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케티의 '과세' vs 마르크스의 '혁명'

‘자본’만 집중해 ‘노동’ 불평등을 놓쳤다.

2014-07-28     러셀 자코비

 미국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토마 피케티의 최근 저서 <21세기 자본론>은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제목을 따와 서구 국가들에서의 불평등 심화현상을 분석했지만, 두 사람의 인식은 다르다. 마크르스는 사회혁명이 세계를 바꿀 것을 희망한 반면에, 피케티는 자본에 대한 국제적 과세가 세계를 변혁시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토마스 피케티의 저서 <21세기의 자본>은 학계에 있어서나 지식인 사회에 있어서나 하나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앨런 블룸의 <미국 정신의 종말>(1)이 당대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 시대의 정신을 구체화해 보여준다. 미국 대학 내 여성과 젠더, 소수자에 관한 연구를 규탄한 <미국 정신의 종말>은 문화적 상대주의의 ‘초라함’을 -블룸의 생각으로는- 그리스 로마 고전과 연결된 ‘탁월함의 추구’와 대조한다. 이 책의 독자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책이 너무 현학적인 경향이 있었다) 미국 공교육 시스템, 더 나아가서는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진보주의자와 좌파 때문에 파괴되었다는 감정에 부채질을 했다. 이러한 감정은 전혀 힘을 잃지 않았는데, 저자인 피케티 본인이 좌파이며 대립의 무대가 교육에서 경제 분야로 옮겨왔다는 점만 제외하면 <21세기의 자본> 역시 이와 동일한 영역에 포함된다. 그러나 이제는 교육계 내부에서조차 불평등의 원인으로 여겨지는 경제적 문제와 장애물에 대해 논의가 상당 부분 집중되고 있다.

제목으로 <21세기의 불평등>이 더 어울려

이 책은 세계의 다른 모든 사회와 마찬가지로, 미국 사회가 점점 더 불공정해질 것이라는 명백한 불안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불평등이 심화되고 어두운 미래의 전조를 예고한다. 책 제목을 <21세기의 자본>이 아니라 <21세기의 불평등>이라고 지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피케티 본인이 목표했던 것을 이루지 못했다며 그의 실패를 비난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피케티에게 찬사만 늘어놓을 일도 아니다. 이 책이 현재 우리의 참담함을 어떤 식으로 밝혀내고 있는지 자문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겠으나, 많은 주석자들은 칼 마르크스에 관한 피케티의 논문에 관심이 있다. 피케티가 마르크스에게 얼마나 빚지고 있으며 어떠한 부분에서 다른지 말이다. 마찬가지로 평등에 대한 근심을 다룬다면 마르크스로 되돌아가는 것이 쓸모없지만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이 두 저자를 가까이 놓고 보면 일종의 대립을 발견하게 된다. 피케티와 마르크스 둘 다 경제적 격차를 거부하지만, 서로 반대되는 길을 택하고 있다. 피케티는 임금과 소득, 부의 분야에서 논의를 개진한다. 극단적인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하며 -비통했던 ‘프라하의 봄’ 당시의 슬로건을 모방해보자면- 우리에게 ‘인간적 얼굴의 자본주의’를 가져다주고자 한다. 반면 마르크스는 상품과 노동, 소외의 분야에 자리를 잡는다. 이들 간의 관계를 파괴하고 사회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피케티는 불평등을 가차 없이 비난하는데, <21세기의 자본> 서문에서 “이제는 더더욱 경제 분석의 중심에 불평등의 문제를 가져올 때”라고 썼다. 그는 자신의 책 첫머리에 1789년 <인권선언문>의 두 번째 문장, “사회적 차별은 공동의 유용성에 기반을 두어야만 성립될 수 있다”을 인용했다.(이 부분에서 우리는 왜 이토록 장황한 책이 인권선언문의 첫 문장, “인간은 누구나 그 권리에 있어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고 존재한다”를 놓치고 지나갔는지 자문하게 된다) 수많은 수치와 도표를 기반으로 하여, 피케티는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하며 가장 부유한 이들이 독점하는 부의 부분이 증가한다고 증명했다. 어떤 이들은 그의 통계 수치에 단호히 반론을 제기했으나, 피케티는 이러한 반론을 수포로 되돌린 바 있다.(2)

