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히지 않는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정신
[기획/혁명은 왜 일어나는가]
민중들 수십 년간 쉼없이 독재자들 몰아내
자유민주주의 이후 찾는 ‘확신의 정치’ 정착
혁명이 아니면 죽음을! 독재정권이 40년 동안 군림했던 니카라과에서 독재정권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은 치열했다. 보랏빛 호수들과 황토색 화산들로 이뤄진 땅에서 잔혹한 전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1979년 7월 19일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의 전사들이 아나스타시오 소모사를 권좌에서 몰아냈을 때 민중은 환희에 들떴다.
2002년 4월 쿠데타 발생당시, 차베스를 지지하는 시위대들-모리스 르무안
붉고 검은 깃발이 마나과에 펄럭였다. 바람직하지 않은 선례였다. 특히 인접한 엘살바도르와 과테말라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었다. 1980년 11월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의 공화당 정부는 니카라과를 공격했다. ‘콘트라’, 즉 니카라과의 반혁명 게릴라 세력을 앞세워 미국은 산디니스타 정권을 10년 이상 공격했다. 산악지대의 햇살에 그을리고 또 그을린 ‘카초로’(강아지)들이 맞서 싸웠다.(1) 그들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1991년 전쟁과 기아에 시달리고 폐허로 변한 조국에서 그들은 무기를 내려놓아야 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났을 때 그들은 권력을 돌려줘야 했다. 민주적으로…. 그리고 지옥으로의 기나긴 추락이 시작됐다.
역풍을 맞은 미완의 혁명
그보다 두 해 전, 1989년 베네수엘라에서는 석윳값이 추락했다. 석유가 거의 물값으로 팔렸다. 빚더미에 올라앉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국제통화기금(IMF)은 베네수엘라에 구조조정을 강요했다. 베네수엘라 국민에게는 밀가루도 없었고 설탕도 없었다. 커피도 없고 기름도 없었다. 쌀도 없었다. 물가가 앙등하면서 베네수엘라 국민은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대중교통 요금이 하룻밤 사이에 100% 오르기도 했다.
2월 27일 지도자도 조직도 없이, 구호도 깃발도 없이 민중은 카라카스 길거리로 뛰쳐나와 “우리에게도 살 권리가 있다! 우리는 베네수엘라 국민이다!”라고 외쳤다. 그동안 억눌려왔던 고통이 폭발하며 혼란스런 소요와 폭동이 잇달았다. 자동차가 불타고 슈퍼마켓과 상점이 약탈당했다. 사회민주당 출신의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대통령은 군부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질서를 회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끔찍한 결과가 빚어졌다. 거의 3천 명이 사망했다. 이른바 ‘카라카스의 대충돌’이었다. 그리고 한동안 잠잠했다.
1990년 에콰도르. 간선도로가 차단되고, 재산이 약탈당했다. 교회도 점령당했다. 식민 지배자와 토지 소유자에게 맞선 기나긴 저항의 역사가 다시 시작됐다. 토착민들의 폭동에 권력자들은 공포에 떨었다. 그리고 망각의 시대가 찾아왔다.
볼리비아에서는 조금 일찍 1985년에 주석 광산의 야만적 민영화로 2만4천 명의 토착민 노동자가 하루아침에 거리로 쫓겨났다. 모든 것을 빼앗긴 채 고산지대의 차가운 바람에 버려진 그들은 차파레 지역에 정착해 가난한 농민에게 유일하게 수익을 보장해주는 작물인 코카를 재배하려 했다. 오호통재라! 워싱턴의 눈에 코카는 곧 코카인이었다. 곧바로 억압이 시작됐다. 그리고,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1978~79년 독재에 신음하던 브라질에서는 상파울루 교외의 산업도시 ABC(산토안드레(A), 상베르나르두(B), 상카에타누(C) 세 도시를 지칭)의 금속노조가 불법을 무릅쓰고 파업에 돌입해 공권력에 과감히 맞섰다. 때마침 니카라과에서 산디니스타가 소모사 정권을 전복시킨 뒤라 브라질의 독재정권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파업을 진압했다.
1990년대 초, 민주주의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독재자들의 낙원이던 라틴아메리카가 굴레에서 벗어난 자유주의의 실험대로 변했다. 1980년에는 가난한 사람의 수가 1억2천만 명 정도였지만 20년 후에는 2억2500만 명으로 증가했다. 워싱턴과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과 각국에서 소수에 불과한 부르주아들은 이른바 ‘임금철칙’, 즉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노동자와 그 가족의 생활 유지에 필요한 최저비용에 일치해야 한다는 법칙을 강요했다.
