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감벤과 데리다는 왜 동물과 인간을 발가벗겼나

2014-07-02     이동연

동물은 인간에게 어떤 존재인가? 인간의 육식을 위한 사육의 대상인가? 인간 곁에 함께 하는 반려의 대상인가? 전생에 죄의 억겁을 짊어진 채 비천하게 살아야 하는 윤회의 대상인가? 아니면 인간과 다른 자연의 세계에 살고 있는 독립적인 존재인가? 이 네 가지 문제 설정은 동물의 현재적 위치를 모두 설명해 준다. 동물은 인간 육식의 욕구를 위해 대량 사육되는 고기 덩어리에 불과하다. 동물은 때로는 인간의 외로움을 해소하고, 인간의 인간관계를 대신하는 반려동물로 존재한다. 반려동물은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상호 관계 속에서 위치한다는 점에서 단지 인간의 부속물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또한 동물은 현존하는 세계의 구성원일 뿐 아니라, 인간 신화의 상징적 아이콘이기도 하면서 종교 원리를 지탱해주는 구성적 요소이다. 동물은 인간 윤리의 긍정과 부정의 대상이기도 하다. 종교와 신화의 장에서 동물은 인간의 종적 우위를 정당화하는 도구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생명 그 자체의 소중함을 각인시켜주는 인간을 성찰하게 하는 거울이기도 하다. 때때로 동물은 인간의 어리석음, 허무함, 이기적 속성을 알게 해주는 숭배와 성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물론 동물의 존재는 인간을 배제한 그 자체로 독립적인 내적 존재성과 외부환경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수없이 관찰해왔지만, 아직도 모르는 동물만의 고유한 세계를 우리가 모를 뿐이다.

동물과 인간의 관계는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역사적으로 다양한 형태로 형성되었다. 신화적 관계, 종교 제의적 관계, 경제적 관계, 그리고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반려 관계 등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다양하고 복잡하다. 이러한 구성적 관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동물에 대한 철학적 탐구는 인간중심주의의 사고에서 벗어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 이 글은 특히 동물과 인간과의 상호 관계를 철학적으로 조명한 조르조 아감벤(1942~, 이탈리아 철학자이자 미학자-편주)과 자크 데리다(1930~2004, 프랑스 해체주의 철학의 대표적인 철학자-편주) 논의를 통해 이 문제에 접근하고자 한다. 흥미롭게도 아감벤과 데리다는 동물과 인간 사이의 철학을 ‘발가벗음’이란 말로 풀어내려고 한다. 두 사람이 사용하는 발가벗음의 언어는 다르지만, 이 용어가 동물을 바라보는 인간의 근본적인 성찰을 위한 문제설정이라는 점에서 심오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동물화, 동물의 인간화

조르조 아감벤은 인간과 동물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 신화적 세계의 상상력을 복원함으로써, 인간과 동물이 서로 ‘개방적인 존재’로 관계 맺기를 강조한다. 아감벤에게 ‘개방성’은 인간과 동물이 가진 본래적인 속성이다. 아감벤은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우스 도서관에 있는 13세기 히브리 성서의 마지막 장에 그려진 세밀화 속의 동물들을 언급하면서 종말론적인 동물과 인간의 형상들, 예컨대 독수리 부리, 소의 붉은 머리, 사자 머리, 당나귀 머리, 표범의 옆모습을 지닌 의인들, 원숭이 머리를 한 바이올린 연주자들의 형상들은 영지주의, 메시아주의, 그리고 동물의 대우주와 인간의 소우주의 유대 관계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1) 아감벤이 보기에 인간의 몸을 가진 동물-머리가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스라엘의 생존자를 상징한다면, 그 동물-머리의 형상은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새로운 형태를 띠고, 인간이 스스로의 동물적 본성과 타협하게 되는 것”을 예견한다. 아감벤은 동물적인 형상과 행위라는 것은 예술과 사랑, 유희처럼 전쟁, 혁명, 철학과 같은 유한한 인간의 모습을 지울 수 있는,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무한정 보존되는 것과 같다고 본다.(6쪽) 동물의 형상은 “예술, 사랑, 유희들이 인간적인 틀을 벗어나 동물적이고 자연적인 행위가 되어 인간을 만족시켜 줄 것임을 확인”한다.(7쪽)