피케티는 사회 전체, 특히 미국 사회를 왜곡시키는 불평등의 심화를 다루며 강력하고도 정확하게 공격한다. 예를 들자면, 교육은 모두에게 접근 가능해야 할 뿐 아니라 사회 계층 이동을 장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하버드 대학생 부모의 평균 소득은 현재 45만 달러에 육박”하며, 이는 미국 가계 최고소득의 상위 2%에 해당한다. 그는 이러한 논거를 다음과 같은 특유의 완곡어법으로 결론지었다. “여기서 능력본위주의를 표방하는 공적인 담화와 현실 간의 대비는 특히 극심한 것처럼 보인다.”(p.778)

좌파 중 일부에게 이러한 주장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다른 이들, 최소 임금을 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거나, ‘일자리 창출의 원동력’에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거나, 미국 사회는 전 세계에서 가장 열린 사회라는 이야기를 지긋지긋하게 들어온 사람들에게 피케티는 신이 내려준 동맹일 것이다. 실제로 책에 인용되지 않은 어느 보고서에 따르면, 2013년 미국에서 가장 높은 소득을 얻은 25명의 투자 펀드 매니저들은 210억 달러를 벌었으며 이는 미국의 유치원교사 15만 명이 얻은 소득의 2배 이상이었다. 만약 경제적 보수가 사회적 가치와 일치한다면, 어느 헤지펀드 매니저 한 명은 교사 17명만큼 가치가 있는 셈이다. 학부모(그리고 교사)들은 아무도 이러한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피케티, 노동구조 언급 없어

그러나 이처럼 피케티가 자신의 논의를 불평등에만 한정하는 것은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한계를 드러내게끔 한다.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차티스트 운동,(3) 노예제 폐지, 여성 참정권 운동을 거쳐 미국의 인권 운동에 이르기까지 평등을 향한 열망은 분명 수많은 정치적 소요를 초래했다. 이러한 사회적 항의에 관한 백과사전을 참조해보면, 여기에 할당된 항목은 아마도 수백 페이지에 달할 것이고 수많은 다른 항목을 참조해야 할 것이다. 평등을 향한 열망은 필수불가결하고 긍정적인 역할을 해왔으며 이를 계속 해나가고 있다. 최근 월가 점령 시위(Occupy Wall Street)와 동성 결혼 운동이 바로 이러한 증거이지 않은가. 이 같은 주장은 사라지기는커녕 새로운 활력을 찾았다.

그러나 평등주의는 일종의 체념을 전제로 한다. 사회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부와 특권의 분배에 있어 다시금 균형을 이루게 하려 할 뿐이다. 동성애자는 이성애자와 동등한 자격에서 결혼할 권리를 얻기를 바란다. 좋은 시도인 것은 분명하나 이는 사회가 포기할 수도, 개선할 수도 없는 결혼이라는 불완전한 제도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 1931년에 영국의 좌파 역사학자 리처드 헨리 토니는 또 다른 관점에서 평등주의를 주창하는 책(4)에서 이미 이러한 한계를 강조한 바 있다. 그는 노동 운동이 돈보다는 사람에 더 큰 가치를 두는 사회의 가능성을 믿는다고 적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성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동시에, 노동 운동은 지금과 다른 사회 질서, 즉 돈과 경제적 권력이 더 이상 성공의 척도가 아닌 사회 질서를 열망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형태의 사회 질서에서 그저 돈과 경제적 권력이 조금 다르게 분배된 형태를 바랄 뿐이다.” 여기서 바로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는 것이다. 지구를 오염시킬 권리를 모두에게 부여하는 것은 평등에 한해서는 진보이겠지만, 지구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음이 분명하다.