사회조직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사방에서 저항이 시작됐다. 브라질과 파라과이에서부터 볼리비아까지 토지 없는 농부들과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기 위해 다국적기업들에 저항했다.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저항은 때때로 폭력적인 형태를 띠기는 했지만 지속적이지 못했고, 목표마저도 즉흥적이고 한정된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은 멕시코 치아파스에서 1994년 1월 1일 무장봉기를 선언하며 “멕시코 정부가 우리에게 결코 허락하지 않으려는 것, 즉 일자리와 땅, 지붕과 식량, 건강과 교육, 독립과 자유, 민주주의와 정의 및 평화를 쟁취하기 위해 취할 수밖에 없는 투쟁을 시작했다”고 선언했다.(2)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과 마르코스 부사령관의 저항이 1929년부터 멕시코의 절대권력으로 군림하던 제도혁명당을 2000년 권력에서 추락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정권 장악’은 이차적인 목표에 불과했던 까닭에 집권을 위한 명확한 전략이 없었다. 따라서 사파티스타는 국민행동당의 오른손 자격으로 권부에 입성하지 못했다. 그들이 온갖 난관을 무릅쓰고 얻어낸 자신들의 공동체인 치아파스의 자치권으로 만족했다.
물론 남쪽 나라들에서 대통령들이 추풍낙엽처럼 권력에서 밀려났다. 에콰도르의 하밀 마우아드와 루초 구티에레스, 페루의 알베르토 후지모리, 볼리비아의 곤살로 산체스 데로사다와 카를로스 메사, 아르헨티나의 페르난도 데 라 루아가 “세계화에 반대!”, “통화기금이여, 떠나라!”, “모두 떠나라!”고 외치는 목소리에 밀려 권좌에서 쫓겨났다. 1980년대 초 이후 14명의 대통령이 임기 전에 물러나야 했다.
제국에 맞선 카리스마 지도자들
이런 변화 이외에 대다수 국가에서 국민의 저변에는 집단의식이 잠재돼 있었다.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는 화약통이었다. 심지를 태울 불꽃이 없었다. 국민의 자발적인 분노나 민중 동원이란 불꽃은 심지에 불을 붙일 수 없었다. 그 일을 해줄 ‘지도자’가 필요했다. 전통적인 정치계급은 가난한 사람들을 혁명으로 인도할 수 없었다. 따라서 노동조합, 저항세력, 무장세력에 뿌리를 둔 지도자에게 그 몫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대안적 세계화나 반자본주의 운동, 혹은 ‘신도 없고 주인도 없으며 선동가도 없는 세상’을 바라며 집단 지도체제나 민중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운동에서는 이런 변화가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의 몫은 분명히 눈에 띈다. 그렇다고 그 과정에 어떤 식으로든 참여한 무명의 수많은 시민들의 구실을 의심한다는 것은 아니다.
피델 카스트로가 없었더라면 쿠바가 미국의 침략을 50년이나 견디지는 못했을 것이다. 베네수엘라에서는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없었다면 시몬 볼리바르가 꿈꾸던 혁명이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또 볼리비아의 혁명적 변화에는 에보 모랄레스가 있었다.
“모든 위대한 지도자의 이력을 살펴보면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한 상징적인 행동과 영웅적인 행위가 있었던 까닭에 정치의 탄생이 있었다.”(3) 1940년대 콜롬비아에서는 바나나 농장의 노동자들을 지켜주려던 엘리에세르 가이탄의 영웅적 행위가 있었고,(4) 쿠바에서는 1953년 7월 26일 피델 형제가 산티아고에 주둔한 몬카다 병영을 공격했고 그 후에는 마에스트라산맥의 시대가 있었다. ‘카라카소’의 악몽이 있은 지 3년 후인 1992년 2월 4일에는 차베스 중령이 쿠데타를 시도해, 그의 표현대로 ‘불의하고 타락한 민주주의’를 전복하려 했다.
젊은 카스트로는 몬카다 병영을 공격한 후에 체포돼 재판을 받을 때 “역사가 나를 사면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차베스는 쿠데타의 실패로 항복할 때 카메라 앞에서 “이번에는 우리가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에 카스트로와 차베스란 인물의 상징적 위상을 깊이 심어준 말들이었다.