인간의 형태를 한 동물은 인간을 닮아가는 것과 같다. 이것을 역으로 말하면, 동물의 형태를 한 인간은 동물을 닮아가는 것과 같다. 전자의 명제가 “동물의 인간화”라면, 후자의 명제가 “인간의 동물화”라고 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인간은 동물의 인간화의 거울과도 같다. 인간중심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동물의 배타적 외부이며, 동물은 인간의 지배적 외부가 된다. 아감벤은 이러한 근대적 이분법적 기준들, 인간과 동물을 몇 가지 기준과 장치로 구분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 이분법 사이의 공간에 주목하며 “인간의 동물화”와 “동물의 인간화”의 관점을 제시한다.

아감벤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이분법적 구분 사이에는 예외가 존재하며, 이 예외적 공간에는 인간적 삶도 아니고 동물적 삶도 아닌 그 자체로 분리되어 있고 배제되어 있는 “발가벗은 삶(bare life, 38쪽)”이 위치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감벤이 말하는 이러한 발가벗은 삶은 바로 인간과 동물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사이’의 삶이며, 인간의 동물화, 동물의 인간화로 이행하는 경계의 삶이다. 아감벤은 이 삶의 공간에서 개방성을 찾고 있다. 여기서 개방성은 인간만이 열린 세상을 볼 수 있다고 믿는 은폐된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57쪽)

아감벤은 인간의 개방성과 동물의 개방성이 만나는 지점을 하이데거(1889~1976, 현대 독일 철학자로 실존주의 철학의 대표자-편주)가 말하는 “심오한 따분함(profound boredom)”을 통해 설명한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따분함이란 “텅 빈 채로 남겨진 상태(being left empty, 63쪽)”로 집중할 일이 없이 동물처럼 심심함에 매혹된 상태를 말한다. 텅 빈 상태로의 순간은 따분함을 본질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64쪽) 심오한 따분함으로 인해 공허함에 남겨진 상태에서 인간은 마치 동물과의 관계에 있어 과거에는 결코 드러나지 않았던 ‘타자’로서 본질적인 분열의 반향처럼 뭔가 떨림이 일어나는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따분함을 느끼게 된다. 따분함을 느끼는 인간은 스스로 동물적 매혹에 가장 근접한 상태에 있음을 발견한다.(65쪽) 아감벤에게 있어 따분함이란 결국 동물의 개방성과 인간의 개방성이 만나는 순간을 의미한다.

발가벗음의 역설로 본 인간과 동물

인간과 동물의 발가벗음의 역설에서 타자성의 진리를 질문하는 데리다의 철학적 성찰 역시 아감벤과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데리다가 주장한 발가벗음의 역설은 그가 오랫동안 비판했던 로고스 중심주의(로고스가 서구의 사회, 문화, 사상 등 모든 영역을 지배해왔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크 데리다가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편주)의 해체를 기획하는 것이다. 이 기획의 중심에 인간의 종속적 타자가 아닌 인간의 양가적 존재로서 동물의 동물성이 자리 잡는다. 동물의 동물성은 인간의 인간성 성찰에 대한 거울과도 같다. 동물에 대한 데리다의 질문은 두 가지 모티프를 갖고 있다. 첫째는 철학에서 거의 잊혀져 있거나 조롱당해 왔던 동물적 삶의 양상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철학 역사의 사유에서 가장 지속적이고 집요했던 ‘철학적 상대성’의 의미를 동물의 이면에 대한 놀라움의 발견을 통해 간파하는 것이다.(2) 이 두 가지 모티프들은 모두 인간중심주의적 사유에서 벗어나기 위한 예외적 선택의 사례로 동물의 삶을 들여다보려는 의도를 갖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보고 있는 동물, 즉 그들을 바라보는 동물의 경험은 그들 담론의 이론적 또는 철학적 건축에서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3) 이는 인간중심적인 주체의 시선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제기하는 것이다.

