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티카 여객기 추락의 미스터리

2014-07-28     안드레아 푸르가토리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신임 총리는 숱한 폭력과 음모로 점철된 1970~80년대 문서에 대한 비밀을 해제하기로 결정했다. 원인불명의 추락 사고로 사망한 우스티카 여객기 탑승자 81명의 유가족들은 이 기밀문서 접근을 오랫동안 염원해왔다. 한편 유력한 용의자로 여겨지는 프랑스 역시 이 미스터리한 지정학적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이탈리아 법원에 성실히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1980년 6월 27일, 저녁 8시 8분. 이타비아 항공 DC-9 여객기가 113분을 연착한 끝에 마침내 이탈리아 볼로냐를 출발했다. 여객기에는 어린이 13명을 포함한 승객 77명과 승무원 4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아펜니노 산맥을 넘은 여객기는 ‘암브라 13(Ambra 13)’ 항로를 따라 비행했다. 티레니아해 상공을 지나 종착지 팔레르모로 향하는 비행 항로였다. 시야도 맑고, 관제탑과의 교신도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저녁 8시 59분, 별안간 음성기록장치에서 기장이 부기장에게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기장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한 채 그저 “과(Gua)…”라고만 소리쳤다. 혹시 “과르다(Guarda·조심해)!”라는 말을 하려던 것이었을까? 진실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돌연 기장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시칠리아에서 6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자그마한 섬 우스티카의 상공을 비행하던 여객기 신호도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DC-9 여객기는 그렇게 세 동강이 난 채 수심 3,700m의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때부터 4개국(이탈리아, 프랑스, 미국, 리비아)의 정부와 군, 정보기관 사이에 한바탕 정신없는 포커판이 펼쳐졌다. 온갖 속임수가 난무하는 도박판이었다. 그들이 기진맥진한 채로 이 끝날 줄 모르는 지루한 사기도박을 벌인 데는 각자 말 못할 속사정이 있었다. 바로 멀쩡히 하늘을 날던 정기여객기가 별안간 공중에서 폭발해 탑승자 81명의 생명을 앗아간 이유가 무엇인지 진실을 은폐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이 미스터리한 사건을 일컬어 일명 ‘우스티카 대학살(Strage di Ustica)’이라 불렀다.

카다피를 겨냥한 프랑스의 미사일?

2013년 이탈리아 대법원은 2건의 민사 판결에서 비록 어떤 나라의 전투기가 쏜 것인지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어쨌든 대공미사일이 여객기 폭발의 원인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면서 항공기 안전을 충분히 보장하지 못한 이탈리아 정부에 대해 희생자 유족에게 1억 유로의 보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여객기를 격추한 미사일이 사실상 리비아 국가 원수 무아마르 카다피를 겨냥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범인이 남긴 ‘족적’을 따라가 보면 그 끝에는 유일한 용의자인 프랑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증거와 정황, 위증과 주요 증언 모두 프랑스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프란체스코 코시가 전 이탈리아 대통령 역시 사망하기 3년 전인 2007년 6월 25일 난데없이 공영라디오와 SKY TV에 출연해 다음과 같은 폭탄발언을 하기도 했다. “프랑스는 카디피가 탄 비행기가 그쪽 비행 항로를 통과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카다피는 테러를 비껴갔다. 이륙 직후 이탈리아 군 정보기관(SISMI)(2)의 책임자로 있던 주세페 산토비토 장군이 프랑스의 의도에 대해 귀띔을 해준 덕분이었다. 카다피는 결국 회항을 결심했다. 그리고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도록 DC-9 여객기 뒤에 바짝 붙어 비행했다. 그러나 금세 프랑스에 발각됐다. 결국 해군 전투기를 출격시켜 미사일을 쏜 것은 프랑스의 소행이었다.”

