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운동에 나선 캐나다 원주민들

2014-06-03     필리프 파토 셀레리에

“배고픈 자들을 먹여 살려라! 부자들을 먹어 치우자!” 피켓을 든 열대여섯 사람들이 다운타운 이스트사이드의 새로 지은 음식점 앞을 지나갔다. 지역 사람들은 이곳을 ‘캐나다에서 가장 빈곤한 우편번호’(1)라고 말한다. 태평양 연안 밴쿠버의 구시가지는 두 개의 대도로인 메인 스트리트와 헤이스팅 스트리트가 가로지르는데, 원주민이 대부분인 주민들은 ‘고통과 황폐(Pain and Wasting)’의 거리라고 비아냥댄다. 관광 지역인 개스 타운과 차이나타운 사이에 낀 10여개의 블록으로 이루어진 이 구역에서는 보통 천여 명에 달하는 노숙자들이 눈동자에 얼이 빠진 채 수레를 밀면서 기계적인 걸음걸이로 어슬렁거린다. 마약 중독자, 알코올 중독자, 마약 취급자, 성매매 여성 등 아메리카 인디언의 사회적 참상을 세계 10위 경제대국의 대도시 도심 대부분에서 엿볼 수 있다.

이날 시위자들은 “더 이상 가만있지 말자!(Idle no more!)”라고 구호를 외쳤다. 태평양에서 대서양으로 캐나다 전역에 걸쳐 이 구호는 매우 보수적인 스티븐 하퍼 총리 정부와 조상 전래의 협정 위반에 대한 투쟁에 불을 붙였다. 카렌은 “어제 그들은 우리 땅을 빼앗았고, 오늘은 우리를 내쫒는다. 그러면 내일은?”이라고 물었다. 그녀는 유럽인이 이주하기 전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에 살고 있던 ‘원주민족’(영어로 First Nation-역주) 중 하나인 샐리쉬 인디언족의 후예이다. 1982년의 캐나다 헌법은 ‘원주민족’인 북아메리카 인디언, 메티스, 이누이트를 세 개의 원주민 집단으로 인정하였다. 2011년 그들은 캐나다 전체 인구의 4.3%에 해당하는 140만 원주민 중 기타 3%를 제외하고 각각 61%, 32%, 4%를 차지하였다.(2)

더 이상 가만있지 말자는 ‘Idle no more’ 운동은 캐나다 중서부 대초원지대의 사스캐추완 주에 사는 네 명의 여성에 의해 시작되었다. 실비아 멕카담, 제시카 고던, 니나 윌슨, 쉴라 맥런은 캐나다 의회가 채택한 C-45조와 C-38조 법안을 규탄하였다. 심의도 거치지 않고 날치기로 통과된 이 두 법안은 각각 400페이지에 이르는 중요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C-45조 법안은 1876년에 제정된 인디언법을 개정하였다. 국가는 보호지구의 결정기구인 ‘부족위원회(Conseil de bande)’의 선거권자 과반수 획득이 아니라, 참석자의 과반수만 획득하면 원주민 보호지구의 토지를 임차하거나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C-38조 법안은 원주민 소속 보호 수로를 97개의 호수와 62개의 하천으로 제한하여 캐나다 민물 함수량의 1%로도 채 안 되게 만들었다.

새 법안들은 외부 투자자들이 토지 구매와 모래석유(3)에 함유된 세계 3위 석유 매장량에 접근하는 것에 대한 보장을 목적으로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부존자원은 캐나다 남부의 대다수 원주민들이 유럽의 식민지 개척자들에게 쫓겨 정착한 캐나다 중부와 북부에 매장되어 있다. 토지소유권은 오늘날 경제적 이권이 태산 같은 만큼 첨예한 문제로 부상했다.

