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가 자유무역을 지지한 이유
강연자로 나선 마르크스는 “값싼 빵, 높은 임금이 바로 자유무역론자들이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어가며 내세운 유일한 목표였다”고 비난했다. 무역 자유화에 따른 치열한 국제 경쟁이 임금 수준을 저하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고전 경제학자들의 이론을 마르크스는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러면서 “‘현 사회 상황에서’ 자유무역이란 다름 아닌 ‘자본의 자유’를 의미한다”고 일갈했다.
반면 당대 프랑스인 가운데는 이런 혁명적 의미에서 자유무역에 ‘찬성표를 던지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 국가는 보호주의를 표방했고, 생산자들도 관세당국이 강력한 권한을 갖고 수입규제를 해주는 덕에 안정된 내수시장의 혜택을 톡톡히 누릴 수 있었다. 따라서 자유무역이라는 대의를 옹호하는 자들은 주로 활발한 활동을 보이는 소수의 사람들뿐이었는데, 가령 장 바티스트 세이 또는 애덤 스미스, 혹은 데이비드 리카도의 계보를 잇는 후학 ‘경제학자들’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들은 특히 시장 개방에 관심이 많은 사업가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가령, 보르도 무역상들 덕분에 1846년 저널리스트 프레데릭 바스티아가 주도하는 ‘자유무역협회’가 설립될 수 있었다. 뛰어난 문장가이자 공화주의자였던 프레데릭 바스티아는 영국 반곡물법동맹의 창시자 리처드 코브던의 지도를 받으며 자유무역 옹호투쟁에 온힘을 쏟아 부었다. 한편 이런 자유무역주의 진영에 맞서는 보호무역주의 진영이 등장했다. 한 해 전 루베 지역에서 방적회사를 운영 중이던 갑부 기업가 오귀스트 미므렐이 ‘자국노동보호협회’를 설립한 것이었다. 이 단체에는 외국과의 치열한 경쟁을 두려워하거나, 앞으로도 계속 관세장벽을 통해 자신들의 이권을 보호받기를 원하는 유력 기업인들이 참여했다.
자유무역 진영과 보호무역 진영은 양쪽 모두 오랜 의회 경험을 지닌 정치인이나 언론계와의 두터운 인맥을 동원해 여론 조성에 열을 올렸다.(2) 먼저 자유무역 진영의 경우, 자유주의 부르주아들이 1789년의 계승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그들은 정치적 자유의 연장인 무역의 자유가 사회를 근대화하는 원동력이 되어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유무역 진영은 행정적 제약이 민간 영역의 진취적 활동을 억압하는 현실을 규탄하며 국가가 어떤 식으로든 경제와 사회에 개입하는 것을 맹렬히 비난했다.
한편 보수주의적인 색채가 강한 보호무역 진영은 자신들을 지배층으로 만들어준 사회 질서에 매우 깊은 애착을 보였다. 경제학자들이 모호한 논리를 들이대는 것과는 반대로, ‘자국 노동의 수호자들’은 양식에 호소하는 수사학을 동원했다. 이를 테면 스스로를 무역 개방이 불러올 참담한 결과로부터 영세 제조업자나 노동자를 보호하는 파수꾼을 자처했다. 그들은 국가라는 깃발, 특히 ‘프랑스산’이라는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당시 출간된 루이 레이보의 유명한 풍자 소설 <사회적 지위를 찾아 나선 제롬 파튀로>를 보면, 양품류 제조업자인 제롬 파튀로가 ‘산업조사위원회’로부터 “스페인이나 독일 작센 지방에서 생산한 최고급 양털을 사용한다면 모직물의 품질이 훨씬 더 우수해지지 않겠냐”는 질문에 거의 목이라도 매달 태세로 반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면 프랑스의 목동은요?, 위원장님! 프랑스의 방목장은요? 프랑스의 양치기 개들은요? 아무리 위원장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 해도 제 신념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누가 뭐래도 프랑스 양들이 최고입니다!”(3)
반면 <정치경제학사전>에 실린 ‘무역 자유’에 관한 글에서 저널리스트 귀스타브 드 몰리나리는 -그보다 한층 더 심각한 어조로- 존엄한 교리를 놓고 이리저리 쏟아지는 모든 ‘보호주의 궤변’을 맹렬히 비난했다.(4) 정말 우리는 자유무역으로 인해 한 나라가 외국에 종속될 것을 우려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는 그것이 매우 어리석은 소리라고 일갈했다. 어쨌거나 한 나라가 철저히 고립적인 국가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관세는 자국 생산자가 부담하는 세금을 낮춰줄 수 있지 않은가? 보호주의 시스템은 오히려 생산자나 소비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보호무역 체제에서는 원자재나 생필품을 더 비싼 값에 살 수밖에 없는 탓이었다. 그렇다면 자유무역 반대진영은 정말로 “외국과 치열하게 경쟁하며 고용과 생산이 감소되는 것을 막고, 노동자의 생계 수단을 보장해 주기 위해 자국 노동을 보호하자”고 주장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도 드 몰리나리는 반대 논리를 역설했다. “보호주의 시스템은 결국 모든 것을 비싸게 만들어, 소비는 물론이요, 더 나아가 생산이나 일자리까지 모조리 감소하게 만들 것이다.” 반대로 무역의 자유는 ‘저가’의 동의어라고 할 수 있었다.
