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은 공산주의 주체가 아니라, 경유지일 뿐"
세계에서 가장 ‘위험하고 바쁜 철학자’라는 별명을 지닌 지젝이 이번에는 공산주의를 내세우며 나타났다. 애초에 문화․철학비평 쪽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십여 년 전부터 “레닌을 반복하라!”는 테제로 전 세계 지식인들을 격동시켰고, 마침내 공산주의를 자신의 철학적 이념으로 앞세우며 세계를 순회했다. 2009년 런던을 기점으로 베를린(2010), 뉴욕(2011)을 거쳐 지난해에는 서울에서 ‘공산주의 이념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지난해 9월 27~29일 매일 5백여명이 행사장을 방문하는 등 그의 개별강연에 거의 만명이 찾아왔다 하니 새삼 ‘지젝 파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2008년 미국발 세계자본주의의 위기와 맞물려, 우리는 지젝의 모습에서 흡사 곧 도래할 새로운 세계를 설파하는 예언자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물론, 그의 이론이나 정치적 입장에 매서운 비판을 가하며 ‘거짓 예언자’라 규탄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 펼쳐진 이택광과 홍준기의 논쟁은 그가 불러일으킨 이론적·실천적 문제제기가 한국의 지식사회에서 ‘뜨거운 감자’로서 받아들여졌음을 부인할 수 없게 한다.
지젝이 그의 ‘전략적 동반자’ 격인 바디우와 제기한 공산주의가 지난 역사 속의 공산주의와 꼭같은 것이라고 믿을 순진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서구 마르크스주의 전통과도 다르다. 관건은 때로는 ‘가설’로, 때로는 ‘이념’으로 제시되는 공산주의가 대체 무엇인지, 이전의 정치적 체제와 어떻게 다른지, 또한 어떤 독특한 변별성을 갖는지 검토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지젝은 공산주의 담지자가 아니라 시대의 문제의식을 던진 철학자
공산주의 혹은 그로 대표되는 진보적 이념 일반을 거부할 요량이 아니라면, 오늘날 또다시 제기된 공산주의를 적극적으로 검토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다만 그에 앞서, 지젝이든 바디우든 그들이 내세우는 공산주의가 정답인지 아닌지 검증하는 게 우리의 목적이어선 곤란하다는 점을 밝힌다. 그것은 은연중에 지젝이나 바디우가 공산주의의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필요한 것은, (논쟁의 도마에 오른) 지젝을 거친 공산주의가 얼마나 현실을 변혁하는 이념이 되는지, 그것을 채워보고 실험해 보는 일이 아닐까? 마르크스나 레닌 등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공산주의라는 진리의 담지자가 아니라 그것을 시대의 문제의식으로 던져놓고 질문한 철학자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정의했던 바, 공산주의가 현 상태를 지향해 가는 현실의 운동이라면 지젝은 그 운동의 주체나 인도자가 아니라 다만 경유지일 것이다.
공산주의의 이념은 바디우에 의해 처음 안출되었고, 이를 지젝이 적극적으로 받아쓰며 더욱 확장되었다. 두 철학자 사이의 이론적 간극을 잠시 접어두고, 일단 지젝의 논의를 검토하기 위해 바다우의 논변을 짚어보자. 그에 따르면 공산주의는 일단 ‘가설’로서 제기되어 있다.
공산주의 가설이란 무엇인가? 그 가설의 정전인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주어진 일반적 의미에서 ‘공산주의적’이라는 말은 우선 계급의 논리—노동의 지배계급에의 근본적 종속, 고대 이래로 지속되어온 합의—는 불가피하지 않고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산주의 가설은 다른 집단적 조직이 실천가능하다는 것이고, 부(富)의 불평등 그리고 심지어는 노동분업을 제거하리라는 것이다. 거대한 재산의 사적 소유와 상속에 의한 그 재산의 양도는 사라질 것이다. 시민사회와 분리된 강제적 국가의 존재는 더는 필연성으로 인식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연합에 근거한 장기에 걸친 재조직 과정은 국가를 소멸시킬 것이다(<사르코지라는 이름이 뜻하는 것>).
