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로 끝난 퀘벡당의 분리주의 '단풍의 봄'

2014-06-03     장 프랑수아 나도

캐나다로부터 분리 독립을 추구하던 퀘벡당은 2012년 선거로 정권을 되찾았으나, 집권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유권자들을 실망시키고 말았다. 이에 퀘벡당은 FTA, 긴축재정, 전방위적 석유개발 등 경쟁 관계에 있는 연방주의 정당과 유사한 정책들을 펼치며 ‘퀘벡의 가치 수호’에 집중하는 공격적인 문화민족주의 이미지를 벗고자 했다. 하지만 결국 지난 4월 선거에서 패배를 맞게 된 지금, 이른바 ‘아름다운 주(州) 퀘벡’의 분리운동은 끝을 맞게 되는 것일까?

오랜 학생 시위, 각종 부패 스캔들, 10년간의 장기 집권 등으로 녹초가 된 퀘벡자유당(PLQ)은 지난 2012년 퀘벡 주의회 선거에서 창당 이래 가장 처참한 패배를 맞았다. 전문가 중에서도 퀘벡자유당이 18개월 내에 퀘벡당(PQ)을 꺾고 패배를 설욕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지난 4월 7일, 그 일이 현실로 일어났다. 한 달 전인 3월 초, 퀘벡당 소속 폴린느 마루아 퀘벡 주 총리는 총선 실시를 결정했다. 그녀는 퀘벡당의 승리를 자신하면서 다수당 정부로 거듭나기 위해 필요한 의석 몇 석만을 추가 확보하길 기대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전직 의사 출신 필립 쿠이야르가 이끄는 퀘벡자유당이 과반수의 선거구에서 의원직을 차지했다. 결국 퀘벡자유당은 주의회 선거방식의 ‘마법’(박스기사 참조)을 통해 반을 넘지 못한 41.5%의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전체 의석 125석 중 70석을 확보하며 퀘벡 주 집권당으로 자리매김했다. 반면 퀘벡당의 결과는 지지율 25%와 의석 30석에 그쳤다. 이렇게 단기간 내에 물러나는 정권은 다시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교육 이슈와 야당 부정부패 스캔들 등 호재 놓쳐

 퀘벡당에 대한 시민들의 실망의 정도를 확인하려면 우선 2012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퀘벡 주 총리였던 퀘벡자유당 소속 장 샤레 총리가 대학 등록금 인상을 발표했고, 이에 퀘벡의 대학생들은 일제히 거리로 뛰쳐나와 캐나다 대학 역사상 유례없는 장기 시위를 시작했다. 이에 더해 집회를 금지하고 대규모 구속을 정당화하는 ‘특별법’까지 통과되자 시민들도 대부분 학생의 편에 서기 시작했다.(1) 이때 폴린느 마루아는 학생 시위의 상징인 붉은 사각형을 옷깃에 보란 듯이 달고 학생 운동을 자연스레 이어갈 주체로 퀘벡당을 내세우고자 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2012년 9월 선거 당시 폴린느 마루아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들은 그녀가 전 총리의 등록금 정책을 철회해 주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실제로 퀘벡당은 2013년 2월 고등교육회담 자리에서 5년에 걸친 등록금 75% 인상안을 철회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교육비 공제율을 기존 20%에서 8%로 대폭 하향 조정했고, 덕분에 최빈층 학생을 위한 지원금 인상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됐다. 이러한 정책들은 퀘벡 학생 시위, 이른바 ‘단풍의 봄’의 상속자와도 같은 정당이 내놓은 것이라고 보기엔 실망스러웠다. 학생 운동 리더 중 한 명인 가브리엘 나도 뒤부아는 “2012년 당시 학생 시위의 핵심 주제는 사회정의, 환경, 문화 등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원했던 것은 선거과정을 통해 모든 논쟁을 끝내는 것이었다”라고 밝혔다.

교육은 퀘벡 주정부 예산 중 보건 분야 다음으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분야지만, 이번 2014년 선거기간 동안 그 어떤 주요 정당도 교육문제에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교육에 대한 논의는 아예 없다시피 했다. 정당 대표 간 TV 토론 자리에서도 퀘벡자유당의 쿠이야르 대표가 초등학교에 영어 수업을 개설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이에 마루아 대표가 노후 학교시설의 곰팡이 벽 문제를 언급하며 응수했을 뿐이었다.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는 고등교육 진학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의견도 오가지 않았다. ‘단풍의 봄’과 퀘벡당 간의 연결 고리가 끊어졌음을 시사하는 증거는 이뿐만이 아니다. 학생 운동가 출신 레오 뷔로 블루앙과 학생 시위 대표인 마르틴 데자르댕이 지난 선거에서 퀘벡당으로 합류해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번 4월 선거에서는 두 사람 모두 패배를 겪고 말았다.

