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지원하는 중남미의 소리 없는 쿠데타
급진적 반(反)카스트로주의자인 카를로스 알베르토 몬타네르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연구소의 후원을 받아 2010년 9월 23일 미국 마이애미의 호화로운 금융가 건물에서 ‘21세기 사회주의 모델의 몰락’에 대한 회의를 개최했다. 참석자 중에는 매우 잘 알려진 에콰도르 망명자 몇 명이 눈에 띄었다. 에콰도르 수도 키토에서 신자유주의 전성기 시절을 누렸던 식스토 두란 바옌 정부(1992~96)의 전직 장관인 마리오 리바데네이라, 에콰도르에서 가장 큰 은행이었던 필란방코를 위장 파산시킨 후 사법망을 피해 도주한 로베르토 이사이아스, CIA와 과도하게 유착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2008년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에게 파면당한 군정보기관장 출신의 마리오 파스미노 전 대령이 회의에 참석한 것이다.
군 대령 출신으로 에콰도르 대통령에 선출된 뒤 2005년 4월 20일 민중 반란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되었던 루시오 구티에레스가 이날의 연사였다. 그는 사회주의자들의 신비주의적이고 천년지복적인 비전과 마르크스주의, 이들의 위험한 포퓰리즘을 규탄했다. 아울러 루시오 구티에레스는 몇 가지 단서들을 충족한다는 조건 아래 행복과 번영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21세기의 사회주의에 종말을 고하기 위해서는 코레아(Correa)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구티에레스의 발언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일주일 후 2010년 9월 29일과 30일 밤, 스위스 호텔 21개 룸 중 한 곳에서 반정부 인사들이 새벽 3시까지 모임을 지속하였다. 오전 7시 에콰비사 텔레비전 방송국의 ‘컨택트 다이렉트(Contact direct)’라는 프로그램에 갈로 랄라가 등장했다. 기독교사회당(PSC) 대표인 갈로 랄라는 카메라 앞에서 ‘공공서비스법’이 의회에서 막 통과된 것을 알렸다. 이 법은 여러 계층의 공무원들과 관계된 것으로 경찰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 법은 상여금, 메달·훈장 수여 포상금, 크리스마스 선물 등 여러 특전을 금지시켰다. 그 대신 시간외 수당과 사회주택 프로그램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 등 다른 특전을 공무원에게 부여했다. 그런데 랄라의 발언은 뭔가를 부추긴다는 느낌을 주었다. “코레아 대통령이 경찰의 자녀들에게서 장난감을 빼앗아가 버렸다. 그래서 대통령은 사람들에게 폭행을 당할까봐 두려워한다. 코레아 대통령이 나라를 떠나려 짐을 싸고 있다!” 놀랍게도 저명 논객인 에밀리오 팔라시오의 묵시록적인 기사는 일간지 <엘 우니베르소>에도 실렸다.
9월 30일 쿠데타, “차베스주의자를 내쫓아라”
당시 에콰도르의 내무장관이었던 구스타보 잘크의 기억에 의하면, 이 악명 높은 법에 항의하기 위해 경찰들이 키토 경찰청 내에서 태업을 하기로 한 사실을 오전 8시 코레아 대통령이 알게 되었다. 코레아는 지체하지 않고 “뭔가 오해가 있는 것이다. 내가 그들과 직접 협상을 하러 가겠다”고 말했다. 코레아와 잘크는 카론델렛 대통령궁을 나와 둘 다 현장으로 이동했다. 이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현장에 있던 8백 명의 경찰들에게 알려지자, 경찰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오고 있다!”, “차베스주의자들을 내쫓아라!”라고 소리쳤다. 여기서 차베스는 당연히 2013년에 사망한 베네수엘라의 전직 대통령 ‘유고 차베스’를 가리켰다.
