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에 지배당한 네덜란드 대학
1989년 네덜란드 교육부 장관 조 리첸은 네덜란드 대학들이 영어로 진행하는 수업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덜란드 문화를 저해하는 이러한 발상은 파장을 일으켜 급기야는 네덜란드 의회가 네덜란드어를 공식 교육 언어로 지정하는 법안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 여론을 들끓게 했던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네덜란드의 학사 과정과 실용 교육과정에서 영어 수업이 제한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가장 유명한 대학교의 석사 과정 수업의 대부분이 영어로 진행되고 있다. 이 때문에 네덜란드는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이 가장 많은 비영어권 유럽 국가가 되었다. 영어 진행 수업이 가장 많은 분야는 생활 과학, 엔지니어, 경제 등이다.
네덜란드의 이러한 변화는 다양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경제가 상당히 개방적이라는 점, 네덜란드어가 영어와 근접한 게르만계 언어라는 점,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곳이 근접한 벨기에 플랑드르 지방뿐이라는 점, 이 모든 요소로 인해 현실적으로 네덜란드가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교육 기업 ‘에듀케이션 퍼스트’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조사대상 60개국 가운데 영어가 가장 널리 보급된 국가에서 3위에 선정될 정도로 이미 영어가 상당히 확산되어 있다. 법적 측면에서도 네덜란드어는 헌법상 지위를 갖고 있지 않다. 1992년 10월 8일 법이 네덜란드어를 교육언어로 지정하고 있지만 법에서 규정하는 수많은 예외 조항들로 그 본질이 흐려지고 말았다.
전지전능한 영어를 신봉하는 측은 네덜란드의 이러한 선택이 ‘정의 그대로의 국제적’ 교양을 전수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1) 인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만큼 세계적으로 파급된 언어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컬드웰 기자는 여기에 “영어가 의도하는 것에 대해 관대하다면”이라고 단서를 붙였다.(2)
교양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이러한 셰익스피어 언어의 선전은 연구·교육 상품의 국제 상업화로 대변되는 지식 산업 안에서 대학들 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현실에서 기인한다.(3) 1999년 6월 19일 볼로냐 선언은, 축구선수들의 리그 간 이동을 자유롭게 해준 1995년 보스만 룰과 같은 방식을 통해, 고등교육에서 유럽의 위치를 확립할 것을 다짐했다.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대 뤽 소에트 학장은 이미 “교육은 수출 상품이 되었다”고 단언한 바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학 기관들은 상품 교역에 있어서 세관과 마찬가지로 자국어가 학생들의 국제적 이동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여기게 된다. 이렇게 ‘영어화’는 대학교 중상주의의 언어적 도구가 된다.
“영어개방화에도 네덜란드 문화 유지”
다수의 프랑스 학자들은 “언어에 있어서 어떠한 재제도 없는 네덜란드의 풍부하고 활발한 지적 생산 활동은 영어 개방화에도 네덜란드 문화가 무너지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좋은 예다”고 평가한다. 프랑스가 본보기로 해야 하는 정책이라는 것이다.(4) 네덜란드 내부에서조차도 교육 위원회 ‘Onderwijsraad’가 네덜란드 문화와 언어의 영속을 위해, 그리고 주요 경제 주체들이 적당한 영어를 구사할 수 있도록 대학들에 언어 정책을 더 적극적으로 실시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5) 그러나 이와 같은 권고는 현재 실시 중인 정책에 대해 공허한 비판처럼 들리고 정책의 결함을 넌지시 보여주는 듯하다.
네덜란드 정부의 선택으로 네덜란드의 매력도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전 세계 해외 유학생 중 네덜란드에서 유학하고 있는 학생의 비율이 2000년 0.7%에서 2009년 1.2%로 증가했다.(6) 그러나 2012년, 네덜란드에서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의 38%가 한 국가, 바로 이웃나라 독일에서 온 유학생들이었다.
마스트리히트대는 이러한 역설적 국제화 즉, 이웃국가들에 한정되어 네덜란드의 국제적 영향력 확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국제화의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마스트리히트대에서는 몇몇 법률 수업과 의학 수업을 제외한 모든 수업이 영어로 진행된다. 해외 학생이 전체 학생의 47%를 차지하는 마스트리히트 대학은 “네덜란드에서 가장 국제화된 대학”이라고 자부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역 간”이라는 부연 설명이 덧붙여져야 한다. 독일 학생이 외국 학생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으며 벨기에와 영국이 그 뒤를 잇고 있기 때문이다.
