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위기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고뇌

2014-06-03     아사프 하자니, 니르 봄스

시리아에 유혈사태와 국가붕괴가 시작된 지도 삼 년이 넘었다. 시리아 국민의 3분의 1은 인근 국가로의 탈출을 선택했으며 인프라의 절반이 파괴되었다. 이러한 혼란상황으로 인해 이스라엘에서도 안보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이스라엘이 몇 년 전부터 아랍세계를 휩싸고 있는 사건들을 지칭하는 용어는 다양하다. 아랍세계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인지하는 방식이 각 주체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아랍의 봄’이라 불린 이 사건이 수개월이 지나면서 ‘이슬람 과격파의 겨울’이 되었다. 국가 지도자들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변혁의 성격조차 정의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근동의 대혼란’이라 명명되었다. 결국, 낙관주의와 비관주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분위기는 극심한 혼란 상황으로 치달았다.

튀니지에서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분신 자살 이후 촉발된 도미노 현상에 적잖이 놀란 이스라엘은 처음에는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저쪽 세계’의 항쟁을 통해 흥미로운 사회학적 경험을 했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이스라엘은 이를 별개의 사건, 근동지방의 특수한 경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전직 이스라엘 국방장관 에우드 바락(2007~2013년 재임)은 이스라엘을 ‘정글 중앙에 자리잡은 빌라’로 간주했다. 2011년 일어난 이스라엘 텐트시위(1)(생활고에 대한 이스라엘 주민들 항의시위)는 집권층의 눈에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Los indignos)’이나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 등 유럽과 미국의 시위에서 영감을 받은 한여름의 모험으로, 주변지역 시위 흐름의 전염이라기보다는 사회에 대한 불만으로 해석되었다.

처음에 이스라엘은 신중을 기하기 위해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 ‘아랍의 봄’이 지속적으로 언론 일면을 장식하기는 했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예멘, 바레인 등에서 일어난 변혁은 극히 조용히 지나갔다. 이스라엘의 안보를 직접적으로 위협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내 혼란의 직접적 여파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곧 이스라엘 집권층은 아랍혁명이 국익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가 2011년 이전 보유하고 있던 무기들이 이스라엘 국경 부근에서 무차별적으로 활약하는 테러분자들의 손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고 우려가 증폭된 것이다.

2011년 초,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의 퇴진 직후 시나이반도에서 테러가 일어났으며, 2013년 여름 모하메드 모르시 대통령 축출과 함께 테러활동은 점차 심화되었다. 시나이 반도의 안정을 겉으로나마 유지하려고 애썼던 이집트 대통령들은 권위를 세우는 데 번번이 실패했다. 1979년 이집트와 평화조약을 맺은 이스라엘은 딜레마에 직면했다. 테러행위에 대응을 했어야 할까, 아니면 사회질서를 회복할 능력이 없는 이집트 정부를 질책해야 했을까? 두 가지 선택지 모두 리스크를 피할 길은 없었다. 또 다른 선택지는 평화조약의 군사 관련 부분을 재검토하여 이집트가 시나이반도에서 군사력을 강화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현재를 희생하여 미래의 안보를 보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결정적 선택이었던 것이다.

  ‘아랍의 봄’과 ‘이슬람 과격파의 겨울’ 사이

  그러나 문제는 시나이반도 한 곳이 아니었다. 그간 완전히 등한시되어 왔던 요르단의 불안정조차 수면 위로 떠오르며 우려가 가중되었다. 게다가 시리아 내전이 일어나는 동안, 국제적 지하드 조직들이 대거 시리아로 이동하여 혼란에 휩싸여 있는 시리아에서 그 영향력을 점점 키워 갔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상황을 우려의 눈초리로 관찰하며 근동지방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팔레스타인까지 퍼져나가지 않기를 희망하는 마음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한 가지 의문은 무장세력이 강화되고 있는 시점에 인접 국가들을 여전히 관련 당사자로 볼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2011년 3월 봉기가 시작된 후 처음 수개월 동안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은 이를 지역적 대혼란과 무관하게 그저 지나가는 폭우와 같은 현상이라 믿고 싶어 했다. 제한된 시간과 공간에서 금요일에 일어난 시위는 자신의 권력에 대항할 만한 것이 전혀 못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리아는 매우 빠른 속도로 피바다가 되었으며 시리아에서 촉발된 저항은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리비아 정권의 퇴진으로 인해 근동 전역의 무기거래가 활성화되면서, 수많은 해외 지하드 세력이 시리아로 대거 이동했다.