검은 안경 차림에 송수신기를 낀 채 핸드폰을 든 주동자들이 하위 경찰들 틈에 섞여 소란을 선동했다. 그들 중에는 구티에레스 전 대통령의 대변인으로 애국사회당(SP) 지도자인 피델 아라우요도 끼여 있었다. 이 현장에서 그는 국가수반인 코레아를 떠밀고, 욕설을 퍼부었고, 심지어 최루탄을 던지기도 했다. 몇 안 되는 경호원이 진땀을 흘려서 간신히 겨우 3층 창문으로 올라간 코레아는 연설을 시도했다. “이 법은 여러분 삶의 조건을 향상시킬 것이다. 우리는 경찰을 위해 이 법안을 마련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제공하려는 모든 것들을 잊지 말라.”(1)
코레아 대통령에게 야유가 쏟아졌고, 심지어 “대통령을 잡아라! 죽여 버려라!”는 소리도 들렸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 대통령이 넥타이를 풀고 도전적인 제스처를 취하면서 와이셔츠를 열어 젖혔다. “여러분이 만약 대통령을 죽이고 싶다면 대통령이 여기 있다. 원한다면 나를 죽여라! 그럴 용기가 있다면 군중 속에 비겁하게 숨어있지 말고 나를 죽여라!” 파렴치한 것인가? 신중치 못한 것인가? 대통령의 특이한 태도로 인해 이 사건은 주목을 받았다.
4백 명의 군인이 출동하여 키토의 마리스칼 수크레 공항을 봉쇄했다. 타쿤가 공군기지, 국회와 항구, 주요 도시인 구아야킬의 공항들도 마찬가지로 통제에 들어갔다. 구아야킬에서는 묘하게도 오전 9시부터 경찰기동대가 철수했다는 사실이 퍼져 나가면서, 범죄자들이 유리창을 깨고, 상점을 약탈하면서 현금지급기를 약탈해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2002년 4월 13일 ‘쿠데타’를 시도하면서 차베스를 감금했던 베네수엘라에서처럼, 수만 명의 에콰도르 시민들이 자신들의 지도자를 지지한다는 표시로 거리에 나섰다. 반면, 민주적인 정당을 표방하는 야당의 일부 세력은 대통령을 지지하는 데에 조건을 내걸었다. 또 다른 야당의 일부는 ‘에콰도르 원주민연합’의 분파인 파차쿠티크의 지메네스 대표를 본받아,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기 위해 ‘국민전선’을 구성하자고 원주민사회 단체들을 선동했다(이들은 이 당파의 말을 따라주지 않았다).
코레아 대통령 전용차에 쏟아진 총탄들
최루가스에 질식하고 부상당한 코레아 대통령은 키토 경찰청 부근의 경찰병원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4층에 갇혀 폭도들의 위협을 받게 된 코레아는 오후 8시에 군특수부대(GOE)와 경찰의 구조팀(GIR) 요원들이 충성스럽게 구조하러 올 때까지, 10시간 이상 경찰병원에 감금되었다. 건물 외부에 배치된 경찰의 무선송신기에서 “군인들이 오기 전에 코레아를 끌어내 체포하라!”, “그를 죽여라. 대통령을 살해하라”라는 말들이 들렸다. 대통령은 결국 총격이 난무하는 가운데 탈출했다. 대통령을 보호하는 군인 한 명이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대통령에게 방탄복을 빌려준 또 다른 군인은 총탄에 폐가 관통되는 중상을 입었다. 대통령 전용승용차에서 5발의 총탄 흔적이 발견되었고, 대통령 경호 차량들에서는 17발의 총탄 자국이 나 있었다. 이날 하루 6명이 사망했고, 거의 3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자발적인 운동의 일탈된 행동이었을까? 몇 주 전부터 엄청난 양의 우편물과 팸플릿이 경찰청에 쇄도했다. 모든 우편물과 팸플릿은 논란이 된 공공서비스법을 왜곡된 표현으로 비난했다. 사실상 불처벌 법조항에 익숙해진 일부 경찰들은 경찰 특수부대인 작전지원팀(GAO) 대원들이 민간인을 고문하고 실종시킨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1980년대 벌어진 진압 범죄사건들(2)의 진상을 밝혀내기 위해 설치된 이 진실위원회에는 어느 누구도 자발적으로 출두하지 않았다. 코레아 대통령의 사회정책, 인접 진보주의 정부들과의 돈독한 관계, 에콰도르가 ‘아메리카를 위한 볼리바르 동맹(ALBA)’에 가입한 사실, 만타의 미군기지 폐쇄도 비난의 대상이었다. 경찰들의 이익 옹호라는 궁색한 핑계로, 사람들이 경찰들을 조종했다. ‘9월 30일 사건’은 단순 불복종 사건이 아니라 쿠데타 기도 사건이었다.
