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보다 생존의 길 택한 IMF
여기저기서 비판을 받던 국제통화기금(IMF)이 이미지 쇄신을 위해 기존의 운영 방식과 정책을 바꾸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IMF는 다짐과 달리 경제적 어려움으로 허덕이는 국가들에 대출을 대가로 여전히 엄격한 조건을 적용하고 있으며 선진국들의 금융이 불안정해지면서 위기가 발생해도 그대로 수수방관하고 있다. 더구나 런던에서 열린 선진·신흥 20개국(G20) 정상회담에서는 IMF에 오히려 재정을 지원해주고 힘을 실어주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2009년4월2일 공식성명은 G20이 정상회담에서 1조2천억 달러의 부실자산을 청산하는 방안이 결정됐다고 밝혔다. 전례 없는 경기 회복을 위한 전세계 규모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다. 이번 G20의 결정으로 커다란 수혜를 입은 건 뭐니뭐니 해도 IMF다. 이 기구는 G20 회원국들이 즉각 재정을 지원해준 덕에 대출 능력이 2500억 달러에서 7500억 달러로 무려 세 배나 늘어났다.
<비타민>, 1969-조안 라바스칼
G20은 IMF가 이른바 IMF 화폐인 ‘특별인출권’(1)을 새로 발행할 수 있도록 촉구했고, IMF가 향후 2~3년 내에 최빈국들에 추가로 60억 달러를 쉽게 지원해줄 수 있도록 금 보유고 일부를 매각할 수 있게 했다. 이제 IMF는 필요한 경우 시장에 대출을 검토할 수 있게 됐다. 이 기구는 대출 수익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IMF는 새로운 변화를 맞아 제3의 인생을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브레턴우즈 체제의 낡은 유산
1944년 7월에 브레턴우즈 회담을 통해 창설된 IMF는 원래 전후 국제통화 시스템을 안정시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당시 IMF의 주요 구실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회원국 화폐의 평가절하를 막기 위해 통화 협력을 보장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국제수지가 일시적으로 불안한 회원국들에 자금을 빌려주어 국제 유동성을 보장해주는 일이었다. 브레턴우즈 체제가 존재하던 기간에 IMF가 대출해 준 금액의 3분의 2 이상은 선진국에 이뤄졌다.
미국이 달러를 금으로 전환하지 않기로 하면서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됐다.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하자 IMF는 거의 비현실적인 방식을 고수하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제3세계의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1982년부터 지급불능 위기를 맞은 국가들이 많아지자 IMF는 다시 활기를 찾으며 제2의 인생을 맞았다. 20년 동안 IMF는 부채로 허덕이는 10여 개 국가들에 대출을 해주고 그 대가로 구조조정 계획을 요구했다. 이렇게 해서 ‘워싱턴 컨센서스(합의)’를 실천하게 되었다.
특히 전직 세계은행의 수석 경제학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통화기금의 방식은 실패라고 비판했다. “금리 인상이 밑바탕에 깔린 무역 자유화는 고용을 악화시키고 실업률을 높이는 방법이다. 여기서 피해를 입는 건 빈곤한 사람들이다. …상황에 맞지 않게 무분별하게 예산을 긴축하면 실업률이 높아지고 사회 계약이 깨질 수 있다.”
1980년대에 아시아와 남미에서 금융위기가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아프리카가 빈곤에서 도통 빠져나오지 못하자 IMF는 신뢰에 타격을 입게 됐고 결국 기존 방식을 재고하게 됐다.
그러나 1999년부터 새로운 국제 금융 구조가 생겨나고 2002년 3월 멕시코 몬터레이에서 새로운 합의가 채택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IMF의 구제금융에서 벗어나기로 한 신흥국들은 세계 경기 변화를 이용해(원자재값 상승, 금리 인하) 외환 보유액을 늘렸다. 타이(2003년), 아르헨티나와 브라질(2006년)은 부채 전부를 조기에 상환한 대표적인 국가들이다.