이탈리아는 관련국들에게 수십여 차례에 걸쳐 증거 조사 의뢰장을 보냈다. 그러나 조사는 전혀 진전이 없었고 오히려 새로운 의혹만 자꾸 불어났다. 수개월 전까지 프랑스는 우스티카 참사에 대해 전혀 할 말이 없다는 입장을 이탈리아 재판부에 전달했다. 자국 전투기가 코르시카 섬 소렌자라 공군기지에 있었던 것은 그저 ‘국방’ 목적 때문이었다고만 답변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검사 마리아 몬테레오네와 에르미니오 아멜리오가 당시 소렌자라에서 복무하고 있던 장병 15명의 신원을 밝혀냈다. 상당히 오랜 기간 병사들을 찾아낼 수 없다고 주장하던 프랑스는 최근 입장을 바꾸어 이탈리아 재판부의 요구를 수용했다. 그렇게 지난 4월 프랑스 퇴역 군인들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34년 만에 처음으로 프랑스 군인들은 1980년 6월 27일 밤 소렌자라 기지의 비행 활동이 끝난 것은 오후 5시가 아닌 한밤중이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그동안 프랑스 국방부는 공식적이면서도 매우 단호하게 이런 가능성을 줄곧 부인해왔다. 그런 만큼 프랑스 국방부의 승인 없이 장병들이 일방적으로 이런 발언을 했다고는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한편 그보다 더 유의미한 사실도 있다. 바로 프랑스 법원이 이탈리아 법원에게 두 번째 공판을 허용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 법원은 앞으로 ‘국가 기밀’ 여부를 떠나 진실을 밝히기 위한 모든 조사 과정에 성실히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같은 용의자들

프랑스의 태도 변화는 지중해에 정치적·군사적 긴장이 높았던 시절, 평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자행된 용서할 수 없는 전쟁 행위와 관련된 이 국제적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데 결정적인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처럼 유력한 살인 용의자 뒤에는 또 다른 수많은 살인범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질지도 모른다.

여객기가 추락하던 날 밤, 로마 치암피노 비행장의 관제사들(당시 모두 현역 군인)은 레이더 화면 위에서 여러 대의 전투기가 우스티카 상공을 비행하는 신호를 포착했다. 전투기들은 마치 그곳에 항공모함이 떠있기라도 한 듯 바다에서 출격해 부지런히 다시 바다로 되돌아갔다. 관제사들은 ‘혹시 미 해군 6함대가 개입한 것은 아닐까’하고 판단하며 즉각 미 대사에게 사실 확인을 위해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 사이 그들도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바로 산토비토 장군이 프랑스 대외정보기관 SDECE(대외정보·방첩국)의 알렉상드르 드 마랑슈 국장에게 텔렉스로 무슨 일인지를 묻는 긴급 전신(물론 질문지나 답변지 모두 발견할 수 없었다)을 띄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산토비토의 오른팔이었던 프란체스코 파시엔자가 확인해 주었다. 당시 산토비토 장군과 함께 마랑슈 국장을 만나는 자리에 동석했던 파시엔자가 예심에서 이렇게 증언한 것이다. 비로소 국제적 음모가 조금씩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살인범과 공모자들은 일찌감치 증거 인멸에 들어간 뒤였다.

사고 이튿날인 6월 28일 새벽, 드디어 주사위는 던져졌다. 온갖 거짓말이 난무하는 포커게임이 시작된 것이었다. 먼저 미국 대사는 미국이 이번 사고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잡아뗐다. 그러나 밤사이 이 대사는 워런 크리스토퍼 미국 국무부 부장관으로부터 DC-9 여객기에 미국 시민이 탑승했는지 여부를 확인해달라는 전보 한 통을 받았다. 한편 이탈리아 공군도 기계 결함에 의한 사고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뒤에서는 동시에 우스티카 상공을 찍은 레이더 기록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그 와중에 이탈리아 주재 리비아 대사는 카다피의 명령에 따라 뜬금없이 우스티카 여객기 사고 희생자를 기리는 깜짝 추도문을 발표했다.