민중과 지도자의 일체화
기준을 벗어난 사람이라기보다는 민중의 의지와 자신을 일체화한 표본도 있었다. 그의 시대에 살바도르 아옌데는 선동가이기도 했지만 일상의 투쟁에 단련된 정치인이기도 했다. 1940년 보건장관으로 재직하며 국민 보건의 지휘본부에서 활기차게 일했다. 아옌데는 그렇게 자신의 지지자들을 끌어모았다. 또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는 상베르나르두 금속노동조합 조합장으로 1979년 상파울루 외곽의 ABC에서 41일간의 파업을 주도했고, 경찰의 곤봉에 시달리다 투옥되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에보 모랄레스는 치아파스의 코카 재배를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정부에 저항했고 노동조합을 이끌었으며, 2002년에는 민주 선거로 당선된 의회에서 부당하게 제명당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모랄레스는 볼리비아 정계의 실력자가 됐다. 페르난도 루고 주교는 파라과이에서 해방신학의 이름으로 ‘가난한 자들의 교회’ 운동에 참여했고, 이제는 파라과이의 대통령까지 됐다.
차베스와 모랄레스, 더 크게는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라 대통령까지, 지도자와 민중 간의 이례적인 관계를 ‘보수주의자’들은 거북하게 받아들인다. 심지어 병적으로 두렵게 생각하기도 한다. 극단적으로 반체제와 반독재적이라는 담론이 이 지도자들과 민중 간의 관계에서 핵심적 요소다. 따라서 포퓰리즘이고 위기에 대한 선동적이고 피상적인 대응에 불과하며, 무지한 민중을 현란한 수사로 속이는 선동가라는 비난이 끊이지 않는다.
실제로 그런 지도자들은 민중과의 대화에서 민중의 감정을 받아들여 상당히 일관된 방식으로, 또 강력한 힘을 담아 재해석하면서 집단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차베스와 민중이 변증법적 관계로 얽혀 있는 것은 분명하다. 달리 말하면, 차베스와 민중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다. 베네수엘라 국민은 우고 차베스와 ‘볼리바르 운동’의 행동을 통해 정치적 주체가 됐다. 따라서 둘 중 하나를 떼어놓고 말하는 것은 현재의 역사적 상황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5)
대통령의 연설은 지지자들에게 앉아서 보는 구경거리가 아니다. 그들이 참여하는 행위이며, 참여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현재 일어나는 변화에 동참하기 위한 기운을 얻는 행위다. 그렇게 민중운동의 역동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대통령과 민중은 서로 보완적 관계에 있다.
그러나 카리스마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카리스마라는 것이 유일한 유혹거리도 아니고, 열정적인 연설로 민중을 선동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도 아니기 때문이다. 보수적이고 심지어 반동적인 사람도 매력적일 수 있고 카리스마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지도자는 행동을 기준으로 평가받게 된다.
일부 진보 정권, 자본에 굴복
룰라 대통령은 2002년 가난한 사람들의 대변자로 당선돼 임기를 시작한 후에 포르투알레그레에서 개최된 세계사회포럼에, 또 다보스포럼에도 참석했다. 악마와 선한 하느님의 길을 끊임없이 모색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위한 일련의 ‘시혜주의적’ 공공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경제구조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고 신자유주의 정책의 추진을 옹호했다.(6) 우루과이의 타바레 바스케스, 아르헨티나의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와 그의 후임인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 칠레의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유사한 태도를 보인다. 소수가 지배하는 우익 정권에 반대한 진보주의를 표방한 그들 모두가 근본적인 사회개혁을 포기하고 민간 자본의 요구에 굴복했던 것이다.
