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응주의로 망가진 라디오 프랑스

2014-07-02     다니엘 메르메

 

라디오 프랑스 경영진을 긴장시키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바로, 상업적 논리를 반영하는 청취자 설문조사와 정치적 영향을 받아 임명되는 회장 자리다. 라디오 프랑스의 3대 설립이념인 정보 제공, 지식 전달, 엔터테인먼트의 비중은 수차례 변화했지만, 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가 해방될 당시 엔터테인먼트는 정보 제공 및 지식 전달 비중을 넘어서지 못했다.

청취자는 돌아오게 마련이다. 라디오 프랑스 본사 사옥의 페디먼트(고대 그리스식 건축에서 건물 입구 위 삼각형 부분)에 금박으로 새겨 넣을 만한 문구이다. 청취자 수가 줄어들거나 새 회장이 취임하거나 만평가가 바뀌거나 시사문제가 주의를 끌지 못할 때, 엘리베이터에서 평온한 목소리로 늘상 들려오는 말이 있다. “뭐, 청취자는 어차피 돌아오게 되어 있다고!” 어떤 국장은 심지어 대체 어떻게 해야 청취자들이 완전히 떠나는 건지 의아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프랑스 제2의 종합방송라디오로 하루 청취자 수가 5백만 명에 달하는 프랑스 엥테르(France Inter)에게 청취자는 마치 고요히 흐르는 기나긴 강과 같다. 지난 40년간 큰 문제로 떠오른 사건은 세 가지에 불과했다. 1974년 프랑스방송협회(ORTF)의 분열, 1981년 좌파집권으로 독점이 깨지면서 민간 라디오 채널이 급증한 일, 그리고 2005년 5월 유럽헌법조약(ECT)에 관한 국민투표에서 프랑스 엥테르 편집부가 ‘찬성’을 적극 지지한 상황에서 ‘반대’가 54.7%로 국민투표에서 크게 승리한 일이다. 그러나 매번 청취자들은 되돌아왔다. 조사기관인 ‘메디아메트리’에서 매분기 발표하는 청취자 총계는 프랑스 엥테르에 불안감을 조성하곤 한다. 특히 경영진 사무실 근처에 불안감이 엄습한다. 이에 경영진은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공익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에드가 모랭(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 사회과학부문 명예연구원-편주)의 복합성 이론에 입각할 만치 어려운 연설을 계속한다. 그러나 사실상 모든 것은 화살표가 위로 향하느냐, 아래로 향하느냐로 귀결되는 단순한 문제이다.

휴게실에서 기자들이나 일용직 직원들은 습관적으로 메디아메트리가 앙케이트를 조작하는 방식을 비판한다. 무엇보다 광고료를 결정하는 데 혈안이 되어있는 거대 민영 라디오방송국들이 메디아메트리의 주주로 있기 때문이다. 공영방송인 라디오 프랑스 역시 메디아메트리의 주주지만, 광고료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사만의 다른 점을 인정하여 존재의미와 의욕을 되찾을 수 없었던 공영방송 라디오 프랑스는 결국 시장 법칙을 따르게 되었다. 넓은 대지를 마음껏 달릴 수 있는 자유로운 말이 지성이나 욕망의 결여로 어쩔 수 없이 근로마 곁에서 나란히 영리기업을 위해 꾸준히 밭을 갈아야 한다고 상상해 보라. 청취자는 프랑스 엥테르의 유일한 나침반이 되었다. ‘다수’라는 명분이 ‘왜’라는 의문을 제거해 버렸다. 휴게소에서 메디오메트리를 비판하던 반역자들은 모든 지성의 승리와 집단의 해방도 처음에는 소수의 반체제적인 행위로 비춰진다고 주장한다. 이는 이념에서든 예술에서든 정치에서든 마찬가지다. 메디아메트리에는 갈릴레오, 빈센트 반 고흐, 알버트 아인슈타인은커녕 피에르 데프로제도 없다. 에드가 모랭의 화살표는 상향인가 하향인가? 비즈니스 원리가 라디오의 공익 가치를 오염시켰고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우체국이나 공공보건, 교육, 연구 분야에서도 매한가지이기는 하다.