1920년까지 토지소유권은 대두되지 않았던 문제였다. 몬트리올대의 장 르클레르 법학과 교수는 “협정은 주로 원주민들로부터 영토 권리의 포기를 얻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며 “그 반대급부로 국가는 원주민 공동체들에게 소규모 보호지구를 제공했으며 그 운영은 ‘인디언법’으로 엄격하게 규제하였다”고 알려줬다.(4) 그런데 오늘날 토지소유권은 무시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여러 판례와 1982년의 헌법은 점차적으로 원주민들에게 ‘조상 전래의 권리’를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그 개념이 하도 모호하여 영토 갈등이 있을 때마다 법정에서 정리되어야 했다.

1990년 ‘오카(Oka) 위기’ 사태는 법적 보장의 한계성을 드러내었다. 78일 동안 처음에는 퀘벡 경찰청 경찰력, 그 뒤에는 캐나다군이 몬트리올 인근 도시 오카의 모학 원주민공동체와 대치하였다. 원주민 공동체와 상의도 없이, 오카 시장은 모학 원주민들의 조상 묘가 있고 소유권이 걸린 땅에 골프장 확장을 결정하였고, 이에 원주민이 거세게 반발하였으나 결국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그와 똑같이 부당한 감정은 오늘날 ‘Idle no more’ 운동에 활력이 됐으며 요구사항은 토지소유권 문제를 훨씬 뛰어넘었다. 온타리오주 북부에 위치한 아타와피스카트의 크리 원주민 보호지구의 추장 테레사 스펜스 여사는 이 운동의 주요 인물이 되었고, 2012년 12월 11일 단식투쟁에 돌입해 소속 공동체 1700명을 위협하는 사회적 재앙을 고발하였다. 비위생적 주거환경, 실업, 노후한 교실, 한정된 수원지 등의 모든 문제가 크리 원주민 영역에 위치한 빅토르 광산과 불과 100km 이내에 존재하고 있었다. 보석 함유량이 예외적인 이 광산은 세계 최대 다이아몬드 회사 드 비어스가 2008년부터 개발해 왔다. 원주민 보호지구는 예상 수입 67억 달러 중 9천만 달러만 손에 쥐었다.

  원주민 여성들이 희생된 ‘눈물의 고속도로’

  언론에 많이 보도되고 상징이 된 스펜스 여사의 단식 투쟁으로, 운동은 시위와 점거를 통해 전국으로 확산되어 광범위하게 의식을 일깨웠다. 원주민은 실업률이 전국 평균 실업률 15%보다 두 배 높고, 평균수명은 전국의 평균수명보다 현저하게 낮다. 원주민 남성의 평균 수명은 68.9세, 여성은 76.6세로 전국 평균치보다 각각 9세, 5세 낮다.(5) 특이한 사실은 운동이 617개의 캐나다 인디언 부족을 대표하는 ‘원주민족 의회(l’Assemblée des premières nations)’의 추장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원주민 여성들에 의해서 주창, 전개, 표방된 점이다.

이누이트 출신으로 퀘벡 원주민여성회 회장인 비비안 미쉘은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면서 “여성들은 너무나 많이 부당한 대우를 받아서 자신들의 권리를 찾고자 한다. 그녀들은 전통적 추장들의 행동폭을 제한하는 교섭과정에서 뒷전에 밀려나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적극적이고 투쟁적이다. 여성이자 원주민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이중의 차별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카렌은 “우리는 항상 부정적 통계수치 속에 과장되어 묘사되어 있다”면서 “그런데 우리를 말살하려 했음은 틀림없다! 로버트 픽턴, 뭐 떠오르는 생각 없는가?”라고 덧붙였다.

2002년에 체포된 연쇄 살인범 로버트 픽턴은 원주민 여성에 대한 폭력의 상징이 되었다. 2007년, 6건의 살인범죄에 대한 유죄선고를 받은 로버트 픽턴은 49건의 살인을 자백했으나 나중에 번복하였다. 그의 희생자들은 밴쿠버 도심에서 가장 취약한 주민들로 대개가 성매매 여성들이었으며, 브리티쉬 컬럼비아주 전직 검찰총장인 월리 오팔에 의하면 사회와 경찰에 의해 이중으로 버림받았던 사람들이었다. 2010년에서 2013년 사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임무를 부여받은 실종여성조사위원회를 이끌었던 윌리 오팔은 “경찰이 비우호적인 선입관(6)을 보여줬다”고 지적했다.