한편 마르크스는 평등에 관해서는 지면을 거의 할애하지 않는다. 노동자 임금이 상당히 오를 것이라고 여기지도 않았을 뿐더러, 설령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마르크스는 문제가 거기에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본은 노동과 이득이 되는 것과 이득이 되지 않는 것의 특징, 속도, 심지어는 정의조차 강요한다. 노동자가 임금을 더 많이 받아 더 잘 살고 더 많이 소비할 수 있는 ‘편안하고 자유로운’ 형태를 띤 자본주의 체제에서조차 상황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노동자가 더 많은 소득을 얻고 말고는 노동자의 의존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식주와 처우의 개선도, 그리고 ‘그들의’ 재산 증가도 의존 관계와 노예적 착취를 철폐하지 못했다.” 소득 증가는 기껏해야 “노동자 자신이 이미 단련된 ‘황금 사슬’의 범위와 무게가 줄어들어 예전보다 목을 좀 덜 조른다”(5)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러한 지적이 19세기의 것이라는 이유로 여전히 반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피케티가 노동의 구조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반면, 마르크스는 적어도 그에 집중한다는 이점을 지니고 있다. 이 둘 중 자본주의의 기능에 관해 누가 더 옳은지를 따지고자 함이 아니라, 그들 각자의 분석에 존재하는 매개체를 알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피케티에게 그것이 분배라면, 마르크스에게는 생산인 셈이다. 전자는 자본주의의 열매를 최고소득자와 최저소득자 간의 격차를 줄이는 식으로 분배하고자 하고, 후자는 자본주의를 변혁하여 그 영향력을 없애고자 한다.

마르크스는 청년기부터 노동자의 비참함에 관해 저술했는데, <자본론>에서는 100여 페이지에 걸쳐 전형적인 노동자의 하루와 그것이 야기한 비판을 소개했다. 피케티는 자신의 책 첫 장 서두에서 어느 파업을 기술했지만, 이 주제에 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미국판 색인의 ‘노동’ 앞부분에는 “‘자본-노동 간극’을 참조하시오”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이는 충분히 이해가능한데, 저자가 말 그대로의 노동이 아니라 그러한 간극으로부터 야기되는 불평등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최상위 부자에게 집중적으로 분노 표출

피케티에게 노동은 무엇보다도 소득의 총액으로 요약된다. 그의 책에 종종 등장하는 분노의 표출은 최상위 부자들에게 집중돼 있다. 그는 로레알의 상속자 릴리안 베탕쿠르의 재산이 1990년에서 2010년 사이에 40억 달러에서 300억 달러로 증가했다고 지적했다. “릴리안 베탕쿠르는 단 한 번도 일한 적이 없지만, 이러한 사실은 그녀의 재산이 빌 게이츠의 재산만큼 빠르게 증가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처럼 최고소득자들에게 집중된 관심은 우리 시대의 감수성에 완벽히 일치한다. 반면 일당을 받는 제빵사와 세탁업자, 염색업자의 노동에 관해 기술하는 마르크스는 과거에 속해 있다. 제조업과 조립업은 자본주의 경제의 선진국에서 사라져가는 한편 방글라데시부터 도미니카 공화국에 이르기까지 개발도상국에서 성행하고 있다. 그러나 오래된 논거라고 해서 폐기 처분할 것은 아니며, 마르크스는 노동에 집중함으로써 <21세기의 자본>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차원을 강조했다.