1970년대 말 지중해에서는 국제적 긴장이 높았다. 안와르 엘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1977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체결하고,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며 소련의 영향권을 벗어나는 등 역사적인 변절의 길을 걸었다. 당시 소련은 이집트의 변절을 결코 용서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집트를 용서할 수 없는 건 카다피도 마찬가지였다. 리비아 원수 카디피는 서구의 최대 주적으로 인식됐다. 그는 훗날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에 이어 오사마 빈라덴이 차지하게 될 자리, 요컨대 최고의 ‘깽단 보스’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카다피가 군비 증강에 나서면서 국제적 불안감이 더욱 고조됐다. 카다피는 막대한 오일달러를 바탕으로 프랑스에서는 미라주 전투기를, 소련에서는 미그 전투기와 스커드 미사일을 마구잡이로 사들였다. 카다피는 당시 분쟁국면에서 비록 자신이 주인공은 될 수 없어도 적어도 체스판의 졸 역할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분쟁에 기름을 붓는 식으로 국제적 긴장국면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했다. 같은 해인 1980년 카디피는 구쿠니 웨데이 차드 대통령을 지원하기 위해 자국 군대를 아프리카 차드에 파병했다. 당시 차드 대통령은 프랑스의 지원을 등에 업은 반군 이센 아브레를 상대로 내전을 벌이고 있던 중이었다. 웨데이 대통령은 카다피에게 지원병을 보내준다면 그 대가로 리비아와 연합하겠다고 약속했다. 리비아와 프랑스 특수부대 간 충돌이 잦아지면서 급기야 선전포고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유혈 분쟁이나 다름없는 상황으로 사태가 악화됐다. 프랑스의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은 한편으로는 차드의 우라늄 광산을 잃고 싶지 않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1981년 5월 대통령 선거를 수개월 앞둔 상황에서 자국의 안마당이나 다름없는 옛 식민지 아프리카에서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았다.

암살 정보를 리비아에 흘린 이탈리아

2011년 로자리오 프리오레 판사는 우스티카 사건을 둘러싼 프랑스의 침묵과 카다피 암살 시도를 주제로 <국제적 음모>라는 제목의 책을 지오바니 파사넬라와 공동 저술했다. 10년에 걸쳐 이 대학살 사건을 조사해온 프리오레 판사는 이 책에서 프랑스의 방해공작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증언했다. “지스카르 데스탱은 물론 프랑수아 미테랑도 마치 자물통을 채운 듯 입을 꼭 다물었다. 두 사람 모두 국가기밀을 철통같이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을 줄기차게 고집하였고, 관련 국가들이 어디인지를 절대 밝히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랑슈와의 장시간 만남(5)에서 나는 몇 가지 중요한 단서를 확보할 수 있었다. 마랑슈는 어쨌거나 프랑스를 상대로 조사해봐야 별 성과를 거두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정보국이 정말로 카디피 암살을 시도한 것이라면 절대 흔적 따위는 남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마랑슈는 개인적인 사견도 넌지시 덧붙였다. 당시 카다피가 더 이상 말썽을 일으키지 못하게 조용히 만드는 것은 여러 정부의 숙제였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탈리아의 입장은 어떠했을까? 당시 이탈리아는 남편 미국과 애인 리비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속을 끓였다. 이탈리아는 자국 에너지 수급의 40%를 리비아에 의존하고 있었고, 자마히리야(카다피 정권)가 대규모 개발 사업에 나서면서 리비아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이탈리아 노동자만 무려 2만5천여 명에 달했다. 그러니 이탈리아 정부로서는 리비아 통치자였던 카다피의 심기를 가급적 건드리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이탈리아는 심지어 리비아의 강압적인 요구마저 수용해야만 하는 처지였다. 가령 이탈리아 군 정보기관(SISMI)이 카다피의 목숨을 구해준 것만 최소 두 번이 넘었다. 먼저 1980년 8월 투브루크에서 군사 반란이 일어났을 때 한 번 카다피를 도와주었고, 1986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트리폴리와 벵가지에 대한 폭격 명령을 내렸을 때도 폭격이 임박한 사실을 카다피에게 미리 귀띔해주었다.

