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코뮌에서 실현된 유토피아

2014-07-02     크리스토프 브와이요

 

좌파 코뮌주의가 집권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선 아직 꿈같은 이야기지만, 지구촌 곳곳에선 좌파 정권들이 들어서고, 또 사라지고 있다. 우리가 아직 순전한 좌파정권을 맞이하지 못한 것은 아직 흘려야 할 피와 눈물이 남아서일까? 이에 본지는 파리 코뮌에 등장한 좌파 코뮌주의의 의의와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레에서의 코뮌주의 실험, 프랑스 내 코뮌 자치정부의 출범을 살펴보고, 한국 진보정치세력의 암담한 현실과 과제를 진단한다. (23~26면)

“정치를 바꾸고 남녀 간 평등을 실현하고, 새로운 형태의 정부를 만들고, 시민을 참여시키자.” 노동자 운동이 오랫동안 내세웠던 명령어들이다. 1871년 파리 시민들의 봉기에 의해서 이 명령어는 특별하고 구체적인 의미를 얻게 되었다.

140주년 기념일에 이르러 파리 코뮌은 또다시 기억 속에서 부활했다. 파리 시청은 전시회, 강연, 안내자가 딸린 방문들을 주최했으며 수많은 관련 출판물도 간행되었다. 이와 같은 기념행사 속에서도 파리 코뮌의 기억은 투쟁의 마지막 전투가 일어났던 피의 주간이라는 이미지 앞에서 지워져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마치 아돌프 티에르가 시위 진압을 위해 지른 화재의 연기와 베르사이유 정규군이 파리 봉기의 희망과 구체적인 성과를 덮어버리는 것과 같다. 생생한 사진(1)으로 그리고 이 사건을 단순히 칼 마르크스가 격렬하게 표현한 것에 빗대어 “벽돌과 화약의 남용”(2) 정도로 간주하는 식의 재조명에 대해서는 71일 동안 이루어진 성취는 파리 시민들로 하여금 국민 스스로에 의한 국민의 정부라는 의식을 실행하게끔 했으며, 직업 군인들에 맞서서 동등한 무기를 가지고 대항할 수 있는 힘으로 변모시켰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코뮌은 이중의 두려움으로부터 발생했다. 하나는 프러시아군이 파리에 진입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고 다른 하나는 1871년 2월 국회의원 선거 결과에서 비롯된 왕정의 반격이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수도의 프롤레타리아들은 지배계층의 배신과 쇠약을 확인하고 자신들이 상황을 수습할 때가 왔다는 것을 깨닫고 공공 업무를 지휘할 지도부를 장악해야 한다고 믿었다”는 것을 3월 21일자 알림에서 밝혔다.(3) 민주주의를 향한 열정, 1793년 헌법이 보장한 거부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기억에 고무되고,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굳은 결의로 무장한 파리 시민들이 구성한 다양한 집단들이 이럭저럭 이전에는 결코 존재한 적이 없던 새로운 조직을 구성하였다.

코뮌은 ‘빵 배급표’의 분배, 요리용 값싼 공동 화덕과 냄비 제공, 세입자 퇴거 금지. 1970년 10월 이후의 월세 삭감, 공용 전당포 철폐, 채무 변제 능력이 없는 소상인에게 파산을 피하기 위한 지불유예 연장 등과 같이 당시의 노동자 계층이 처해있던 비참한 상황에서 필요한 응급조치 외에도 도시 생활에 필수적인 여러 요소를 긴급히 조정했다. 이런 조치들을 얼핏 살펴보기만 해도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코뮌의 대표성에 관해서는 무엇보다 3월 26일 선거로 그 정당성을 일차적으로 획득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프랑스 혁명 이래 이처럼 위임의 절대적이고 취소할 수 없는 성격이 강조된 적은 없었다. 17구의 한 의원이 유권자들에게 “여러분에게 공적 업무에 대해서 알려드리고 우리의 느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만족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4) 외국인들도 이 과정에서 배제되지 않았다. 일부는 1870년 제3공화국 제청 이후 프랑스군에 협력하여 싸웠다. 가리발디와 그의 ‘붉은 셔츠’들, 벨기에, 폴란드, 러시아인들도 참여했다. 보석 세공 노동자인 헝가리 출신 레오 프란켈이 지도부에 선출된 것에 대해서 선관위는 “코뮌의 깃발은 전 세계 공화국의 깃발이며 모든 도시는 그 도시를 위해 봉사하는 모든 외국인들에 대해서도 시민이라는 칭호를 마땅히 부여할 권리가 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위원회는 외국인들도 허용되어야 한다고 판단한다”고 설명했다.(5)

