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들뢰즈 인 아시아' 국제학술대회 참관기

학문의 장벽을 초월해 접목된 들뢰즈의 사유

2014-07-02     최승현

 

아직도 들뢰즈인가? 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서구의 지적 전통인 경험론과 관념론의 사고의 기초 형태와 서구 근대이성을 재검토한 그는 현대 철학의 경계를 확장한 탁월한 철학자로, 오히려 해를 거듭할수록 연구자들의 조명을 받고 있다. 베르그송, 니체, 칸트, 프로이트, 스피노자, 헤겔을 넘나드는 그의 방대한 지식과 독창적인 철학적 사유가 현대 사회의 존재론적 질문에 어떤 실마리를 주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제2회 ‘들뢰즈 인 아시아’ 학술 대회가 지난 5월 30일에서 6월 9일까지 일본 오사카대에서 열렸다. 제1회 대회가 2008년 중국 하이난대에서 열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로 오랜만이다. 그만큼 아시아 지역에서 이 대회를 유치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방증한다. 다음 대회는 들뢰즈 서거 20주기인 내년, 인도 마니펄대에서 5월 29일에 개최될 예정이다.(이 대회의 홈페이지는 http://deleuze2015.manipal.edu/). 들뢰즈·가타리를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는 그간 유럽과 영미권을 중심으로 열려왔다. 올해로 10년을 넘긴 이 대회는 ‘들뢰즈 스터디즈’라는 국제학술지와 더불어 성장해왔다. 푸코와 마찬가지로 들뢰즈·가타리 또한 영미권 대학의 비교문학과를 통해 주로 소개되었으며, 이로 인해 푸코, 들뢰즈·가타리, 데리다를 비롯한 일군의 프랑스 사상가들에 대한 열기는 이들의 출신지인 프랑스보다 영·미권 학자들 사이에서 더 높다. 최근 어느 분야건 국제학술대회는 영어를 공용어로 삼는다. 이는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언어권 연구자들의 표현력을 심각하게 제한하고 있다. ‘들뢰즈 인 아시아’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즉, 한국을 비롯해 중국, 일본, 싱가포르, 대만 등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들뢰즈·가타리 관련 연구 성과를 점검해 보자는 것이다.

이번 대회의 주제는 ‘섬’이다. 일본은 섬나라답게 들뢰즈의 대담집 제목인 ‘Desert Island’를 차용하여 이 주제를 내걸었다. 이 대회가 아시아라는 지역명을 달고 있긴 하지만 <안티 오이디푸스 가이드북>(국내 번역본 출간 예정)의 이언 부캐넌, <들뢰즈와 예술>(이정하 역)의 얀 소냐바르그 등 국제적 학자들도 다수 참가하였다.(이언 부캐넌은 내년 인도에서 열리는 대회에서도 대회 어드바이저 역할을 할 예정이다.) 한국의 학자로는 <천개의 고원> 번역자인 김재인 교수 등 6명이 참석하였다. 필자 또한 한국의 혁신학교 정책과 들뢰즈·가타리의 배움론을 중심으로 발표자로서 참가하였다.

들뢰즈·가타리의 기계론과 로봇공학

방대한 저작을 남긴 들뢰즈·가타리의 영향으로, 이번 학술 발표는 철학, 공학, 수학, 예술론, 사회과학 가릴 것 없이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발표자만 50~60명을 헤아렸고 청중은 몇 배 더 많았다. 흥미로운 발표로는 먼저 로봇공학과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를 엮은 연구를 들 수 있다. 케어로봇이 말기 암환자를 위해 시를 낭송해 준다거나, 그의 얼굴 표정을 공학적으로 감지하여 공감해 주는 등의 역할을 한다. 이런 사례가 들뢰즈·가타리의 기계론과 함께 논의된다. 예술 분야에서는 선가(仙家)의 난장판과도 같은 작업실이 들뢰즈·가타리의 매끈한 공간과 더불어 논의된다. 공학에서는 로봇 청소기에 올라탄 고양이에 대해 청소기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따위의 물음을 던진다. 고양이는 쓰레기인가 아닌가가 로봇 청소기의 고민거리이다. 고양이의 움직임은 청소로봇이 볼 때에는 패턴화되지 않은 움직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와세다대학교의 군지 페기오-유키 교수는 이런 일상적 현상들을 수학·공학적으로 모델화함으로써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기반한 연구논리를 개발하고자 힘쓰고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잠재성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한 논의는 친연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학에서는 메이지기 당시 도쿄의 천황궁 주변이 일반 대중들에게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새롭게 공론장으로 활용될 가능성을 모색한다.

일본을 처음 여행하거나, 이 나라의 장점에 대해 말하는 이들은 첫인상에 대해 호평한다. 어디가나 친절한 음식점, 카페, 관광지와 깨끗하게 정돈된 도시를 다니다 보면 팍팍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어느 프랑스 학자는 이런 일본인들의 태도 이면에 담긴 맹목적 애국주의를 꼬집기도 했다. 필자는 이번 대회의 주제인 ‘섬’과 관련하여 이에 관해 더 말해보고 싶다.

우선 지도를 보자. 일본 열도가 거꾸로 누워 있다. 우리가 흔히 보던 모습과 사뭇 다르다. 열도의 북쪽 홋카이도는 사할린과 맞닿아 있고 남쪽 쓰시마 섬은 한반도와 매우 가깝다. 일본의 우익들이 싫어하는 진보적 역사학자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 1928~2004)가 <일본이란 무엇인가>(박훈 역, 2003)에서 제시한 지도로, 일본이 단일 국가가 아님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19세기까지도 북쪽 섬 홋카이도와 최남단 섬 오키나와는 실질적인 일본의 영토가 아니었다. 즉, 그 지역 사람들이 자치적으로 관할하던 지역이었다. 한반도와 가까운 일본 서부, 즉 나가사키 짬뽕으로 유명한 나가사키 등지는 본래 죠몬인, 즉 대만 계통의 사람들이 유입된 곳이다. 그래서인지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앞두고 영국, 중국 등에 문호를 개방한 곳도 바로 이 곳이다.