소비는 물론 생산까지 모두 확대시켜 줄 것이었다. 그래도 무역의 자유를 도입하면 사회가 깊은 혼란에 빠질 수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 이 원로 논객은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그것이 낡은 체계, 낡은 방법, 낡은 생각을 혼란에 빠뜨린다는 핑계를 들어, 정녕 우리는 새로운 체계, 새로운 방법, 새로운 생각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에 따르면 사실상 모든 진보는 위기와 혼란을 수반하기 마련이었다. 진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하는 대가일 뿐이었다.
나폴레옹3세, 낙후된 산업 근대화 위해 자유무역
하지만 자유무역 신도들의 주장은 당시 막 태동 중이던 노동운동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거슬리는 소리였다. 그들에게는 이런 이분법적 사고가 실로 무의미했다. 그들이 보기에는 ‘자국 노동’의 파수꾼들이 반동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경제학자’들은 모든 사회권의 발전에 대립하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뜬금없게도 프랑스를 자유무역의 길로 인도하기로 결정한 것은 나폴레옹3세였다. 나폴레옹3세는 프랑스의 뒤처진 산업을 근대화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교역의 확대는 교통수단의 비약적 발전과 맥을 함께 했다. 사실상 개방은 소비자 가격과 일부 원자재 비용을 낮춰줌으로써 산업계가 기술 발전에 힘쓰도록 유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자유무역의 사도들은 이 점을 굳게 믿었다. 이런 사실을 신봉한 사도들 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파리-생제르맹 열차회사와 크레디 모빌리에 은행을 설립한 에밀·이자아크 페레르 형제였다. 과거 생시몽주의자에서 참사원 관료이자 독재정권의 저명한 경제학자로 변신한 미셸 슈발리에도 자유무역의 숭배자로 널리 활약했다.
황제 나폴레옹3세는 극비리에 일단의 전문가들에게 영국과의 통상 조약을 준비하도록 명령했다. 이 조약은 1860년 1월 23일에 이르러 마침내 체결됐다(이후 다른 조약들도 잇달아 체결됐다). 황제는 경쟁 위험에 별로 노출되지 않은 농민 세력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있었던 덕분에 그다지 보나파르티즘을 추종하는 기업인들의 불만을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미셸 슈발리에는 기쁨에 들떠 어쩔 줄 몰랐다. 그가 보기에 통상 협정은 분명 인류를 계몽의 길로 인도하는 프랑스 대혁명을 계승한 커다란 변혁의 바람을 의미했다. 무역의 자유에 힘입어 “각 국가는 자연스럽게 자국의 이익을 위해 서로 가까워질 것이다. 서로를 분열시키는 편견이나 선입관, 증오심을 누그러뜨릴 것이다. 결코 서로가 서로를 흡수해 천편일률적이며 무익한 획일성을 띠도록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의견과 생각과 각자 자국 노동자가 만들어낸 생산물을 교환하며 모두가 함께 이익을 누리기 위해서 말이다.”
세기 말까지 공화국을 뒤흔드는 모든 무역 논쟁에서 사회주의자들은 항상 매우 특별한 이론적 입장을 견지하려 애썼다. 가령 1897년 의회 토론 중에 장 조레스는 사회주의는 “전 세계적 차원의 경제적 무질서를 의미하는 자유무역과, 오늘날 소수의 대자산가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보호무역”(5)을 동시에 배격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진정한 논쟁은 오히려 생산의 사회적 조직 형태나 지배계급이 자본에게 부과하기를 거부하는 세금 문제를 놓고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레스가 보호주의를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사회주의 사상을 실현한 국가는 “더 많은 나라와 다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자국의 발전에 기여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외국 생산물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역설했다. 여기에서 외국의 생산물이 자국의 발전에 기여하는 경우라는 단서는 다시 말해 국내 경제활동을 먼저 최대치로 끌어올린 이후를 의미했다.
글·앙투안 슈바르츠 Antoine Schwartz
정치학자. <사회적 유럽은 이룰 수 없다>(레종다지르·파리·2009년)의 공저자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Karl Marx, ‘자유무역에 관한 연설’(발췌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3월호
(2) David Todd, <프랑스의 경제적 정체성>, 그라쎄출판사, 파리, 2008년
(3) Louis Reybaud, <사회적 지위를 찾아 나선 제롬 파튀로>, 제2권, 폴랭출판사, 파리, 1846년, http://gallica.bnf.fr
(4) Charles Coquelin, Gilbert-Urbain Guillaumin, <정치경제학 사전>, Librairie Guillaumin, 파리, 1852~1853년
(5) Jean Jaurès, ‘사회주의와 농민들’, 1897년 6월 19·26일과 7월 3일 하원 연설
<상자기사>
자유무역 연표
1846년 6월 영국 ‘곡물법’이 폐지되고, 밀 무역이 자유화됐다(이 조처는 1849년에 발효).