바디우는 서울에서 이 가설을 계급철폐를 통한 평등의 실현, 억압국가의 철폐, 사회와 노동의 새로운 조직화 등으로 재차 요약한 바 있다. 지젝에 의하면 이러한 공산주의의 ‘영원한 이념’이자 ‘불변항’은 플라톤부터 중세 천년왕국운동 및 자코뱅과 레닌, 마오쩌둥으로 이어지는 근본 개념들을 포함한다. ‘엄격한 평등주의적 정의’, ‘처벌적 테러’, ‘정치적 주의주의’ 및 ‘민중에 대한 신뢰’가 그것들이다.
이 개념들이 얽혀서 만들어진 매트릭스는 그 어떤 외적인 진동에 의해서도 ‘지양’되지 않은 채 ‘끈질기게 존속해’ 왔는데, 그것은 영원불변한 것이라기보다 ‘패배 이후 매번 다시 귀환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또다시 던져지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공산주의의 이념을 가설로 머물지 않고 현실적 운동이 되게 만드는 ‘고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즉 원대한 이념이 현실과 분리된 단락을 어떻게 이어붙일 것인가가 문제다.
자주 ‘이념’이라 부름에도 불구하고 지젝이 공산주의를 하나의 ‘가설’로 제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계급을 철폐하고 사회를 새롭게 조직화하는 등의 계획만으로 이념은 진리가 되지 않는다. 가설이 진리가 되려면 실험을 해봐야 하고, 그 과정을 통해 공산주의라는 가설은 이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공산주의라는 진리는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철저하고 순수한 주의주의(주지주의에 대립 개념. 의지가 지성 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편주)의 산물이란 게 지젝의 주장이다. 참과 거짓, 진짜와 가짜, 진리와 허위 사이의 양자택일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양자택일하는 행위 자체가 참과 거짓, 진짜와 가짜, 진리와 허위를 가르는 근본적 계기가 된다. 진리가 우리를 행위하게 하는 게 아니라 행위가 우리를 진리의 편에 묶어준다는 말이다. 정말 그럴까?
이제부터 논의할 세 가지 단락은 공산주의를 가설에서 이념으로 옮겨놓기 위해 어떤 교량을 어떻게 놓아야 할 것인지, 지젝의 답안을 검토해 본 것이다.
20세기의 현실 사회주의가 소비에트 연방에서 유일당 독재로 귀착한 이래 서구좌파 지식인들은 공산주의의 제도적 장치들, 즉 당과 국가에 거리를 두는 ‘초연함’의 정치철학을 추구해왔다. 실제 정치로부터의 ‘후퇴’라 부를 만한 이러한 정치철학 혹은 ‘철학적 정치’(?)는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를 경유하여 ‘공동체 없는 공동체’와 같은 소극적 자세를 취하는데 익숙해졌고, 이는 현실을 우파의 ‘세력 범위’로 전락시켜 버렸다.
개입과 초연함의 아포리아 사이에서 좌파가 머뭇거리는 동안, 우파가 현실정치의 빈 자리를 집어삼킨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폭발한 아랍민중의 봉기나 미국의 월가 점령시위에 대해 좌파 지식인들이 보인 대책없는 경이의 원인도 여기 있다. MB정권 초에 타올랐던 촛불집회의 성격에 대해 한국의 지식인들이 이론적 혼란과 실천적 무능 사이에서 주저앉았던 사정도 그와 멀지 않다.
현실 개입을 터부시했던 좌파의 역사적 맥락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그것을 하나의 원리적 차원으로 받아들여 공산주의 운동을 현실 ‘너머’의 초월적 원리 속에 투사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바디우와 달리, 칸트가 ‘규제적’ 원리라 불렀던 이런 입장을 지젝은 거부한다. 그것은 공산주의를 절대적인 진리로 상정하고 우리가 그에 적응하길 요구하는데, 완성된 진리로서 공산주의가 이미 존재한다면 우리가 할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 이념이 현실 속에 성취되길 기다리고 보조하기만 하면 충분하다. 하지만 공산주의가 그 자체로 완성된, 절대적인 이념이 아니라면? 가설에 불과하기에 우리가 그것의 진리를 입증하기 위해 끊임없이 매달려 실험해야 하는 것이라면?
앞서 언급한대로, 공산주의가 현 상태를 지양하는 현실의 운동이라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가야 하는 과정이지 이미 완성되어 우리를 규제하는 것일 수 없다. 공산주의는 저 멀리서 우리를 기다리는 초월적 진리가 아니다. 정신분석의 언어로 말해 공산주의는 대타자가 아니다.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할 대상이 아니라 아무런 확약없이 무조건 실천해야 할 행위의 대상이 공산주의다. 요점은 행위다.
