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산층은 혁명을 할 수 있을까?

[기획/혁명은 왜 일어나는가]

2009-05-05     장루이 로카 | 사회학자

                   지배층에 그들의 가치로 맞서는 ‘순응 세력’
                   항의와 분노 늘겠지만 ‘혁명’이 되긴 어려워


  모두 중국의 중산층이 형성되길 바라는 것 같다. 서방 언론은 중국에서 중산층이 형성되면 곧 민주적인 시민사회가 등장하고, 새로운 시장이 만들어질 것으로 본다. 중국인들은 현대화와 개인적 성취와도 동일시되는 바로 그 중산층에 자기 자신도 속하고 싶어한다. 중국의 지식인들과 언론들은 중산층의 형성이 정치적으로 국민 의식을 높여줄 수 있다고 여기는가 하면, 중국 정부는 중산층의 형성을 사회 안정과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중산층이라는 사회적 계층은 1990년대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의 학력도 있으며 도시에 거주하는 이 계층은 크게 불편함이 없는 이른바 ‘샤오캉’(小康)의 위치에 올랐다고 볼 수 있다. 덩샤오핑도 중국인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표를 설정할 때 내세운 용어이기도 한 샤오캉은 풍족한 소비사회의 이점을 누릴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미 사회주의 중국에서도 도시에 거주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집 한 채와 자동차를 소유하고, 식당에 가서 외식하는 것과 휴가철 바캉스를 원한다.
 

                                                        <무제>, 1996-팡 리준 

‘샤오캉’, 중국이 지향하는 삶의 수준
 실제로 이런 삶을 누리는 이들의 수는 얼마나 되는가? 기준에 따라서 그 편차는 크다. 만일 수입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거나 여기에 현금으로 받은 프리미엄이나 커미션, 불법 노동과 같은 비공식적인 수입을 더하면 3억에서 3억5천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물론 이 수치에는 대개 은행에 상당한 현금을 가지고 있고 비밀스런 생활양식을 고수하지만 외관상으로는 월급이 박한 공무원이나 학력은 보잘것없고 지방 권력에 의존적인 소기업이나 부유한 자영업자, 도회지에 사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기도 하는 부유해진 농부나 이주민들, 선생, 의사, 대기업 사원들, 엔지니어들은 빠져 있다. 만일 샤오캉의 기준에 교육 수준이나 생활양식 또는 정치적 성향도 고려한다면, 그 수치는 줄어들어 불과 몇천만 명 정도가 될 것이다.

 이런 샤오캉이란 계층의 출현과 더불어 이 계층을 앞으로 중국이 지향해야 할 하나의 이상적 사회계층으로 간주하는 주장들이 넘친다. 샤오캉 계층의 등장은 재능이나 노력, 교육 그리고 진보하려는 꾸준한 욕망에 기인한 것으로 보고 있다. 까다롭지만 확실하고 합리적인 이들이 곧 가격이 비싼 고부가가치 제품의 소비자이다. 이들이 바로 향후 중국의 성장을 견인할 국내 수요의 기반을 닦으리라는 기대가 있다. 이들의 세련된 행동이나 매너는 문명화된 현대성의 상징과도 같은 ‘상표’로서, 사회적 신분 상승을 추구하는 인민 계층에게는 일종의 활력소 같은 구실을 할 것이다.

 외관상으로 중산층은 이런 이미지와 정확하게 부합한다. 이들이 바로 경제와 사회 전체의 윤리적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사회적 신분 상승에 빠르게 성공한 벼락부자와는 반대로, 이들은 성공하기 위해 뒷배경이나 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투명한 수입으로 살아가는 정직한 월급쟁이들이다. 이들의 눈에는 개인이 지닌 능력만으로는 부를 얻기 어렵기 때문에 부자라는 것은 의심스러운 존재일 뿐이다.
 