차이점에서 차별화로

수비학(數祕學, 수를 사용해서 사물의 본성, 특히 인물의 성격·운명이나 미래의 일을 해명·예견하는 서양 고래의 점술-편주)의 파워는 도처에서 나타난다. 라디오 프랑스에서는 1년에 4회 열리는 회의 때마다 마법의 숫자들이 스크린에 올려진다. 이 수치들은 새가 날아가는 모양이나 닭의 내장을 유심히 살펴서 황제가 어떤 특출한 명령을 내려야 할지를 결정하는 의견을 내던 고대 예언자의 풍습을 그대로 차용한 방식에 따라 검토되고 풀이된다.

라디오는 분명 들으라고 방송되는 만큼, 청취자들의 반응을 알고 싶게 마련이다. 그러나 청취자를 평가하기 위한 다른 방식들은 모두 배제되었다. 방송 품질, 유익성, 서비스, 대중과의 토론 등 다른 조사 방식을 통해, 더 넓은 수평선을 향해 라디오 프랑스라는 배가 나아가도록 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1970년대 말 프랑스 엥테르가 내건 슬로건은 “차이점을 들어보세요”였다. 당시 사장은 여기서 말하는 차이점이 고객과 시민 간의 차이점을 일컫는다고 현학적으로 설명했다. 상업라디오는 고객을 타깃으로 하고, 공영라디오는 시민을 대상으로 한다는 설명이었다. 청취자의 ‘집착증’이 민간부문 소관이라면, 청취자의 ‘야망’은 공공부문 소관이라는 것이다. 박수 받을 만한 설명 아닌가. ‘차이점’이라니. 최근에는 ‘차별화’라는 전혀 다른 단어를 사용하여 슬로건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엥테르를 들으면 일반대중과 구별되는 특별한 인격체가 된다는 것이다. 프랑스 엥테르의 필립 발 사장은 위의 슬로건을 옹호하기 위해 “프랑스 엥테르는 편협하지도 선동적이지도 저속하지도 않은 만큼 충분히 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예전 프랑스 식민지 시절처럼 필립 발 사장은 본인이 문명전파의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성가신 무리를 무시한다.”(1) 제한된 대중을 겨냥해서 한 말이다.

이러한 경멸적 발언으로 인해 프랑스 엥테르의 ‘일반대중’ 청취자들과 반목이 생겼다. 지난 12월, 청취자 한 명이 프랑스 엥테르의 엘리트주의를 고발했다. “종합채널은 모든 주제를 다루게 되어 있다. 그러나 본인이 55개 방송을 검토해본 결과 뉴스 프로그램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문화산업에 치중된 프로그램이었다. 당신이 가수나 음악가, 연극 감독 또는 작가라면 프랑스 엥테르 라디오 프로에서 당신에 대해 언급하거나 당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다룰 확률이 어느 정도 있다. 음악 관련 방송은 10개 이상이고, 다문화 프로그램은 적어도 8개는 된다. 영화나 연극을 다루는 프로그램은 수없이 많고, 과학이나 역사, 경제 등의 주제도 어김없이 다루어진다. 우리의 동물친구들과 요리도 빠지지 않으며, 자정이 되면 성에 대한 주제도 다룬다. 결국 교양과 학식을 갖춘 이들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이 편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의 최대 관심사는 과연 방송프로그램에서 다루어지고 있는가? 예를 들어, 고용문제나 직업, 건강, 그리고 사회보장제도에 관한 프로그램은 어떤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일요일 오후 1시 20분부터 1시 30분까지 ‘외곽지역(Périphéries)’이라는 프로그램이 변두리 지역과 그 지역주민들의 삶을 다룬다. 발언권은 자유롭지만 엘리트주의로 인해 대다수 청중은 그 목소리를 듣기가 어렵다.”

