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재 민영화 유혹에 사로잡힌 푸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독재적인 통치에도 불구하고 국가 재정과 권력 재정비를 통해 국민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도시 난방 문제가 불거지면서 공공 투자 재정비가 기본적인 공공 서비스의 향상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공공재의 민영화 유혹을 쉽게 뿌리치기 어려운 지금, 에너지 효율화까지는 아직 길이 멀다.
한겨울, 러시아 시민들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런닝에 반바지, 여름 원피스를 입고 창문을 반쯤 연다. 러시아의 겨울 실외 온도는 모스크바가 영하 25도, 시베리아는 영하 40도를 우습게 넘긴다. 그러나 실내로만 들어가면 숨 막힐 듯한 열기에 창문을 열어 얼음장 같은 바람을 들여와야 한다.
옛 소련의 유물과도 같은 러시아의 도시 난방 체계는 현재까지도 전체 가구의 4분의 3이 사용하고 있는 시스템이지만, 사용자가 각자 난방 온도를 조절할 수 없다는 데 큰 문제가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오래된 러시아의 난방 네트워크 시스템은 처음 고안될 당시 가스, 석탄, 석유 절약에 대한 큰 걱정 없이 설치되었다. 열 생산시설은 대부분 콤비나트(유사 산업 간 공장단지) 내 발전소에 함께 건설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시설이 연료를 잡아먹는 주된 원인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지하에 설치된 온수 파이프는 대부분 단열처리가 되어 있지 않아 온수공급 시 막대한 열손실이 일어나곤 한다. 생산 단계뿐만 아니라 소비단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집단 주택을 세울 당시, 도시계획가들은 단열 문제를 우선순위로 여기지 않았다. 그 결과, 오늘날 러시아에서 생산되는 원자재의 3분의 1이 난방에 소비되고 있고, 누수, 낙후화, 비효율성, 공급 중단 위험 등 각종 문제가 발생하고 있어 시설 재개발이 시급한 상황이다. 하지만 그 막대한 비용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이 의문은 결코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며, 단순한 금액의 문제도 아니다.
러시아에서는 난방뿐 아니라 주거에 관련된 모든 공공서비스가 의료, 교육 등과 함께 삶의 기본 필요조건으로 간주되고 있다. 국가는 각 개인에게 거주지를 제공하고 난방, 수도, 전기 등 공공요금을 아주 낮은 수준이거나 무료로 유지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 옛 소련 시대부터 이어진 국민들 대부분의 인식이다.(1) 그런데 러시아 국영여론조사기관 브치옴(VTSIOM)의 조사에 따르면 2013년 초 가장 큰 걱정거리로 ‘공공 서비스 비용’을 선택한 응답자는 전체의 58%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도 그럴 것이, 1990년대 초 연평균 가계소득 대비 2% 남짓에 불과했던 공공요금이 오늘날에는 8~10% 수준으로 올랐으며, 소득 수준 자체가 낮은 시골 소도시에서는 그 비율이 더욱 높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공공요금 인상에 푸틴 지지자들 대규모 반대 시위
러시아 연방법은 공공요금이 가계소득의 22%를 넘을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여기에 더해 지방자치단체가 해당 요금을 통제할 수 있다. 실제로 부유한 시 재정 덕분에 충분한 보조금을 갖춘 모스크바는 이 제한선을 10%까지 낮추었다. 정년 이후 고령층이나 참전 퇴역군인 등 일부 국민들에게는 공공요금 특혜를 주기도 하는데, 바로 여기에 국민들이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2005년 당시 러시아 정부는 대중교통비, 의료·보건비, 지방 세금의 할인 또는 면제를 의미하는 사회보장제도인 ‘리고띠(ligoti)’에 문제를 제기했고, 할인 및 면제 혜택을 보조금 지급의 형태로 대체하고자 했다. 그러자 백여 개의 도시에서 50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공공서비스에 대한 목소리를 높였다. 이렇게 대규모의 시위가 열린 것은 소련이 해체된 1991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유럽 국민들의 주된 염려는 주택 마련을 위해 점점 더 많은 비용이 필요한 반면, 러시아 국민들은 1991년 이후 대부분 무상으로 주택을 소유하게 돼 이제는 난방, 수도, 전기 등의 공공요금만이 걱정거리로 남았다.(2) 레바다 분석 센터 소장이자 사회학자인 레드 구드코브는 “푸틴은 이 문제에 대해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며, 특히 시베리아 등 지방 소도시들의 상황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며 “이 지역이 푸틴 대통령 지지 기반의 핵심 지역이기 때문이다”고 강조했다.