피케티는 특히 미국에서의 불평등 ‘폭발’에 관한 증거 자료를 제시하며, 정통파 경제학자들이 소득의 막대한 격차를 시장의 논리적인 힘이라며 정당화한다고 비난한다. “미국 경제가 잘 운용되고 있으며 특히 재능과 공로를 공정하고 정확하게 보상한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p.468) 미국 경제학자들을 조롱하는 것이다. 피케티는 “이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닌데 이러한 경제학자들 자신이 최상위 계층 10%에 포함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피케티는 “이들이 금융계에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면 금융계는 그들의 임금을 더 높이 끌어올려 주기 때문에, 이들은 ‘공익의 보호’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 뒤에 숨어서 자신들의 사익을 지키려 하는 유감스러운 경향을 보인다”고 기술했다.(p.834)

피케티의 책에 등장하지 않는 예를 하나 꼽아보면, 전미경제협회 학회지에 실린 최근 기사(6)는 여러 수치를 들어가며 심각한 불평등이 경제적 현실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필진 중 한 명인 스티븐 캐플런 시카고대 비즈니스스쿨 교수는 “최고소득자들이 자신의 재능이 지닌 높은 가치를 비싼 가격에 협상할 수 있는 희소하게 독자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캐플런은 제 입에 풀칠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페이지 아래의 주석을 보면 그가 여러 뮤추얼 펀드의 이사회에 속해 있으며 또한 사모투자전문회사와 벤처캐피털 다수의 자문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인간적인 21세기형 교육이 아닌가! 책 서두에 언급하길 피케티는 “메사추세츠 공대(MIT)에서 강의를 하면서 미국 경제학자들에 대한 환상이 모두 깨졌으며, 프랑스 대학의 경제학자들은 대단히 존경받지도, 많은 보수를 받지도 않는다는 ‘엄청난 이점’을 가졌다”고 지적했다. 그 덕분에 프랑스 경제학자들이 땅에 발을 붙인 채 현실감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제시하는 해석은 진부하기 그지없다. 소득의 어마어마한 격차는 기술과 교육, 풍속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최상위 간부’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보수’, 특히 미국의 경제적 불평등이 증가하는 강력한 메커니즘은 생산성의 합리적인 논리로는 설명될 수 없다.(p.530~531) 이러한 것들은 오늘날 사회적 기준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기준 자체가 최고 부자들의 과세를 줄이는 보수적 정책에 속해 있는 것이다. 대기업 오너들은 스스로에게 막대한 연봉을 부여하는데 이는 이들이 그럴 수 있기 때문이며, -최소한 미국과 영국- 사회가 이러한 관행을 용납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자본의 축적이 실업을 초래하는 현실을 도외시

마르크스는 이와는 매우 다른 분석을 제시하는데, 막대한 경제적 불평등을 증명하기보다는 자본의 축적에서 불평등의 뿌리를 찾았다. 물론 피케티는 이러한 불평등이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모순”, 즉 자본수익률과 경제성장률 간의 분리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을 불가피하게 앞서며 현재의 노동에 손해를 야기하면서까지 부를 키우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결국 부의 분배에 ‘어마어마한 불평등’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도 이 부분에 관해서는 동감할지 모르겠으나, 다시 한 번 말하자면 그는 노동에 관심을 두며 노동이야말로 불평등의 근원이자 그것이 펼쳐지는 장소라고 보았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의 축적은 부분적인, 임시적인, 혹은 상시적인 실업을 불가피하게 초래한다. 오늘날 세계에서 그 중요성을 부인하기 어려운 이러한 현실이 피케티의 책에는 완전히 부재하다.

물론 마르크스는 부를 창출하는 것이 노동이라는, 완전히 다른 제안에서 출발했다. 이러한 의견은 낡아 보일 수 있으나, 자본주의의 해결되지 않는 긴장을 드러내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 즉, 노동력이 필요한 사람은 노동력 없이 해결할 방법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일자리의 확대를 필요로 하는 만큼, 자본가는 원가 절감을 위해 생산자동화 방식을 택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노동력 없는 방법으로 해결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상대적 과잉 노동 인구”(7)를 생산하는 방식을 오랫동안 연구했다. 이러한 과정은 노동자 해고 혹은 신규 채용 중단이라는 두 가지 근본적인 형태를 취했다.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는 ‘일회용’ 근로자 혹은 실업자 예비군을 생산하는 것이다. 자본과 부가 증가하면 할수록 불완전고용과 실업은 더 늘어난다.