파리 날리다 금융위기로 다시 한철
주요 고객과 관계가 끊어지면서 수익의 상당 부분을 잃게 된 IMF는 대출 액수가 2003년 1030억 달러에서 2008년 3월 31일에 161억 달러로 줄어들게 되었다. 그것도 대출한 액수 중 3분의 2는 순전히 터키가 대상이었다. 도미니크 스토로스칸이 2007년 11월 1일에 취임할 당시 IMF는 예산이 부족하게 됐다. 몇 달 전, 재정 감사에 관한 ‘크로켓’ 보고서는 경상비 감소, 금 보유고 일부를 매각하는 것을 지지했다. 2008년 봄에 스트로스칸은 직원 2634명 중 380명을 감축했다.
2008년 가을 중에 발생한 초기 글로벌 유동성 위기로 급작스럽게 IMF가 호기를 맞게 됐다. 2008년 10월과 2007년 1월 사이에 9개국 이상이 486억7300만 달러의 대출을 요청한 것이었다. 위기를 맞는 국가들(루마니아·레바논·터키 등)이 늘어나 대출할 일이 많아졌다.
우스갯소리로 IMF의 재정이 조만간 바닥날 것만 같을 정도로 대출이 많아졌다. 이런 가운데 G20의 활발한 지원으로 IMF의 재정이 3배나 늘어났고 개혁도 더욱 소극적이 됐다. 그러나 두 가지 개선점은 분명히 생겼다. IMF를 유럽이 전적으로 지휘하던 시기가 끝났고 2011년까지 신흥 국가들의 투표권을 높이기 위해 쿼터제를 수정하기로 한 것이다. 이런 조처는 IMF를 좀더 민주적인 기구로 만들려는 취지이기도 하다.
IMF에서 투표권을 얼마나 가질 것인지 결정하는 방식은 전후(戰後) 균형을 기본 기준으로 하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주로 갹출금을 많이 내는 선진국들이 투표권을 대부분 나누어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2006년 초기 개혁 이후에도 투표권 중 겨우 10%만 조정돼 실질적으로는 투표권의 균형에 변화가 없었다. 게다가 G20도 대출 조건에 대해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다.
임금 동결 등 가혹한 조건 강요
분명 G20은 2008년 10월 29일에 새롭게 바뀐 대출 방식이 기존의 방식보다 유연하다며 환영하는 태도를 보였다. 새로운 방식이란 어떤 것인가? 유동성 위기를 맞은 국가들에 3개월 동안 대출을 해주면서 구조조정 프로그램과 조건을 그 대가로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대출 한도는 1천억 달러였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방식은 정치가 건전하다고 판단되는 나라들, 경제 체질의 기본을 갖춘 일부 국가들에만 해당된다. 2007년 12월에 IMF 독립평가사무소는 1995~2004년에 IMF가 개도국 55개국을 대상으로 120건의 대출을 해주면서 대가로 평균 17가지 조건을 달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너무 과하다는 평가를 받아 차후 IMF가 대출 대가로 제시하는 조건은 4~5개로 줄어들 것 같다. 2009년 3월 24일에 IMF는 대출 정책을 대대적으로 재검토했으며 대출의 대가로 엄격한 구조조정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이전에는 대출을 해주는 대신 엄격한 구조조정을 요구했으나 이제는 경제 체질이 기본적으로 튼튼한 국가들에만 대출을 해주겠다는 것이다.
결국 구조조정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기준이 된다. 다만 대출 액수와 프로그램 평가 방식만 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구조조정 조건은 예전보다 조금 완화됐다는 것뿐이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또한 IMF의 대출 정책은 여전히 금리 인상, 공공 지출 감소, 임금 동결을 기본 조건으로 하고 있다. 2008년 10월과 2009년 1월 사이에 9개국에 IMF가 해준 대출에 대해 ‘제3세계 네트워크’가 연구를 한 적이 있다. 그 연구를 보면 IMF가 제시하는 재정과 통화 조건이 과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엄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이스라엘과 라트비아의 금리 인상률은 6%포인트, 파키스탄의 금리 인상률은 2%포인트였으며 그루지야, 우크라이나의 경우는 재정 적자율을 각각 국내총생산(GDP)의 6%에서 3.75%, 0%로 맞춰야 한다. 한마디로 위기 때 대출을 해주는 대신 엄격한 구조조정과 체질 개선을 요구하는 관행은 변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현지 국민들이다.