한편 퀘벡당은 집권 기간 동안 학생들의 요구 사항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경쟁 상대인 퀘벡자유당의 부정부패 스캔들조차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다. 2011년 10월 조사위원회가 세워진 후, 프랑스 샤르보노 담당 판사 앞으로 수많은 건설 사업가들이 줄줄이 출두했다. 공공계약 관련 뇌물수수, 공무원 매수, 경쟁 입찰 특혜 제공 등 3년 전부터 퀘벡자유당 의원이 대표로 있는 모든 지역구에서 조사가 이루어졌다. 퀘벡 주 제2의 도시인 라발의 시장은 구속되었으며, 퀘벡자유당 소속 의원들은 일부 해임되었다. 또한 나탈리 샤르보노 전 장관은 퀘벡자유당에 대한 재정 지원을 조건으로 한 엔지니어링 기업에 1100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보조금을 지급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최근 새로운 스캔들 폭로로 퀘벡당 정부도 흔들리고 있는 마당에, 어떻게 이러한 부패 스캔들을 이용할 수 있었겠는가.(2)

퀘벡당은 르네 레벡에 의해 창당된 이래 퀘벡 주의 분리 독립 문제를 오랫동안 당내 핵심 사항으로 삼아왔으나, 이번의 짧은 집권 기간 동안에는 독립에 대해 놀라우리만큼 침묵하는 모습을 보였다. 1976년과 1994년, 두 차례 퀘벡당이 주 정권을 잡았을 때에는 퀘벡 주 독립 찬반 국민 투표를 시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집권 중에는 마루아 총리가 국민 투표를 실시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것 외에는 독립에 대한 어떠한 견해도 내놓지 않았다.

퀘벡당은 분리 독립, 프랑스어 수호, 주권(州權)의 확대 등이 아닌 ‘종교 중립 헌장’이라고도 불리는 ‘퀘벡 가치 헌장’을 통해 자신들의 민족주의를 드러냈다. 퀘벡당은 ‘문화적 차이에 대한 수용안 자문 위원회’와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다.(3) 이 위원회는 수개월에 걸친 과정 끝에 2008년 5월 보고서를 통해 합리적 수용, 즉 문화 및 종교적 차이에 따른 타협안에 실질적인 문제는 없으며,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결론을 내렸다. 해당 보고서는 법관, 경찰 등 국가 권력을 대표하는 직책에 ‘드러내기 위한 종교적 상징물 착용’을 금지하는 규정을 제한하기도 했다.

 분리 독립 여론 분열로 지지표 분산

 반면 “공동의 유산”, “퀘벡 사회의 가치” 등 모호한 개념들로 채워진 퀘벡당의 가치헌장은 공공기관 내 전 직원의 종교적 상징물 착용을 금지하도록 하고 있다. 퀘벡당 소속 베르나르 드랭빌 민주제도 담당 장관을 비롯한 가치헌장 지지 세력은 종교적 수용에 있어서 퀘벡의 가치를 훼손하는 이민자들의 요구사항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양성평등을 침해하는 경우가 많다고 보았다. 특별히 변화 양상을 보여주는 연구나 조사는 전혀 없었지만, 드랭빌 장관은 “이제 정부가 두 팔을 걷고 체제유지주의(integrism)의 부상을 막아 나설 때”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퀘벡당 창당 당시의 시민민족주의가 후퇴한 문화민족주의로 변모되면서 분리 독립 여론이 분열되기 시작했고, 이는 퀘벡당에게 분리주의 표의 분산이라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1995년 분리 독립에 대한 국민 투표 당시 정권을 쥐고 있었던 퀘벡당 소속 자크 파리조 전 총리는 지난 2013년 10월 3일 일간지 <주르날 드 몽레알>의 논설문을 통해 “이번 가치헌장이 퀘벡의 분리 독립 계획에서 이민자 출신 시민들을 제외시킬 위험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한 “가치헌장이 정교분리주의 원칙이라는 퀘벡의 전통에 대치하고 있다”고 판단하며 “지금까지 종교 복장 착용 문제가 법적 개입의 원인이 됐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수단(가톨릭 신부의 긴 옷)과 모자도 사라졌고, 로만칼라도 특별히 법제·규제화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채 없어지지 않았던가?”라고 덧붙였다. 파리조 전 총리는 결국 퀘벡당 전 총리이자 분리주의자인 프랑수아 르고가 이끄는 퀘벡미래연합당(CAQ)에 지지를 표명했다.

