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 북침 주장 철회, "멀리서 불난 집 쳐다본 탓"

2014-07-02     변광배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서명으로 한국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어언 61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그 원인에 대해 프랑스 지식인들은 이념적 지형에 따라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프랑스 공산당의 해석을 수용하여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지난 6월 21일 고려대에서 열린 국제비교한국학회에서 변광배 한국외국어대 외래교수는 이와 관련하여 <사르트르와 한국전쟁> 논문을 발표하였다. 본지는 이를 요약하여 게재한다. <편집자>

1950년 한국동란이 발발했을 때 프랑스는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정부 차원에서는 미국과 영국 등과 협력해 유엔 다국적군 구성을 위한 주도권을 행사하면서 한반도의 평화를 재정립하는 데 기여를 했다. 프랑스는 총 3,461명의 군인을 파견했으며, 그중 사망자는 287명, 포로는 12명, 실종자는 7명, 부상자는 1,008명에 달했다.

이 전쟁은 분명 프랑스 지식인들에게 불과 5년 전에 끝난 2차 세계대전의 악몽을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거기에 이 전쟁이 냉전시대로 접어든 이후 발생한 가장 ‘중요한’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1) 프랑스인들이 이 전쟁이 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지 않을까 우려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참여지식인의 한 명으로서 사르트르는 한국전쟁에 대한 논의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편에서 남한이 38도선을 넘어 북한을 먼저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과연 한국전쟁에 대한 사르트르의 이와 같은 해석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가? 과연 한국전쟁에 대한 그의 해석에 오류는 없는가? 그는 후일 자신의 해석을 수정했는가?

프랑스 공산당의 해석을 수용한 사르트르

우선 1945년 해방 이후 프랑스 지식인들의 지형도를 그려본다. 당시 프랑스 지식인들은 크게 네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편에는 대부분의 페탱주의자들이 집결한 극우 진영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가로디, 카나파, 르페브르, 바이앙, 아라공, 엘뤼아르, 드장티 등이 가입한 공산주의자들 진영이었다. 그리고 이 두 진영 사이에 레이몽 아롱이 포진되어 있는 자유주의자들 진영, 사르트르와 시몬느 보부아르, 메를로퐁티 등이 포진되어 있는 온건좌파 진영이 있었다. 이 네 진영 중 한국전쟁과 관련해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페탱주의자들에 의해 구성된 극우 진영을 제외한 나머지 세 진영이다. 그리고 온건좌파 진영에 속한 지식인들은 한국전쟁에 대한 프랑스 공산당(PCF)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아롱은 자기가 근무하고 있던 우파 대변지 <르 피가로>의 지면을 통해 많은 기사를 썼다. 그는 우선 이 전쟁을 “멀리서 발생한 부차적인 중요성을 가진 전쟁”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그는 이 전쟁을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발생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판단하면서 추이를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2) 그는 이 신문에 기고한 한국전쟁에 대한 첫 기사에서 북한을 전쟁의 책임자로 지목했다. 아울러 그는 소련이나 중국도 이 전쟁과 무관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왜냐하면 이 전쟁은 스탈린과 마오쩌둥 사이의 회담에서 “공동으로” 구상되고 결정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후일 아롱은 약간 시차를 두고 이 기사에 대해 약간의 수정을 가하게 된다. 우선 아롱은 1973년에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과 이 전쟁은 “모스크바의 동의를 얻어, 그게 아니면 모스크바의 주도”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한국전쟁에 대한 자유주의자들 진영의 견해는 해방 이후 프랑스 사회에서는 소수 의견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한다. 이 진영에 속했던 아롱은 프랑스 지식인들로부터 고립되어 있었고, 그 결과 그의 견해는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에 대한 그 당시 프랑스 지식인들의 견해 가운데 아롱의 것은 아주 합리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지식인들 내부에서 이처럼 소수에 해당되었던 자유주의자들의 견해에 맞서 해방 이후 프랑스에서 다수에 해당되었던 견해는 좌파 지식인들이었다. 좌파의 견해 속에는 당연히 프랑스 공산당의 견해가 포함되어 있다. 프랑스 공산당은 한국전쟁에 대해 남한이 먼저 38도선을 넘었다는 북침설을 주장했다.

