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나파르트주의 또는 제헌의회
2005년 5월 29일 유럽헌법안 부결은 프랑스 역사에서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민주적 정당성에 대한 요구는 묵살됐다. 그 후 산발적인 방식으로 저항이 지속되어 왔다. 겉으로는 비일관적인 형태를 띠었지만, 현 집권 세력들을 거부한다는 공동의 의지가 표출되었다. 대규모 시위, ‘붉은 모자’ 시위 등(1) 이런 사태는 혹시 더 광범위한 폭동이나 체제의 심각한 위기를 예고하는 전조가 아닐까?
겉으로 드러난 모순 하나는 주요 정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의 기초가 되는 제도의 정당성을 문제 삼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민들이 갈수록 자신들의 목소리가 대의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현실을 그들 모두가 인지하고 있다.
‘비합법성’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금기시되었다. 그러나 2013년 11월 11일 프랑스 대통령은 저항의 상징 도시 우아요낙스를 방문했을 때 주민들로부터 야유를 받았다. 다음 날 장마르크 에로 총리는 국회 질의 시간에 크리스티앙 자콥 대중운동연합(UMP) 원내대표에게 “당신은 우리가 제도적 위기에 봉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보통선거를 통한 대통령 선출의 합법성 자체를 문제 삼겠다는 것인가?”라고 쏘아붙였다. 에로 총리는 단호했지만 권력의 정당성 문제가 제기되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프랑스 제5공화국은 점차적으로 허약해졌다. 제5공화국의 권력은 대통령의 절대적 권한에 기초해 있다. 특히 2000년부터 임기가 5년으로 단축되면서 권한은 오히려 강화되었고, 대선이 총선보다 훨씬 큰 중요성을 획득하게 되었다(총선은 단기명 2차 투표로 진행되기 때문에 집권당의 지배를 더욱 강화해주는 측면이 있다). 그 결과 권력과 시민 사이의 거리는 더욱 벌어지고 말았다. 아울러 유럽연합은 모든 회원국의 인민 주권을 빨아들이는 규제 기관으로 기능함으로써 이런 경향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현 제도의 민주적 가치에 대한 믿음을 유지시켜주는 것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는 대중운동연합(UMP)과 사회당(PS)의 교차 집권이라는 눈속임뿐이다. 이런 식으로 권력은 정당성보다는 합법성을 추구하며 유지된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제기된다. 어떻게 하면 게임의 룰을 바꿀 수 있을까?
국민전선(FN)은 상당수 유권자들의 눈에 게임의 룰을 바꿀 수 있는 주체로 인식되고 있다. 또한 국민전선의 위협에 맞서 대중운동연합-사회당 커플을 구하기 위해 이른바 공화주의 전선의 기치 아래 단결하자는 요청에 등을 돌리는 유권자가 갈수록 늘고 있다. 이들의 변화가 단순히 인종차별적 고려에서 기인한다고 믿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다. 지난 30여 년 동안 삶의 질과 사회적 권리가 끊임없이 파괴되어온 현실 속에서, 보호받고자 하는 열망은 질서에 대한 희구로 표현된다. 신변의 안전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사회적 안전이다.
꿈틀대는 나폴레옹3세 쿠데타 망령
시민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지난 수십 년간의 처방과 다른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강력한 정부라는 옵션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때이다. 이른바 국민공동체의 수호자로서의 국가라는 개념이 보나파르트에 대한 추억과 함께 재등장한다. 이런 옵션은 마린 르펜과 국민전선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난 20년간 니스 민선 시장 크리스티앙 에스트로지(“나는 나폴레옹3세처럼 보나파르트주의자다. 이건 하나의 정신이요 마음이다”)(2)와 공쿠르상 수상자 디디에 반 코벨라에르 등과 같은 인물들이 나폴레옹3세 재평가 움직임에 동참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3) 2010년 1월 12일 베르나르 아쿠아예 국회의장은 필립 세구앵을 추모하며, 나폴레옹3세의 비판자 “빅토르 위고의 유산”과 단절할 것을 호소했다. 아울러 그는 프랑스를 정비하고 번영으로 이끈, 공공의 복지를 고려한 현대적 황제의 비전을 찬양했다. 1851년 쿠데타와 제국 복원 과정에서 희생된 공화주의자들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사회당 의원들은 그의 발언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공화주의 정신이 힘을 잃을 때 12월 2일(1851년 나폴레옹3세가 쿠데타를 일으킨 날-역주)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사회계약과 공화주의적 단일성이 사적 이해관계들 속에 용해되어 버린다면, 프랑스 정치사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해온 시민권이 단지 학술대회의 토론 주제로 전락한다면, 시민이 더 이상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 아니라면, 공화주의적 질서 따위를 외친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시민들은 기준점을 상실했다. 모든 상황이 그들을 그렇게 내몰았다.