이성과 합리에 따라 묻고 따지는 손익계산을 물리친 채, 무조건 행위한다는 것은 욕망과 광기에 우리를 맡기는 모험에 다름 아니다. 왜 이런 맹목이 필요할까? 우리는 역사의 발전에 대해 다소 순박한 인과론적 원칙을 종종 적용시킨다. 오늘은 어제의 결과이며, 내일은 오늘의 결과라는 것. 맞는 말이다. 과거라는 조건 위에 현재와 미래가 만들어지는 것은 상식적일 뿐만 아니라 합리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과관계를 맹신할 때 우리는 혁명을 꿈꿀 수 없게 된다. 혁명이란 어제와는 분리된 오늘, 오늘과 절단된 내일 속에 벌어지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인과율을 넘어서는 사건이 혁명이며, 그러한 혁명만이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시간일 수 있다. 자본과 권력에 사로잡힌 지금-여기를 중단시키고 전적으로 새로운 시공간을 전개시키는 게 혁명이라면, 그것이 인과율의 사슬을 벗어난 사건이란 점은 필연적이다. 혁명적 행위가 광기에 사로잡혀 있으며, 합리 너머의 맹목이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마르크스의 말을 비틀자면, “가설은 가설이다. 그것은 특정한 조건에서 이념이 된다.” 현재의 단락을 만들어내는 것은 두말 할 나위없이 행위다. 그런데 행위는 이성(의식)에 의한 현실에의 개입이 아니다. 신좌파가 그렇게나 겁을 내며 사양했던, 현실에 대한 이론의 설익은 참여가 아니라 ‘막무가내’로 보일 법한 충동에 가까운 것이다. 그것은 거짓 예언자의 참언 같기도 하고, 혹세무민하는 ‘유령적’ 소문일 수도 있고, 종말에 대한 공포스런 예언일지도 모른다. 진짜는 오직 행위 자체의 수행성으로부터, 의식 아래 깔린 무의식과 욕망의 영토로부터 연유하는 탓이다.
현재에서 미래로 도약하는 단락을 내는 방법으로 지젝이 당차게 거론하는 것이 바로 벤야민의 신적 폭력이다. 그에게 쏟아지는 세찬 비난의 상당수가 이러한 ‘폭력예찬’에 기인한다. 유대적 자기희생의 의미를 탈각한 채 타자에 대한 유혈로 점철된 ‘사디즘적 폭력’이 그것이라는 말이다. 비판의 빌미가 된 지젝의 문장은 이렇다.
“십수년 전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일어난 사태를 상기해 보자. 빈민가의 군중들이 도심의 부유층 거리로 가서 슈퍼마켓을 마구 약탈하고 방화하기 시작했다. 이런 것이 바로 신적 폭력이다... 그들은 인간의 죄를 신의 이름으로 벌주기 위해 성경에 나오는 메뚜기떼 같았다. 신적 폭력은 목적없는 수단으로서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들이닥친다(<폭력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인지할 수 있고 계산가능하며 기획가능한 가시적 구조의 파괴가 아니라 각자의 신체 속에 각인된 ‘사회(정체성)’라는 (무)의식적 믿음이 제거되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를 <매트릭스>(1999)에 나오는 인간-건전지들처럼 계속해서 잠들게 한다.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할 때 레닌의 근심은 러시아 인민을 “새로운 인간으로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그들이 “낡은 믿음을 버리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에 있었다.
그렇다면 폭력을 통해 습관을, 무의식을 파괴하면 새로운 삶이 성취될 것인가? 이 질문에서 우리는 다시금 대타자의 유혹을 지각한다. 세상이 멸망하면 메시아가 오리라는 헛된 희망이 그것이다. 유혈낭자한 폭력을 통해 혁명이 일어나면, 그렇게 등장한 공산주의는 만병통치약이 될까? 그럴 리 없다.