결국은 집으로 돌아오는 탕자처럼, 그래도 청취자들은 항상 돌아온다. 이를 설명해줄 근거는 충분하다. 품질, 재능, 사장의 기지, 프랑스인들이 공영라디오에 가지고 있는 열정적 애착. 그러나 무엇보다 이를 효과적으로 뒷받침해줄 근거는 ‘광고가 없다’는 것이다. 프랑스인들이 광고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라디오 프랑스는 공공 시청각매체 수신료로 재원조달이 이루어진다. 매년 6억5천만 유로의 예산이 프랑스 제1라디오 그룹인 라디오 프랑스, 여기에 속한 7개의 국영 라디오 채널, 일일 1400만 명의 청취자, 700명의 기자를 포함한 4727명의 정규직원의 한 해를 보장한다. 그리고 이처럼 훌륭한 공기업인 라디오 프랑스 사장을 위해 매우 호화로운 자가용과 운전기사까지도 이 예산으로 보장된다.

인적자원, 기술자원, 재정자원 등을 위해 공기업을 수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완벽한 구실이 된다. 사실상 두려운 것은 세계화의 여파나 유럽연합의 일방적 결정이 아니다. 따라서 수익창출이 목표가 아닌 라디오 프랑스로서는 모든 방면에서 야심찬 정책을 펼치기에 충분한 여건이 갖추어져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목표는 무엇인가? 2013년 12월 프랑스 엥테르는 50주년을 맞이하여 자사의 역사자료실을 대중에게 공개했다. 전문가들이 텔레비전의 출현으로 인해 라디오의 비중이 곧 배경음악 수준으로 감소하리라고 전망하던 1963년, 샤를르 드골 전 대통령은 라디오 프랑스 사옥 창립기념사에서 “영혼에 유익한 것은 반드시 대의명분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이제 우리의 대의명분을 정했으니 프랑스 라디오는 사건, 예술, 과학, 정치의 흐름을 어떠한 편견이나 배타적인 태도 없이 수집하고 전파하여 인류의 자유와 존엄, 연대에 기여해야 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사실 공영라디오는 그로부터 20년 전, 정확히 말하자면 1944년 8월 20일에 탄생했었다. 신문과 마찬가지로 라디오 역시 그 당시에는 나치 협력의 늪에 빠져 있었다. 이 시기 라디오는 자유로운 의사표현의 장(“여기는 런던…”)이자 중대한 과오를 저지르는 무기였다. “라디오-파리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라디오-파리는 나치의 손아귀에 있다(Radio-Paris ment, Radio-Paris ment, Radio-Paris est allemand).” 운율을 맞추어 구성된 피에르 다크의 짤막한 노래는 지하철 막차 복도 내에서 조심스레 흘러나왔다.

1944년 8월 17일 라디오-파리 방송은 중단되었다. 샹젤리제 대로 116번지 사옥에서 직원들은 문서보관소에 불을 지른 후 회사를 버리고 떠났다. 뤼니베르시테 거리 37번지에는 이 순간을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사람들이 몇 있었다. 비시정권 하의 라디오방송국에서 은근히 때를 기다리던 젊은 저항세력이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일하면서 쟝 기뉴베르의 주도 하에 은밀하게 라디오 해방위원회라는 저항단체를 구성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 세력과 연계되어 있는 피에르 쉐페르도 그 일원이었다. 이들은 적진의 한복판에서 저항하며 때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는 프랑스 국민라디오 방송”