마스트리히트 대학에서 차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엑스-라-샤르펠에서 온 실크는 네덜란드 대학의 장점을 “교수와의 관계가 독일처럼 너무 학술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이 실크가 네덜란드에 관심을 보인 이유의 전부였다. 실크는 “네덜란드어 수업을 듣기는 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고 덧붙였다. 이 대학 어학센터의 책임자인 피터 윌름 스 반 커스버겐은 “1학년 네덜란드 수업은 무료이며 수업 효과도 좋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최종 평가에 반영되지 않는 네덜란드어 수업을 듣는 외국 학생은 7,500명 중 800명뿐이다. 대부분 외국 학생들은 네덜란드에서 지내는 동안 식당에서 네덜란드어로 계산서 달라는 말도 못한다. 이러한 ‘언어적 치외법권’이 해외 유학의 장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유학국가 문화의 수용’에 방해가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네덜란드에서 유학 중인 외국인 12명 중 9명은 유럽연합 국가 출신 학생들이다. 불가리아 학생들이 인도 학생들보다 2배는 많다. 브릭스(BRICS,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공 등 신흥경제 5개국-편주) 국가 중 중국 학생의 네덜란드 유학이 가장 많아 네덜란드 전체 유학생의 8%를 차지한다. ‘영어화’는 신흥국가들에 대한 영어의 더욱 강력해진 영향력뿐만 아니라 유럽 내 국가 관계에서도 점차 주도권을 잡아가는 영어의 위상을 보여준다. 게다가 이러한 ‘영어화’ 현상은 유럽연합이 선포한 다국어주의에도 반하는 현상이다.
네덜란드 일간지인 <NRC 한델스블라트(NRC Handelsblad)>에 게재된 한 기사는 교수들이 사용하는 영어가 그럴 듯하지만 너무 막연하다고 지적했다. 기사의 제목도 흔히 사용되는 영어 오류를 살짝 꼬아서 붙였다. 기사의 제목은 “How do you underbuild that.” ‘underbuild’라는 단어는 앵글로색슨에서도 사용하지 않는 단어로, ‘지지하다’라는 뜻의 네덜란드어 단어 ‘onderbouwen’을 모방한 단어이다.(7) 이처럼 부정확한 문구들이 넘쳐나고 있어, 언어 자체를 본질적으로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그런가 하면 말은 더욱 부자연스러워지고 순발력도 떨어지게 된다. 마스트리히트대 교육사회학자 잽 드론커스는 “내 영어 실력은 나쁘지 않은 편이다. 그렇지만 연구원들을 감독할 때, 연구원들의 동의를 얻어낼 때 필요한 섬세함이 부족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고 털어 놓았다. 스웨덴에서 실시한 한 연구는 수업이 스웨덴어가 아닌 영어로 진행될 때, 학생들이 문자 이해에 더욱 집중하게 되며, 이는 학생의 비판적 사고를 무디게 만든다고 밝혔다.(8)
글로비시가 네덜란드어를 훼손
기능적 영어는 터키 안탈리아의 카페에서 일하는 청년이 당신에게 바다 풍경을 그저 ‘무척 아름답다’고 묘사할 경우 등 아주 피상적인 의사소통에는 유용하다. 그러나 모든 언어적 역량을 동원해야 하는 대학 교육에서 영어는 한계를 드러낸다. 모국어와 같은 수준의 뉘앙스와 정확성을 가지고 외국어를 구사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어 철칙은 영어 수준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국가에서조차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한 영국인 감독관은 ‘글로비시’,(9) 더군다나 북유럽 인사가 발음하는 글로비시로 진행되는 무미건조한 회의를 지켜봐야 하는 갑갑함과 고충을 묘사하기도 했다.(10)
다수의 연구자들이 네덜란드어의 올바른 사용이 이미 훼손되고 있다고 판단하는 상황에서 글로비시는 네덜란드어에 해로운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홍보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한 인턴은 “맞춤법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대학에서 항상 영어로만 썼기 때문에 네덜란드어는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털어 놓았다. 영어는 공항 언어, 네덜란드어는 활주로 언어가 되어버린 것일까?
또 다른 위험은 바로 ‘영역의 손실’이다. 이는 다른 언어로는 어떠한 과학적 개념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상황이다. ‘영역의 손실’은 ‘가정과 정원, 부엌’(11)에서 언어의 이용을 감소시키면서 언어의 ‘위신의 상실’과 ‘본질의 손실’을 야기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화적 다양성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드롱커는 ‘불평등한 사회적 지위를 갖는 두 개의 언어가 공존하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예를 들어, 드롱커는 자신의 조교와는 네덜란드어로 대화하지만 이메일은 영어로 쓴다.(12) 네덜란드어가 지방어와 같이 점차 비공식적 언어에 한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안한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영어 우위가 네덜란드어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제3국 언어 학습을 심각하게 저해하고 있다. 루뱅대 뤼도 베헤이트 교수에 따르면, “영어 이외의 외국어 학습은 극히 사소한 학습이 되어버려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나 독일어 기사를 읽으라고조차 하지 않는다.” 이는 비단 네덜란드 대학생들만 해당하는 상황이 아니다.