지젝은 오히려 그 다음부터가 진짜 혁명임을, 섣부른 희망의 찬가를 걷어치울 것을 주문한다. 혁명은 결코 우리가 원하는 것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선사하지 않으리란 게 그의 단언이다.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은 채 메시아주의에 우리를 맡겨야 한다. 폭력은 폭력이다. 우리의 재산과 생명마저도 내놓기를 요구하는 외설적인 힘, 종말론적 공포가 폭력의 진면목일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각오하고 덤벼들지 않는 한, 혁명은 결코 바랄 수 없는 몽상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주의하자. 폭력없이는 혁명이 불가능하니 무조건 다 때려부수고 뒤집어버리자는 허무주의적 폭력예찬과 공산주의는 무관하다. 신적 폭력은 언제 어떻게 발생할지 모른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미지의 지대에 남아있다. 누가 그 폭력의 주체가 될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라는 말은 그런 의미다. 미리 계획하고 계산하는 극좌주의적 폭력은 혁명의 결과를 자신의 것으로 목적하는 한 메시아주의의 함정을 벗어날 수 없고, 그 현실적 미래는 몰락해버린 소련의 운명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도래할 혁명을 예기하면서도 섣불리 그것을 전유하려고 하지 않는 모호한 간극, 가설과 이념의 단락에서 요구되는 것은 바로 신적 폭력에 대한 사건적 충실성이다. 조금 변주해 말한다면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가 전국으로 확산되고 급진작되었을 때 진보세력은 설익은 지도력을 발휘해 대중을 선도하려 들거나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운동의 향방을 결정지으려 들지 말았어야 했다. 사실 그 누구의 지휘도 받지 않으면서 대중의 흐름을 시작되었고 전개되었으며 최고점까지 올랐지 않은가? ‘명박산성’을 넘어갈 것인지 그대로 회군할 것인지 역시 합리적 토론이나 전략적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그 흐름 자체의 힘에 내맡겨졌어야 맞지 않았을까?
공산주의, 해방의 시간, 이념의 순간이자 신적 폭력의 계기는 과연 어떻게 도래하는가? 단락 ‘너머’의 시간을 바라는 우리는 대체 누구인가?
레닌이 한 일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지 못한 일, 그가 놓친 기회를 반복
정신분석의 목적은 물론 치유다. 하지만 여기엔 역설이 있다. 자신의 증상에 괴로워하는 환자는 실상 그 증상을 즐기고 있으며 결코 치유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신분석이 환자 외부의 분석가를 치유의 절대적 조건으로 상정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치유를 소망하지만, 나는 결코 나 자신을 낫게 만들 수 없다. 외부로부터의 개입, 내가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한 강압적인 침투는 그래서 필연적이다.
바디우에 따르면 주체 바깥에서 가해진 타격, 즉 사건이 주체를 주체로서 만들어 준다. 여기서 앞의 주체와 뒤의 주체는 전혀 다른 존재다. 사건을 마주친 주체는 그 사건 속에 휘말려들고, 사건과 결합함으로써 주체로 (재)탄생하기 때문이다. 주체의 ‘결단’이란 사건적 과정에서 주체가 맞부딪히는 (무)의식적 결정들을 가리키는데, 앞서 진리가 미리 정해진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란 의미가 이것이다.
우리는 객관적이고 영원불변하는 진리를 아는 게 아니다. 사건 속에 관여한 우리가 주체로서 결정한 것이 진리라는 말이다. 만일 공산주의가 생활과 정치, 삶의 진리라면, 그것은 우리에게 선험적으로 부여되는 어떤 내용이 아니라 우리가 공산주의를 실천하며 행위하는 와중에 형성되는 것일 게다. 이 점에서 지젝은 공산주의가 순수한 주의주의의 산물이라 단언한다.
재미있는 것은 ‘행위’나 ‘실천’이라는 단어가 반드시 그것들의 능동적인 이미지하고만 결합하는 것은 아니란 점이다. 오히려 한 발 뒤로 물러나는 것, 그것이 행위와 실천을 규정지을 수도 있다. 나는 그 사례를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작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발견하는데, 대강 이런 내용이다. 이반 카라마조프는 자신의 무신론을 신은 없다는 식으로 설파하지 않는다. 독실한 신자인 동생 알료샤에게 전하는 그의 우화에는, 신의 정의가 아닌 인간의 정의를 이루기 위해 그가 무엇을 할 것인지가 적시된다.