데리다는 또한 “동물적 삶의 양상에 대한 연민의 감정, 동물의 이면에 대한 놀라움의 발견”을 “발가벗음(naked)”이란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발가벗음은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타자의 동일한 상태를 통해 그 이면을 발견하려는 성찰적 행위를 말한다. 발가벗겨진 인간은 이미 발가벗은 동물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다시 생각한다. 그렇다면 발가벗음의 역설이란 무엇일까? 실제로 자신과 함께 살고 있는 고양이와의 에피소드를 기억하며, 데리다는 먼저 발가벗은 채 동물 앞에 서 있는, 그리고 동물의 시선에 포착된 인간의 곤란함, 부끄러운 상황을 상상해 보라고 한다. “동물의 집요한 응시 앞에, 발가벗은 채 진실된 모습으로 서는 이 곤란한 만남의 원초적인, 단일하고 비교 불가능한 경험”(4쪽)은 원래 발가벗은 동물 앞에서 인간의 발가벗음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를 알게 한다.

데리다의 언급대로 인간은 자신의 성기를 가리기 위해 옷을 발명한 유일한 존재이다.(5쪽) 여기서 역설이 발견된다. 인간은 발가벗겨질 수 있다는, 즉 부끄러워질 수 있다는 한에서만 인간이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스스로 부끄러워질 수 있다는 것을 안다”(5쪽)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부끄러움을 이기기 위해 옷을 입는 것은 사실상 발가벗겨진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자연 속의 동물과 문화 속의 인간의 역설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연 속에서 발가벗은 상태에 있는 동물에게 어떠한 발가벗음도 없다는 역설은 문화 속에서 발가벗지 않은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옷을 입고 있는 인간은 역설적으로 발가벗고 있는 상태라는 역설 말이다.

발가벗음의 역설은 곧바로 발가벗음의 양가성을 생산한다. 이 양가성은 로고스 중심주의, 인간 중심주의의 경계를 해체하고자 한다. 데리다는 다음과 같은 상태에 대한 철학적 존재의 성찰을 요구한다. 발가벗은 상태에 있는 인간, 그리고 그 인간을 바라보는 동물이라는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시선의 주체가 동물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한 동물이 발가벗은 나를 바라본다”(6쪽), “내가 고양이와 놀 때, 내가 고양이에게 시간을 내주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가 내게 시간을 내주는 것인지 누가 알랴”(7쪽)라는 지적은 시선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주체의 시선의 전환은 인간의 시선이 동물의 응시를 통해 새로운 관계를 생성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데, 데리다는 이 관계의 생성을 “따름과 뒤에 있음”이라는 양가적 언어로 설명하고자 한다. 사실 따름과 뒤에 있음은 같은 말이지만, 주체의 시선에 따라 양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름”은 앞선 주체에 이끌리는 것을 말하며, “뒤에 있음”은 앞선 주체의 조건 혹은 전제의 상태를 말한다. “따름”과 “뒤에 있음”은 마치 인간과 동물의 시선, 혹은 인간과 동물의 관계의 시공간적 위상을 알게 해 주는 양가적 표현이다.

데리다는 결론적으로 발가벗은 인간이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듯이, 고양이가 자신을 바라볼 때, 그 고양이가 “그 눈 깊은 곳에서, 나의 첫 번째 거울일 수는 없는 걸까”(51쪽)하는 질문을 던진다. 이는 어떤 로고스적 언어도 불필요한, 응시하는 동물의 눈에 투영된 인간 존재의 깊은 성찰을 질문하는 것과 같다. 인간의 거울과도 같은 동물의 응시에서 인간의 발가벗음의 역설과 양가성의 순간을 포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글·이동연

중앙대학교 영문학 박사. 계간 <문화/과학> 편집인. 저서에 <문화자본의 시대>, <대안문화의 형성>, <아시아문화연구를 상상하기>, <문화부족의 사회> 등이 있다.

 

(1) Giorgio Agamben, The Open: Man and Animal,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2, 1. 이하 인용은 본문에서 쪽수 표시

(2) Marie-Louise Mallet, "Forward" in The Animal That Therefore I Am (by Jacques Derrida and translated by David Wills), Fordham University Press, 2008, 참고. 이 글에서 인용된 한국어 번역은 <문화/과학> 76호에 실린 데리다의 글(최성희/문성원 역)을 참고했음

(3) Jacques Derrida, The Animal That Therefore I Am, translated by David Wills, Fordham University Press, 2008, 13. 이하 인용은 쪽수 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