그러나 카다피는 답례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국 대사를 통해 로마와 밀라노 등지에 망명해 있는 리비아의 반체제 인사들에 관한 정보를 내놓지 않으면 석유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이탈리아 외무부를 협박했다. 결국 이탈리아 군 정보기관(SISMI)은 리비아에 관련정보를 넘겨주어야만 했다. 카다피는 이미 이탈리아 자동차회사 피아트의 지분을 13% 보유하고 있었고, 이탈리아의 토지와 공장과 건물을 수천 헥타르씩 매입한 상황이었다. 이제 카다피는 망명한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암살자들을 급파했다. 그렇게 해서 1980년 6월 11일 밀라노 역에서 아제딘 엘헤데리가 암살됐다. 미국은 분개했다. 암살된 자는 바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정보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군 정보기관(SISMI)은 자신들은 전혀 아는 바가 없다며 시치미를 뗐다.

리비아의 요구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카다피는 리비아의 미그 전투기들이 고장나 옛 유고 바냐루카 지역에서 수리를 마치고 돌아가는 중이라며, 아드리아해가 아닌 티레니아해 해상을 지나는 항공로를 통해 자국으로 귀국 비행하게 해줄 것을 이탈리아 정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실상 카다피는 코르시카섬 소렌자라에 있는 프랑스 공군기지의 방공능력을 한 번 시험해보고 싶었다. 또한 나폴리만에 주둔 중인 프랑스 부대는 물론 시칠리아에 있는 시고넬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해군항공기지의 상공을 자국 전투기가 자유로이 활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미 해군 6함대에 과시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든 이탈리아 공군이 눈을 감아줘야 했다. 다시 한 번 카다피는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해냈다. 이탈리아 관제사들에게 비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NATO 통합방공시스템의 경고등이 울리지 않도록 ‘적국’ 리비아 전투기의 항적을 모조리 지우라는 명령이 떨어졌던 것이다. 이것은 분명 용납할 수 없는 사기 행위이자, 동시에 자국의 주권을 포기한 비굴한 처사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탈리아의 두 우방국인 프랑스와 미국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과도 같았다.

의문 속에 추락한 리비아의 미그 전투기

1994년 3월 비첸차에 주둔 중인 NATO 제5연합전술공군(ATAF) 사령부의 모든 첩보활동을 관할하는 베로나 소재 SISMI 기지의 고문서실에서 의문의 화재가 발생했다. 이 화재 사고로 2,000건이 넘는 1975~89년 서류들이 소실됐다. 그러나 프리오레 판사는 가까스로 화마를 비껴간 서류들 가운데서 ‘극비’ 혹은 ‘기밀’로 분류된 문서들을 발견했다. 1980년 6월 27일 사고 이전 문서들은 동맹국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프랑스가 얼마나 격렬하게 반응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가령 프랑스 정보국은 차후 티레니아해 상공을 비행하는 미그기가 발견되면 무조건 격추할 것이라며 엄중하게 경고했다. 한편 그 외 우스티카 참사 이후 작성된 서류들도 발견됐는데 이 문서들은 DC-9 여객기 격추를 프랑스의 실수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전 경고에 따른 이성적인 행동이었으며, 다음에도 또 다시 리비아 항공기가 출연한다면 격추할 뜻을 분명히 밝혔다.

여기서 잠깐 시곗바늘을 조금만 돌려본다. 1980년 7월 18일, 이탈리아 국방장관은 칼라브리아 지방 실라 산악지대에서 리비아 미그 전투기 한 대가 추락했다고 발표했다. 시신을 부검하기 위해 크로토네의 의사 2명이 현장에 불려갔다. 당시 사망한 조종사는 이탈리아 공군의 비행복과 군화를 착용하고 있었다. 아마도 풀리아 갈라티나에 있는 이탈리아 공군기지에서 훈련 중이던 리비아 비행사일 것으로 추정됐다. 부검은 카스텔실라노 묘지에서 진행됐다. 현장에는 군복 차림의 고급장교들과 정보국 요원들이 동석해 시신의 사진을 찍느라 분주했다. 그러나 시신의 상태는 일말의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절대 7월 18일 사망한 시신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적어도 남자가 사망한 지 3주가 넘어 보였다. 3주 전이라면 분명 우스티카 여객기가 추락한 6월 27일 저녁일 가능성이 컸다.