그런데 사르트르는 1950년경 프랑스 공산당과 아주 가까웠다. 물론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면서, 그리고 해방 직후에 프랑스 공산당은 그를 신랄하게 비난하기도 했지만 한국전쟁 때부터 사르트르는 친 프랑스 공산당 지식인으로 변신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사르트르와 프랑스 공산당의 밀월관계는 1956년 소련이 헝가리 사태에 개입할 때까지 계속 이어지게 된다.

한국전쟁의 해석에서 사르트르가 <현대(Les Temps modernes)>지 진영과 함께 프랑스 공산당의 해석을 추종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그 당시 <현대>지의 정치 분야를 담당하고 있던 메를로퐁티는 한국전쟁을 기회로 점차 프랑스 공산당, 소련과 멀어지게 된다. 메를로퐁티에게 있어서 한국전쟁은 철의 장막 뒤에 가려져 있던 소련의 정치적 정체성을 알아차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우선 소련의 혁명적 목표를 부정하게 된다. 그는 한국전쟁을 통해 소련의 제국주의적 야망, 곧 약탈과 억압 체제의 특징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고 보았다. 요컨대 메를로퐁티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소련의 죄를 폭로하면서 “반(反)공산주의자(anticommuniste)”로 개종을 하였다.(3) 한국전쟁을 계기로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는 각각 ‘역방향으로’ 상대방의 지적 여정을 걸어가면서 점차 이념적으로 갈라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메를로퐁티는 이렇게 해서 한국전쟁에 대한 프랑스 공산당의 해석을 포기하게 된 반면, 사르트르는 이 해석을 더 적극적으로 따르게 된다. 하지만 사르트르 역시 북한군이 38도선을 먼저 넘었다는 사실에 곤혹스러워 했으며, 또한 공산당 기관지에서 이 사실을 부정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곤혹스러워 했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프랑스 공산당의 견해를 따라 남한이 한국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했다고 주장하였다. 미국 신문인 <더 네이션(The Nation)>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 그는 한국전쟁에 대한 남한과 미국의 책임에 대해 암시하게 된다.(4) 하지만 그는 1961년 메를로퐁티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에 자신의 입장을 어느 정도 수정하였다.

정보 부족의 오류를 인정한 사르트르

‘살아 있는 메를로퐁티’라는 추도의 글에서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지적했다. 하나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 프랑스 지식인들에게는 이 전쟁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사르트르는 그 당시 남한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이름을 들어보았는지를 자문하고 있을 정도였다.(5) 요컨대 메를로퐁티와 더불어 “귀머거리들처럼” 더듬으면서,(6) 그리고 “불확실함 속에서” 헤매면서, 사르트르 자신은 “멀리서 불난 집을 쳐다보고 있었다”고 말했다.(7) 다른 하나는 사르트르가 한국전쟁에 대한 자신의 해석에 직접적으로 수정을 가한 점이다. 헝가리 사태가 발생한 1956년 이후로, 특히 메를로퐁티가 세상을 떠난 해인 1961년에 사르트르는 이미 소련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사르트르는 남한이 북한을 먼저 공격했다는 자신의 첫 번째 주장을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북한군이 국경을 먼저 넘어섰다면, 그것은 북한군이 남한과 미국이 쳐놓은 함정에 빠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르트르가 한국전쟁에 대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수정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수정 역시 여전히 진실과는 많이 동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이 점을 PCF의 해석에서도 볼 수 있다.

