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관 무시한 생명보험사들

2014-06-03     박동진

“인간에겐 누구나 존엄이란 게 있어. 하지만 상처 받고 모멸 당해.”

영화 <글루미 선데이> 속 주인공 자보(조아킴 크롤)가 죽기 전 한 말이다. 유대인의 실용적 마인드와 자존심이 살아 있는 대사다. 인간의 자살은 사회가 버린 재해인가, 내가 잘못 살아온 탓으로 인한 일반적 죽음인가. 자살을 어떤 형태의 죽음으로 봐야할지를 두고 보험업계가 떠들썩하다.

“아들. 조금만 기다려. 엄마가 갈게.”

세월호 참사로 세상을 떠난 어느 학생의 엄마가 자살을 시도하기 전 카카오톡 프로필에 남긴 말이다.

수많은 승객이 숨졌다. 세월호가 침몰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시신 수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준석 세월호 선장은 승객을 등지고 가장 먼저 도망쳐 기어코 살아남았다. 이 선장의 뒤를 이어 승무원 23명도 세월호를 빠져나왔다. 승무원의 지시를 기다리며 바다에 갇혀있던 아이들은 싸늘한 주검이 되어 육지로 돌아왔다. 이후 자식을 잃은 유가족뿐 아니라 나라 전체가 무너지고 있다.

희생된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들 학부모들의 자살 기도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안산 단원고 남학생의 어머니 김모씨는 수면제를 복용하고 자살을 기도했다. 아들을 잃은 서모씨도 합동분향소 인근에서 자살을 기도했다. 경찰은 분향소 유족 대기실 위편에서 목을 매 자살하려는 서씨를 발견했다.

아울러 안산 합동분향소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배모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학생과 고등학생 아들을 둔 배씨는 2년 전부터 우울증을 앓아오다 이번 세월호 참사 유족들을 도우면서 증세가 심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단원고 강모 교감은 학생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신을 찾지 못하는 녀석들과 함께 저승에서도 선생을 할까”라는 글을 남기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자신의 유골을 세월호가 침몰된 바다에 뿌려달라고 했다.

한국은 자살률이 OECD 회원국 중 압도적 1위다. 2011년 1년 동안 1만 5681명, 하루에 4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살을 부른다는 명곡 ‘글루미 선데이’가 탄생한 본고장인 헝가리(2위)보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목숨을 끊고 있다.

한국의 자살률은 OECD 회원국 중 다른 나라에 비해 너무 높다. 그것도 9년째다.

생명체 중에서 스스로의 의지로 목숨을 끊는 건 인간밖에 없다. 자살은 생명의 연장과 종족의 번식을 추구하는 동물로서의 인간의 본능에 정면충돌한다. 삶이 어려울수록, 사회가 팍팍할수록 자살 비율은 증가한다.

따라서 자살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질병으로 보는 이도 있다. 사회경제적으로 자살은 인적 자본의 파괴로 볼 수 있다. 자살자의 두뇌에 축적된 지식, 경험, 노하우는 허무하게 무너져 버린다. 그 지적 자산의 형성을 위한 교육투자는 소실되고 마는 것이다.

금감원의 딜레마

이러한 자살의 경우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해야 할 것인지의 문제로 보험업계가 떠들썩하다.

문제의 발단은 ING생명이 그동안 자살한 가입자에게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나면서부터 시작됐다. 자살보험금에 대한 논란은 생명보험사 전체로 퍼졌다. ING생명뿐 아니라 삼성생명, 교보생명 등 대부분의 생명보험사들이 그동안 약관을 어기고 자살한 가입자에게 재해사망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살에 대해 재해사고인지 일반사망인지 판단을 두고 생보사와 시민단체의 시각은 팽팽하게 갈렸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ING생명은 재해사망 특약 2년 후 자살한 90여 건에 대한 200억 원의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보험가입 2년이 지난 후에는 자살의 경우에도 재해사망 보험금을 지급하도록 명시한 약관을 따르지 않고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 일반사망 보험금만 지급한 것이다. 지급했어야 할 재해사망 보험금 약 150억 원이 지급되지 않았다.

금감원의 조사에서 보험사가 재해사망 특약에 가입하고 2년 뒤 자살한 계약에 대해 재해사망금을 지급하지 않고 일반사망금을 지급한 것이 드러나 문제가 된 것이다. 이 상품의 재해사망 특약 약관에는 자살을 재해로 해석해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보험사들은 약관을 떠나 자살은 재해가 아니므로 재해사망금을 지급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처럼 “약관의 문구대로 지급해야 한다”는 주장과 “자살은 재해사망이 아니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자살은 그 개념 자체가 고의에 의한 행위임을 내포하고 있다. 자살에 대한 재해사망보험금의 지급은 “고의로 인한 보험사고는 보장하지 않는다”는 보험법의 기본원리에 저촉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재해(accident)라는 것이 당사자가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변수에 의한 외래적, 우연적 사고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자살이 과연 재해인지 여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약관상 자살의 경우에도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하겠다는 취지의 문구가 있으면 위와 같은 보험의 원리에도 불구하고 계약은 지켜져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더군다나 약관을 작성한 쪽이 보험의 전문가인 보험회사니 약관의 조항이 애매할 경우에는 작성자에게 불리하게 즉, 보험계약자에게 유리하게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한 인간이 자살에 이르게 되는 사회경제적, 문화적 환경이라는 것은 자연재해에 준하는 외래적 사건이라는 주장도 가능할 것이다.