전쟁으로 인해 시리아는 극심한 고통에 휩싸였으며, 시리아 국민의 대규모 국외 이주는 국제적인 이슈로 자리 잡았다. 수십만 난민이 터키, 레바논, 요르단 등으로 이동하며 이들 국가의 안정을 위협하였다. 그러나 철천지원수 이스라엘은 이 모든 문제에 끼어들 필요가 없었다. 팔레스타인 역시 시리아 난민을 위한 조치를 취할 때 이스라엘과의 의견조율을 거부했다. 이미 수많은 아프리카 노동자의 이주로 난항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오히려 상황이 편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이밖에도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평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건들이 있었다. ‘아랍의 봄’이 시작되면서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일은 국제사회의 현안에서 뒷전으로 밀려났다. 시리아에서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근동지방에서 난민의 신분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인들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시리아 난민 수가 이를 넘어섰다. 근동 지방에서 망명 중이거나 강제 국외이주 상태인 이들 중 시리아인이 최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시리아 해체에 대한 우려는 이란-시리아-헤즈볼라 간 협력관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전에는 이란과 시리아가 헤즈볼라 지원에 집중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시리아를 통해 헤즈볼라로 대량살상무기가 전달되는 것을 우려하지만, 이제는 시리아가 이란과 헤즈볼라의 원조를 가장 많이 받는 국가가 되었다. 특히 이스라엘 기득권층이 역사적으로 안보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았던 변화들은 완전히 무시한 채 안보적 관점에서 지정학적 사건들을 예의주시한다는 점을 볼 때, 이러한 변화는 간과할 일이 아니다.

알 아사드 정권이 준엄히 단죄되리라는 사실을 예측한 이스라엘은 외부 관망자 지위를 지키고 있는 자국의 상태에 만족했다. 또한, 2012년 팔레스타인 하마스와 시리아의 관계가 깨지는 모습을 보고 자축하기도 했다. 그러나 분쟁이 심화되면서 많은 고위 지도자는 메나헴 베긴 전 이스라엘 총리가 전혀 다른 맥락에서 사용했던 “양측 모두 행운을 빕니다”라는 문구를 다시금 사용하기 시작했다.

알 아사드 정권의 퇴진으로 인해 이란-시아파 축이 불안정해짐으로써 상황이 이스라엘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야당인 정교분리파의 약세를 고려했을 때, 반군의 승리는 이스라엘 정부 후방에 적대적 이슬람정권이 들어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 이스라엘이 공식적으로 적으로 선포한 알 아사드는 왕궁에 앉아 있고, 의사를 전달할 방법이 많다. 그러나 반군에게는 저항의 소재지조차 없다. 아니면 소재지가 너무 많아서 공공의 적 하나를 대할 때처럼 전략적 요지의 폭격, 제3자를 통한 메시지 전달 등의 방식으로 반군들과 투쟁하거나 협상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할 수도 있다.

이스라엘은 공개적으로 어떠한 편도 들어주지 않는 데에 거의 성공했다. 외교적인 노력으로 시리아 화학무기고 해체를 제도화하는 데 성공하면서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민방위 책임자인 무장세력의 국내전선 사령부는 가스 마스크의 생산을 중단시켰다. 이스라엘은 시리아의 전략적 무기이송(특히 헤즈볼라로의 이송), 골란 고원(이스라엘이 1967년 시리아 영토를 점령하여 1981년 합병) 또는 자국 영토에서의 전투 확대 등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이스라엘 공군은 시리아의 군사적 목표물에 대해 공습을 서슴지 않았으며 최근 2014년 2월과 3월에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

1973년 10월부터 완충지 역할을 하였던 골란 고원은 완충지의 기능을 상실했다. 유엔군의 활약도 효율성이 떨어지면서 국경에서 매우 인접한 곳에서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박격포 발사, 포탄 투하, 기관총 연속사격 또는 도로변에 장치된 포탄 등은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수시로 이스라엘을 겨냥한다. 여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시나이반도에서 이집트 군사력 강화를 허가했던 것처럼 유엔군의 활동을 이 지역에서 더 강화해야 할까? 위험 고조를 무릅쓰고 대응사격을 해야 할까?