특히, 체제의 희생제물인 의회의 역할을 되살려야 한다는 결의는 자주 사회제도의 정당성 약화 문제를 은폐하는 구실을 하는 데 그친다. 2008년 7월 23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이 헌법 개혁을 단행한 이후, 2012년 7월 16일 프랑수아 올랑드 현 대통령은 “공적 삶의 윤리와 혁신”을 위한 조스팽 위원회를 설치했지만 기존의 방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주제의식의 변화 과정을 잘 보여주는 위원회의 행보는 무엇보다 겸직 금지, 대통령 형사면책 특권폐지 등 선출직 공무원의 도덕성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요컨대, 의회의 중요성이 제도적 역할 혹은 대통령의 정치활동에 대한 견제보다 의원들의 덕에 있다고 믿게 하고 싶은 모양이다.
2005년 5월 29일 이후 공론장에서는 잘 다뤄지지 않았지만, 부결된 유럽헌법안과 별반 다르지 않은 리스본 협정 체결로 시작된 보통선거에 대한 공격은 시민들의 뇌리에 상당히 강하게 각인되었다. 무엇보다 이런 방식은 연속적으로 인민 주권을 이양 받는 권력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또한 2005년 5월 29일의 헌법안 부결은 잡다한 불만의 표출이라기보다 선행 논쟁들을 통해 집단적 의지가 창조된 결과로 봐야 한다. 그것은 공화국의 기초가 될 새로운 공동이익의 밑그림을 그리는 주권을 가진 국민의 의지였다.
당시 형성된 민주주의적 역동성이 더 발전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집단적 의지에 일관된 언어, 민주주의적 모토가 결합되었어야 했다. 가령, 유럽헌법안에 찬성하는 대통령의 하야와 의원 대다수가 찬성표를 던진 국회의 해체를 요구했어야 했다. 그러기는커녕 유럽헌법안 찬반 투표를 순전히 당파적인 목적에 동원함으로써 정치가들의 놀음으로 수준을 끌어내리고(가령, 대선에서 유럽헌법안 반대를 외쳤던 좌파 후보 등), 국민 다수의 도약을 개별적인 운동으로 쪼개버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모든 종류의 숙명론과 언론의 압력, 경제적 협박을 넘어서 집단적 의지가 건설적인 방식으로 표출될 수 있음을 보여준 좋은 기회였다.
현 위기는 정치사회 조직의 문제
현 위기의 평화적, 민주적 해법은 바로 이런 의지 속에 숨어있다. 그리고 그 실현과정은 보통선거를 통한 제헌의회 선출로 완성될 것이다.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이런 관점이 너무 제도적 해법에 치우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사회운동 없이 변화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철의 법칙으로 유지되는 현재의 정치적 틀 내에서 사회운동이 성공할 확률은 적어 보인다. 사회 내부의 반대 목소리들은 사회의 존재 자체와 무관하게 표출될 수는 없다. 전 영국 총리 마가렛 대처는 이 점을 분명히 이해했다. 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신봉자였던 그는 “사회 같은 건 없다(There is no such thing as society)”(4)고 선언했다. 사회적 자산에 대한 공격, 실업 문제, 비참과 불안정의 확산 등에 맞선 투쟁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상황이지만, 정치 단체의 결성 없이 투쟁은 성공할 수 없다. 여기서 제헌의회의 근본 목표, 즉 공적 삶이라는 공공재의 재전유를 위한 사회의 재구축이라는 목표가 도출된다. 정치적 존재의 재창조는 제헌의회에 의미를 부여하고, 제헌의회는 이런 재창조 작업에 목표를 제시한다.
결코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과거 장 조레스는 노동자 운동의 역사는 곧 노동자들이 자치 능력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 내부에 공적 공간을 창조해낸 역사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조레스는 투쟁과 해방의 도구로서 민주주의의 유용성을 강조한다. 그는 “민주주의가 계급들이 살아가는 환경으로서, 거대한 사회적 충돌이 발생했을 때 중재자로서 힘을 발휘한다”(5)고 말한다.
