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수위의 채무, 혁명의 변곡점?
박근혜 정부 2기 경제팀의 난제
최근 종영된 드라마 <정도전>의 인기에는 지금의 대한민국에 대한 근본적인 불만이 투영되어 있다. 주지하듯이, 고려 말 권문세족의 탐욕과 부패로 절망에 빠졌던 백성에 대한 구제책으로 전제개혁이 제기되었고, 사전의 완전한 혁파와 재분배를 주장한 혁명 세력의 승리로 끝났다. 대다수 백성을 채무 노예로 전락시킨 당시의 고려왕조는 수명이 다한 사회질서였고, 백성을 채무 노예에서 해방시키는 사전 혁파와 토지 재분배는 새로운 사회 건설의 출발점이었다. 채무 노예가 증가하는 사회의 채무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한 시대가 막을 내릴 때의 공통 현상이었다. 기존 사회질서의 활력이 소진되고 사회 전체의 파이가 정체하는 가운데 소수 상위층의 약탈과 착취로 다수의 민중이 몰락한 결과였다. 예를 들어, 최근의 미국 금융위기 역시 미국의 주요 시스템들의 활력이 소진되며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악화된 결과다. 가처분소득에서 개인소비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1980년대 초 90% 정도에서 금융위기 직전에 약 100%로 증가했듯이 금융위기 직전 30년간 진행된 ‘금융화’는 다름 아닌 ‘채무화’였다.(최배근, ‘민주주의 없이 창조경제 가능할까,’ 본지 2013년 12월호 참고)
역사는 대다수 사회구성원을 생존 위기로 몰아넣는 사회는 지속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지난 10년간 가계부채의 증가 속도가 국민소득 증가의 3배에 달해 가계부채가 가처분소득의 1.6배가 넘을 정도로 한국사회도 채무화의 위기에 놓여 있다. 한국사회의 채무화는 지난 20년 이상 누적된 것이다. 90년대 초부터(1998년 외환위기, 2003년 카드사태, 2008년 금융위기 때를 제외하고서는) 지난 20년 넘게 가계의 소비지출 증가율이 가계의 총처분소득 증가율을 앞서 왔고, 그 결과가 오늘의 가계부채 문제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난 20년간 가계의 소비지출 증가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가운데 가계부채가 증가했다는 점이다. 소득 증가율의 하락 속도가 더 빠르게 진행된 결과였다.
이처럼 한국사회의 채무화는 소득 증가의 둔화에서 비롯한다. 소득 증가가 둔화된 요인은 지난 20년간 경제성장률 자체의 절대적 저하뿐만 아니라 (OECD국가 중에서 경제성장률과 가계소득 증가율이 가장 큰 격차를 보일 정도로) 경제성장률을 하회하는 가계소득 증가율에서 비롯한다. 즉 제조업에 기반한 성장패러다임의 종언과 가계·기업소득의 성장불균형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1992년부터 한국 경제성장의 주역인 제조업의 고용 규모가 축소되는 탈공업화가 시작됐다. 제조업 종사자의 규모(비중)는 1991년 516만 명(27.6%)을 정점으로 2012년에는 363만 명(15.8%)으로 감소하였다. 제조업의 구조 변화는 기본적으로 노동력이 기술로 대체된 결과 노동생산성이 증가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 즉 제조업 부가가치의 규모는 커졌으나 제조업의 일자리가 축소된 것이다.
문제는 제조업의 일자리 감소(153만 명)가 전체 일자리의 증가(679만 명)와 제조업의 1인당 부가가치의 급증 속에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즉 1990년대 초까지 차이가 없었던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1인당 부가가치는 90년대 중반 이후 격차가 확대되어 두 배 이상으로 벌어졌다. 이처럼 탈공업화는 상대적으로 생산성이 높은 제조업에서 일자리의 감소와 생산성이 낮은 서비스업에서의 일자리 증대로 이어진, 즉 줄어든 중간소득 일자리의 대부분이 저소득 일자리로 이동한 일자리 및 소득의 양극화였고, 경제 전체의 성장률을 하락시킨 한 요인이었다.