훗날 이탈리아 공군 참모총장으로 승격하게 될 한 장교가 주축이 된 사고조사위원회는 리비아의 미그기 조종사가 벵가지에서 이륙한 뒤 심근경색을 일으켰을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의식을 잃은 채 자동항법장치로 비행을 하다 연료가 바닥이 나자 칼라브리아에서 추락을 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였다. 사실상 7월 18일 이오니아해에서는 NATO의 선박과 항공기들이 곳곳에 배치돼 적군, 즉 리비아군의 침투에 대비한 방공훈련[일명 ‘데몬 잼(Demon Jam)’]이 한창이었던 것이다. 한편 그 사이 조종사의 사망 시점이 더 빨랐을 수 있다는 소견이 담긴 부검결과서가 난데없이 자취를 감췄다. 로마로 이송 중에 부패가 한참 진행된 시신에서 채취한 DNA 샘플도 연기처럼 사라졌다.

미심쩍은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부서진 미그기 표면에는 대공포 구멍이 잔뜩 뚫려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안 하사관이 상부에 보고했지만, 상관들은 이 사안에 별다른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프리오레 판사가 이러한 사실을 알아냈을 때 공군은 사고 이후 미그기의 강도를 실험하기 위해 동체에 포를 쏘았다고 둘러댔다. 심지어 6월 27일 칼라브리아 일대 여기저기서 항공기들이 마치 대공 미사일이 바닥나기라도 한 듯 대공포를 쏘며 전투기 한 대를 뒤쫓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나왔는데도 말이다. 한편 CIA 이탈리아 지부장 듀안 클래리지도 미그기가 공식적으로 발견되기 나흘 전에 이 전투기에 대한 조사를 벌인 적이 있다고 주장했다(공군 정보부를 지휘하던 한 장군의 수첩 메모에 1980년 7월 14일자로 이 같은 사실이 적혀 있었다). 물론 그는 재판이 열리자 이 주장을 번복했다.

가장 그럴듯한 가설은 미그기가 혼자서 혹은 다른 전투기들과 함께 공중전을 벌이다 수세에 몰리자 크로토네 비행장으로 도주를 시도했을 가능성이다. 프리오레 판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크로토네 비행장에 있던 헌병대장 빈센초 인졸리아는 사고가 일어난 날 밤 긴급 연료 공급을 준비 중에 있었다. 아마도 도주 중인 리비아 미그기에 연료를 주입하려던 것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프랑스 전투기가 쏜 대공미사일에 여객기 피격”

그렇다면 다시 한 번 과거로 돌아가 보자. 이 두 번째 플래시백에는 아마도 불가능한 조사에 관한 이야기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6월 27일 레이더를 담당한 관제사들의 이름이 기재된 근무명령서와 레이더 영상, 교신 녹취록 등이 줄줄이 종적을 감췄다. 사건 당일 밤 우스티카 상공에서 벌어진 일을 재구성하는 데 필요한 문서와 증거는 더 이상 찾아낼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1980년 11월 로마 치암피노 비행장의 레이더 기록은 놀랄 만한 사실을 밝혀주고 있었다. 바로 추락 사고가 발생하기 직전 DC-9 여객기 근방에 두 개의 신호가 포착됐는데, 미국 연방항공청(FAA) 조사관 존 매키덜은 이것이 한 군용기의 신호일 것이라고 이탈리아 법관들에게 설명한 것이다. 사실 매키덜이라면 이 분야에 권위 있는 전문가라 할 만했다. 전직 전투기 조종사 출신인 그는 훗날 1986년 미국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폭발했을 때도 사고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조사에 함께 참여한 바 있다. 한편 미국 국방부 소속 존 트렌슈 고문도 동일한 사실을 확인해줬다. 1982년 영국 공영방송 BBC 프로그램 ‘파노라마’에 출연한 그는 “DC-9 여객기가 사실상 전투기가 쏜 대공미사일에 맞아 피격된 것”이라면서 “전투기가 고전적인 공격전술에 따라 민항기를 조준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으로 우스티카 사건 조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DC-9 여객기가 실수로 피격된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처음 제기됐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해명하기 쉬운 편리한 가설은 아니었다. 대체 어떤 나라의 전투기가 여객기를 격추했단 말인가? 그리고 격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유력한 용의자 중 하나인 미국은 자국은 이 사건에서 전혀 감출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은 해군 항모 USS 사라토가호의 항적을 설명하는 순간이 되자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해명으로 진땀을 뺐다. 미 국방부는 당시 항공모함이 나폴리 정박지에 있었고, 이탈리아의 TV 전파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레이더를 잠시 꺼 둔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하필이면 그 날 밤 바로 그 자리에 레이더를 꺼둔 미국의 항공모함이라니? 한편 6월 28일 아침 미 해군 6함대에 승선한 함장에게 전달되었던 보조레이더 기록들도 이후 홀연히 종적을 감췄다. 물론 항해일지 원본도 함께 사라졌다. 원본을 파기한 뒤 깨끗하게 다시 작성된 새 일지에는 별다른 부가설명은 따로 달려 있지 않았다. 그러나 6함대가 우스티카 상공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전혀 몰랐다는 말은 곧이곧대로 믿기가 힘들다. 사실상 당시 사고는 6함대 바로 머리 위에서 일어났다. 그러니 단순히 프랑스를 엄호하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나, 당시 미국은 간접적이나마 사건에 개입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편 두 번째 용의자인 프랑스는 당시 사고 해역에 배치된 자국의 해군 병력은 전혀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국방부는 당시 항공모함 클레망소가 툴롱 해역에, 포슈는 항구에 정박해 있었다고 주장). 그리고 소렌자라 기지의 전투기들 역시 오후 5시에 모두 비행 활동을 마쳤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가까스로 증거 인멸의 운명을 비껴간 포지오 발로네 기지의 레이더 기록은 정반대의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분명 레이더 기록에는 자정을 넘은 시간까지도 소렌자라에서 전투기들이 이륙한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중 두 대는 참사가 일어나기 바로 직전 티레니아해 남쪽을 향해 출격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거짓말을 한 것일까?