1990년대 말, 첫 정권을 잡은 푸틴 대통령은 화석 연료 가격이 세계적으로 급상승한 덕분에 많은 수익을 거두었고, 이를 통해 도시 난방비용과 ‘최약층’ 국민을 지원할 수 있었다. 덕분에 일반 가정은 난방 에너지 생산 비용의 3분의 2 정도만을 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국가는 보조금을 더해 단기적으로 고지서상의 숫자만 낮추고자 했고, 에너지 효율에 투자해 장기적으로 비용을 낮추려고 하지 않았다. 빈곤 억제 부분에 있어 정부의 사회적 정책들이 부정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레바다 분석 센터에 의하면, 식사가 어려울 정도로 소득이 충분하지 않다고 답한 국민의 비율이 1990년대 15~20%에서 최근 5~6%까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정책은 시장경제가 최빈곤층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을 완화시킨 것일 뿐, 행정체제에 과도하게 접목시켜 마비 지경에 달한 사유화 모형은 전혀 바로잡지 못했다. 모스크바 카네기 센터의 마리아 리프만 정치분석관은 “푸틴 대통령이 공공요금을 인상하긴 했지만, 국민 지지 기반에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도록 한다는 한계선은 여전히 존재한다. 푸틴은 사실상 사회적 평화를 매수하고 있는 셈이다”고 풀이했다.
2005년 도시 난방 공급의 4분의 1을 차지했던 민간 부문은 옛 소련 방식이 남아 있는 지금의 상황을 끝내버리고, 공공서비스가 품고 있는 거액을 거두어 갈 수 있길 열망하고 있다. 시장 운영시스템은 공공 서비스를 이어가기 위해 요금 확정에 대해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러시아의 난방문제에 대해 수많은 조사를 진행해온 자문 기관인 러시아 국립에너지안보재단(NESF)의 콘스탄틴 시모노프 대표는 “상품의 가격조차 결정하지 못하는 분야에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투자를 하려는 투자자는 절대 없다”면서 “사업가들에게는 투자 후 얼마 만에 이득을 볼 것인지가 가장 큰 관심사다”라고 강조했다. 한편 ‘러시아 에너지전략 2030’에 따르면 전체 난방 인프라 중 65~70%가 구식 시설이고 15%는 파손 직전인 것으로 조사된 만큼, 이 시장에 걸려있는 돈은 막대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의 난방망에는 1980년대 이후 대규모 투자가 단 한 번도 진행된 적이 없으며, 최근 재정위기로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난방 시설 재개발을 위해 할당된 금액은 2007년 절반으로 곤두박질쳤고, 이후 원래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민간 기업들이 부족한 부분을 채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장담하긴 했지만 그 비용은 결국 각 가정의 국민에게 전가되고 말 것이다. 시베리아 지역을 비롯한 각 지역의 지지 기반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구식이 되어버린 난방 시설을 빠르게 현대화할 것인가. 러시아 정부는 두 선택지 사이에서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지지도 유지를 위해서는 요금 인상 제한을 해야 하지만, 시설 현대화를 위해서는 요금을 대폭 인상하지 않을 수 없다.
2010년 7월 27일, 러시아 정부는 난방에 대한 연방법 투표와 함께 요금 정책 개혁을 시도했다. 특히 제9조는 사회적 우려와 투자 수익성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찾고자 총 네 가지 요금 계산법을 소개하고 있다. 소비자에게는 신뢰도와 품질, 접근성 개선에 관련된 법적 틀을 제공하여 시장 가격에 맞춘 요금의 정당성을 나타내고자 했다. 기업에게는 법을 통해 요금 투자에 대한 수익금을 포함시키도록 하였다. 하지만 현실은 멀기만 했다.