폭동진상 규명 임무를 담당한 ‘9월 30일 사건위원회’의 오스카르 볼리야 위원은 “일반적으로 대통령은 경호팀의 조언에 따라, 몸을 드러내지 않고 대통령궁인 카론델렛에 틀어박혀 있게 되었다. 대통령이 이곳에 갇혀 있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프란시스코 벨라스코 문화부 장관은 “이 시나리오는 며칠간의 거센 폭동이 지속된 후 일부 군인이 야당의원들, 국제적으로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기업들과 짜고 ‘통치능력’이라는 이름으로 권력 공백을 선언하면서 정국에 개입하기 아주 좋은 작전이었다”고 평했다. 우리들은 비폭력적인 민중반란이 일어났을 때, 1997년 압달라 부카람, 2000년 자밀 마후아드, 2005년 구티에레스 같은 대통령에 대해 장군들이 과거에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지 알고 있다. 혼란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군대가 대통령을 풀어주었고 그런 다음 혼란을 진정시킨다는 명목으로 대통령에게 하야를 요구했었다.
역설적으로 코레아 대통령은, 사람들이 그에게 수없이 비난했던 경솔한 행동을 감행함으로써, 키토 경찰청으로 이동해 반란 폭도들의 음모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는 위기에 직면해 헌법적 출구를 찾는 예상 시나리오를 뒤집고 ‘시민혁명’을 구해 냈다.
이 사건이 발생한 후 며칠 동안 야당과 지역 언론은 이 사건에 대해 어떤 논평도 내놓지 않았다. 다시 말해, 쿠데타 기도도 없었고, 감금도 시키지 않았으며,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의도도 없었으니, 이 상황의 유일한 책임자는 코레아 대통령 자신일 뿐이라는 식이었다. 심지어 팔라시오는 일간지 <엘 우니베르소>의 사설을 통해, “대통령이 경찰 병원에 사격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대통령을 ‘반인륜범죄’로 국제형사재판소(CPI)에 기소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 기사는 대통령에 대한 사법소송,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쟁, 팔라시오의 망명을 야기했다.
외국에서는 대부분의 기자들이 이 모든 논거를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2011년 1월 12일자 <르몽드>처럼 “야당은 대통령의 경솔함과 오만을 모든 혼란의 원인으로 본다”는 기사를 그대로 게재했다.
거의 분석된 적이 없는 에콰도르의 이 사건에 대해 우리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3) 이 사건은 거북스러운 국가수반을 권좌에서 축출하기 위해 사용된 새로운 전략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확실히 예전에는 남아메리카에서 군인들이 미국 정부의 도움을 받아 민주적 선거로 탄생한 합법정부를 빈번하게 뒤집어 버리곤 했다. 그러나 좌파나 중도좌파의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들이 빈곤계층을 결집시키면서 1999년 이래 권좌에 오르게 되자, 때로는 실패하고 때로는 성공한 ‘쿠데타’, 무장폭동, 그 밖의 정권 불안정화 전략이 베네수엘라(2002~03년, 2014년), 아이티(2004년), 볼리비아(2008년), 온두라스(2009년), 에콰도르(2010년), 파라과이(2012년)에서 시도되었다.
군사 쿠데타 대신 정권불안정화 전략 선호
그런데 예상과 달리 이러한 반란이 국제 여론에서 심한 역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적어도 라틴아메리카에서 전통적인 ‘쿠데타’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수적인 군부는 알게 되었다. 그러자 다양한 기법이 개발되었다.