사건 이후 연이은 의문의 사망자들

아마도 그에 대한 답변은 포지오 발로네의 관제사들이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법관들이 관제사들을 심문하려고 마음먹었을 때는 이미 때가 너무 늦어버린 뒤였다.

6월 27일 포지오 발로네 기지의 지휘를 맡았던 장교가 1981년 5월 9일 28세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둔 것이다. 당시 레이더를 담당했던 하사관도 1987년 3월 30일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 우스티카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 하사관은 아내와 누이에게 “지난 밤 이탈리아는 거의 전쟁 직전까지 갔었다”는 말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자살, 불안장애, 사고 등 우스티카 참사 이후 잇따른 의문의 사망자만 모두 20여 명에 달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이한 사건은 단연 포지오 발로네 레이더 기지와 그로세토 지역 기지에서 일어난 사망 사건이었다. 판사들은 목을 맨 레이더 담당관이 프랑스에서 군사 레이더 기술 교육을 받고 집으로 돌아온 날 극심한 불안 증세를 보였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당시 레이더 담당관은 자신이 마량슈가 이끄는 프랑스 정보국의 표적이라는 확신으로 불안해했다. 우스티카 참사의 진실을 아는 자 가운데 하나로 정보국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편 판사들은 6월 27일 사고 당일 밤 그로세토 기지 전투기 F-104를 몰던 두 베테랑 조종사 이보 누타렐리와 마리오 날디니가 DC-9 여객기를 목격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당시 레이더 교신 녹취록을 분석한 NATO의 여러 공식 보고서들에 따르면, 두 이탈리아 조종사는 다른 항공기 두 대를 발견하고는 재빨리 NATO 매뉴얼에 정해진 대로 비상경계 신호를 울리며 황급히 회항했다. 매뉴얼대로 기지 위를 삼각 편대로 비행하며 아무 말 없이 무선호출버튼을 세 차례 눌러 비상사태를 알렸다[일명 ‘스쿼크(squawk)’라 불리는 절차].