나아가 전투 중인 세력 중 어느 한편을 도와주어야 하는가도 이스라엘의 고민이다. 한쪽 편을 선택하여 다른 편과 맞서야 하는가, 아니면 어떠한 편도 도와주지 않아야 하는가? 그것도 아니면 양쪽 편 모두 동시에 다양한 측면에서 지원해야 할까? 이스라엘이 지원에 나선다고 가정했을 때, 직접적으로 지원해야 하는가, 간접적인 방식을 택해야 하는가도 문제다. 공개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은밀히 지원해야 하는가? 종종 그래 왔듯이 무기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지원해야 할까, 인도주의적 원조를 택하여야 할까?

  인도주의적 원조의 묘수

 이스라엘 정부가 공론화 없이 적극적으로 개입한 몇 안 되는 활동 중 하나는 2013년 2월부터 골란 고원에서 발생한 시리아 부상자들을 위한 의료지원이다. 준의료 군사인력이 국경지역에서 시리아 부상자들을 돌보고 있다. 늘어나는 부상자를 수용하기 위해 야전병원이 건립되었고, 부상자 중 일부는 이스라엘의 사페드 병원으로 이송되기도 했다. 시리아 부상자 중 800명 가까이 이 같은 치료를 받았다. 다른 형태의 인도주의적 원조는 비정부기구(NGO)들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다.

그러나 골란 고원 남부가 이슬람 과격파의 전략적 안식처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해당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편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기다리면서 미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지켜보기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였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행동 양상에서는 결정적인 답이 나오지 않는다. 시리아 안팎 반군에 대한 지원 거부는 알 아사드 정권의 유지를 선호한다는 의미이고, 이미 이스라엘에게 친숙한 적을 택하는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2013년 9월 미국의 군사개입에 대해 지지를 표명한 것이나 인도주의적 지원을 확대하는 모습은 정책방향의 선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근동지역과 전반적으로 거리를 두기 위해, 특히 시리아 내전에 개입하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이러한 결정은 여론의 지지는 물론 미국의 지지를 받았다. 2013년 초, 미국은 화학무기의 사용을 ‘넘어서는 안 되는 레드 라인’이라고 밝히며 시리아에 군사적 개입을 하겠다고 위협했다. 미국은 차후 이를 포기하고 ‘배후에서 주도’하는 편을 택했지만, 터키, 카타르, 이란, 걸프협력회의(GCC) 회원국들은 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여 이슬람 야당의 여러 당파를 지지했다.

‘이스라엘 플라잉 에이드(Israeli Flying Aid)’와 ‘시리아 난민들과 손에 손잡고(Main dans la main)’ 등 이스라엘 비정부 기구는 또 다른 답을 제시했다. 이들은 누구보다 먼저 시리아인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필요성 및 가능성을 동시에 인식하고, 특히 식량 및 의료품 지원을 통해 요르단, 터키, 시리아 등에 인도주의적 지원을 시행하였다. 지금까지 총 1300t 이상의 물자가 지원되었다. 이를 계기로 최초로, 때로는 공개적으로 이스라엘과 시리아 단체들이 서로 협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민간 차원에 머무른 협력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군국주의와 안보주의 비전에 사로잡혀 있는 이스라엘 외교는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일이 없다. 게다가 최근 몇 달 동안은 외교부 관료들의 파업까지 겹쳐 더할 나위 없이 비효율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인도주의적 원조에 외교적 행보까지 더해진다면 이스라엘은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뿐 아니라 미래 동맹국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작년에 이스라엘 의료 지원으로 치료를 받은 800명의 시리아인이 이에 가장 적합한 홍보대사가 아닐까.

  글· 아사프 하자니 & 니르 봄스 Asaf Hazani et Nir Boms

언론인

번역·김혜경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야엘 레어러, ‘이스라엘 거리에서의 (선택적) 분노 표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