이런 논의는 현 시대에도 유효할 뿐 아니라, 유럽연합 건설, 국가 극복이라는 주제, 세계화 등에 의해 새로운 차원과 중요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안토니오 네그리 같은 일부 좌파 인사는 인민 혹은 국민의 폐기를 진보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는 “국민, 인민, 민족의 개념은 결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6)고 말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극우파들이 반길 말이다. 좀 더 신중한 시각을 지닌 이들은 가장 광범위한 대중적 결집은 언제나 국가적 차원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잊은 채, 사회운동과 정치활동을 유럽 혹은 세계적 차원에서만 바라본다. 이미 1957년 1월 18일, 급진사회당 소속 총리 피에르 망데스프랑스는 국회 연설에서 로마협정에 반대표를 던진 이유를 설명하면서 예상되는 문제점을 비판했다.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구세주 같은 인물에게 모든 권력을 이양함으로써 내부적인 독재에 호소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적 권위에 권력을 위임하는 것이다. 이 권위는 기술이라는 미명 하에 실질적인 정치권력을 휘두르게 될 것이다.”
“사회적 세계화” 혹은 “공화주의적 유럽연합”에 대한 희망은 그 속에 공화주의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 파괴라는 이데올로기적 목표가 숨어있는 한 공염불에 불과하다. 볼리비아, 에콰도르, 아이슬란드 등에서 기존 질서에 대한 반대 운동이 국가 제헌의회 소집으로 이어졌으며, 국제사회에서 고립을 초래하기는커녕, 라틴 아메리카의 새로운 동맹관계처럼 활발한 국제적 운동으로 확산된 예를 우리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는가.
현재 프랑스의 위기는 다수파의 위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위기는 국가 전체의 정치·사회적 조직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민과 정치 지도자들 사이의 신뢰 관계가 갈수록 약화되는 이유다. 전 세계가 지정학적, 경제적 차원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지금, 유럽연합과 회원국들은 자신만의 확신 속에 갇혀 체계적인 국가 권한 축소 움직임, 범대서양 무역투자동반자협정 등(7)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아갈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현 시대가 제기하는 도전에 직면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선택에 대한 인민의 적극적 지지가 절실하다. 그래야만 국가적 차원에서 힘을 결집하는 동시에 국제 연대의 새로운 판을 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나파르트주의냐 제헌의회 선출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 앞에 놓여있다. 두 선택 모두 인민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각각의 선택은 미래에 대한 다른 비전, 다른 가치를 기초로 삼는다.
역사 속에서 보나파르트주의라는 옵션은 국민투표 등을 통해 정당성을 획득함으로써 인민에 기초한 체제임을 내세우면서도, 시민의식을 유치한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비정치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반면, 제헌의회의 민주주의적 함의는 대립이 표출되도록 함으로써 그 과정에서 새롭게 공동이익이 창출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었다. 제헌의회는 수년 전부터 잠재적으로 존재해온 정치 사회적 신체를 재구축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이는 이미 1789년 혁명의 과정에서, 1946년 레지스탕스 전국위원회(CNR)의 프로그램 속에서 실현된 바 있다.(8) 이런 재구축된 신체는 2005년 5월 29일 투표에서도 윤곽을 드러낸 바 있다. 만장일치의 공동체에 갇힌 무차별적 개인과 대비되는, 정치적 신체의 일원으로서 자유롭고, 인간적이며, 사회적인 시민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다. 이는 조지 오웰이 ‘빅 브라더’의 입을 빌려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이기도 한다. “당신의 목적이 인간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존하는 것에 머무는 한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스스로를 영원한 현재 속에 가두고 내가 언제나 곁에 있을 것이라고 믿음으로써 인간으로 살 자격보다는 생존만을 선택한 셈이다. 그러니 불평하지 말라.”(9)
글·앙드레 벨롱 André Bellon
제헌의회를 위한 모임 회장
번역·정기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주요 역서로 <리듬분석> 등이 있다.
(1) Serge Halimi, ‘희망 없는 진보 덕에 춤추는 극우세력(Le temps des jacqueries)’,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1월호.
(2) ‘Nice Rendez-vous’의 인용. 2010년 6월 13일. www.nicerendezvous.com
(3) Didier van Cauwelaert, ‘NapoléonIII: “Victor Hugo m'a tué.”(나폴레옹3세: “빅토르 위고가 나를 죽였다.”)’, <Le Point>, 파리, 2010년 8월 12일.
(4) ‘Woman's Own’ 대담, 런던, 1987년 10월 31일.
(5) Jean Jaurès, <De la réalité du monde sensible(감각세계의 현실에 대하여)>, Vent Terral, 파리, 2009년.
(6) Toni Negri & Michael Hardt, <Empire(제국)>, Exils, 파리, 2000년.
(7) Lori Wallach, ‘국가 정책을 위협하는 다국적 기업(Le traité transatlantique, un typhon qui menace les Européens)’,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년 11월호.
(8) 물론 1848년의 경우처럼 실패할 수도 있다.
(9) George Orwell, <1984>, Gallimard, 파리, 197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