수백 명의 경제학자들이 이러한 분석을 수정하거나 반박하려고 시도했지만, 과잉 노동력 증가라는 이론은 진실임이 확인된 것처럼 보인다. 이집트에서 엘살바도르, 유럽에서 미국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국가들은 높은 수준 혹은 심각한 수준의 불완전고용률 또는 실업률에 시달리고 있다. 달리 말해 자본생산성이 자본소비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셈이다. 25명의 헤지펀드 매니저가 제 아무리 낭비벽이 심할지라도, 본인 소득 210억 달러를 절대 다 쓰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자본주의는 마르크스가 ‘과잉생산, 과잉인구, 과잉소비’라는, ‘괴물’이라고 부른 것의 부담을 지고 있다. 예컨대, 중국은 혼자서도 유럽, 미국, 아프리카 시장 전체에 공급할 상품을 충분히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 나머지의 노동력에는 무슨 일이 생길까? 중국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로 섬유와 가구를 수출하면 이는 아프리카인들의 일자리가 다수 줄어드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8)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불완전고용자와 지속적 실업자로 이루어진 예비군의 확장과 현대적 불평등의 전형이 바로 여기서 생겨나는 것이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간 만큼 마르크스와 피케티가 서로 다른 해결책을 내놓는 것은 당연하다. 불평등을 줄이고 분배를 개선하는 데에 열심인 피케티는 “세습적 불평등의 끝없는 확산을 막기 위해” 자본에 부과하는 국제세(global tax)와 누진세를 제안했다. 피케티 자신이 인정했듯이 “이상적”일지는 모르나, 그는 이 해법이 유용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약 한 세기도 더 전에 소득세가 거부되었던 것처럼, 많은 이들이 자본에 부과하는 세금을 위험한 환상이라며 거부할 것이다.”(p.840) 한편 마르크스는 그 어떤 진정한 해법도 제시하지 않았다. <자본론>의 끝에서 두 번째 장은 자본주의를 변혁하기 위해 태어난 ‘힘’과 ‘열정’을 암시했다. 노동자 계급이 “토지와 생산 수단의 협동 및 공동 소유”(9)가 득세할 새로운 시대의 막을 열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2014년인 오늘날에도 이러한 제안은 여전히 이상적, 혹은 소비에트 공화국의 경험으로 볼 때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

