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년, 세상을 뒤엎은 혁명의 순간들

[기획/혁명은 왜 일어나는가]

2009-05-05     로랑 보넬리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1902년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썼다. 여기에서 레닌은 ‘혁명적 행위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 즉 선동가와 조직가, 전문적인 선전자로 주로 이루어진 조직이 없이는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볼셰비키는 주저 없이 이 형식을 받아들였고, 그 후로 다른 이데올로기 집단을 비롯해 많은 혁명 조직이 레닌의 모델을 따랐다. 얀 팔틴, 막스 횔츠 등 전투적인 조직이 파업이나 폭동의 최전선에서만이 아니라 사상의 전파와 전개에서도 주된 활약을 하면서, 이 조직들은 진보주의자의 머릿속에서 반드시 본받을 표본이 됐다.(1)

 이 소수의 전투적인 조직들에 정치경찰도 관심을 가질 정도였다. 이 조직들은 끊임없이 서로 협조체제를 강화하며 사회적 동원 이외에도 다른 목적을 추구할 국제조직을 결성하는 은밀한 방법을 모색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국제주의가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주의보다 앞섰다.
 이 둘의 목표는 실질적으로 모든 면에서 다르지만, 각자가 추구하는 혁명의 역동성이 일부 주동자의 의식적이고 계획적이며 조직화한 행동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일맥상통하는 셈이다.
 
 레닌 이론 맞지 않는 프랑스혁명
 그러나 이런 분석의 문제점은 프랑스혁명에서는 잘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티머시 타킷처럼,(2) 1789년 삼부회에 소집된 세 계급, 즉 성직자, 귀족, 평민 출신 위원들을 분석해보면 폭동의 상습범이라고 의심할 만한 사람을 찾기 힘들다. 오히려 왕족, 공작, 후작, 백작, 남작, 대주교, 주교, 사법관, 변호사, 의사, 대학 교수, 은행가 등 프랑스 왕국에서 가장 존경받는다고 여겨질 만한 사람들이 모였다. 평민 대표였던 100여 명과 교구 신부였던 일부 성직자를 제외하면, 베르사유에 모인 1천 명의 대표 중 압도적 다수가 구체제에서 가장 혜택을 누리던 부류에 속했다.
 그러나 몇 주 후에 그들은 군주제의 근간을 뒤엎어버렸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입법의회 의원이던 말루에 남작은 1789년에 끝난 사건에 다시 놀라며 “계획이나 특별한 목적도 없이 의도와 습성과 이해관계에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같은 길을 추구하며 체제의 완전한 전복을 위해 손잡았는지 알 수 없다”라고 말했다.(3)
 이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알베르 소불이나 미셸 보벨과 같은 역사학자들은 재정 위기를 맞은 구체제에서 경제적인 부르주아 계급과 땅을 가진 귀족 간의 반목에 주목했다. 부르주아 계급은 군주제의 끝없이 늘어가는 부채를 실질적으로 감당했지만, 태생적 혜택 덕분에 귀족이 독점하던 정치권력에 접근할 수 없었다.
 근본적으로 이런 분석은 삼부회 대표들이 혁명가로 돌변한 전반적인 맥락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면이 있다. 또 이 대표들이 스스로 잘 알고 있던 정치적·제도적인 세계를 뒤바꿔야겠다고 집단적으로 합의한 맥락도 깊이 분석하지 않았다.

 프랑스혁명은 갑자기 진행돼 누구도 혁명을 완전히 주도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프랑스혁명은 먼저 평민의 단합으로 시작됐고, 얄궂게도 성직자와 귀족의 태도가 평민의 단합을 부추겼다. 평민 대표들과 자리를 함께하는 걸 거부하며 그들이 따로 모임을 가지라고 고집을 부림으로써 특권 계급들이 평민들을 단합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한 셈이었다. 가장 보수적인 파벌이 주도하던 귀족들의 비타협적인 태도는 평민들에게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귀족들의 거만한 태도와 경멸에 온건한 평민까지 분노했다. 그래서 평민들은 두 계급의 대표들을 배제한 채 단독으로 행동하기로 결정하고 6월 17일에 ‘국민의회’를 구성했다.

