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 카뮈의 투쟁
<콩바. 사설과 기사 1944~1947> 알베르 카뮈
파리에서 저항운동의 유력지 <콩바(Combat)>가 1941년에 비밀리에 탄생했다. 1930년대 말에 <알제르 레퓌블리캥>을 창간해 알베르 카뮈에게 기고를 부탁했던 박학다식한 파스칼 피아는 1943년에 다시 한 번 카뮈에게 글을 의뢰했다. <콩바>의 첫 호가 발행된 1944년 8월 21일부터 1947년 6월 3일까지 피아는 <콩바>를 이끌어 갔다. 카뮈는 편집장을 맡았다.
카뮈가 쓴 글들은 레지스탕스를 역사적 시기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프랑스의 새로운 힘, 즉 유일하고 정당한 힘을 만드는 신화로 바라봤다. 하지만 레지스탕스 활동에 각계 각지의 애국자들이 모여 들었다. 이들은 세계 2차 대전에서 공동의 적인 독일 나치에 맞서기 위해 이견은 잠시 묻어 두었다. 하지만 파리가 해방되고 전쟁이 끝나기 전, 이데올로기 방향에 대한 이견이 전면에 불거졌고 어제의 동료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카뮈는 이 모든 갈등을 레지스탕스라는 개념 속에 무너뜨리려는 듯하다.
전반적으로 카뮈는 민주주의를 이데올로기의 갈등에서 벗어나게 해 민주주의에 하나의 논리적인 장점, 즉, 사회민주주의의 장점이라는 옷을 입히려고 했다. 카뮈와 <콩바>는 공산주의와 파시즘 같은 전체주의에 맞서며 사회민주주의를 선택했다. 또한 카뮈와 <콩바>는 특정 정당에 치우치지 않으려는 결심을 했다. 정치색보다는 윤리를 중시하기 때문이었다.
카뮈는 작가로서의 직업에도 같은 선택을 했다. 자유주의 경제는 모든 이들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개선될 수 있고 나아가 혁명적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카뮈는 알제리의 독립에 반대하면서 식민지배 제도가 민주적이고 평등한 새로운 알제리를 탄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카뮈는 냉전 시기 동안 유럽의 지식인과 예술가들 사이에 불었던 소련의 영향과 맞서기 위해 정보국이 창설하고 지원하는 문화자유 회의(1950~1967)에 가입했으며 <자유로운 인간 선언>에 서명했다. 실제로 문화자유 회의가 추구하는 목표는 전체주의 위협에 대한 윤리적, 정치적 해답을 찾는 일이었고 여기에 우파 인사들과 스탈린 체제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다. 카뮈는 기사를 쓰면서 ‘에너지’, ‘진실’, ‘씩씩함’, ‘미덕’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모두 정치적인 술수에 놀아나지 않고 정당함을 지킬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표현들이다.
이브 마크 아주샹봄은 <콩바>의 탄생에서 1974년 몰락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조명하며 <콩바>의 카뮈가 추구하는 방향을 소개하지만 프랑스 공산당이 레지스탕스 운동에서 결정적으로 기여한 중요한 공로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자클린 레비 발랑시는 <콩바>에 실린 카뮈의 기사들을 소개하면서 카뮈에게 통찰력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지만 객관적인 분석은 아니다. 두 책 모두 흥미로운 내용을 싣고 있지만 이 같은 한계가 보여 안타깝다.
차라리 카뮈와 19세 청년이 주고받은 서신을 담은 <참여하다?>를 읽는 편이 낫다. 이 19세의 청년은 훗날 <한국 사람들>(1956), <이피제니 호텔>(1958)을 발표하는 희곡작가 미셸 비나베르다. <참여하다?>를 읽으면 카뮈의 입장에 대해 매우 정확한 비판과 만나게 된다.
글·마리 노엘 리오 Marie-Noël Rio
영화·드라마 편집자
번역·이주영 ombre2@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번역서로는 <이렇게 될 줄 몰랐어>(2014) 등이 있다.
(1) Albert Camus, <콩바. 사설과 기사 1944-1947(Combat. Editoriaux et articles 1944~1947)>, Gallimard, 파리, 2013년
(2) Yves Marc Ajchenbaum, <콩바(Combat)>, Gallimard, 파리, 2013년
(3) Albert Camus, Michel Vinaver, <참여하다?(S’engager?)>, L’Arche, 파리, 201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