마루아 정부의 가치헌장에 나타난 종교중립성은 그 자체로서의 가치 때문에 주장된 개념이 아닌, 선거를 목적으로 도구화된 개념이다. 합리적 수용에 대한 보고서의 공동 저자 제라르 부샤르는 “이 헌장이 일부 국민들에게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라는 원초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으며, ‘퀘벡에서 이슬람의 거대 음모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다’, ‘우리 사회를 이슬람 신자들에게 빼앗길 수 있다’, ‘그들이 우리 사회에 속하기를 거부한다’, ‘우리에게 그들의 가치를 강요한다’와 같은 비상식적인 공포감을 심어줄 소지가 있다”고 여겼다.(4)

게다가 퀘벡당이 주장하는 종교중립성의 개념은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다. 전 공무원의 종교적 상징물 착용을 금지하고 베일, 터번, 키파(유대교 모자) 등을 벗지 않는 공무원은 해임하도록 되어 있으나, 국회의원에겐 ‘의회 면책권’을 주어 종교적 상징물을 착용할 수 있게 했다. 또한 가톨릭과 정치 간의 유착이 최고조에 달했던 1936년 ‘대암흑기’ 당시에 모리스 뒤플레리스 정부가 퀘벡 국회의사당에 걸기 시작한 십자가상을 역사라는 이름으로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퀘벡의 정계 곳곳에 성공회의 기둥과도 같은 영국의 지배가 남긴 흔적들은 모두 인정받고 있다.

사실상 헌장에 대한 논의는 대부분 이슬람식 베일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퀘벡의 종교중립성이 위협당하고 있다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는 반면, 이슬람 신도들과 이민자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내용의 논의들이 최근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의회 선거를 며칠 앞두고 치러진 여론조사에서 몬트리올 바깥 지역을 필두로 절반 이상의 지역들이 가치헌장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마루아 총리는 선거 지지 세력의 활성화를 위해 유명 작가이자 페미니스트 방송인이며 ‘여성 헌장’의 공동서명인으로도 알려져 있는 자네트 베르트랑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베르트랑은 양성 평등이라는 명목으로 가치헌장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2014년 3월 30일 퀘벡당이 주최한 ‘종교중립성 브런치’ 프로그램에서 베르트랑은 “제가 사는 건물에 수영장이 하나 있습니다”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수영장에 아쿠아 체조를 하러 일주일에 한 번씩 갑니다. 어느 날 두 남자가 수영장에 왔는데, 여자 둘이 이미 있는 걸 보고 실망하더군요. (중략) 그들이 자리를 떠나 수영장 주인에게 가서 (중략) 이렇게 요구했다고 생각해봅시다. ‘저희가 하루 종일 쓰고 싶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수영장을 늘상 사용하는 건 결국 그 남자들이 되겠죠. 바로 이겁니다, 조금씩 갉아먹는다는 것이죠. 이것이 우리가 두려워하는 일이고, 헌장이 없다면 우리에게 일어나게 될 일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지어낸 것으로, 이야기에 맨 끝에 베르트랑도 허구임을 스스로 인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언론에서는 모든 내용을 퍼다 나른 후였다.

이런 유사한 발언들이 잦아지자 퀘벡 내 일부 다민족 지역에서는 긴장이 고조되었고 퀘벡당에 대한 강력한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실제로 몬트리올 북부에 다수의 북아프리카 출신 이민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는 부라사 소베 선거구에서는 2년 전 선거 당시 42.3%에 그쳤던 퀘벡자유당 지지율이 올해 약 60.5%로 상승했다. 한편 퀘벡당이 분리 독립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을 피하고자 위해 이리저리 몸을 뺐지만, 퀘벡당에 합류한 피에르 카를 펠라도의 말을 통해 독립 문제가 다시 선거의 한복판으로 갑작스레 뛰어들게 됐다. 펠라도는 퀘벡 내 여섯 번째로 많은 재산을 가진 인물로, 최소 43개 일간지, 방송채널, 통신사업 등이 포함된 ‘케베코미디어’를 소유하고 있는 언론 재벌이다. 지난 3월 9일 생 제롬 선거구에서 퀘벡당 소속 의원 후보로 공천된 그는 주먹을 쥐어 보이며 ‘퀘벡을 하나의 국가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구심점 잃은 분리 독립주의 노선