마침내 IMF는 2009년 4월 2일에 라트비아가 공공 지출을 기준대로 축소할 때까지 대출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대출 조건을 반드시 준수하게 만들겠다는 의지 표명이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2009년 4월 2일은 G20이 IMF의 재원을 3배로 늘리기로 한 날이기도 했다. 라트비아는 IMF가 제시한 대로 공공지출 적자율을 5%로 맞추기가 힘들다며 7%로 높여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말았다.
달러 대체할 새 국제통화 논의 꿈틀
더구나 미국이 신흥국들에서 엄청난 금액을 대출받아(이들 나라 중에서 중국은 미국의 최대 채권국가다) 자국의 적자를 메우려고 하면서 세계 금융을 불안정하게 흔들고 있는데도 G20은 아무 말도 안 하며 그저 수수방관이다. 그 결과 국제통화 구조도 불안정하다. 특히 국제 기준 통화인 달러가 지금은 나날이 부채가 쌓여가는 국가(미국)의 통화이다 보니 현 시스템이 저절로 붕괴될 것 같은 불안한 조짐마저 보인다.
한편 중국과 다른 신흥국들은 자국의 발전을 위해 재원이 필요한 상황이긴 하지만 우선 심각한 적자 상태인 미국에 재원을 지원하려 수천억 달러를 모으고 있다. 문제는 만일 달러가 위기를 맞게 되면 이 신흥국들도 달러 보유고가 순식간에 날아가버리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G20 정상회담이 열리기 며칠 전에 중국 중앙은행 총재가 초국가적인 통화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국제 보유고 시스템을 제안한 것도 달러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중국이 한 이 제안은 유엔 금융위기 진단 전문가 위원회, 유엔개발위원회, 기타 여러 신흥국들(브라질·러시아·남아프리카공화국·한국 등)이 제안하기도 한 것이다. 사실, 이러한 제안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 것이기도 하다. 케인스는 달러와 금보다는 초국적인 국제통화 ‘방코르’(Bancor)를 기반으로 한 브레턴우즈 시스템을 세우자는 제안을 한 바 있다. 만일 초국적인 국제통화가 채택되면 IMF는 완전히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될 것이다. 특정 국가의 화폐가 아닌 초국가적인 국제통화를 기반으로 마련된 통화 시스템을 바탕으로 국제금융을 안정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국제통화를 기반으로 한 통화 시스템은 단기적으로는 실행하기 힘든 정책이다. 이를 실현하려면 우선 달러의 지위가 하락해도 미국이 이를 감수하겠다고 결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기적으로 바라본다면 달러 가치가 하락해 상황이 변하면 새로운 국제통화 시스템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국제 투기를 방지할 만한 효과적인 정책이 없다면 오히려 IMF의 구제금융은 새로운 거품을 만들게 된다. 현재 미국의 재정 거품이 심상치 않아 보인다. 그러나 금융 역사는 거품이 언젠가 터지게 되어 있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이미 남긴 바 있다.
글/아르노 자샤리 Arnaud Zacharie
국립개발협력센터(벨기에) 사무총장, 브뤼셀 대학과 리에주 대학의 부교수. <IMF : 보이지 않는 손>, <개발 자금자원 : 찾지 못한 합의>를 집필한 저자
번역/이주영 ombre2@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졸. 한불상공회의소 격월간지 <꼬레 아페르> 전속 번역. 번역서로는 <엔돌핀 경영> 등이 있다.
<각주> 특별인출권
1969년에 세계 통화준비금으로 마련된 특별인출권은 IMF의 ‘화폐’를 지칭한다. 특별인출권은 회원국가들에 대한 채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