전쟁 중에 사용되었던 심리 투쟁은 평화 시에도 역시 커다란 효과를 낸다. 1970년대 초반 칠레 일간지 <엘 메르쿠리오>는 아옌데를 1973년 9월 11일 쿠데타를 통해 축출하기 위해 쿠데타 준비를 열정적으로 수행했다.(4) 그 당시 유럽에는 이런 선동을 분석하고 규탄할 수 있는 출판물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그런 상황에 놓여있지 않다. 미국과 유럽연합이 부여한 질서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에도 전반적으로 찬동하는 인터넷이 출현하고, ‘퍼나르기 복제’가 일반화되어 이른바 ‘서구의 미디어 정보’를 획일화시켜 버렸다.
칠레에서는 <엘 메르쿠리오>가 여전히 변함없이 획일화된 정보를 되풀이하여 배포하고 있다.(5) 아르헨티나에서는 <클라린>과 <라 나시온>, 브라질에서는 <오 글로보>와 <폴랴>, 베네수엘라에서는 <엘 나시오날>, <탈쿠알>, <엘 우니베르살>, 에콰도르에서는 <라 오라>, <엘 코메르시오>, <엘 우니베르소>, 온두라스에서는 <라 트리부나>, <엘 에랄도>, <라 프렌사>, 볼리비아에서는 <엘 데베르>, <라 라손>, 콜롬비아에서는 <엘 티엠포 이 세마나> 등이 이런 일을 하고 있다. 미국의 <CNN>, <월스트리트 저널>, <워싱턴 포스트>, <마이애미 헤럴드>,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 스페인의 <엘 문도>, <ABC>, 프랑스의 <르몽드>, <리베라시옹> 및 공공 영상매체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 때문에, 심지어 모든 당사자들이 이런 시도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반정부세력이 미묘한 ‘심리작전’을 펼치면 외부의 도움 없이도 표적이 된 정부를 조종하거나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고, 해당 정부에 대해 외국에서 나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럴 경우 사람들은 시행된 정책들에 대해 일반적인 비판보다 훨씬 더 심한 비판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를 왜곡되게 사용함으로써,(6) 해당정부의 주권적 결정을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무책임한 정책”으로 변질시키면서, 빈곤 축소, 부의 재분배, 해당 국가의 매우 중요한 사회적 제안들을 흔히 뒷전으로 밀리게 해버린다.
2000년대 초반 베네수엘라에서 차베스에 대한 쿠데타 시도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의회에 탈레반이 존재한다”, “검은 10월”, “정부에 테러리스트들이 숨어있다”와 같은 제목이 <엘 나시오날>, <엘 우니베르살> 등의 일간지에 끊임없이 등장했다. 이에 앞서 “대통령을 전복하라”는 호소도 수없이 나왔다. 마치 군사작전에서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대포를 발사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언론과 외국의 외교사절을 표적으로 삼아 이들에게 제공되는 첫 번째 정보는 ‘시민 사회’가 불만을 표시했다고 여론을 조작하는 것이다. 정말 마술 같은 표현이다! ‘우파 야당’이 결집한다는 공고는 평범한 독자도 완벽히 해독할 수 있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시민 사회’란 용어의 등장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비록 시민 사회가 투표에서는 소수를 대표하는데도 그렇다. 그런 사실을 명확히 말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시민 사회’, ‘학생들’이란 용어로 혼란 야기
2014년 2월에 터진 위기 때는, ‘시민 사회’라는 용어가 ‘학생들’이라는 용어로 대체되었다. ‘학생들’이라는 용어가 ‘활동 중인 극우파’라는 용어보다 훨씬 내세우기 좋았기 때문이다. 칠레의 아옌데 정권 하에서 ‘쿠데타’를 준비하는 동안 두 개의 사회단체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여성의 힘’이라는 단체와 ‘가톨릭 대학생연합(FEUC)’이라는 단체다. ‘여성의 힘’이라는 단체는 ‘빈 냄비’를 들고 행진했는데, 이런 행동이 식량난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으나 사실 식량난은 기획된 쇼였다.