이번 사태에 관하여 어떻게 결론이 내려지더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보다 나은 삶을 위해 고안된 보험이라는 제도가 피보험자로 하여금 자살을 실행할지 여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역설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가 된 보험은 2010년 4월 표준약관 개정 이전에 체결된 재해사망 특약이 있는 보험계약이다. 당시 ING생명 상품의 약관 제12조에는 “피보험자가 정신질환 상태에서 자신을 해친 경우와 특약의 책임개시일로부터 2년이 경과된 후에 자살한 경우(또는 자해로 제1급 장애 상태가 됐을 경우)에는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한다고 명시돼 있다. 즉 가입자가 자살할 경우에도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한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ING생명뿐 아니라 대부분의 생명보험사도 동일한 상황이라는 것. 금감원은 최근 생명보험업계를 조사한 결과, ING생명뿐 아니라 삼성생명, 교보생명 등 대부분의 생보사가 자살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은 사실을 적발했다. 현재 전체 24개 생보사 가운데 푸르덴셜생명과 라이나생명을 제외한 대부분 생보사가 약관을 어긴 것으로 드러났다. 미지급한 자살 재해사망보험금은 최소 수천억 원에서 최대 수조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2010년 4월 개정 이전 대부분의 보험사 표준약관에는 재해사망 특약의 책임개시일로부터 2년이 지나고 가입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생보사, 약관에 자승자박

 재해로 인한 사망보험금은 일반사망보다 보험금이 2배 이상 많다. 하지만 생보사들은 자살한 가입자에게 일반사망보험금만 지급해 논란을 낳았다. 금융당국은 과거 생보사들이 잘못된 약관을 서로 복사해 사용하면서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논란이 불거지기 전 2010년 4월 생보사들은 약관을 슬쩍 고쳤다. 약관은 “2년이 경과된 후에 자살한 경우에는 재해 이외의 원인에 해당하는 보험금을 지급한다(즉 일반사망보험금 또는 사망 시까지 적립된 적립금을 지급한다는 것)”라고 개정했다. 표준약관 개정 이후 생보사들은 약관 변경을 근거로 내세우며 기존 약관이 적용되는 계약자들에게 일반사망보험금만 지급해 왔다.

생보사들은 “2000년 초반에 표준약관을 만들 때 실수로 잘못 설계된 것”이라며 “자살은 재해가 아니라는 점은 소비자들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동안 논란이 되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과거 약관은 표기 실수일 뿐 자살은 재해가 아닌 일반사망으로 보기 때문에 지급 의무가 없다는 주장이다. 또한 자살보험금을 인정할 경우 자살을 조장할 수 있다며 적극 반박하고 있다. 약관에 일부 잘못이 있다고 해서 재해사망으로 보기 어렵다는 부연이다.

금융당국은 자살의 사망보험금을 재해사망으로 보느냐, 일반사망으로 보느냐를 두고 딜레마에 빠졌다. 재해사망으로 판단하면 자살을 조장한다는 논란을 피할 수 없고, 반대로 일반사망으로 판단하게 되면 보험계약자 보호를 무시한 행위로 강력한 반발이 예상돼 쉽게 결론을 내지 못했다.

따라서 금융감독원은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금감원 관계자는 “자살보험금은 논란의 여지가 있어 검토하고 있다”며 “현재 진행상황을 말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당국은 내달 초 제재심의위원회에 ING생명에 대한 제재안을 상정할 것으로 예상된다.

생명보험사들은 금융당국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한 생보사 관계자는 “금감원의 결과를 기다릴 것”이라고 짧게 답했다. 생보사들은 이 문제를 제기한 고객들에 개별 보상을 해주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그동안 약관을 무시해온 생보사들이 논란이 커지자 사태를 덮는 데 급급하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도 생명보험사들의 자살보험금 미지급에 대해 약관이 잘못됐더라도 지켜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법만 보고 따졌을 때 약관대로 지급하지 않은 것은 약관 위배”라며 “약관에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애초에 약관을 소비자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만들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지난 2007년 대법원은 “가입 2년 후 자살하면 보험금을 지급하겠다”는 약관을 기재한 보험사는 가입자가 고의로 자살을 기도했더라도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당시 우울증 상태에서 지하철로 갑자기 뛰어들어 사망한 A씨의 딸 B씨가 교보생명을 상대로 약관을 지키지 않았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은 “보험 가입 후 2년이 지났으며 우울증으로 인한 사고이기 때문에 교통재해에 해당한다”고 판단해 B씨는 승소했다. 이 재판은 잘못된 약관이더라도 보험금은 약관대로 지급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로 남았다.

아울러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보통 거래약관의 내용은 계약체결자의 의사나 구체적인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평균적 고객의 이해 가능성을 기준으로 객관적·획일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면서 “고객 보호 측면에서 약관 내용이 명백하지 못하거나 의심스러운 때에는 고객에게 유리하게, 약관 작성자에게 불리하게 제한·해석해야 한다”고 밝혔다.

금융소비자연맹(이하 금소연)은 금융당국이 생보사들의 재해사망 특약의 자살보험금 미지급을 알고도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다른 생보사들도 동일한 상황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규모가 수조 원에 달해 업계에 미칠 파장이 크다는 이유로 이를 덮어두려 했다는 것이 금소연 측 설명이다.

금소연 관계자는 “보험사들은 계약자를 속이고 약관대로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았다”며 “금융당국은 자살방지 차원이라고 하지만 결국 제대로 된 검사를 하지 않았으니 업무 태만이다”라고 비판했다. 약관에 문제가 있었다고 해도 보험금은 약관대로 줘야 한다는 설명이다.

금소연은 미지급된 자살보험금이 생보업계 전체 2조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금융당국도 현재 미지급된 자살 보험금만 수천억 원에 이르며 현재 계약자까지 포함하면 향후 조 단위로 늘어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글·박동진

경제 분야 전문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