 소외 계층에겐 너무나 먼 ‘샤오캉’
 빈민층과 이주민에 대한 이들의 견해에는 신중함이 배어 있다. 이들은 국가가 빈민층을 돌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주민 노동자에 대해선 자신들과 일터를 공유하고 자기들과 마찬가지로 특권 계층의 희생자인 만큼, 모든 사회계층의 관심과 온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들의 온정주의는 우선 빈곤층을 두 유형으로 구분한다. 온정을 받아야 할 진짜 빈곤층인 노약자나 장애인 등이 있는가 하면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공공의 온정을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이주노동자들은 그 수가 많은데다 궁극적으로 중산계층을 살찌우는 데 기여하기 때문에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따른다. 이주노동자들이 이른바 ‘문명화한’ 게임을 받아들여야 하고, ‘진정한’ 도시인이 되려고 스스로 노력해 학식 있고 신사다워야 하며, 국가 공용어를 쓰고, 마땅한 노동과 소비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스스로 배우면서 중산계층에 편입되려는 능력과 의지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샤오캉의 범주에 새로운 사회계층을 편입하는 문제는 정치적인 의미를 띨 수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와는 반대로, ‘중산층’은 특권층이다. 중산층은 성공에 필요한 두 가지 열쇠라 할 수 있는 고등교육과 뒷배경을 독점한 까닭에 이 새로운 신분을 얻은 것이다. 만일 이주노동자들이 여기에 편입되면, 중산층의 이런 독점은 어떻게 될 것인가?
 미디어나 광고 분야 종사자나 첨단 기업, 예술계나 공연계의 사람들과 같은 소수파의 견해는 실용적이다. 참여 민주주의가 그들에게 과연 무엇을 가져다줄 것인가라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정직하고 경쟁적인 훌륭한 지도자들을 찾기 힘들다. 오히려 본업에 소홀하고 강력한 로비에 휘말려 권력을 남용하는 정치인들을 마주칠 위험이 더 크다. 참여 민주주의는 이미 인도나 미국의 예를 보더라도 사회 불평등에 대처할 만한 효율적인 힘을 더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요컨대 이미 19세기 말 유럽에서 제기된 똑같은 문제의식이 떠오른다. 민주주의는 좋은 것임이 분명하나 국민의 의식 수준이 개선됨에 따라 점진적으로 도입하는 게 좋다는 시각이다. 그렇다면 농민들이 ‘시민’(demos), 이른바 중산층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인가!
 
결집력 없이 발산되는 ‘분노’
?이렇게 볼 때 현재 진행 중인 정치 논쟁은 정치의 질을 논하려는 것이 아닌 듯하다. 언론은 중국의 정치 지도자들에게는 관대하다. 오히려 언론은 아직 제도화하지 않은 행정 체제로는 올바른 정책을 실행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법이 없는 것이 문제이지, 선거가 없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중산층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고, 또 자신들에게 비우호적인 공공 정책이나 사회계층들에 맞서려고, 폭력을 사용하는 걸 거부하면서 법이야말로 사회를 제도화하는 최상의 것이라고 여긴다. 가장 주된 주장 중 하나가 사회적 차원의 이익을 대변할 법적 통로를 마련해달라는 요구다. 소유권이나 환경권 같은 권리의 수호를 위한 중산계층의 투쟁은 장차 모두가 따르게 될 모델을 제시한다.
 분노감은 대부분의 운동에서 주요 동력으로 작용한다. 엉터리 법에 분노하고, 이런 법에 따르기를 거부하며, 개인적으로 경험한 불합리 탓에 분노를 터뜨리는 것이 그러한 예다. 그런데 이런 분노감은 집단적 항의로 이어지지 않는다. 중산층은 환경오염 사태를 알았거나 개발업자나 감독과 불화가 있다거나 혹은 단순하게 야간 경비와 심한 언쟁이 있다거나 하는 우연한 경험에서 자신들이 이러한 불공정을 피해갈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사건들은 체제 전반에 대한 신뢰의 상실로는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이들은 향후 사회적 규범을 마련하기 위한 법적·윤리적 원칙을 적용하는 데 도움이 된다.