독재와 맞서는 다양하고 평화로운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해 죄 없는 희생자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베네수엘라에서 소문난 ‘시민 단체’가 2002년 4월 11일 시위를 했을 때, 개별 행동대들이 대통령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시민 단체 회원 여러 명을 살해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민병대’와 ‘블루 셔츠’(푸른 옷을 입은 차베스 지지자들을 지칭)를 파견하여 반대파를 진압하려 한다고 비난받은 차베스를 군인들이 나서서 체포하도록 조작하기 위해서였다. 12년 후 공동체들(사회·문화·교육·스포츠 공동체 등 온갖 종류의 공동체)은 ‘준군사적’ 공동체로 낙인찍혀 악마 취급을 당했다.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 이점을 갖고 있는 이 개별 행동대들이 이번에는 간접적으로 파라과이의 페르난도 루고 대통령(2008~12년 재임)을 전복하기 위해 이용되었다. 루고가 권좌에 오른 이래 반대파들이 온갖 핑계를 대면서 대통령의 ‘해임’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을 때, 뜻밖에 터진 농민 분규가 작전을 시행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 기회는 2012년 6월 15일 마리나 쿠에라는 곳에서 주어졌다. 마침내 경찰이 토지점령을 진압하는 작전을 전개하였고 총격전이 발생하여 총 17명이 사망했는데 이 가운데 11명이 농민, 6명이 경찰이었다. 이 비극의 책임이 ‘땅 없는 사람들’에게 지워졌는데, 그들이 경찰기동대를 함정에 빠트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러 증인 외에도 함께 조사를 실시했던 농민 지도자 비달 베가는 “잠입자들이 농민과 경찰 양쪽에 사격을 가함으로써 총격전을 유발시켰다”고 분명하게 증언했다. 의회가 능숙하게 정치적 판단을 재빨리 내려, 대통령의 정책이 토지 소유주들에게 폭력을 유발시켰다는 죄목으로 루고 대통령을 기소하고, 결국 그를 해임시켜 버렸다.(7) 그 후 베가는 가면을 쓴 청부살인업자에게 암살당했다.
2009년 6월 28일 라틴아메리카 볼리바르 동맹(ALBA)의 회원국인 온두라스가 이런 ‘합헌적 쿠데타’의 희생물이 되었다. 쿠데타 감행자들이 쿠데타를 하면서도 ‘강제해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용어에 거의 신경을 안 쓰는 외신기자들을 불러 ‘권한을 잃은 대통령’이라고 상기시킴)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의회는 기만적 핑계를 대고 마누엘 젤라야 대통령을 해임시켰다. 젤라야에게는 재선되기 위해 헌법을 위반하려 했다는 죄목을 씌웠다. 실상은 젤라야가 입헌 의회의 소환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8) 이번에 사용된 기법의 이점은 그 후 벌어진 일에서도 똑같이 드러났다.
6월 28일 군 특공대가 젤라야를 체포해 코스타리카행 항공기에 태우는 한편, 거리로 쏟아져 나온 그의 지지자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이 사건의 행동대장인 로메오 바스케스 장군은 곧바로 권력을 국회의장인 로베르토 미첼레티에게 넘겼다. 책략은 완벽했다. ‘시민 권력에 종속된’ 군인들이 ‘대통령 승계’를 허용해준 것이다. 곧바로 미첼레티의 쿠데타 정권은 ‘과도 정부’란 이름으로 변신을 했다. 2002년 베네수엘라에서도 불충한 장군들과 사령관들은 자신들의 청부계약을 일단 완수하자 똑같은 절차를 밟아 대통령궁의 열쇠를 경영자 총대표인 페드로 카르모나에게 넘겼다.
결론적으로 과거에는 군인들이 어떤 파당을 위해 일을 저지른 후에 권좌에 머물러 있었지만, 이제 그들은 병영으로 돌아간다. 문민화된 독재는 투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새로운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칠레에서 1973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1990년까지 장기 집권했던 독재자-편주)를 규탄할 수 없게 된다. 몇 달 후 ‘감시 하에’ 선거를 치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책략이 성공하는 것이다.(9)
“쿠데타 시도 구조는 똑같고 약간의 변화만 있을 뿐”
21세기 초에도 미국 정부는 여전히 민주주의를 시장의 훌륭한 작동을 허용해주는 도구로만 생각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새로운 좌파’는 ‘행복한 세계화’라는 거대한 소설에 종말을 고하면서, 자연자원을 국유화하고 독립을 선언하며 미국의 전통적 헤게모니에서 벗어나고 있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성경으로 무장했던 리처드 닉슨이나 로널드 레이건 시절에는‘국가안보 독트린’이 명확했다. 통제를 유지하기 위해 전면적이고 총체적이며 절대적인 전쟁을 벌이는 것이었다. 조지 부시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2002년 베네수엘라에서 벌어진 ‘쿠데타’ 시도에 직접적으로 연루돼 있었다.