이 사건이 희대의 살인사건이지만 유일한 것은 아니었다. 수십 명의 원주민 여성들이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의 16번 고속도로를 따라서 피살되어 ‘눈물의 고속도로’라는 별칭까지 생겼다. 오타와대 법학연구원 마리안 피어스는 지난 40년 동안 발생한 824건의 실종사건에 대한 자료조사를 했다.(7) 혹자에 따르면 과소평가된 수치지만 아찔한 숫자이다. 캐나다 원주민 여성협회 회장은 “만약, 총인구 중에서 여성들이 같은 비율로 실종됐었거나 살해됐었다면, 1970년 말부터 지금까지 전국적으로 1만8000명의 여성들이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고 말했다.

원주민 여성의 열악한 지위는 역사적으로 깊은 뿌리를 갖고 있다. 수십 년 동안, 비(非)인디언과 혼인한 여성은 인디언법에 따라 법적 지위를 상실하였다. 그녀들은 자신의 공동체로부터 제외되어 조상 전래의 권리와 협정에 명시된 권리를 동시에 박탈당했다. 자신과 자기 자식들도 가족 유산을 상속받을 수 없었다. 식민지 사회의 가부장적 제도가 강요한 여성 차별은 원주민사회가 당시 모권체제와 모계를 따랐기 때문에 강력한 동화 요소로 작용하였다. 몬트리올 국립과학연구소의 인류학자 카롤 레베크는 “유럽인의 이주 전에 원주민 여성은 발언권과 결정권에 있어서 진정한 지위를 누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런 부당한 대우로 버림받고 소외된 피해자 대부분은 1970년대 초부터 도시로 이주했다. 레베크는 “1950년대에 설립된 ‘원주민 우정센터(les Centres d'amitié autochtones)’들은 이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였다. 이 센터들은 건강, 교육, 고용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구제 목적의 프로그램과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피해자들은 서로 상부상조하고 공공장소를 이용하였으며 그중 열성적인 운동원은 조직적 차별에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출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캐나다 총리 “인디언 말살하기” 공식 사과

  1985년, 소급법인 C-31조 법안으로 이 여성들은 권리를 획득했고 인디언 여성 지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함에도, 보호지구의 상황은 전혀 호전되지 않았다. 알라니스 오봄사윈은 “협소한 토지, 과잉 인구, 실업, 자본 부재, 알코올 중독, 자살 등으로 여성들은 생활 여건이 어렵다. 여건이 되는 여성들은 점점 보호지구 밖에서 미래를 추구한다”고 증언했다. 그녀는 아베나키 부족민으로 캐나다의 탁월한 기록영화 제작자이며, 현재는 ‘Idle no more’ 운동에 관한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8)

미쉘 여사는 “이 운동의 도전은 우리가 겪고 있는 실상을 비(非)원주민들에게 알리는 것”이라고 전했다. 왜냐하면, 다수의 캐나다 국민들은 여전히 원주민 지위 규정을 세금 특혜와 과다한 사회보조 제도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보호지역에서 생활하는 ‘원주민족’만이 세금이 실제로 면제된다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 편견의 벽은 두텁다. 지난해 10월 18일자 허핑턴 포스트에 수필가 프랑스와 엘 파라디는 “원주민들은 천연자원에 대한 짭짤한 사용료를 부과하여 그들의 무위도식에 자금을 조달하려 한다”고 비난하면서 원주민들의 만성적 알코올 중독은 사회적 원인이 없다고 주장했다.