  마루아 총리는 분리 독립보다는 이슬람 베일 이야기를 더 하고 싶었지만, 결국 독립과 국민 투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펠라도를 정부로 끌어들이면서 퀘벡당 창당 목표였던 분리 독립의 불씨를 되살리겠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분리 독립은 과거 공산주의 운동가로 <주르날 드 몽레알>에서 장장 764일간에 걸친 기록적인 장기 직장폐쇄(lockout)를 단행할 만큼 강경한 노조 탄압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는 펠라도의 신자유주의 관점에 따라갈 것인가? 기자들의 질문공세 앞에서 마루아 총리는 캐나다 달러 사용과 관련한 답을 급히 이어가며, 퀘벡당이 말하는 독립은 절대 경제적 단절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마루아 총리는 분리 독립에 대한 국민 투표는 물론 그 어느 것도 예정되어 있지 않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다. 퀘벡당은 상대 당에서 독립주의에 대한 그들의 근본적인 사명을 가리킬 때마다 회피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심지어는 독립주의 노선이 마치 허수아비처럼 힘을 잃고 왜곡되도록 내버려 둘 정도였다.

투표 이튿날, 대부호 고(故) 폴 데마레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파워코퍼레이션 그룹 소속 일간지(라 프레스, 르 솔레이, 르 누벨리스트, 라 트리뷴, 르 코티디앙 등)들은 일제히 “퀘벡 주민들은 결국 분리 독립의 선택지를 버렸다”며 승리를 선언했다. 하지만 이는 성급한 결론이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살펴보면 독립 문제에 대한 지표들은 거의 바뀐 적이 없기 때문이다. 1995년 이래로 독립 문제 자체가 논의의 중심에 선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독립 찬성 비율은 늘 40% 안팎으로 꾸준했다. 다만 이번 선거에는 이런 표심이 여러 당으로 분산되었다. 실제로 퀘벡당, 퀘벡연대(QS, 탈세계주의 및 분리주의 정당), 퀘벡미래연당의 지지율 총합은 전체의 56%로 나타났다. 따라서 퀘벡당이 지난 4월 선거에서 패배한 것은 독립주의 전체가 아닌, 여러 독립주의 노선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대표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글 | 장 프랑수아 나도 Jean-François Nadeau

언론인, 역사학자

 번역 | 김보희 sltkimbh@gmail.com

고려대 불문과 졸.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파스칼 뒤푸르, ‘퀘벡 대학생들의 끈질긴 등록금 투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6월호

(2) Robert Dutrisac, ‘Commission Charbonneau : Le PQ sur la défensive’, <르 드부아르>, 몬트리올, 2014년 1월 23일

(3) 이 위원회는 ‘부샤르-테일러 위원회’ 또는 ‘합리적 수용 위원회’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4) Gérard Bouchard, ‘La démagogie au pouvoir’, <라 프레스>, 몬트리올, 2014년 1월 10일

 

 주의회 선거방식의 ‘마법’

 다시 살펴보면, 지난 4월 7일 치러진 캐나다 주의회 선거는 캐나다 선거방식의 민주주의적 한계를 보여줬다. 표결 결과만 보자면 퀘벡당의 경우 창당 이래 가장 낮은 지지율인 25.38%를 기록해 기권율 28.57%보다 뒤로 밀려났다. 다만 확보한 의석은 30석으로 최악의 성적은 아니었다. 퀘벡미래연합당은 퀘벡당에 비해 2.38%p밖에 낮지 않은 지지율을 나타냈지만 의석은 22석 확보에 그쳤다. 퀘벡자유당의 경우 지지율은 50% 미만이었으나 의석수에서 과반수를 확보했다. 퀘벡 서부 등 주요 지역에서는 퀘벡자유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는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퀘벡자유당이 의석을 차지하기도 했다.

영국 여왕이 국가수반인 입헌군주국 캐나다에서 영국식 다수대표 소선거구제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번에도 선거가 끝나기가 무섭게 선거제 개혁을 주장하는 청원이 이미 제기되었다. 지난 40년간 매 선거 그러했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