인디언 원주민 출신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2006년부터 재임-편주)이 통치하는 ‘더 이상 소유주는 없고 파트너만 존재하는’(10) 볼리비아에서 필립 골드버그 미국대사는 2006년 10월 부임한 이후부터 가스와 탄화수소가 풍부한 4개 주, 즉 산타크루스와 타리하, 베니와 판도를 묶은 지역인 메디아 루나(‘반달’이란 의미)의 반정부 세력과 밀착 관계를 유지하였다.(11) 이에 앞서 골드버그는 2004~06년 사이 코소보의 프리스티나에서 미국대표단을 지휘했었다. 모랄레스의 ‘국가 통제적, 권위주의적, 원주민 위주의’(여기서는 ‘원주민 위주’라는 말이 ‘포퓰리스트적’이라는 말을 대체) 국가 계획안에 반대하는 투쟁이 마치 우연인 것처럼 벌어지면서, ‘차베스주의 추종국가’(12)인 볼리비아는 발칸화 과정에 들어서게 되었다.
2008년 5월 4일부터 메디아 루나의 주들은 독립선언과 거의 유사한 자치 지위를 승인받기 위해 불법적인 국민투표를 연속적으로 실시하였고, 폭력 소요가 발생했다. ‘자치주의’ 돌격대들이 테러를 살포하고, 공항과 정부기관 및 건물들을 점령했다. 9월에는 민병대들이 판도에서 농민 30명을 암살했다.
어떤 순간에도 ‘권력획득’을 위해 전통적인 ‘쿠데타’ 선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2014년 베네수엘라에서처럼(13) ‘자발적인 폭력’이나 진압하는 과정에서 유혈 사태로 국가를 통치불능 상태에 빠지게 했다. 그 목표는 ‘국제 공동체’가 해당 국가권력에 대해 총체적인 유죄판결을 내려 대통령을 강제 해임시키거나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볼리비아에서는 ‘라틴아메리카 국가연합’의 지지를 받은 모랄레스가 군사적 진압수단보다는 대중 동원을 선택함으로써 그 계획을 좌절시켰다. 더 정확히 서술하자면, 2008년 9월 10일 볼리비아 당국이 골드버그 미 대사에게 72시간 내 볼리비아를 떠나라고 명령하자, 메디아 루나의 분리주의 열기가 갑자기 사그라졌다.
2009년 6월 28일의 사건으로 온두라스가 충격에 빠졌을 당시, 백악관의 주인은 부시에서 버락 오바마로 바뀌었다. 그런데 젤라야를 테구시갈파(온두라스 수도)에서 코스타리카의 산호세로 강제 이송하는 비행기가 1980년대부터 온두라스 영토에 설치된 팔메롤라 미군기지에 잠시 착륙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쿠데타에 불복종하기>의 저자인 후안 파스 이 미뇨는 “내가 코레아 대통령에게 9월 30일 사건의 배후에 미국이 존재하냐고 질문했을 때, 대통령은 나에게 ‘증거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그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고 지적했다.(14) 결국 에콰도르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의 직접적인 책임을 배제하면서도 CIA를 문제 삼아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표현했다. “확실한 것은 미국에 극우 그룹들이 존재하고, 이 극우 그룹들과 우리 정부에 반대하는 수많은 공모자에게 자금을 대주는 수많은 재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15)
1983년 레이건 대통령이 제안하고, 의회의 후원을 받아, 전 세계 ‘민주주의를 위한 국가기금(NED)’이 탄생했다. 미국국제개발처(USAID), 국제공화당연구소(IRI), 미국평화연구소(USIP), 프리덤하우스와 오픈 소사이어티 연구소 같은 모호한 이름의 싱크탱크 및 재단들, 심지어 지난 세기 말에 세르비아에서 생겨난 ‘오트포르(Otpor, ‘저항’이란 뜻)’ 같이 멀리 떨어진 지역의 단체들과 연계된 반정부 세력과 비정부기구들이 이들로부터 기술적·이데올로기적·재정적 지원을 받아 계획을 꾸몄다.