한편 DC-9 여객기 잔해 분석 역시 소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잔해를 수습하기를 원하는 판사에게 이탈리아의 법무장관은 이 작업에는 60억 리라라는 너무 과도한 비용이 든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코시가 대통령과 한 차례 충돌을 빚은 크락시 총리가 뜻밖에도 1986년 잔해 수습 작업에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주었다. 먼저 코시가 대통령은 다리아 본피에티 여사가 이끄는 유가족협회와 면담을 한 뒤 진상 규명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내왔다. 이에 크락시 총리는 진실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사건 당시 이탈리아 총리를 맡고 있던 코시가뿐일 것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나 이후 어쨌든 크락시 총리는 필요한 자금을 마련해냈다. 이탈리아는 프랑스 국립해양개발연구소(IFREMER)에 인양 작업을 의뢰했으나 IFREMER는 동체 일부만 인양했다. 이탈리아 군정보기관(SISMI) 신임 책임자였던 풀비오 마르티니 제독은 총리가 IFREMER에 작업을 맡긴 결정을 맹렬히 비난했다. 마르티니 제독은 국방부에 IFREMER와 프랑스 정보국 간 유착관계가 있음을 경고했다. 그러나 1987년 6월 17일 의회에서 열린 우스티카 참사 진상조사위원회에 참석한 IFREMER 대표 피에르 파퐁은 이런 정보국과의 유착관계를 부인했다. 그러면서 그는 “IFREMER의 고결함을 의심하는 것은 프랑스 정부의 고결함을 의심하는 것과 같다”는 흥미로운 발언을 덧붙였다.

진상보고서에 대해 관련 국가들은 침묵

그로부터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격납고 안에서 DC-9 여객기 전체를 재조립하기 위한 두 번째 잔해 수습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노력은 결국 무위로 돌아갔다. 당시 일부 전문가들은 미사일 격추 가설을 제시했고, 또 다른 전문가들은 여객기 화장실 폭탄의 폭발 가능성을 제기했다. 한편 프리오레 판사는 조사 도중 이탈리아 공군 고위 관계자와 내통한 사실이 드러난 두 전문가를 배제해야 했다. 조사 결과 군 장성들이 제기한 폭탄 설치 시나리오는 앞뒤가 맞지 않는 가설로 판명 났다. 화장실 잔해에서는 결코 폭발물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폭발 중심부에서 불과 몇 센티미터 근처에 있는 동체에 전혀 손상도 입히지 않고 폭발물을 설치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더욱이 DC-9 여객기는 예정시간보다 2시간이나 더 늦게 출발했다. 만일 시한폭탄이 설치되어 있었다면 여객기는 볼로냐 활주로에서 폭발했어야 맞다. 결국 군 장성들은 증거인멸 혐의로 재판장에 서는 신세가 됐다.

그러나 2007년 1월 10일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던 피고들은 상고심에서 무죄 석방됐다. 무죄 판결이 나자 재판장에는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쏟아졌다. 그러나 군 장성들의 안도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몇 달 뒤 책임회피 전략을 펴는 데 있어 중요한 우군 역할을 했던 코시가가 돌연 깜짝 선언을 한 것이다. 그는 이제 진실을 밝혀야 할 때가 왔다며 프랑스에 비난의 화살을 겨눴다. 그에 따르면, DC-9 여객기는 항공모함 클레망소에서 출격한 전투기에 의해 피격됐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전투비행사는 자신의 실수를 인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

사실 이탈리아 전 국가수반이 이 같은 돌발 발언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1990년 에든버러에서도 그는 40여 명의 기자들과 같은 수의 위스키 잔이 앞에 놓인 자리에서 거만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자신이 글라디오(Gladio)의 ‘수호자’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글라디오’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주의 부상을 저지하고, 소련 주도의 바르샤바 조약군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NATO가 창설했던 일명 ‘스테이 비하인드(Stay Behind)’로 불리는 비밀 첩보 조직의 이탈리아 지부였다.(6) 그러나 그런 그가 정작 자신이 총리직에 있을 때 일어난 우스티카 참사에 있어서는 과연 어떤 행동을 보였던가?