대체 사르트르가 한국전쟁의 해석에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그것이다. 한국과 러시아의 수교가 이루어진 1994년에 김영삼 대통령이 러시아를 공식 방문하게 된다. 그 기회에 당시 러시아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은 그때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548쪽에 달하는 한국전쟁 관련 비밀문서를 한국 정부에 전달하게 된다. 이 문서의 공개와 더불어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에 새로운 동력이 생기게 되었고, 특히 침략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한 연구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이 비밀문서에 따르면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허락을 받고 김일성이 발포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기밀분서에 입각해 이루어진 한국전쟁에 대한 한 연구를 프랑스에서도 볼 수 있다. 문제의 연구는 <사회 역사의 노트(Les Cahiers d'Histoire Sociale)>지에 실린 <소비에트와 한국전쟁 고문서(Les Archives soviétiques et la Guerre de Corée)>라는 글이다.(8)

스탈린은 김일성에 의해 준비된 남한에 대한 공격 결정을 지지했다. 북한군의 공격 날짜와 시간에 대해서도 결정했다.

작전에 필요한 모든 예비조치는 6월 24일에 준비될 것이오. 각 부대의 지휘관들은 6월 24일에 공격 날짜와 시간을 하달 받게 될 것이오. 국방장관의 명령이 군인들에게 낭독될 것이오. 그 내용은 남한군이 38도선을 넘어서는 공격을 감행하고 도발했다는 점과 인민민주공화국 정부는 인민군에게 반격을 할 것을 명령한다는 내용이오. (…) 전군은 6월 24일 자정에 출발할 것이오. 군사작전은 한국시간 4시 40분에 시작될 것이오.(9)

옛 소련의 비밀문서를 통해 사르트르가 한국전쟁의 해석에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란 문제에 대해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사르트르는 프랑스 공산당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한국전쟁에서 남한이 북한을 먼저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옛 소련의 비밀문서에 따르면 분명 이 전쟁의 발발 주체는 북한이라는 것이 명백하다. 둘째, 사르트르는 북한이 남한과 미국이 쳐놓은 덫에 걸려들었다고 주장했는데, 옛 소련의 비밀문서에 의하면 북한의 역습 전략은 북한군에 의해 구상된 위장 전술이었다는 점이다. 이 증거들은 프랑스 공산당과 프랑스 좌파지식인들의 한국전쟁에 대한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이기도 하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잘 지적한 것처럼, 지식인들은 “성인들(des saints)”이 아니다. 그들 각자는 실수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지식인이라는 신분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보다 역사적 사실에 더 충실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확히 그들은 “인간의 자유와 권리의 변호사(들)이고, 또한 그들의 사명은 “국가의 정의, 진실, 선함, 공간의 중개자이기 때문이다.(10) 결국 우리로 하여금 한국전쟁에 관한 한 “실수하는 권리(droit à l'erreur)”를 남용해서는 안 된다. 불행하게도 사르트르는 이 경우에 해당했다.(11)

글·변광배

프랑스 인문학연구모임 ‘시지프’ 대표

 

(1) Cf. Claude Delmas, Corée 1950 : Paroxysme de la guerre froide, Éds. Complexe, 1982, p.154

(2) Raymond Aron, <<Epreuve de force>>, Le Figaro, 27 juin 1950; repris in Ibid., p.435

(3) Jean-Paul Sartre, <<Merleau-Ponty vivant>>, Situations, IV, Gallimard, 1964, p.249

(4) Jean-Paul Sartre, <<The Chances of Peace>>, extraits d'une longue lettre-article adressée aux Américains, The Nation, 30 décembre 1950; repris in Les Écrits de Sartre, p.229)

(5) Jean-Paul Sartre, <<Merleau-Ponty vivant>>, dans Op. cit., p.238

(6) Ibid., p. 231

(7) Ibid., p. 240

(8) Pierre Rigoulot et Llios Yannakakis, <<Les Archives soviétiques et la Guerre de Corée>>, Les Chaiers d'Histoire Sociale, (Spéciale Corée), no 7, automne-hiver 1996, Albin Michel, pp.39-54

(9) Ibid., p.51

(10) Bernard-Henri Lévy, Les Aventures de la liberté : Une histoire subjective des intellectuels, Grasset, 1991, p.10

(11) Raymond Aron, Mémoires : 50 ans de réflexions politiques, p.7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