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부는 좌파바람
미국의 대도시들은 대부분 민주당 출신이 이끌고 있다. 그럼에도 사회 양극화 현상이 점차 심화되거나 고질화되는 추세다. 그러나 뉴욕에서는 지난 11월 빌 더블라지오 의원이 시장에 당선되면서 금권시대도 막을 내린 듯하다. 뉴욕 시장에 반기를 든 격렬한 저항을 지켜보노라면, 더블라지오 시장이 말로만 변화를 부르짖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뉴욕은 ‘뉴 하바나’(더블라지오 신임 시장의 좌익 성향을 비꼬기 위한 말. 특히 더블라지오 부부가 적성국가인 쿠바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것을 문제 삼아 <뉴욕 포스트>는 더블라지오를 체 게바라에 빗대어 체 더블라지오라고 부르기도 했음-역주)가 되고 말 것인가? 2013년 11월 5일, 미국 주요도시인 뉴욕에서 빌 더블라지오 민주당 의원이 시장직에 당선되자, 공화당 내부에는 이런 불안감이 한층 고조되고 있다. 마이클 블룸버그의 뒤를 이어 뉴욕시장에 오른 더블라지오 의원을 일컬어 공화당 의원들은 ‘진보주의 주적’으로 규정하기까지 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공화당 지도부는 더블라지오가 이끄는 풋내기 정부가 ‘신좌파(new left)’ 부상에 대해 공화당원들이 우려하는 바를 전형적으로 구현하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신좌파란 자고로 “부유층을 백안시하는 포퓰리즘을 표방하는 동시에, 노동자단체에 대해 공공연히 동조의 뜻을 나타내며, 소득 양극화를 줄기차게 문제 삼는다”는 것이다.
더블라지오 의원은 민주당 내에 뉴욕시장 후보 경선이 진행될 때부터 줄곧 불평등 문제를 주요 의제로 삼아왔다. 틈만 나면 뉴욕의 역사가 ‘두 도시 이야기’(2)로 점철되어 왔다며 목소리를 드높였다. 요컨대 뉴욕의 역사가 극부유층을 위한 도시와 나머지 계층을 위한 도시로 나뉘어져 왔다는 것이다. 더블라지오는 이처럼 사회주의적 정책을 표방한 덕분에 민주당 경선에서 승리하고(더블라지오는 미디어에서 유력 후보로 손꼽히던 다른 경선 상대자를 제치고 경선에서 승리했다(3)), 조셉 로타 공화당 후보를 상대로 득표율 72%란 압승을 거둘 수 있었다.
공화당과 보수세력의 반발
2014년 1월 1일 취임 연설에서 더블라지오 신임 시장은 향후 시정 방향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우리는 사랑하는 우리의 도시 뉴욕을 위협하는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끝내라는 부름을 받고 이 자리에 섰다.” 하지만 재계가 전지전능한 권력을 누리는 뉴욕시에서 양극화 해소 정책을 펼치는 과정은 험난한 가시밭길이 예상된다. 가령 더블라지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미국의 온라인 매체 <슬레이트(Slate)>의 칼럼니스트 매튜 이글레시아스 기자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트윗글을 올렸다. “시장 취임식에서 더블라지오는 방부처리를 한 레닌과 마오쩌둥, 호찌민의 시신을 대동하고 무대 위에 올랐다.”
며칠 뒤 공산주의 비판은 한층 더 희극적인 양상으로 치달았다. 얼마 뒤 뉴욕시에 눈폭풍 사태가 발생하면서 폭설로 도로가 마비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타블로이드 매체들은 일제히 맨해튼 최고 부촌 어퍼이스트사이드로 달려가 제설작업 지체에 분통을 터뜨리는 시민들을 앞다퉈 취재했다. 가령 <뉴욕포스트>에는 “더블라지오 시장이 우리에게서 등을 돌렸다”며 분개하는 한 여성 주민의 인터뷰가 실렸다. 그녀는 “사실상 더블라지오가 어퍼이스트사이드 제설작업을 거부함으로써 ‘나는 당신네 부류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표한 셈”이라고 분개했다.(4) 이 말은 곧 인터넷을 통해 일파만파로 확산됐고, 각종 지역 언론과 전국지, 특히 블룸버그가 소유한 매체를 통해 수없이 인용됐다. 그러나 더블라지오 신임시장은 자신을 승리로 이끌어준 양극화 해소론에서 단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더블라지오는 뉴욕이라는 다문화 도시의 시장직에 오르기까지 독일계 아버지와 이탈리아계 어머니에서 태어난 이민자 가정 출신이라는 자신의 다문화 가족사와 아프리카계 미국인과의 결혼사를 백분 활용할 수 있었다. 그는 특히 유색인종에 대한 부당한 불심검문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일부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선거를 승리로 이끈 최대 공신은 바로 더블라지오의 핵심정책이기도 한 경제 관련 정책이었다.
