기심과 공감을 불러일으키지만 평등, 피지배층의 권리, 또 다른 발전 모델과 연결된 ‘보편적인’ 기대와는 관련이 없다.
 반면에 라틴아메리카는 아시아보다 더 큰 국제적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이 지역의 정치적 방향이 민주적인 동시에 사회적이기 때문이다. 20년 전부터 프랑스 좌파는 ‘혁명이라는 막간극’의 종식, 즉 민중의 정치적 소멸을 이론화함으로써 중간 계층의 요구를 우선시한 자신들의 선택을 정당화했다. 반대로 베네수엘라나 볼리비아의 지도자들은 민중의 운명이 고려의 대상임을, 역사적 운명이 결정된 것이 아님을, 투쟁이 계속되고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민중을 재결집하고 있다.
 혁명이 바람직해도 혁명은 드물게 일어난다. 첫째, 행동할 각오가 된 대규모 불평분자들이 존재해야 한다. 둘째, 전통적 지지층의 일부가 국가의 정당성과 권위를 비판해야 한다. 이유는 다양하다. 경제 불안이나 전쟁 패배 때문일 수도 있고, 국가를 마비시키고 무너뜨리는 내부 분열 때문일 수도 있다. 셋째, 사회질서를 비판하는 극단적인 생각들이 존재해야 한다. 이 생각들은 처음에는 극소수의 생각일 뿐이지만 과거의 모든 믿음이나 충성을 잃어버린 자들이 매달릴 수 있는 것들이다.(10)

 미국의 역사학자 빅토리아 보넬은 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을 연구했다. 보넬의 결론은 살펴볼 가치가 있다. 노동자라는 사회집단이 ‘성공한’ 혁명의 주체였던 유일한 경우가 러시아혁명이었기 때문이다. “혁명 의식을 특징짓는 것은 기존 제도의 변화와 다른 사회조직의 구축을 통해서만이 불평분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다.”(11) 물론 이 의식은 사전적인 정치운동과 사상적 배경 없이 자생적으로 출현하지 않는다.
 더구나 일반적으로 사회운동은 방어적 요구에서 출발한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운동은 사주·지주·은행가·지도층이 위반했다고 판단되는 사회계약을 복구하려 한다. 밥, 일, 집, 학업, 생계가 문제인 것이다. 사회운동은 아직 ‘빛나는 미래’를 꿈꾸지 않는다. 다만 ‘가장 고통스러운 것들이 사라진 현재’를 추구한다.(12) 민중들 사이에서 “왕, 자본가, 신부, 장군, 관료들이 사회적으로 유용한가”(13)라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오직 지배층이 그들의 권력과 특권을 정당화하기만 하고, 자신들의 의무를 수행하지 못한다는 것이 명백해지는 경우다. 이때 우리는 혁명을 논할 수 있다. 프랑스혁명 때는 2년 만에, 러시아혁명 때는 몇 달 만에 이행한 것처럼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의 이행이 빠르게 일어날 수도 있고 전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혁명 막으려 연구하는 미국
 거의 2세기 전부터 수백만 명의 정치활동가·노동운동가·역사학자·사회학자들이 혁명의 결정 변수들을 검토해왔다. 지도층이 분열됐고 타락했는가? 지도층의 억압 기제는 온전한가? 변화를 꿈꾸는 사회세력이 조직화돼 있고 확대될 수 있는가? 이 문제들을 미국보다 더 많이 연구한 나라는 없다. 미국에서는 혁명의 가능성을 더욱 효과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혁명을 이해하고 혁명의 결과물을 수용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이 연구들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한 예로 1977년 연구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통치 불가능성’을 걱정하며 왜 소련이 그토록 안정적인지 자문했다. 소련의 안정성에 대한 설명은 다양했다. 소련 지도층 및 국민의 질서와 안정 선호, 정권의 가치를 강화하는 집단적 사회화, 당의 운신의 폭을 넓혀주는 당면 과제의 시의성, 안정성에 기여하는 경제적 성과, 생활수준 향상, 강대국 지위 등이 근거로 제시됐다.(14) 이미 유명한 정치학자인 새뮤얼 헌팅턴은 이런 갖가지 지표들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장차 우리가 해결해야 할 모든 과제들은 소련이 이미 성공적으로 대응한 과제들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15) 우리 모두 그 결과를 알고 있다.

글/세르쥬 알리미 Serge Halimi

2008년 이후 이냐시오 라모네를 이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고 있다. 미국 전문가로서 <새로운 감시자>(1997), <여론, 그것이 움직인다>(2000) 등의 저서가 있다.

번역/박수현

(1) <르피가로>, 2009년 4월 9일.
(2) “결국 자유주의 감수성이 요구하는 것은 카페인 없는 커피다. 즉, 혁명의 맛이 나지 않는 혁명이다.” 슬라보예 지젝, <로베스피에르: 미덕과 공포 사이>(Roberspierre: entre vertu et terreur), 2008, 10쪽.
(3) <파이낸셜타임스>, 2006년 10월 7~8일.
(4) 2009년 3월 24일 기자회견.
(5) 프랑수아 퓌레, <환상의 과거>(Le Passee d’une illusion), 1995, 572쪽.
(6) 비토리오 데시카 감독의 1970년작 <핀치-콘티니의 정원>과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소외된 이들>은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
(7) 레옹 블룸, ‘사회주의의 이상’(L’ideal socialisme), <라 르뷔 드 파리>(La Revue de Paris), 1924년 5월. 장 라쿠튀르, <레옹 블룸>, 1977, 201쪽에서 인용.
(8) 블룸, 위의 책.
(9) 에릭 홉스봄, <무기, 역사학자들, 프랑스혁명의 2세기의 역사>(Aux armes, historiens, Deux siecles de la Revolution francaise), 2007, 123쪽.
(10) 잭 골드스톤스, <혁명>(Revolution), 2002. 테다 스콕폴, <국가와 사회혁명>(Etats et revolution francaise), 1985.
(11) 빅토리아 보넬, <저항의 뿌리: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의 정치와 조직화>(The Roots of Rebellion: Workers’ Politics and Organisation in St. Petersburg and Moscow, 1900~1914), 1984, 7쪽.
(12) 배링턴 무어, <부정의: 복종과 저항의 사회적 기초>(Injustice: The Social bases of Obedience and Revolt>, 1978, 209쪽.
(13) 위의 책, 84쪽.
(14) 제베린 비알러, <스탈린의 후계자들: 소련에서 리더십, 안정성, 변화>(Stalin’s Successors: Leadership, stability, and change in the Soviet Union), 1977.
(15) 새뮤얼 헌팅턴, ‘현대에서 안정성의 의미에 대한 논평’, 비알러, 슬루자(Sluzar), <현대의 급진사상, 3-현대 급진사상의 전략과 영향>(Radicalism in the Contemporary Age, 3- Strategies and Impact of Contemporary Radicalism), 1977, 2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