그것은 신을 부정하거나 저주하는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신에게 복종함으로써 주어진 천국의 입장권을 ‘정중히’ 반납하는 행위다. 신의 나라로부터 한발 물러섬으로써 오히려 그는 신에 맞서지 않으면서 신과 대결하고, 신의 정의 대신 인간의 정의를 주창한다. 아마 인간이 신에 대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이 그것일 게다.
물러섬으로써 한 걸음 나아가는 것. 바디우는 이를 빼기의 정치라 불렀지만 실상 더하기와 다르지 않다. 빼는 행위는 그로써 자신을 주체로 만들고 어떤 저항의 효과를 발생시켰기 때문이다. 감산이자 가산의 행위가 그것인바, 왜 이러한 정치학이 요구되는가? 자본의 권력이 극대화된 오늘날 우리가 어떤 것을 행해도 곧 다음 순간 자본에 의해 추격되고 장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 ‘노마드’는 자본과 권력에서 자유로운 삶의 표상이었으나 어느새 돈으로 구입해야 하는 라이프스타일이 되고 말았지 않은가? 탈주가 곧 또 다른 예속이 되는 상황에서 저항의 가능성은 단락을 억지로 이어붙이기 보다 ‘내버려두는’ 것으로부터 가능하다는 게 지젝의 분석이다.
5월 17일 <르몽트 디플로마티크>가 주최한 콜로키움 현장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논쟁의 장에서 지젝의 공산주의가 거론될 때마다 문제는 그것이 얼마나 현실적인가, 가능한 것인가에 모아졌다. 누군가 지젝 사유의 힘과 정치성에 대해 주장하면 나는 그것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실제로 혁명적 폭발력을 선보일 만한 방식이 무엇인지 답하라고 요구해 왔다. 그 날 나 역시 꼭같은 방식으로 질문의 폭탄을 돌려받았고 다소간 부족한 방식으로 응답할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공산주의는 가능하냐는 물음에 대한 지젝 식의 답변은 기실 실체적인 방식으로는 응답될 수 없게 열려있는 탓이다. 가령 레닌을 반복한다는 것은, 지젝에 따르면 “레닌이 한 일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지 못한 일, 그가 놓친 기회를 반복하는 것이다”(<지젝이 만난 레닌>).
그것은 ‘재현’이 아니라 ‘수행’이며, ‘성찰’이 아니라 ‘행위’다. 그 누구도 아직 하지 않은 일을 행하는 것이기에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실천을 통해서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반복하자면, 공산주의는 현 상태를 지양해 가는 현실의 운동으로서만 그것의 현실화 가능성을 지닐 뿐, 어찌어찌 하라는 식으로 예정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내용을 갖지 않은 공산주의. 실로 우리 앞에 던져진 공산주의의 난제는 여기 있으며,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공산주의를 우리의 과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의 관건이다.
현 상태를 지양하는 현실의 운동이란 표현은 무척 멋있지만 동시에 무엇을 가리키는지 잘 알 수 없는 말이다. 내용이 비워진 채 형식만 남아있는 탓이다. 그런데 바로 그 형식이야말로 공산주의의 중핵이 아닐까? 가설로서 던져져 있으나 매번 내용을 채워넣어야 하는, 하지만 비움으로써 채우는 빼기와 더하기의 정치학. 그렇게 깨진 독에 물붓기 식의 (광적인) 행위로만 채워진 현실의 운동이 공산주의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플라톤으로부터 천년왕국운동, 자코뱅과 레닌을 하나의 실타래로 엮어 제기할 수 있겠는가? 매번 새로이 발명해야 할 가설이자 이념인 공산주의. 지젝은 “우리가 기다리는 자는 다름 아닌 우리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공산주의 실현가능성의 공을 우리에게 넘겼다. 무언가 대단한 혁명을 해보라는 뜻은 아니다. 행위할 수 있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행위의 열정에 우리를 던져넣을 수 있는지 눈을 부라리며 지켜보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일단 우리의 행위가 실행되고 나서야, 우리는 지젝에게 당신의 다음 답변은 무엇이냐고 물을 수 있을 듯하다.
노마드 수유너머N 대표. 러시아 인문학대학교에서 문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저로는 <불온한 인문학>, <문화 정치학의 영토들>, <코뮨주의 선언> 등이 있고, 역서로는 <누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두려워하는가?>, <해체와 파괴>, <레닌과 미래의 혁명>(공역), <러시아 문화사 강의> (공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