뉴욕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불평등한 나라로 통하는 미국에서, 세 번째로 불평등한 도시로 손꼽힌다. 월가에서는 2013년 주식 거래업자들에 대한 고액 보너스 잔치(2013년 평균 1인당 16만4,530 달러)나 로이드 블랭크파인 골드만 삭스 회장 등이 올리는 연간 2천만 달러 이상의 천문학적 소득 따위는 그리 충격적인 사건 축에 끼지 못한다. 블룸버그 전임시장이 이끌었던 시정부는 소수 극부유층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온몸을 바쳐 헌신했다. 소수의 부자들이 뉴욕시 세수의 상당부분을 분담하고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요컨대 5%의 뉴욕 가구가 뉴욕시 전체 세수의 38%를 분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맨해튼 섬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초호화 아파트들이 전 세계 엘리트층에게 수천만 달러에 팔려나가고 있는 가운데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신 번영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맨해튼 섬을 조금만 벗어나면, 적지 않은 수의 뉴욕 중산층 시민들이 서서히 빈곤의 늪으로 빠져드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미국 통계국이 집계한 조사 자료에 따르면, 2008~2011년 뉴욕의 가구당 중위소득은 6% 감소했다. 2011년 말 뉴욕시 가구의 절반이 빈곤선 기준 소득보다 무려 1.5배나 더 적은 소득을 기록한 것이다. 가족구성원 1명이 혼자 종일제로 일하는 가구의 17%와 가족구성원 2명이 함께 일을 하는 가구의 5.2%가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 뉴욕의 임대료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가령 2005~2012년, 뉴욕의 중위 임대료는 11%나 인상됐다(인플레이션 고려). 반면 세입자의 소득 증가율은 불과 2%에 그쳤다. ‘부동산 및 도시정책을 위한 퍼먼 센터’에 따르면, 뉴욕에 사는 세입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소득의 무려 3분의 1 이상을 주거 예산에 할애하고 있는 형편이다.(5)
더블라지오의 정책 가운데 모든 정적으로부터 공격받는 핵심정책은 바로 유치원 취학 전 유아에 대한 보편교육을 위한 특별기금 신설 계획이다. 더블라지오는 이 정책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소득 50만 달러 이상 고소득자에게 0.05%의 세금을 부과하려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정책을 둘러싸고 한 가지 상징적인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바로 뉴욕시장은 혼자서 세금 징수와 관련된 사항을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더블라지오 뉴욕시장은 반드시 사전에 앤드류 쿠오모 뉴욕 주지사의 승인을 얻어야만 한다. 그런데 2016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하려는 야심찬 포부를 지닌 쿠오모 뉴욕 주지사는 비록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입장(총기 규제나 동성결혼에 호의적이다)을 취할지언정, 경제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보수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특히 세금 문제에 있어 매우 단호하다. 쿠오모 주지사는 2011년 12월 뉴욕주 주민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자신이 “뉴욕주 최초로 재산세 상한제를 도입”하고, 중산층 세금을 “1953년 이래 최저 수준”으로, 법인세를 “1968년 이래 최저 수준”으로 인하한 것을 매우 자랑스러운 업적으로 내세웠다.
쿠오모 뉴욕 주지사 협조가 과제
결국 더블라지오 신임시장의 야심찬 계획은 쿠오모 주지사의 강박에 가까운 반 조세 행보에 부딪혀 표류할 위험이 높다. 두 사람이 아무리 서로의 우정을 과시하고 상대를 정치적 동맹자로 소개한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다. 그들은 민주당 내 ‘최대 정적’에 가깝다. 두 사람의 대립은 사실상 민주당 내 두 세력의 갈등을 반영한다. 더블라지오나 엘리자베스 워렌 상원의원과 같은 지도자들에게 희망을 걸고 좀더 공정한 경제를 실현하기를 희망하는 세력과, 기업의 자유를 더욱 중시하는 쿠오모나 힐러리 클린턴을 중심으로 결집한 우익세력이 민주당 내에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주정부는 연방 예산을 분배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시장은 주지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이득이다. 특히 야심찬 정책을 추진 중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쿠오모 주지사는 2016년 대선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다소 모호한 전략을 구상 중에 있다. 가령 많은 시민들이 유치원 취학 전 아동에 대한 보편 교육에 찬성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을 때는 더블라지오 후보의 무상보육안을 지지했지만, 일단 재정지원을 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자 세금 신설에 맹렬히 반기를 들었다. 몇 주간의 팽팽한 힘겨루기 끝에 결국 더블라지오 시장은 가까스로 주정부로부터 3년에 걸친 재정 지원을 승인받을 수 있었다.