 중산층의 요구 사항은 대개 권리의 존중이나 항의의 자유와 같은 보편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지극히 구체적이며 지역적인 사안에 관한 것이다. 오염을 발생시키는 공장을 폐쇄해달라든가, 마구잡이식 부동산 개발 사업을 불허해달라든가, 공용지 사용권의 남용을 막아달라든가 따위다. 이들의 주된 관심은 역시 경제 문제다. 흔히 주차장이나 가계는 임대가 되나, 지하층은 그렇지 못하다. 하지만 기업주는 이런 지하층을 양도받아 그곳에 노동자들을 거주하게 한다. 또한 돈을 내는 거주자에게만 접근이 허용된 운동기구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경우에도 역시 개인의 권리와 이익을 수호하는 것이 관건이다.
 권리와 이익의 수호를 위한 조처는 대개 이렇다. 먼저 청원을 하고, 모임을 결성하고, 공식적인 문건을 만들고, 이를 적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미디어에 호소하기도 하고 유력한 정치적 후원자를 찾아나서기도 한다. 또 당국에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 국제사회에 호소하기도 한다. 이런 행위의 목표는 결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이익을 공적·사회적으로 구현하려는 데 있다.
 
 경제위기에 ‘샤오캉’ 흔들려
 이러한 양상은 민주주의가 경제적 성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기존의 과도기적 이론과 전혀 맞지 않는다. 오히려 이는 서구의 중산층이 이미 경험한 것과 상당 부분 부합한다. “지배계층과 그들의 ‘가치’를 윤리적으로 수용한다”는 점은 “지배층이 내세운 원칙 자체를 바로 그 지배층에 대항해 사용하는, 선호 전략”을 이들이 선택한다는 데서 명백히 드러난다. 그래서 이들의 요구는 ‘개인의 존중’과 개인의 권리 존중, 특히 소유권의 보장에 집중된다. 또 파업과 시위보다는 교육, 정보와 결사, 곧 “같은 ‘명분’을 가진 이들끼리의 재결집”, 그리고 윤리적 촉구를 선호한다.

 위기가 이러한 흐름을 바꿀 것인가? 비록 한정돼 있지만 고용 위기의 충격은 상당하다. 2천만 명의 이주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다고 한다. 비록 아직 2억 명의 노동자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특히 젊은이들이 가장 먼저 타격을 받고 있다. 600만 명의 고학력 젊은이들이 직업을 찾지 못한 상태다. 이미 고용된 젊은이들의 고용 계약도 갱신되지 않고 있으며 다른 많은 이들이 직장을 유지하는 대가로 월급의 50% 내지는 70%의 삭감을 감수하고 있다. 말 그대로의 해고를 제한하려는 조처들이 취해지고 있다.
 지난 3월 소집된 전국인민대표자회의가 증명하듯이 고용을 위한 진정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당국은 사람들을 문밖으로 쫓아내지 말고 고학력 젊은이들을 경비로든 엔지니어로든 고용하라고 기업들한테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다. 지역 당국과 연합조직도 이주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는 것을 돕고 재정적으로 원조하기 위해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이 위기의 책임을 언제나 비판해 마지않던 야만적인 자본주의에 돌리고 있다. 비록 그들이 확실한 신념을 갖고서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베이징에서는 “몇 년 전에는 자본주의가 중국을 구했다. 이제는 중국이 자본주의를 구할 차례다”라는 농담이 유행하고 있다.
 국가적 보호가 요구되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명령에 충실한 사회집단이 어떻게 소강의 기반을 잠식할지 상상하기 힘들다. 물론 위기가 지속되거나 가중돼 생활 수준을 심각하게 악화시키지 않는다는 전제 내에서지만 말이다. 무질서는 최근에 획득한 모든 기득권을 문제시할 뿐만 아니라 ‘대약진 운동’, 문화혁명, 톈안먼 사건과 같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언론은 무질서에 대해서는 가혹하다. 그렇다 할지라도 사회적 항의가 계속되지 않을 이유를 찾기 힘들다. 또 사회적으로 합의된 가치와 현실의 괴리를 인식하는 정도에 맞춰서 항의가 더 심해지지 않을 이유도 찾기 어렵다.

이미 확인했듯이 여기에서는 항의가 혁명을 의미하진 않지만...

글/장루이 로카 Jean-Louis Rocca

사회학자이자 중국 칭화대학의 중·불연구소 소장이며, 프랑스 시앙스포 재단의 국제연구소 연구위원이다. 2008년 <사회학자가 본 중국사회>를 출판했다
번역/이진홍 memosia@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 주요 역·저서로 <진보와 그의 적들>(2003), <자살>(2004)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