2013~14년에만 1억4천만 달러가 다양한 경로를 통해 2014년의 ‘평화적 시위’와 선거운동을 위해 베네수엘라 반정부 세력에 뿌려졌다. 그런데 이런 시위와 선거운동이 반(反)민주주의적 저항의 갖가지 특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민주주의적 통일 플랫폼(MUD)’이란 단체는 볼리비아, 니카라과, 아르헨티나 조직들과 프로그램을 교류한다는 명목으로 10만 달러를 수령했다. 이는 베네수엘라에서 습득한 학습내용을 공유하여, 이런 국가들에 그 경험을 적용하기 위한 것이었다.(16)
우리는 흔히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에 대해 2002년 4월의 쿠데타 기도만을 기억하고 있다. 실상은 그 전이나 그 후에도 쿠데타 시도가 멈춘 적이 없었다. 2001년 12월에는 경영주가 조직한 총파업이 벌어졌고, 2002년 12월에서 2003년 1월 사이 국영 석유회사가 마비되어 경제가 혼란해지자, 군인들이 카라카스의 알타미라 광장 ‘해방구’에서부터 반란이 일어나야 한다고 시민들을 부추겼다. 2004년에는 처음으로 ‘구아림바스(guarimbas, 도로 차단과 바리케이드 설치)’가 발생하고 수도 카라카스 근처에 100여 명의 콜롬비아 민병대가 침투하기도 했다. 2014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내무부 장관 미구엘 로드리게스 토레스는 “이제 그들은 좌파가 ‘갖가지 투쟁 방식의 조합’이라고 불렀던 그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만약 여러분이 사용된 투쟁 요소의 리스트를 작성해보면 그 구성 성분들이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구조는 똑같고 약간의 변화만 있을 뿐이다. 시행하는 방법만이 매번 변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글·모리스 르무안 Maurice Lemoine
기자. <대하(大河)의 검은 물에 대하여>(돈키호테, 파리, 2013)의 저자.
번역·고광식
(1) 2007년부터 하위직 경찰의 급여가 355달러에서 886달러로 상승했으며, 팀장급의 급여는 707달러에서 1329달러로 상승했다.
(2) 헤르난도 칼보 오스피나, <조용히 하고 숨이나 쉬어>, 브뤼노 르 프렝스, 파리, 2013년
(3) “에콰도르 내에서 정부의 권위를 따르지 않는 조직”, 외교행랑, 2010년 10월 1일 www.monde-diplomatique.fr
(4) 아르망 마트라르, “‘악순환’, 구세대가 죽기를 거부할 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년 9월호
(5) 르노 랑베르, “라틴아메리카 정부들은 미디어와 싸우고 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12월호
(6) 제라르 모제, “‘포퓰리즘’, 이동하는 단어의 경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7월호
(7) “콩에게 먹힌 파라과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1월호
(8) “온두라스에 경호원이 복귀하다”, 외교행랑, 2009년 7월 www.monde-diplomatique.fr
(9) 르노 랑베르, “온두라스: 미주기구(OEA)에 복귀. 정상으로 복귀한 것인가?”, 외교행랑, 2011년 6월 www.monde-diplomatique.fr
(10) <르 쿠리에>, 제네바, 2007년 6월 30일
(11) 헤르난도 칼보 오스피나, “볼리비아의 정국혼란에 대한 개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6월호
(12) “볼리비아는 차베스주의를 절대적으로 추종하는 국가다”, <엘 파이스>, 마드리드, 2008년 8월 9일
(13) 알렉산더 메인, “베네수엘라의 쿠데타 음모”,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4월
(14) 후안 파스 이 미뇨, <쿠데타에 불복종하기>의 저자, 압야 얄라, 키토, 2011년
(15) 텔레쉬르, 2011년 1월 4일
(16) “에바 골링거- 베네수엘라에서 NED의 더러운 손을 잡다”, 2014년 4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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