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케티는 유토피언이다"
본지는 마르크스의 사유 전통에 기반한 정치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최근 토마 피케티의 <21세기의 자본>에 대한 TV 대담을 요약하여 게재한다. 지젝은 최근 영국 런던 버벡대 인문학 연구소에서 ‘유물론의 주체성을 향하여’란 주제로 열린 TV 대담에서 피케티를 “사회민주적인 이상주의자”로 규정하면서, 피케티가 근본적인 개혁을 하지 않고 자본주의 틀에서 부의 불평등 관련해 재분배 방식을 추진한다고 비판했다. 지젝은 피케티를 “영국의 사회민주주의자인 피터 만델슨과 거의 같다”고 평가했다. 지젝의 주요 발언은 아래와 같다. <편집자>
오늘날 진정한 유토피아는 정확히 온건한 사회민주적인 시도이다. 유토피아는 매우 온건하기 때문에 피케티는 불평등에 작동하는 자본주의 내재적 경향에서 이를 인식한다. 여러분은 내가 피케티를 유토피언(utopian)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아는가.
그가 옳은 부분은 있다. 20세기에 자본주의 극복이 작동되지 않았지만 그는 선량한 케인즈 학파로서 자본주의가 궁극적으로 도시에서 유일한 게임이며, 모든 대안은 완전한 실패로 끝나서 우리는 자본주의를 보존해야만 한다고 받아들인다.
그는 일종의 사회민주주의자인 피터 만델슨(영국 노동당 상원의원, 유럽 무역위원회 위원장-편주)과 거의 같다. 우리 모두가 대처주의자라고 말한 블레어 정권의 검은 왕자 말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피케티는 생산 모드가 역사적으로 같아야 하고 독창적으로 좀더 급진적인 것에 의하지 않고 세금에 의하여 분배를 바꾸자고 단순히 말하기 때문에, 나는 그를 유토피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시작되며 유토피어니즘으로 들어간다. 만일 당신이 수백만 파운드를 벌어 여기 내 세금이니 나에게 80%를 달라는 것은 내 생각에 실현가능하지 않다. 정부가 이것을 하는 것을 상상해보라. 피케티 자신은 이것이 전 세계적으로 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만일 당신이 한 국가에서 이것을 한다면 자본은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이것이 그의 유토피어니즘의 또 다른 면이다. 내 주장은 만일 피케티가 제안한 조치가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세계 기관을 상상한다면 문제는 이미 풀린 것이다. 이미 정치 개혁을 하여 자본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전 세계적인 파워를 갖는다면 이미 이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문제는 그의 명백히 온건한 조치들이 실현되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피케티에 반대하지 않는 이유다.
물론 당신이 변화시킨 재분배의 수준에서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매우 다이나믹하다면 놀라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토피언이다. 재분배에서의 변화가 생산의 모드와 자본주의 경제학 그 자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당신은 이것을 할 수 없다.
때때로 유토피아는 모든 급진적인 변화의 의미에서 반실용적이다. 때때로는 오류 방식에서 온건적인 것이 가장 훌륭한 유토피아가 될 수 있다.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보기 같을 수도 있다. 피케티는 이런 식이 아니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겠다.
기본적으로 히틀러에 동조하던 이스라엘 공동체 사람들이 “왜 히틀러는 역겨운 반유태주의를 제거하지 않는가?”라고 궁금해 했다.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보수적인 유태인들은 “우리가 히틀러 당신과 함께 국가 통일을 강화했는데, 우리는 당신과 함께 하고 싶은데, 왜 우리를 미워하는가?”라고 했다. 이것이 유토피언적인 사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