정치 집회 장소로 사용된 파리의 교회들

여자들 역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물론 노쇠한 왕당파들과 프루동파 사회주의자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기에는 시기상조였지만 코뮌은 국민과 여성 해방이 다른 길이 아니라 곧 ‘하나의’ 같은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엘리자베스 드미트리에프와 나탈리 르멜이 주도한 여성 동맹이 파리를 수호하는 데 있어서 성차별을 문제시했다. 왜냐하면, 성차별은 정부의 지배계층이 자기들의 특권을 위해서 대립을 조장할 필요성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조성한 것이기 때문이다.(6) 이 점에 있어서도 코뮌의 선언은 단지 구호에만 그친 것은 아니었다. 여성 협력 본부가 벌써 설치되어 합법적인 자유 결혼과 혼외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도 똑같은 위상을 인정받았다. 매춘은 금지되었으며 “인간에 의한 또 다른 인간의 착취”로 규정되었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는 4월 2일 법령에 의해 법제화되었다. 이 법령은 더 나아가 종교단체의 재산도 물론 추후 상세 목록을 규정한다는 조건으로 국유화했다. 많은 교회들이 예배에 방해되지 않는 범주 내에서 정치 집단의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다. 코뮌은 또한 비종교, 무상, 의무 교육이라는 원칙도 명확하게 발표했다. 교육 분과 위원장인 에두아르 바이양이 말한 소위 ‘사회 통합교육’이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바로서 그는 이것이야말로 ‘사회적 평등의 기본’이라고 생각했다. 각 지자체의 많은 부분이 바로 여성의 교육과 직업 교육에 할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에게만 허용된 응용예술학교가 3월 13일 개교되었다. 마지막으로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에게도 생활에 필요한 것이 많으며 절실하다는 근거로 남자 교사와 여성 교사의 보수를 인상하고 차별 없이 평등하게 했다.

코뮌 가담자들은 또한 예술도 소홀히 다루지 않았다. 화가인 구스타프 쿠르베의 발의로 4월 13일 4백여 명이 모인 공개 모임에 이어서 파리 예술인 연맹이 설립되었다. 이들의 선언에 따르면 “예술가들에 의한 이 예술의 정부는 과거의 보물을 보존하고 현재의 모든 요소들을 밝히며 교육에 의해서 미래를 새롭게 하는 사명을 갖는다”고 했다.(7

빅토르 위고, “파리 코뮌 원칙은 찬성하나 적용은 반대”

업무의 조직분야에서 이룬 구체적 성과에 있어서 코뮌은 사회적 혁명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4월 27일자 명령에 의한 제빵 노동자들의 야간작업 금지라든가 제2공화국 하에서 통제의 수단으로 악용되었던 임금 노동자들에 대한 벌금의 폐지, 직업소개소의 폐지 등을 언급할 수 있다. 노동자들의 동맹은 생산 조직의 기본이 되는 원칙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개인의 사적 재산권을 문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활동에 단체로 참여함으로써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을 끝장내려는 의도에서였다. 4월 16일자 명령은 폐쇄된 공장을 한시적으로 귀속시키고 동시에 심판단이 이를 노동조합에 양도할 때 재정 조건을 확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예고하였다. 5월 19일자 명령은 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품위 있는 삶’을 보장하고, 5월 13일자 명령에서는 현재 경제 활동 중인 회사들이 시와 함께 일용직 단순 노동자의 최소임금을 논하고, 이것을 노조가 참여한 위원회에서 확정하도록 하였다. 이런 맥락 속에서 차후 최소 임금은 모든 노동자들에게 확대 적용되도록 규정했다.

사법 분야에 있어서 성과는 상당했다. 매관 제도의 폐지, 5월 16일자 명령에서 규정한 공증인의 자격, 보토선거에 의해서 사법 행정관 선출까지를 포함해 누구나 무료로 사법 혜택을 누릴 권리 등을 규정했다. 공적 자유에 대해서는 코뮌의 공식 매체가 밝힌 바에 의하면 “모든 음모자과 배신자들이 해를 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위법적이고 자의적인 행동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고 4월 16일자 공보에 적었다. 이는 5월 23, 26일의 인질 학살은 차치하고라도 이전 경찰 서장이 저지른 부끄러운 현실과 대비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몸은 쓰러졌지만 정신은 살아 있다.” 빅토르 위고가 한 이 말은 파리 코뮌의 유산을 기억하는 자리에서는 매번 반복 인용된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한 또 다른 말은 이 입장을 다소 모호하게 한다. 1871년 4월 <르 하펠>지에 위고는 “나는 원칙에 있어서는 파리 코뮌에 찬성한다, 그러나 그 원칙의 적용에 있어서는 코뮌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관건은 이것이다. 소위 오늘날 거주권이나 노동권이라는 용어로 도식화되어서 자주 언급되는 원칙에만 안주할 것이 아니라 그 원칙을 적용하는 것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글· 크리스토프 브와이요 Christophe Voilliot

번역·이진홍

 

(1) 파트리스 드 몽칸(Moncan), 〈코뮌 중 불타버린 파리〉, 1871년, Ed., 여 Seuil, 파리, 2009년

(2)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미지의 것을 찾다, 코뮌과 관련된 텍스트와 서신들〉, La Fabrique, 파리, 2008년

(3)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모든 인용은 파리 코뮌의 공식 발표문(1997년 재출판본)에 의한다.

(4) <프랑스 정치의 급경사들(Les Murailles politiques françaises)〉, Le Chevalier, Paris, 1874년, 2권

(5) 〈선거 관리 위원회보고서〉, 1871년 3월 30일

(6) 1871년 3월 11일자 프로그램, 마이테 알비스튀르와 다니엘 아르모가테가 〈프랑스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재인용한 것임, 〈Histoire du féminisme français〉, Des Femmes, 파리, 1977년, 제2권

(7) 제라르 디트마르가 <1871년 파리 코뮌의 역사 Histoire de la Commune de Paris>에서 재인용한 것. 파리, 200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