난방비 인상과 지지층 이탈 방지의 두 난제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블라디미르 푸틴이 세 번째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 이후 난방 문제는 더욱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2011년 12월 총선의 부정선거 논란이 일어났고, 이를 비난하는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푸틴과 1억 4천 3백만 명의 국민 사이의 골은 깊어져만 갔다. 지지 기반의 약화를 느낀 푸틴은 자신의 보수주의적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다. 푸틴의 이러한 전략은 대외적으로는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눈에 띄게 두드러지고 있다. 또한 대내적으로는 단순한 보수적 이데올로기 전환을 넘어, 에너지 시장의 자유주의 열기를 가로막을 위험까지 무릅쓰면서 유권자들의 물질적 기대에 응하기 시작했다.(3)
주요 정치 사안 중에서도 난방 문제가 다시 화두에 오른 것은 주거문제를 주제로 열린 2011년 12월 19일 국무회의 자리에서였다. 카메라를 앞둔 낯선 분위기 속에서, 푸틴 당시 총리는 일반 가정의 공공요금 명세서를 받아 검토하였고 이내 2천 루블(약 6만 원)이 인상되었음을 ‘발견’하고 격분했다. 당시 국민 절반 이상의 소득이 530유로(약 75만 원)를 넘지 못했고 연금도 대부분 200유로(약 28만 원) 미만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2천 루블은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브라운관을 통해 분노를 표출한 그는 바로 난방, 전기 등 에너지 관련 공기업 책임자들을 해고시켰다. 정부 차원에서 관련 분야의 기업들로 하여금 조세피난처에 피해 있는 실소유주의 이름을 명시할 것을 의무화하였다. 레브 구드고프 등 많은 보수파가 ‘사회적 보수주의’ 또는 ‘가부장 주의’라고 평가한 이러한 정책 스타일은 시장주의 정책들과 함께 병행되었다. 스웨덴의 포스트소비에트 경제전문가 테인 구스타프슨은 “러시아의 지도층이 1990년의 혼돈을 통해 비난의 대상은 개인 소유의 민간 기업들이 아닌, 국가의 방향성 부재라는 것을 깨달아 전략 결정에 있어서 국가가 주도적인 역할을 맡는 실용적인 민·관 파트너십을 해결책으로 내놓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푸틴 대통령의 경제 정책은 “과감한 상업주의·민족주의·국수주의적 비전”에서 나올 것이라고 언급했다.(4)
난방 산업 분야 역시 부분적으로 민영화되었지만 동시에 기업 이익에 있어서만큼은 국가의 통제가 일부 존재한다. 해당 분야에서 거의 민간 기업처럼 활동 중인 국영 가스회사 가스프롬은 물론, 재벌 미하일 프로호로프의 오넥심 그룹, 빅토르 벡셀베르크의 레노바 그룹, 그리고 고위급 공무원들과 내통하는 지방 사업가들의 유명 기업의 경우가 그러하다. 반면 러시아노동연합 및 거주자연합의 임원이며 아스트라한 지역의원인 올레그 셰인은 “저수익 기업들은 대부분 국가·지역·도시 등 공공부문의 범위에 여전히 남아 있다”고 밝혔다.
민영화로 인해 난방 시설 재개발율이 특별히 높아지지는 않았다. 현재 속도처럼 연간 재개발율의 최대 1%가 지속된다면, 전체 시설을 전부 교체하는 데 1세기가 소요될 것이다. 막대한 피해로 이어질 수 있는 고장 위험이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난방 시설과 더불어 공공 서비스 전반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가고 있다.
사실 성패는 난방 생산 모델에 달려있다. 러시아 전체 난방 생산량 중 절반은 전기 생산과 열을 함께 발생시키는 대규모 발전소에서 나오고 있다. 그런데 2003년 이후 많은 발전소들이 민영화 과정을 밟았고, 발전소 소유주들은 전기에 비해 수익이 낮은 난방열 생산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난방열 생산량 중 절반은 민간 기업을 통해 구입·임대한 소규모 온수 시설을 통해서였다. 이렇게 생산된 온수를 운반·유통 서비스 업체가 운영하는 파이프관을 통해 공급한다. 그러나 역시 투자금의 부족으로 파이프 규모가 필요 이상으로 크거나 단열 처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다. 결국 오늘날 전체 난방열량 중 약 25%가 공급 중에 소실되고 있다. 핀란드의 경우 이 수치가 6%밖에 되지 않는 것을 감안한다면 러시아가 매우 심각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국영 온수시설 책임자들은 투자금 부족을 지적하며, 공급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재 상황이 불만스럽다. 모스크바 북동쪽 교외에 위치한 미티시 시의 니콜라이 비리우코프 부시장은 “이것은 우리의 가장 큰 어려움이다. 우리는 연료 공급 측에만 전적으로 의존한 채, 위에서 그들의 욕심을 눌러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결국 우리에게 떨어지는 이득은 전혀 없고, 그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프라를 쓸 만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일부 에너지 그룹은 권력을 이용해 난방 시설을 매수하기도 했다. 평범한 노인에서 ‘전문가’가 된 표트르 팔코프는 “이렇게 공급자와 생산자가 하나의 독립체가 되면, 그들은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데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도리어, 난방의 필요가 높아질수록 국민들은 더 많이 에너지를 소비하고 더 많은 돈을 내야 한다. 그 돈이 난방요금이든, 보조금 수혜자들을 위해 세금이든, 어떤 형태로든 말이다. 결국 기업은 더 많은 돈을 벌게 될 뿐이다”고 규탄했다.(박스기사 참고)