피케티, 불평등문제 사회운동에 무관심

피케티와 마르크스 둘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는 없다. 앞서도 말했듯 그보다는 이 둘 간의 차이점을 분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피케티의 이상주의는 세금과 규제라는 친숙한 언어로 얘기한다는 점에서 -이는 그의 장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실용적인 차원을 띤다. 그는 세계적 협력과 세계 정부에 기대를 걸며 “불평등의 끝없는 악순환”(p.835)을 피하게 해줄 세계적인 차원의 세금을 신설하길 원한다. 즉, 극단적인 경제적 격차를 해소하며 진가를 발휘했던 스웨덴식 자본주의라는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피케티는 과잉노동력도, 소외된 노동도, 돈과 이익을 원동력으로 삼는 사회도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인정하고 답습하기를 바란다. 그에 대한 대가로 익히 알고 있는 것, 즉 모든 이점을 그대로 가지고 단점은 덜 가진 자본주의를 주고자 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피케티는 자신이 믿는 것보다 훨씬 더 인습적인 경제학자이다. 그의 본질적인 요소는 소득 수준에 관한 통계이며 과세 계획이자 이러한 문제들을 검토할 담당 위원회이다.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그의 제안은 위에서 명령하는 재정 정책에 한정된다. 과거에 불평등 문제를 제기했고 그러한 역할을 새로이 할 수 있을 사회 운동에 관해서는 절대적으로 무관심하다. 그는 단어 그대로의 불평등보다, 오히려 그러한 불평등을 줄여나가는 데 국가가 실패하지 않을지 더 큰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오노레 드 발작이나 제인 오스틴 같은 19세기의 소설가들을 적당히 불러내기는 하지만, 자본에 대한 피케티의 정의는 너무 경제학적이고 단순화되어 있다. 그는 최고부유층이 혜택을 입고 그 후손의 성공을 용이하게 해줄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원, 축적된 노하우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한정된 사회적 자본은 텅 빈 통장 계좌만큼이나 사회적 소외를 강요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해서도 피케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피케티에 비해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더 주기도, 덜 주기도 한다. 마르크스의 논고는 더 깊고 방대하지만, 아무런 실용적인 해법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우리는 그를 반이상적 이상주의자라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론>의 독일판 2판 후기에서 마르크스는 “미래의 싸구려 식당을 위한 레시피”(10)를 쓰길 바라는 이들을 조롱한다. 그리고 경제학에 관한 그의 글들에서 통찰력이 엿보이기는 하나, 이 통찰력은 평등주의와는 큰 상관이 없다. 마르크스는 만인의 빈곤과 “일반적 초라함”(11)을 선포하는 원초적 평등에 늘 맞서 싸웠다. 그는 부를 창출하는 자본주의의 능력은 인정할지라도, 노동 -그리고 사회- 전체를 이익의 추구 아래 복종시키는 자본주의의 적대적인 성격은 거부했다. 평등주의의 확산은 이 같은 악덕을 대중화시키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황금 사슬”의 힘을 알았지만, 이를 부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만약 그런 상황에 다다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것은 알 수 없다. 마르크스가 우리에게 준 최고의 답변은 아마도 그가 종교를 공격하고 -그 시절에 이미- “상상의 꽃”으로 뒤덮인 황금 사슬을 비난한 젊은 시절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비난은 사슬을 장식한 상상의 꽃을 망가뜨렸다. 인간이 그 어떤 환상도 위로도 없이 사슬을 지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가 사슬을 부수고 살아 있는 꽃을 따게 하기 위해서.”(12)

글·러셀 자코비 Russell Jacoby

저서에 <The Last Intellectuals>(1987), <The End of Utopia>(1999), <Bloodlust: On the Roots of Violence from Cain and Abel to the Present>(2011) 등이 있다.

번역·박나리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앨런 블룸, <미국 정신의 종말>, Simon & Schuster, New York, 1987. 프랑스에서는 알랭 핀켈크라우트(Alain Finkielkraut)에 의해 교육의 퇴폐에 관한 보수적 강박이 체계화되었다.

(2) 크리스 질스, ‘Data problems with capital in the 21st century’, <Financial Times>, London, 2014년 5월 23일자, Gallimard, 2006년, 이에 대한 토마스 피케티의 답변, ‘Technical appendix of the book - Response to FT’, 2014년 5월 28일, http://piketty.pse.ens.fr

(3) 19세기 중반 영국에서의 노동자 정치 운동

(4) 리처드 헨리 토니, <평등(Equality)>, Allen & Unwin, London, 1952년

(5) 칼 마르크스, <자본론> 1권, 장-피에르 르페브르 번역,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Paris, 1993년, p.693

(6) 스티븐 N. 캐플런, 조슈아 로, ‘It’s the market : the broad-based rise in the return to top talent’, <Journal of Economic Perspectives>, vol. 27, n° 3, Nashville, 2013년

(7) Ibid

(8) Cf. 라파엘 캐플린스키, ‘What does the rise of China do for industrialization in Sub-Saharan Africa?’, <Review of African Political Economy>, vol. 35, n° 115, Swine(영국), 2008년

(9) 칼 마르크스, <자본론>, op. cit., p.855-857

(10) Ibid, p.15

(11) Ibid, p.854

(12) ‘헤겔의 법철학에 대한 비판’, dans Karl Marx, <Philosophie>, Gallimard, coll. “Folio Essais”, Paris, 1994년, p.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