 국민의회는 기본 강령에서 세금 징수를 완전히 통제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 혁명적인 대책에 곧바로 왕이 반발하고 나섰다. 왕은 국민의회를 해체하겠다고 발표하고, 회의실을 군인들로 포위했다. 그러나 대결 구도는 이미 맞물려 들어가고 있었다. 국민의회 대표들은 새롭게 맡은 역할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회의에 참석한 베르사유와 파리 시민 수백 명의 열렬한 지지에 용기를 얻어 그들을 해산시키거나 체포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중대한 범죄자’가 될 거라고 선언했다. 이 대담한 집단행동에 단결이 가속화하며, 상당수의 성직자와 47명의 귀족이 국민의회에 참여했다. 그러자 왕은 태도를 돌변해서, 성직자와 귀족 전원에게 삼부회에 참여하라고 명령했다. 따라서 세 계급의 대표들이 여러 위원회에서 함께 일하기 시작하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서로에게 가졌던 반감을 줄여갔다.
 
 ‘국민회의’, 무질서 바로잡아
 베르사유에서는 세 계급의 관계가 천천히 화해 분위기로 접어들었지만 전국의 상황은 점점 흉흉하게 변해갔다. 7월 12일 파리에서 민중의 폭동이 일어났다. 바스티유가 14일에 함락됐고, 약식 처형까지 빈발했다(파리 시장과 그의 사위가 식량배급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죄로 처형당했다). 약탈과 소요 사태가 지방까지 확대되면서 ‘대공포’가 시작됐다. 왕정은 붕괴 직전에 이른 듯했다. 여하튼 소요 사태를 진정시키지 못했다. 나날이 악화되는 상황에 불안하고 겁먹은 국민의회 대표들은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한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1789년 8월 4일 역사적인 회의가 시작되며 법과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칙령의 검토에 들어갔다.

 토론이 진행되던 중에 귀족의 두 대표 노아유 자작과 에귀용 공작이 시위자들의 불평을 받아들여, 귀족의 권리를 포기하고 소득에 비례하는 세금 징수를 제안하며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그러자 왕족 출신이며 7월 중순 파리의 소요 사태를 진압한 군사령관으로 비타협적인 인물로 여겨지던 샤틀레 공작이 발언권을 얻어, ‘정당한 보상’을 받는 조건으로 토지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그 발언에 찬사가 쏟아지자, 대표들이 한 사람씩 나와 선물을 내놓았다. 무료 변론제도의 도입, 성직자의 사례권 폐지, 사냥할 권리, 간접세와 어음의 개혁, 일부 지방에 할애한 특권의 폐지…, 새벽 2시쯤이 되자 더는 내놓을 것이 없었다. 이상주의와 불안감과 우정이 하나로 융합되면서 모든 계급의 대표가 하나가 되었다. 그 밤늦은 시간에 펠르랭 대표는 자신의 일기장에 “후세는 국민의회가 5시간 만에 해낸 일을 믿지 못할 것이다. 국민의회는 900년간 존재했고 한 세기의 철학이 싸웠지만 없애지 못한 악습을 단숨에 없애버렸다”고 썼다.(4)
 물론 그 후에는 많은 다툼이 있었다. 성직자 재산의 국유화를 토론할 때, 1790년 6월 19일 국민의회가 투표로 세습 귀족을 철폐했을 때도 반대가 많았다. 그 결과로 많은 귀족이 혁명 세력에 저항하던 망명 귀족의 군대에 가담했다. 그러나 1789년 8월 4일 밤은, 위기 상황을 맞아 국민의회의 고유한 역동적 기운에 힘입어 대표들이 몇 주 전에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던 혁명적인 견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실례였다.

글/로랑 보넬리 Laurent Bonelli

번역/ 김주헌

<각주>

) 얀 팔틴의 자서전 <조국도 없고 국경도 없던>(Sans patrie ni frontieres), 1999. 막스 횔츠에 대해서는 파코 이냐시오 타이보 2세(Paco Ignacio Taibo II), <대천사: 가능한 혁명이 없는 혁명가들의 12가지 이야기>(Archanges: Douze histoires de revolutionnaires sans revolution), 2001 참조.
(2) 티머시 타킷, <민중의 의지로: 1789년의 대표들은 어떻게 혁명가가 되었나>(Par la volonte du peuple: Comment les deputes de 1789 sont devenus revolutionnaires), 1997.
(3) 앞의 책, 113쪽.
(4) 앞의 책, 1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