위로는 난방비 고정 정책으로, 아래로는 에너지 기업들로 인해 시달리던 러시아 지역사회는 국회의원 및 공무원들의 부패 문제에도 부딪쳤다. 2013년 초, 독일 유력 주간지 <슈피겔>은 여당 측 떠오르는 샛별이었던 미하일 파호모프 의원의 죽음을 조사했다. 슈피겔지의 조사에 따르면 이 젊은 의원은 리페츠크 시 난방 파이프 설치 공사 당시, 은밀한 커미션을 사용해 자신의 회사에 유리한 내용으로 계약서를 체결했고 결국 수백만 유로의 돈을 긁어모았던 것으로 밝혀졌다.(5) 그는 결국 시멘트로 채워진 철제 드럼통 안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말았다. 오랫동안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의 운반 책임을 맡아온 미하일 니콜스키는 “난방비 거품 요금의 원인을 이렇게 지역 의원과 가스 공급 회사 간의 이권 다툼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외에 수송비용을 지나치게 높게 책정하는 운반 회사의 문제도 있다”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정기적으로 이러한 부패 문제 대해 규탄하고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분노한 뒤 여러 지역 관공서 대표들을 대상으로 부패 조사를 서둘러 시행하도록 했다. 국제 투명성기구 러시아 본부의 엘레나 판필로파 회장은 “이는 연기에 지나지 않는다”며 “물론 푸틴 대통령은 집권 이래 점점 더 늘어나는 공무원들과 암묵적 계약관계에 있다.(6) 푸틴 대통령은 그들에게 충성심을 대가로 얼마든지 자유롭게 날 수 있게 해줬다. 다만, 난방 문제에 관련해서만큼은 넘을 수 없는 선을 그었는데, 바로 그에게 표를 던질 개인들을 너무 건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푸틴에게 있어 난방 문제는 자신의 두 충성 집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단위당 단가를 높이면서, 에너지 효율을 확보해 고지서의 거품을 뺄 수 있을까? 2009년 11월 23일 발표된 에너지 효율에 관한 법은 난방열 생산 처리장치들이 1차 에너지를 보다 적게 소비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들을 문서화하였다. 이를 통해 열·전기 공동생산 최적화, 열손실을 3분의 1로 줄일 파이프 단열처리 등이 예정되었다. 미티시 등 일부 도시에서는 지역 내에 시설을 설치해 건물별 난방 조절 시스템을 마련했다. 설치비용은 아파트 한 채당 약 10만 유로(약 1억 4천만 원)에 달하지만, 이론상 이 투자를 통해 주민들의 자발적인 절약 유도를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시모노프 국립에너지 안보재단 대표는 최상의 계산법에 대한 의지가 없다며 유감을 나타냈다. 그는 “이렇게 되면 투자수익이 빨라지긴 하지만, 포스트 소비에트식 관점으로 볼 때는 아직은 지나치다는 느낌이 든다. 러시아인들에게 ‘난방’이란 것은 늘 무료여야 한다. 그런 그들이, 물론 금액이 앞으로 점차 줄어들긴 하겠지만 최소 6~7년간 지금보다 인상된 고지서를 받아들고 왜 이 돈을 내야 하는가를 묻지 않을 리가 없다”고 덧붙였다. 시모노프 대표는 관련 시설에 대한 공채를 발행하여 예산 외의 재정을 늘릴 것을 제안하기도 했으나, 이것은 지난 15년간 계속 논의되어 왔지만 아직도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또한 니콜라이 비리우코프 미티시 부시장의 표현처럼 “투자를 할 수 없는 민간 기업들”이라는 모순을 풀기 위해 민·관 파트너십, 양도의 체계화 등 공권력과 민간분야를 연결하는 자유주의적 방안들이 제안되었지만, 프로젝트 수준 단계를 넘지 못했다.
전략에 대한 논의 내용 중, 서양 국가에서 시행된 민영화가 시장 운영시스템에 의존해 지역 정부를 뒤흔들었다는 사례들도 러시아 지도층에게는 지나칠 수 없는 주제였다. 예를 들어 영국 철도 민영화나 프랑스의 수도 민영화의 경우만 보더라도, 인프라의 민영화가 언제나 만족할만한 투자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로 대표되는 러시아 엘리트층이나 국가통제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기후변화에 따른 에너지 문제를 거론하며 자유주의적 ‘개혁’을 지지하고 있다. 실제로 2009년, 메드베데프 당시 대통령은 ‘현대화 프로젝트’를 통해 오는 2020년까지 에너지 효율을 40% 향상시킨다는 야심찬 목표를 내걸고 국가 경제의 경쟁력을 활성화시키고자 한 바 있다.