유럽위원회의 요청으로 실시된 설문조사에 따르면, 유럽연합 내 국민 중 38%가 배우고 싶은 언어로 영어를 언급했다. 2005년과 2012년 사이, 독일어를 언급한 응답자는 14%에서 11%, 프랑스어를 언급한 응답자는 14%에서 12%, 러시아어는 6%에서 5%로 줄었다. 단지 스페인어를 언급한 응답자만 6%에서 7%로 늘어났을 뿐이다.(13) 영국에서는 외국어 학습이 아주 사소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언어 빈곤화 현상은 근접한 언어들의 경우 상황이 달라진다. 스칸디나비아어를 예로 들 수 있다. 각자 자국어로 대화를 하는 관습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스웨덴에서 노르웨이어를 가르치고 있는 보딜 오스타드는 쉽게 실력이 는다는 점과 국가 간 근접성이 스웨덴 학생들에 동기를 부여하여 “학생들이 단 몇 주 만에 노르웨이어를 상당한 수준으로 쓰고 말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14) ‘전-북유럽’적 이해로 문화 개방성을 강화하고 스칸디나비아의 현실을 직시하여 국가 간 합의의 장을 만들어가는 것이 수월해진다. 언어 차원의 칼마르 동맹(1397년 성립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3국 국가연합)이라 할 수 있다.
네덜란드 한 잡지는 “교육 기관들은 자신들이 국내에 한정되지 않은 국제적 차원의 기관으로 보이기 위해 주요 언어를 영어로 선택하고 있다. 이 기관들은 국내 시장에만 한정할 경우 시골 대학이 되어 버릴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15) ‘영어화’는 국제 조직에 쉽게 부합하고 세계적 학식의 엘리트 그룹에 속한다는 소속감을 갖게 한다. 전통 문화가 기울어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영어 구사는 문화적 차별성의 기준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고등교육부 장관 쥬느비에브 피오라소는 “영어 수업이 없다면 테이블에 둘러 앉아 프루스트 작품을 논할 수 있는 사람이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그칠 것이다”는 돌출 발언으로 프랑스어를 폄하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16)
1921년 모한다스 카란찬드 간디는 영어만이 현대적 매개체라고 신봉하는 자들의 ‘미신’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이러한 간디조차도 언젠가 이러한 항의 시위를 전 세계적으로 일으켜야 할 날이 올 것이라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글·뱅상 두마이루 Vincent Doumayrou
기자. <철도 파괴>(라뜰리에, 이브리-쉬르-센느, 2007년)의 저자
번역·김수영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François Héran, <영어는 무법자?>, 인구와 사회 501호, INED(프랑스 국립 인구연구소), 파리, 2013년 6월
(2) Christopher Caldwell, <글로벌 영어에 저항하는 프랑스인들>, 파이낸셜 타임즈, 런던 2012년 2월 17일
(3) Claude Truchot, <영어를 매개어로 하는 고등교육: 교육의 질에 대한 우려>, 2010년 11월 21일, www.diploweb.com
(4) Collectif, <프랑스 대학에 자리 잡은 영어>, 르몽드, 파리, 2013년 4월 26일
(5) <Weloverwogne gebruik van Engelsi in het hoger onderwijs>, Onderwijsraad, 헤이그, 2011년
(6) 네덜란드 고등교육 국제협력 기관(Nuffic)의 통계자료. www.nuffic.nl
(7) Maries Hagers, <How do you underbuild that?>, NRC Hadelsablad, 로데르담, 2009년 3월 7일
(8) Hedda Söderlundh, Patrik Hadenius, <Engelskan Stör lärandet>, Forsking & Framsteg, 스톡홀름, 2006년 12월 1일
(9) 글로벌 영어, 혹은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말하는 빈약한 ‘공항 영어’
(10) Simon Kuper, <왜 제대로 된 영어가 최고일까?>, 파이낸셜 타임즈, 런던, 2010년 10월 8일
(11) Jaap van Maarle(암스테르담대 교수) <Nederlands in honger onderwijs & wetenschap?>, 아카데미아 프레스, 강(Gand), 2010년
(12) Ludo Beheydt,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외국어 교육>, 2012년 9월-2호, Ons Erfdeel, Rekkem, 2012년
(13) <유럽인과 그들의 언어>, 유럽위원회 보고서, 브뤼셀, 2012년 6월
(14) Bodil Aurstaad, <작은 차이의 유사 언어들, 스웨덴에서 노르웨이어 가르치기>, 실용 언어학 제136호, Klincksieck, Paris, 2004년
(15) Yvonne van de Meent, <단일어에 반대한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년 6월호
(16) Paran K. Varma, <인도사람 되기>, 악트 쉬드, 아를르, 2011년 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