8월 18일, 저항세력은 혼란 상황을 틈타 방송사를 점령하고 마이크, 안테나, 장비 등을 조정했다. 적들은 아직 거리에, 그리고 창문 아래 진을 치고 있었다. 총소리가 울려 퍼졌고 멀리서부터 전차가 다가왔으며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8월 20일 일요일은 역사에 남을 만한 날이 되었다. 체신부(PTT) 저항네트워크에 의해 은밀히 진행된 방송 덕에, 대중은 처음으로 이들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감정은 극에 달했다. 그날 밤 10시 30분, 1940년 휴전협정 이래 최초로 라디오에서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가 울려 퍼졌다. 4년 만이었다. 곧이어 저널리스트 피에르 크레네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프랑스 국민라디오 방송(RNF)입니다.” ‘라 마르세예즈’를 배경으로 한 라디오 멘트는 이 한 마디가 유일할 것이다. 그날 밤 10시 31분, 이렇게 프랑스 라디오가 탄생했다.

프랑스 국민라디오 방송(RNF)은 1945년 3월 프랑스 라디오 방송(RF), 1949년 프랑스 라디오-텔레비전 방송(RTF), 1964년 ORTF를 거쳐 마침내 10년 후에 라디오 프랑스(Radio France)가 되었다. 즉, 레지스탕스는 라디오 프랑스 탄생에 초기 영감을 부여한 토대인 셈이다. 전국 레지스탕스위원회(CNR)의 모토는 ‘언론의 자유보장, 국가와 돈의 힘, 외국 영향력으로부터 명예와 독립의 수호’였다. 돈의 힘으로부터의 독립은 지켜졌다. 그래서 광고가 없더라도 청취자는 늘 되돌아왔다.

그러나 위기로 납빛이 된 하늘 아래서 귀가 밝은 몇몇 사람들은 공익사업을 압박하는 거대한 세력의 잡음이 들린다고 말한다. 라디오 프랑스가 위협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인가?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라디오에 대해 잘 모른다. 라디오 청취자는 하루 1400만 명에 달하나, 딱히 비평하는 사람은 없다. 지나치게 가볍고 저속한가? 라디오는 전 세계 수십억 인구의 삶에 깊숙이 녹아들어 있는데도 역사학자나 연구가들은 지금껏 한 번도 라디오에 크게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프랑스에서는 몇몇 대학교수나 몇몇 대담한 저서 및 사이트가 여론, 정치성향, 순응주의, 언어, 상상 등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데에 비해 라디오는 거의 영향력이 없다. 문화적 분열을 해결하거나 집단적 해방과 개인의 성숙을 도울 수 있는 전 국민 교육을 위한 경이로운 수단인 라디오가 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교육은 개혁의 대상이며 끊임없는 논쟁의 소재이다. 그러나 청취자들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프랑스 전체의 문화형성에 주된 역할을 담당하는 라디오 프랑스는 예외다. 왜 그런가? 전문가나 전문 지식인들의 경우, 각각 준비 중인 작품 또는 저서가 하나씩 있거나 홍보해야 할 영화 또는 신간이 있기 마련이다. “이번에 출간하신 책 제목을 다시 한 번 봅시다”라는 말이 가장 자주 쓰이는 방송국에서 이들을 공격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1944년 8월 21일 RNF의 첫 현장취재는 거리에서, 삶 속에서,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다. 총격과 폭동이 한창인 파리의 레퓌블리크 광장 중앙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되었다. CNR을 대표하여 연설한 조르주 비도의 목소리가 총소리 때문에 끊겨 들려서, 그는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피해 연설을 계속해야 했다. 연설이나 논평 전에 이 라디오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방송을 했다. 다음 날, 프랑스 해방의 기쁨에 취한 아나운서는 “정보국장으로부터 정식으로 허가 받은 내용입니다. 성직자 여러분, 연합군이 파리로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지금 당장 큰 소리로 종을 울려주십시오.”

파리 전역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멀리서 먼저 울리기 시작하여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흥분된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들렸다. “마이크를 창문 가까이 대야 하겠습니다.”

글·다니엘 메르메 Daniel Mermet

France Inter 방송 프로듀서

번역·김혜경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2013년 12월 2일 파리, 텔레라마(Téléra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