반면 더블라지오 신임시장은 ‘차터 스쿨(charter school)’과 관련한 사안에 대해서는 무상보육을 추진할 때만큼 집요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6) 여기서 ‘차터 스쿨’이란 교직원노동조합의 규제에서 자유로운 민간재정으로 운영되는 자립형 공립학교를 말한다. 사실 차터 스쿨에서 공부하는 뉴욕 학생은 소수에 불과하다(기껏해야 6%). 그래서 대부분의 진보주의자들은 “차터 스쿨이 일반 공립학교의 예산 지원을 갉아먹고 우수한 인재를 빼앗아가며 공교육 체계를 뒤흔들고 있다”고 비판한다. 반면 항상 공공의 역할을 축소하는 데 관심이 많은 공화당 의원들과 연기금 운영자들은 차터 스쿨을 맹렬히 옹호한다. 더블라지오 시장이 차터 스쿨의 운영원칙을 비판했을 때도 쿠오모 주지사가 구원군으로 전면에 나서 신임시장이 한 발 물러서는 치욕을 안겨주기도 했다. 당시 대중의 눈에 더블라지오는 새파란 정치 초년병으로, 쿠오모는 노련한 원로 정치인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더블라지오는 결코 원한을 품지 않았다. 2014년 5월 말 뉴욕주 교통·환경·노동·비지니스 관련 이익단체들의 연합체인 친민주당 성향의 단체 ‘워킹패밀리파티’가 2015년 쿠오모 주지사 재선을 놓고 의견이 서로 엇갈렸을 때, 더블라지오는 막후에서 쿠오모를 지원 사격하기도 했다. 게다가 더블라지오 시장이 쿠오모 주지사에게 도전적으로 나가기 힘든 이유는 또 있다. 바로 쿠오모 주지사가 재계의 든든한 지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쿠오모 주지사는 이듬해 열릴 주지사 재선 선거를 위해 3천3백만 달러 이상을 모금했다. 더욱이 쿠오모에 대적할 만한 대항마도 현재로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향후 주택 문제는 더블라지오의 의지를 가늠하는 시험대가 될 것이다. 더블라지오는 뉴욕 시장 선거에서 20만 가구의 추가 임대주택 공급을 공약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에 따르면 이것은 실현하기가 매우 어려운 목표이다. 더블라지오 본인도 “도시 차원에서 추진한 미국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가장 야심찬 서민주택 건설계획”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사실 부동산은 뉴욕 정치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분야다. 그러니 무엇보다 부동산 업계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부유층이 센트럴 파크가 내려다보이는 아파트를 수백만 달러를 주고 사는 데는 모두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극진한 대접을 원한다. 최고의 아파트 관리 서비스를 누리고, 아파트 내부에 구비된 수영장과 헬스센터를 사용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니 지하철 따위나 타고 다니는 평민들과 그들은 한 동네 안에(더욱이 한 아파트 안에는 절대!) 함께 살 생각이 추호도 없다. 지금까지 더블라지오 시장은 양자 사이에서 그럭저럭 균형을 잘 잡아왔다. 그는 부동산 개발에 호의적인 동시에, 서민층과 중산층을 위한 주택 공급 확대에도 전력을 기울여왔다.
이러한 전략은 현재까지 효과가 좋은 편이었다. 가령 ‘도미노 설탕공장’ 사건만 봐도 그렇다. 브루클린 한복판에 자리한 이 옛 설탕공장부지 재개발을 놓고 몇 년 전부터 뉴욕시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2012년 부동산 개발업자 저드 워렌타스가 공장 부지를 매입하고, 첨단기업 유치를 위한 오피스텔과 서민주택 660가구를 포함한 총 2300가구의 주택을 건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더블라지오는 “그 정도 규모로는 충분하지 않다”며 반박했다. 결국 개발업자는 계획을 전면 철회하겠다고 협박했고, 언론들도 일제히 더블라지오 시장을 맹렬히 비난했다. 그러나 뉴욕 시장은 끝까지 버텨냈다. 그리고 결국 워렌타스로부터 서민주택 400가구 추가 건설 약속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더블라지오는 이 사건을 통해 빈곤층과 중산층을 위한 정책은 매번 부유층과 뉴욕주 주도 올버니에 있는 부유층의 동맹군들, 그리고 부유층을 비호하는 언론들과의 힘겨루기를 연출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더블라지오는 시민들에 대한 실질적인 서비스 제공을 통해 미디어의 관심사와 실제 시민들이 일상에서 겪는 문제가 얼마나 다른지를 강조하는 전략에 기대고 있다. 뉴욕시 경제만 잘 받쳐준다면 어쩌면 더블라지오는 1960년대 무너진 ‘도시 혁신주의(urban progressivism)’의 약속을 실현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로스앤젤레스나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혹은 더 나아가 시카고까지 이런 뉴욕의 선례를 뒤따르는 날이 찾아오지 않을까?
글·에릭 알터만 Eric Alterman
언론인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Michael Barbaro, Michael M. Grynbaum, ‘Republicans cast de Blasio as a leading liberal foe’, <뉴욕타임스>, 2014년 5월 14일
(2) Nathaniel P Morris, ‘De Blasio’s taile of two cities’, <워싱턴포스트>, 2014년 3월 7일. 여기서 ‘두 도시 이야기’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 제목에서 따왔다.
(3) Renaud Lambert, ‘블룸버그, 금권의 망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6월호
(4) Jennifer Gould Keil, Frank Rosario, 'De Blasio "getting back at us" by not plowing', <뉴욕포스트>, 2014년 1월 21일
(5) ‘NYCHousing 10 issues for NYC's next mayors’, 부동산 및 도시정책을 위한 퍼먼 센터, 뉴욕대학교, 201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