2010년 NHK에서 9개월에 걸쳐 방영된 <료마전>이라는 대하드라마는 메이지기의 역사적 전환을 다루고 있다. 일본은 오백 년이 넘도록 사무라이들이 지배하던 사회였지만 역설적이게도 지방 사무라이들의 반란으로 중앙의 막부체제가 무너졌다. 바로 이들 초슈, 토사 지역 등의 사무라이들은 지방에서 자신들의 지배권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중앙의 막부가 외국과 비굴하게 통상에 응하자 이를 무력으로 막아선 것이다. 이 새로운 시대를 연 대표자가 바로 고액권인 1만 엔 지폐 속에 새겨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이다. 그는 근대국가 ‘일본’을 제창했다. 그를 비롯한 일본의 개화론자들은 <료마전>에서 생생하게 묘사된 해군을 기르고자 했다. 그것은 미국의 흑선을 보고 난 뒤의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바다를 잘 지킨다면 교토와 동경을 중심으로 한 혼슈 섬(일본 네 개의 섬 중 가장 큰 섬)을 지킬 수 있다’, ‘바다는 대륙의 장벽이 되는 셈이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미노 요시히코는 근대 국가 건설과 맞물린 이런 육지 중심의 사관이 일본의 우편향을 낳았다고 비판한다. 즉, 앞의 지도와 같이 일본의 지정학적 특성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년 고도 교토를 중심으로 한 육지 중심의 인식에서 벗어나 보면,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일본이 보인다. 신기하게도 이 열도는 위로는 알래스카로, 아래로는 필리핀을 거쳐 호주로까지 장대한 규모의 다도해를 이루고 있다. 이 바다를 벗 삼아 살아간 열도 민중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과 관계를 맺은 수많은 유목민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리좀적인 것’

역사는 광활한 바다를 건너는 정복 전쟁이 무모한 것임을 알려준 바 있다. 11세기 원나라는 일본을 침입하려 했지만 거센 파도로 인해 전멸하여 열도를 구경조차 못했고, 반대로 16세기 일본의 조선 침략은 결국 바다라는 환경에 따른 군량미 부족 등으로 실패했다. 현대에 들어와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은 놀랍게도 호주 근처의 과달카날 섬까지 정복하였다. 당시 조선과 마찬가지로 섬에 살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로 인해 고통을 당했음은 불을 보듯 뻔하다. 수렵·목축에서 농경을 거쳐 공업에 이른다는 이른바 ‘발전사관’은 남성이 주도하는 육지 중심의 사관으로서, 이 역사관은 다른 나라보다 발전하지 않으면 청나라처럼 영국의 주구(走狗)가 된다는 두려움을 낳아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제 지도를 거꾸로 보자. 수많은 섬들이 러시아 대륙과 알래스카, 한반도, 필리핀, 대만 등지를 잇고 있다.

이번 대회에서 기조 강연을 한 오사카대의 다츠야 히가키(檜垣立哉) 교수는 아미노 요시히코의 생각과 들뢰즈·가타리의 유사성에 착목하여 ‘천의 고원으로서의 일본’이라는 주제의 글을 발표했다. “아미노에 따르면 국가 바깥에 떠있는 이러한 변방의 존재는 노마드적인 것으로서 국가의 실존을 위한 필수적 조건이다. 이 해양의 노마드적 공간은 제국의 관할이 미치지 않는 섬주민의 노마드이다.”(1) 대륙의 아류도, 고립된 섬도 아닌 노마드적 공간을 잇는 일본 열도. 그 곳은 본래 대만, 조선, 사할린 그리고 멀리는 알래스카로 이어지는 광활하고 ‘매끈한 공간’이었다. 정복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바다, 그리고 그것을 생업으로 살던 사람들의 역사와 그들 간의 교류에 귀 기울여야만 일본의 ‘리좀적인 것’(리좀은 줄기가 뿌리와 비슷하게 땅속으로 뻗어 나가는 땅속줄기 식물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가 내재적이면서도 배척적이지 않은 관계들의 모델로서 사용-편주)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99년 8월 9일 일본 국회는 문부성의 <학습지도요령>에 국기인 히노마루와 국가인 기미가요를 넣어 학생들에게 가르칠 것을 결의했다. 즉, 애국심을 가르치자는 것이다. 일례로, 교육 분야에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왔다. 일본과 한국에만 있는 비밀주의적 근무평정제도(이 제도는 학교장이 교사의 근무성적을 일방적으로 평가하고 그 근거에 대해서는 공개하지 않는다), 일본 문부성의 ‘기대되는 인간상’과 한국 박정희 정권 시절 만들어진 ‘국민교육헌장’ 간의 유사성, 서구의 이론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양국의 대학진학열 등이 그것들이다. 필자는 다츠야 교수의 기조강연에서 이런 역사적 문제에 대한 인문학적 혜안을 읽을 수 있었다.

 

글· 최승현

고려대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관심분야는 들뢰즈·가타리의 교육철학과 기술철학, 한국 교육과 일본 교육의 영향 관계이다. 현재 들뢰즈 연구자인 영국의 키스-안셀 피어슨이 쓴 과학철학서 <니체와 탈인간의 조건>(한국어판 가제, 원제는 Viroid Life, 1997)을 번역 중이다.

 

(1) Tatsuya Higaki(2014), Japan as Thousand Plateaus, Deleuze in Asia 2nd International Conference in Osaka University, pp.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