당시 클레망소의 함장이었던 장 드 라포르카드 해군 대령은 코시카 폭로의 진위 여부를 확인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당국은 침묵과 거짓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가령 소렌자라 기지의 비행 활동이 오후 5시에 모두 끝났다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소렌자라 기지가 주장한 시간 이후로도 7시간이나 더 전투기들이 비행 활동을 벌였음을 확인해주는 증거는 비단 이탈리아의 레이더 기록뿐만이 아니었다. 직접 현장을 지켜본 목격자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안토니오 보조 헌병대장이었다. 그는 당시 우연히 아내와 형네 부부와 함께 소렌자라 기지 활주로 인근 호텔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1980년 6월 27일 밤 끊임없이 활주로를 오가는 전투기들 소리에 밤잠을 설쳤다는 것이다. 한편 1997년 NATO 보고서에도 이 전투기들에 대한 내용이 신고됐다.(7) 비록 프랑스가 NATO 군사체제에 편입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구체적인 신원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포지오 발로네 기지 레이더에 잡힌 전투기 항적과 일치한다는 보고였다.

이 NATO 보고서는 우스티카 비극의 원인을 규명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어 주었다. 보고서는 사건 당일 정체불명의 항공모함 1대와 군용기 12대가 그곳에 있었음을 확인해주었다. 당시 군용기 가운데는 미국의 공중조기경보 관제시스템(AWACS) 정찰기도 한 대 포함돼 있었다. 그러니 엘베 섬 바로 위를 비행했던 이 정찰기가 모든 사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으리란 점은 자명한 셈이다. 세상에 사막처럼 텅 빈 하늘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으니까! 이탈리아 판사들은 1980년 6월 27일 옛 유고에서 이륙한 리비아의 미그 전투기가 사고 해상을 비행하던 리비아 원수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도록 DC-9 여객기에 바짝 붙어 은밀히 비행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로세토 기지의 F-104 전투기가 침입자를 발견하고 경보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그 뒤 클레망소 항공모함이나 또는 소렌자라 기지에서 출격한 프랑스 전투기들이 리비아 항공기를 공격하면서 그날의 참극이 빚어진 것이다.

진상조사 보고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관련국들은 저마다 자국의 책임을 은폐하기 위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가령 이탈리아는 자국 영공 침투를 불법으로 허용한 책임이 있다. 또 미국은 범인과 관계가 깊은 목격자이거나 혹은 심지어 공모자일 수도 있다. 한편 리비아는 참사를 직접 선동했고, 프랑스는 정기여객기 탑승자 81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 모두 책임이 있다.

2011년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결국 카다피의 죽음을 초래한 리비아 군사개입에 나서면서 마침내 리비아와의 해묵은 원한 관계를 청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프랑스 정부는 전격적인 태도 변화를 통해 우스티카 사건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 있다. 한편 4월 22일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도 1970년대 테러 관련 기밀문서에 대한 비밀 해제 조치를 승인하는 법령에 서명했다. 이로써 우스티카 참사의 진실을 규명하는 데 앞으로 더 많은 새로운 단서들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렇다고는 하나, 대체 우스티카 대학살의 원인이 된 미사일이 어느 나라의 것이었는지 밝히기까지는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하는 것일까

 

글·안드레아 푸르가토리 Andrea Purgatori

<코리에레 델라 세라> 대기자 역임. 현재 <허핑턴포스트> 필진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사건 초기부터 줄곧 DC-9 여객기 추락 사고를 취재해왔으며, <Ustica. Storia di un ’indagine>(Plus출판사, 피사, 2006년)를 저술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추락사고 이후 이 민간항공사는 1981년 파산했다.

(2) Servizio per le informazioni e la sicurezza militare. Agenzia informazioni e sicurezza esterna(AISE)의 전신인 이탈리아 정보기관

(3) 프랑스 대외정보기관. 1982년 DGSE로 개칭

(4) Giovanni fasanella, rosario Priore, <Intrigo internazionale>, Chiare lettere, 밀라노, 2010년

(5) 프리오레 판사는 1981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암살 사건 심문과는 별개로 마랑슈를 만났다.

(6) Francois Vitrani, ‘이탈리아, ‘제한적인 주권 국가’인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0년 12월호

(7) NATO는 레이더 장비에 대한 조사를 벌이려면 모든 회원국의 동의가 필요하도록 했다. 따라서 정치 외교적 숙려에만 수년에 걸렸다. 결국 1995~99년 NATO 사무총장을 지낸 하이베르 솔라나 덕분에 최종적인 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