1849~1854년 영국은 각종 관세와 항해조례(외국의 선박이 산지국 이외의 산물을 들여오는 것을 금지하는 한편, 영국 선박에만 식민지와 무역할 수 있는 독점권을 허용)를 철폐했다.
1860년 나폴레옹3세는 프랑스 정치 지도자 미셸 슈발리에와 영국 기업가 리처드 코브던의 조언에 따라 관세를 철폐하는 것을 골자로 한 영불자유무역협정을 맺고 영국에 프랑스의 문호를 개방했다.
1947년 10월 30일 관세정책 통합을 주요 골자로 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이 체결됐다(이 협정은 1948년 1월 1일 발효). 처음에는 23개국이었던 체결국이 1994년에 이르러 120개국으로 확대됐다.
1957년 3월 인력·서비스·상품·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라는 ‘네 가지 자유’에 기초한 공동시장 창설을 주요 골자로 한 로마 조약이 체결되면서 유럽경제공동체(EEC)가 탄생했다.
1959년 11월 20일 EEC 미가입국들(영국, 노르웨이, 덴마크, 스위스, 포르투갈, 스웨덴, 오스트리아)이 모여 유럽자유무역연합(EFTA)을 창설했다. 아이슬란드는 1970년, 핀란드는 1986년, 리히텐슈타인은 1991년에 각각 가입했다. 이후 영국, 덴마크, 포르투갈, 스웨덴, 핀란드, 오스트리아가 EEC 가입을 위해 EFTA를 탈퇴했다.
1963년 7월 20일 EEC가 마다가스카르와 아프리카의 18개 나라(여러 EEC 회원국의 옛 식민지)와 야운데(카메룬)협정을 체결했다.
1973년 1월 1일 제1차 로메협정에서 ACP(아프리카 카리브해 태평양연안) 국가란 개념이 처음 구상됐다. 이 협정은 ACP 국가가 EEC로 수출하는 경우 비상호적인 특혜관세(GATT 규정에서 예외)를 적용할 것을 명시했다. 단, 공동농업정책에 따라 보호받는 유럽의 농산물은 예외로 했다.
1989년 1월 1일 미국·캐나다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됐다.
1992년 12월 비셰그라드 그룹(체코공화국, 슬로바키아공화국, 폴란드, 헝가리) 간 자유무역지대가 창설됐다.
1993년 1월 1일 6개 회원국(태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브루나이) 간 무역장벽을 낮추기 위한 자유무역지대인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이 창설됐다.
1994년 4월 15일 GATT 회원국 간 마라케시협정이 체결되면서 세계무역기구(WTO)가 제도화됐다.
1994년 1월 1일 미국, 캐나다, 멕시코 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발효됐다.
1994년 12월 9~11일 마이애미 미주정상회의에서 윌리엄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미주자유무역지대(FTAA) 창설을 제안했다.
1995년 1월 1일 세계무역기구(WTO)가 탄생했다.
1997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회원국들에게 다자간투자협정(MAI)을 제안했다.
1998년 4월 18~19일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린 제2차 미주정상회의에서 미주자유무역지대(FTAA)에 관한 협상이 본격 개시됐다.
1998년 10월 프랑스가 잇따른 시민들의 대규모 반대시위로 다자간투자협정(MAI) 협상 의사를 철회했다.
2000년 6월 23일 유럽연합과 ACP 77개국 사이에 코토누협정이 체결됐다.
2001년 4월 20~22일 퀘벡에서 열린 제3차 미주정상회의에서 미주자유무역지대(FTAA) 초안이 발표됐다.
2004년 3월 25~26일 유럽이사회가 서비스 시장 자유화에 관한 프리츠 볼케슈타인 지침을 ‘우선과제’로 격상시켰다.
2005년 11월 4~5일 마르델플라타(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제4차 미주정상회의에서 대규모 반대시위가 잇따르며 미주자유무역지대(FTAA) 협상이 좌절됐다.
2007년 12월 8~9일 리스본에서 경제동반자협정 협상을 위해 유럽연합-아프리카 정상회의가 개최됐다.
2008년 9월 22일 세계 최대 자유무역지대 창설을 목표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창설하기로 결정했다. 협상에는 미국, 칠레, 뉴질랜드, 브루나이, 싱가포르가 참가했다.
2008년 11월 20일 리마(페루)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12개국이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페루, 오스트레일리아, 베트남이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2011년 4월 28일 리마(페루)에서 ‘재화, 서비스, 인력,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페루, 콜롬비아, 칠레, 멕시코 간) 태평양동맹이 창설됐다.
2011년 11월 11일 호놀룰루(미국)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이 개최됐다.
2012년 6월 18일 멕시코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 참여를 결정했다.
2012년 6월 19일 캐나다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 참여를 결정했다.
2013년 7월 24일 일본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 참여를 결정했다.
2013년 12월 7일 발리에 모인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 대표 159명이 세계적 차원의 무역 자유화 협정을 승인했다. 이 협정은 수입 절차를 간소화하는 한편, 각종 무역 장벽을 철폐함으로써 국제 무역을 활성화하기 위한 목표에서 추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