밝지 않은 경제 상황과 국민 지지를 잃을 수 없는 대통령의 필요 가운데, 도시 난방 현대화까지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러시아의 시민들은 난방 시설이 고장 나지 않기만을 기도하며 영하 20도의 불안한 겨울을 몇 차례 더 보내게 될 것이다.
글·레지스 장테 Régis Genté
언론인
번역·김보희 sltkimbh@gmail.com
고려대 불문과 졸.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박스기사>
공공요금 고지서의 함정을 해독한 ‘자주적 인간’
2011년 2월 3일, 71세의 표트르 팔코프는 황혼의 전성기를 누리게 됐다. 러시아 채널1에서 방영하는 ‘JHK’(러시아어로 공공서비스를 의미하는 약어)라는 방송에 출연하게 된 것이다. 조각상 같은 헤어스타일로 유명한 여배우 엘레나 프로클로바가 진행하는 이 방송은 소비자 권리의 주장을 다루는 토론 프로그램이다. 팔코프는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는 지역 의원과 공무원들로 구성된 상대 패널들에게 삿대질을 해가며 주거법 내용이 153조에서 명시하는 공공요금을 낼 의무만을 생각하는 자들을 비난했다. 난방비 고지서 뭉치를 겨드랑이에 낀 채 객석에 앉아있던 50대 여성들은 녹화장이 떠나갈 정도로 열띤 박수를 보냈다.
자신의 신랄한 비판을 뒷받침하기 위해, 큰 덩치의 팔코프는 사전에 암기한 법 조항들을 인용하기도 했다. 리옹 정치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엘렌 리샤르는 팔코프를 “공공요금 고지서를 보다가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을 발견한 뒤 독학으로 법을 공부한 아마추어 법률가”라고 설명했다. 러시아 사람들도 팔코프를 “자주적 인간”이라고 불렀다. 엘렌 리샤르는 “러시아의 경우 2005년의 반대 시위 이후로는 비교적 조용한 시민운동만이 뒤를 이어왔다. 보다 투명한 공공요금을 위해서도, 국민들은 이제 법이나 판례에 근거하며 소규모 집단으로 움직이거나 개별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팔코프가 러시아 난방·수도·전기요금 고지서에 나타나 있는 교묘함을 전부 설명한다면 듣는 사람은 다 따라가기조차 쉽지 않게 느껴질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바로 이해하려고 하면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전부 불합리하고 모순적이며, 현실에서는 분명히 드러나 있는 내용들이 숨겨져 있는 데다가, 아직도 확인할 수 없는 부분들도 있기 때문이다”라고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는 고골(러시아의 초현실주의 작가)의 글에나 어울릴 법한 치노브니키(공무원)들의 계략을 찾아내 그중 몇 가지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각종 법과 지역 조례들을 살펴보던 중, 공무원과 관련 기업들의 실수로 생겨나는 손실들이 국민에게 전가되고 있다는 사실과 계산법상 개인이 각자의 요금을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 등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는 왜 공공요금 고지서를 읽는 데 이렇게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었을까? 팔코프는 “다른 국민들이 아직도 사회적 어린 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라고 장난스레 답했다. 그는 특별히 이끌고 있는 단체는 없지만, 자신과 비슷한 몇몇 사람들과 함께 비공식 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은 공공요금 문제와 관련해 절대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소송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글·레지스 장테 Régis Genté
언론인
번역·김보희 sltkimbh@gmail.com
고려대 불문과 졸.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Jane R. Zavisca, <Housing New Russia>, Cornell University Press, 이타카, 2012년
(2) 1991년 7월 4일 제정된 주택 사유화에 대한 법
(3) 장 라드바니, ‘아시아로 중심 이동한 러시아의 외교 전략’,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5월호
Jean-Marie Chauvier, ‘Eurasie, le choc des civilisations version russ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4월호(프랑스판)
(4) 테인 구스타프슨, ‘Wheel of Fortune: The Battle for Oil and Power in Russia’, 벨크냅 프레스, 캐임브릿지, 2012년
(5) Matthias Schepp, ‘ The ‘Pride of Russia’: A corrupt politician’s ignoble demise’, 슈피겔, 2013년 3월 27일
(6) 2000년과 2012년 사이, 공무원의 수는 35% 상승해 116만 명에서 157만 명으로 증가했다.(통계청 Rosstat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