둘째, 시장개방은 소득분배를 악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저임금 미숙련 노동력을 집약적으로 사용하는 부문의 수입이 크게 증가하고, 고임금 숙련 노동력을 집약적으로 사용하는 부문의 수출이 증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90년대 이후 시장개방의 확대는 일자리 및 소득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특히,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중국과의 교역 급증이 저임금 미숙련 노동력의 수요와 소득에는 부정적으로, 다른 한편 고임금 숙련 노동력에의 수요와 소득에는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재분배 이전의 시장소득을 기준으로 한 불평등이 1992~2009년 기간 26%가 증대한 배경이다. 저임금 미숙련 노동력의 타격과 중간 소득층의 감소는 한·중 수교 이후 중국산 수입의 급증과 더불어 부도업체와 자영업의 급증에서도 확인된다. 즉 90년대 초 이래 중견기업들의 대거 도산으로 중산층이 지속적으로 축소된 반면, 실직한 근로자들이 영세 소기업 시장과 영세 자영업 시장으로 대거 유입되면서 영세시장 과잉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또한, 1992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자본시장 개방은 기업에 대한 금융의 영향력 확대로 이어졌고 인건비 절감과 구조조정을 상시화시킴으로써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노동소득의 비중을 저하시켰다. 이처럼 시장개방은 일자리 양극화와 임금 인상의 둔화, 고용 불안정 등 내수 취약성의 한 요인이 되었고, 내수 취약성은 내수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자영업의 취약성을 구조화시켰다.
셋째, 일자리 및 소득 양극화와 내수의 약화 등으로 기업은 수출에 목을 매고 정부는 친기업 정책으로 기업의 경쟁력을 지원하였다. 그 결과 기업은 부유해지고 국민은 가난해졌다. 1991~2011년 기간 가계소득 증가율(연평균 8.5%)은 국민총소득(GNI) 증가율(9.3%)을 밑돈 반면 기업소득 증가율(11.4%)은 GNI 증가율을 상회하였다.
고환율정책 최대수혜자인 삼성전자, 국내 일자리 창출은 8%에 그쳐
대표적인 친기업정책이 고환율, 노동시장 유연화, 감세 정책들이다. 환율 절하는 소득분배를 악화시키는 경향이 있고, 이러한 경향은 무역개방도가 높을수록 증대한다. 무역의존도가 과도하게 높고 고환율정책에 의존한 한국의 (노동소득/국민소득) 비중의 하락 속도가 OECD국가 평균보다 2.5배나 높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를 들어, 고환율정책의 최대 수혜기업인 삼성전자(모바일 부문)가 최근 증가시킨 일자리 중 국내에서 만든 일자리는 8%밖에 되지 않는다.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또 하나의 친기업정책이다. 제조업의 고부가가치화는 제조업을 아이디어집약적으로 변화시켰고, 그 결과 노동력의 숙련도 역할이 약화되면서 기업의 비정규직 선호가 증대하였다. 비정규직의 급증은 임금불평등을 증가시키고 이는 결혼율을 저하시킴으로써 저출산율과 고령화 등 인구구조를 악화시키고 내수 취약성을 심화시켰다. 소득세율과 법인세율 인하 등 감세정책도 국민소득에서 기업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을 증대시켰다. 외환위기 이전 20여 년간(1975~1997년) 가계소득과 기업소득 증가율은 각각 연 8.1%와 8.2%로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2000~2010년 기간엔 가계소득과 기업소득 증가율은 각각 증가율은 2.4%와 16.4%로 격차가 크게 확대되었고, 특히 후반부인 2006~2010년 기간에 각각 1.7%와 18.6%를 기록할 정도로 가계와 기업소득의 격차는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요약하면 지난 20년 이상 탈공업화가 진행되며 주요 시스템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며 사회적 탈구들이 진행된 결과가 한국사회의 채무화다. 즉 한국사회의 채무화에는 한국경제의 모든 문제가 응축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스템 실패의 결과물이다. 공업화의 확산과 국가 간 제조업 기술의 평준화 → 제조업 공급 과잉과 경쟁의 심화 → 기업은 가격경쟁력 확보를 위해 임금 인상 억제, 생산 자동화로 고용 축소, 비정규직 선호, 생산기지의 해외 이전, 정부에 친기업정책 요구 등으로 대응 → 임금 상승률 둔화, 고용 불안정 증대, 영세 자영업 증가와 임금불평등 확대, 결혼율과 출산율 저하 그리고 고령화 심화 등 인구구조 악화 → 내수 취약성의 심화와 자영업 취약성의 구조화 → 수출에 목을 매는 경제의 구조화라는 악순환 고리가 만들어졌다. 