‘급진주의자’들은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을 순탄하게 끌어가기 위해서 진정한 무기로 무장했다. 헌법 개정을 위한 의회 선거와, 국민투표로 국민의 동의를 받은 헌법 개정부터 시작했다(베네수엘라·에콰도르·볼리비아). 투표 방식, 소득 없이 끝난 소요, 무력시위 등에 많은 관측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어쩌겠는가. 한편 의회에서 과반수를 얻지 못했지만 이념적인 연대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된 파라과이의 페르난도 루고 대통령도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을 지지해준 사람들이 요구한 농지개혁에 관련된 문제를 제기하며 “농민단체들이 목표로 삼는 ‘라티푼디움’(대농장)의 종말은 헌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우리가 헌법을 바꾸거나 수정하지 않는다면 총체적인 농지개혁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7)
‘21세기 사회주의’ 가능성 모색
라틴아메리카에서든 유럽에서든 주요 좌파 세력은 언젠가부터 사회주의를 언급하지 않으려 애써왔다. 여기에서 분명한 경계선이 찾아진다. 2005년 1월 30일, 제5차 세계사회포럼이 개최됐을 때 차베스는 처음으로 ‘21세기의 사회주의’에 대해 언급했다. 그 후 모랄레스와 코레아도 루비콘강을 건넜다.(8) 적어도 세 나라에서는 미적지근하지 않다. 전략적 자원의 국유화, 대대적인 사회개혁 프로그램, 토지 재분배가 추진되고 있으며, 특히 베네수엘라에서는 소유와 지배의 사유화를 허용하지 않는 형태(협동조합, 노사가 공유하는 기업, 공동체 위원회)까지 추진했다.
이런 의식적인 노력으로 ‘온건파’와는 현격하게 다른 결과를 빚어냈다. 하지만 지배계급이 손발을 놓고 있지는 않을 것이기에 그런 대책들에는 시련과 반발이 있기 마련이었다. 2001년 12월 베네수엘라의 야당은 일련의 개혁 조처가 지나치게 급진적이라며 반발했다. 그때 차베스는 볼리바르 대로에 모인 군중 앞에서 “우리가 적당히 개혁하려고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다. 우리가 주권자인 국민에게 거짓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온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소수의 특권자가 보기를 원하지 않고 듣기를 원하지 않아도 이 혁명의 길에서 물러설 수는 없다!”고 열변을 토했다. 그로부터 넉 달 후인 2002년 4월, 차베스는 쿠데타의 위협을 받았다. 집권 이후로 변함없는 민중의 지지로 차베스는 쿠데타의 위협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볼리바르 혁명을 한층 가속화하고 심화했다. 에보 모랄레스는 제헌의회의 태업, 기업주의 파업, 산타크루스주를 분할하겠다는 위협에 부딪혔다. 또 2008년 9월에는 정국을 불안에 몰아넣으려는 시도까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압도적인 다수의 지원을 등에 업고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이런 급격한 변화가 이론가들에게 중대한 연구거리인 것만은 틀림없다. 이런 변화는 다른 지역에서 실험된 방법을 답습하지도, 위대한 혁명가의 십계명을 암송하지도 않는다. 고유한 원칙을 따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고 있다. 자유민주주의가 바람직한 유일한 정체라고 전제하는 까닭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회의주의적 정치와 달리, 이런 변화는 확신의 정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역사에서 종종 보았듯이 국민이 일어설 때 ‘숙명’까지 바꿔놓는다는 사실이 여기에서도 확인
되는 듯하다.
글/모리스 르무안 Maurice Lemoin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장. <차베스를 대통령으로!>(2005)의 저자.
번역/강주헌
불문학 박사 출신의 문화비평가 겸 번역전문가. <선물> <해리포터 철학교실> 등 100여 권의 번역서를 펴냈다.
<각주>
(1) 산디니스타 인민군(EPS)에 지원한 젊은 병사들.
(2)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정보기관’(Organe d‘information de l’EZLN), 1권, 1993년 12월. <이제 질렸다!>(Ya Basta!), 1994.
(3) 다이앤 라비의 ‘민중운동과 혁명운동에서 카리스마 리더십’(Le leadership charismatique dans les mouvements populaires et revolutionnaires) 참조. Cuadernos del Cendes, Caracas, 2006년 8월. 프랑스에서는 ‘라틴아메리카와의 연대 및 정보망’에서 2007년 7월에 출간. http://risal.collectifs.net.
(4) 콜롬비아의 독재정권은 가이탄을 위협적인 존재로 분류하고 1948년에 암살했다. 그의 죽음으로 콜롬비아는 폭동의 혼란에 빠졌고, 그 혼란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5) 다이앤 라비, 앞의 자료.
(6) 룰라는 2006년에 재선됐지만, 그가 개인적으로 인기가 높고 우익에 비해 ‘덜 나쁘다’는 비정치적인 이유로 당선됐다.
(7) <엘 파이스>(El Pais), 2009년 3월 26일.
(8)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세 대통령이 국제감시위원단의 감시하에서 치러진 선거로 당선됐다는 점을 언급해두고 싶다. 또한 그들이 종신 집권을 획책하는 거란 의심을 받지만 그런 시도에 대한 견제장치로 국민소환투표제를 헌법에 포함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