어떤 사람들은 ‘인디언 기숙학교’ 사태가 사고방식을 변환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를 건다. 미쉘 여사는 “‘인디언 기숙학교에 관한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우리 역사의 가장 어두운 장의 장막을 벗겨서 우리가 처하고 있는 어려움을 더 잘 알려주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1880년대부터 1996년까지 6세에서 16세 사이의 15만 명의 아동들이 가족과 격리되어 연방정부 예산으로 교단들에 의해 운영되는 139개의 기숙학교에 강압적으로 보내졌다. 이 제도가 내건 목표는 하퍼 총리가 캐나다 국민의 이름으로 공식 사과할 때 사용한 표현에 따르면 “어릴 때 인디언 말살하기”였다.

최소한 4200명의 어린이들이 추위, 궁핍, 학대 등으로 사망했고, 어떤 아이들은 과학 실험용으로 이용되기까지 했다. 아직 생존해 있는 7만 명의 과거 기숙학교 학생들은 이제 봇물이 터졌다. 2015년까지 수집될 증언은 벌써부터 끔찍할 정도다. 수많은 아이들이 어떤 기숙학교에선 100%까지 성적학대 또는 성적폭행을 당했다. 프랑스와 엘 파라디와 같은 부류들의 망상과는 정반대로, 기숙학교 강제수용은 특히 육체적, 성적 폭력이 수반된 경우 원주민에 보다 많이 나타나는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 문제와 밀접한 관련성이 입증되었다. 또한 이 깊은 상처는 전국 평균보다 5배 높은 자살률과 이누이트 젊은이들의 11배 높은 자살률을 의미심장하게 설명하여 준다.

“원주민들에게 자신들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서 자긍심을 되찾아주는 것이 이 운동의 가치다”고 오봄사윈 여사는 역설했다. 그러면, 이 운동이 지속될 것인가? 2015년의 연방선거에서 명맥을 이을 수 있고, 그동안 수많은 요구의 결집력과 수렴점이 되온 하퍼의 정치노선과 정부에 대한 반대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있을까? 복잡한 이해관계와 상이한 법률적 기득권이 얽히고설킨 617개의 부족이 보여주듯, 대단히 복잡한 원주민의 실상에 비추어볼 때 많은 사람들은 회의를 품는다.

레베크 여사는 “이 저항 운동은 이제 사회변혁 운동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미쉘 여사는 “현재로선, 목소리를 내어 우리를 캐나다 너머까지도 알릴 것”이라면서 “우리가 이와 같이 많은 지지와 옹호를 받는다는 것은 이미 우리 사회에 변화가 일고 있다는 신호가 아닐까?”라고 반문했다.

 

 

글·필리프 파토 셀레리에 Philippe Pataud Célérier

기자. www.philippepataudcélérier.com

번역·손종규

프랑스 렌느2대학 박사과정 수료. 번역가.

 

(1) 캐나다 도시 우편번호는 구역과 거주블록도 표시한다.

(2) ‘캐나다의 원주민: 원주민족, 메티스, 이누이트. 전국인구조사’, Statistique Canada, Ottawa, 2013년 5월 8일

(3) Emmanuel Raoul, ‘앨버타주의 모래석유 밑’.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4월호

(4) Irène Bellier 지도, 전 세계 원주민. 인정의 문제점, <L'Harmattan>, coll. ‘Horizons autochtones’, Paris, 2013년

(5) ‘캐나다의 원주민족의 건강’, Université d'Ottawa, 2013년 9월 11일, www.med.uottawa.ca

(6) Emmanuelle Walter, 빼앗긴 자매들. 캐나다의 비극, <Lux>, Montréal, 2014년

(7) Maryanne Pearce, ‘어색한 침묵 : 취약한 여성들의 실종과 피살. 캐나다의 사법제’, faculté de droit d’Ottawa, 2013년

(8) 국립영화제작소(Office national du film)가 제작한 그녀의 영화는 http://onf-nfb.gc.ca에서 시청 가능

(9) ‘원주민족과 이누이트의 건강 : 자살 방지책’, 보건부, Ottawa, 2013년 11월 8일, www.hc-sc.gc.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