낙수효과가 실종된 이유다. 내수 취약성과 수출 의존적인 경제의 구조화는 대외환경이 악화될 때마다 인위적인 경기부양, 즉 부채 주도의 성장을 반복시켰고 그 결과가 한국사회의 채무화다. 예를 들어, 가계부채의 질이 본격적으로 나빠지기 시작한 이명박 정권 기간 동안 국민소득이 334조 2천억 원 증가했는데 가계부채는 302조 2천억 원이 증가했으니 부채 증가 없이는 성장이 거의 불가능했음을 보여준다. 한 추정에 의하면, 지난 5년간 가계부채의 증가 덕분에 경제성장률이 연평균 2.9%p 상승했던 반면, 실제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3.0%에 불과했다. 정부부채 증가(244조 2천억 원)까지 포함하면 부채 증가 없이는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 첫 해에 가계부채가 57조 5천억 원이 증가했는데 국민소득은 50조 8천억 원 증가에 불과했다. 부채에 의한 성장 효과조차 약화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경험들은 부채에 의한 성장 효과가 약화될 때 경제위기가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박근혜 정권의 때늦은 ‘경제혁신 3개년 계획’
이런 점에서 창조경제를 통한 역동적인 혁신경제, 내수와 수출의 균형성장 등을 목표로 올해 초 발표한 박근혜 정권의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은 만시지탄이었다. ‘탈공업화 함정’에서 벗어나 (특히 청년층을 위한) 괜찮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새로운 경제모델 없이 한국사회의 채무화를 역전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 시점에서 창조경제와 균형성장의 실현가능성을 기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창조경제가 제조업과는 전혀 다른 원리를 요구하고 있고, 제조업에 기초한 주요 시스템들의 혁파를 전제로 한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최배근, “민주주의 없이 창조경제 가능할까,” 본지 2013년 12월호 참고) 균형성장 역시 소득불평등을 ‘혁명적’으로 개선하거나 (특히 청년층을 위한) 괜찮은 일자리를 만들지 못하는 한 임기응변식의 재정·금융정책으로는 불가능하다. 일본이 ‘잃어버린 20년’의 핵심원인으로 산업체계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 시기를 놓쳤다는 진단을 내놓았다. 문제는 1990년대 말부터 창조산업의 육성을 본격적으로 추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적이 충격적이라는 점이다. 1999~2012년 기간 전체 산업의 매출액, 고용규모, 기업체 수는 각각 7.8%, 22.9%, 6.5%가 증가한 반면, 창조산업은 각각 –14.3%, -14.0%, -26.9%로 오히려 후퇴하였다. 특히 제조업부문에서 창조산업은 각각 –45.6%, -50.5%, -50.3%로 크게 후퇴하였다. 제로금리와 양적완화 그리고 신자유주의식 구조개혁이나 제조업에 기반한 교육시스템, 혁신시스템, 금융시스템 등으로 창조경제가 만들어질 수 없음을 보여준다.
창조경제와 균형성장이 빛바랜 구호가 된 이유는 박근혜 정권의 경제정책이 지난 20년간 실패로 입증된 성장과 친기업 중시, 부동산시장의 인위적 부양 등 낡은 패러다임의 틀에서 한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편중적인 소득분배, 일자리 및 소득 양극화 등에서 비롯한 한국사회의 채무화가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즉 다수의 국민들이 중산층에서 저소득층, 다시 빈곤층으로 추락하는 현상이 가속화될 수밖에 없고, 서민의 희생으로 자산소득자 등 최상위 소득자의 부를 증대시키고 있다. 2007년 대선 때 박근혜 후보의 ‘줄푸세(세금을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우자)’ 공약을 주도한 박근혜 정권 2기 경제팀의 대책에 시간제 일자리를 포함해도 고용률이 40%에 불과한 청년층 일자리 문제, 파산으로 내몰리는 자영업자의 생존 문제 등에 대한 해법은 보이지 않는다. 박근혜 정권이 한국사회 채무화의 변곡점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국사회 채무화의 지속불가능은 혁명을 부를 수밖에 없다. 즉 채무 노예의 해방과 청년층을 위한 괜찮은 일자리를 만들지 못하는 한 현 체제의 붕괴는 불가피하다.
글·최배근
미국 조지아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안경제 이론과 대안경제 시스템 문제를 연구하고 있으며 교육·지역자치·통일운동 분야의 사회활동에도 관심이 높다. 현재 경제사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