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고 독재권력에 대한 프랑스 후견은 언제까지?

2014-07-28     미쉘 갈리

 포르 냐싱베 현 토고 대통령은 2015년 토고 대선에 재출마할 것인가? 그의 퇴진은 5월 중순에 시작된 모든 정당들 간의 대화에서 중요한 쟁점이다. 반정부세력은 40년 전부터 선거 때마다 저질러진 살인과 부정선거의 문제를 해결할 근본대책을 요구한다. 그 첫 번째가 프랑스가 독재권력 지지를 중단하는 것이다.

국제인권사면회가 예전에 ‘공포국가’(1)로 규정한 토고에서 프랑스 기자는 당혹감에 사로잡힌다. 49년 전부터 살인적 정권을 비호해온 국가에서 온 기자는 의심쩍은 직업 행위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프랑스 AFP 통신 주재원이면서 1967년에서 2005년까지 토고에서 군림했던 냐싱베 에야데마 장군과 친분관계에 있던 인물은 다름 아닌 프랑수와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1981~1995년 재임)의 아들인 장 크리스토프 미테랑이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제적 미디어나 아프리카 관련 정기 간행물에서 일하는 상당수의 기자들은 파리에서 그들의 생활수준이 보여주듯 대통령궁에 ‘봉투’를 가지러 가는 관례를 유지하고 있다. 프랑스군은 아프리카 독재자들의 탄압적인 군대를 지도하고, 외교관들은 이들의 불법선거와 대량학살을 눈감아준다.

39년 동안 에야데마 장군은 ‘프랑사프리카’(프랑스와 아프리카의 합성어로, 프랑스의 지지를 받은 아프리카 독재정권을 빗대어 만든 단어-역주)의 독재정권들의 화신이었다. 그는 1963년 1월 13일 토고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실바뉘 올랭피오(2)의 암살에 일조하면서 유명해졌다. 그의 후임은 그런 아버지의 아들인 것 말고는 어떠한 합법성도 없이 그의 노선을 이어갈 뿐이었다. 2005년 포르 냐싱베의 부정 ‘당선’은 반정부 진영에서 1천여 명의 인명 피해와 4만 명의 난민을 초래했다.(3)

토고 수도 로메 시의 베 알라글로 지역 판자촌에 살고 있는 아코코 아그베주흘롱은 파안대소로 우리를 맞으면서 누덕누덕한 철제 오두막집에서 어떻게 사는지 미나 언어로 설명했다. 36세의 이 여성은 쓰러지기 일보직전의 오두막집에 사는데 자칭 ‘동네 두목’에게 매달 8000세파 프랑(12유로)을 내야만 한다. “여긴 보건진료소도 없고 공립학교에는 교사들이 없다”면서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사립학교에 보낸다”고 말했다. 1년 등록금 5만 세파 프랑(76유로)을 마련하기 위해서 그녀는 바느질을 비롯해 옥수수로 만든 토고 고유음식인 ‘악크판’과 같은 가정음식 판매 등 잡다한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반복되어 짓밟힌 민주화 염원

수도 로메 시는 무자비한 권력에 의해 버려진 듯 시장도 시의원들도 없다! 로메 시의 광역지구 중 네 곳은 석호의 범람을 막을 도시계획이 부재하여 주민들이 여러 달 전부터 물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주변 주민들은 해수면 아래에 도시가 건설됐음을 강조하면서 지난 범람 때 수위가 허리까지 이르렀다고 가리켰다. 이것이 인간개발지수 순으로 세계 164개국 중 149위(4)이고 인구 약 7백만에 달하는 국가의 서민들이 생활하는 모습인 것이다.

선거 때마다 잠정적 개표결과가 나오자마자 삭제되고 탄압이 따르지만 야권에 대한 지지도 상승을 보여주곤 했다. 수도 남부지역 시민들은 대체적으로 대서양 연안에 초호화 저택에 거주하면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영위하지만 정부에 대해선 비판적이다.

토고는 민주화 염원이 반복되어 짓밟히는 현대사를 갖고 있다. 1987년까지 토고는 일당체제에 의해 통치되었다.(5) 체제가 점진적으로 개방되었지만 대통령 측근세력은 권력 유지를 위해 폭력은 물론, 갖은 공작과 수단을 동원하였다. 반정부세력이 힘겹게 얻어낸 협약들이 ‘국제사회의’ 무관심 속에 정권에 의해 수없이 무시되어 왔다. 야권인사들은 그러한 정치놀음에서 회유에 말려들어 신망을 잃고 ‘자리’를 챙겼다.

1991년 11, 12월에 냉전의 종식으로 아프리카 대륙에도 민주화 시대가 도래하였다. 토고의 의회 격인 ‘살아있는 힘’ 전국대회는 로메 시 전 변호사협회장이자 인권연맹 창립자인 조셉 코쿠 코피고흐를 국무총리로 지명하였다. 그러나 에야데마 장군의 돌격대는 총리실을 두 달 동안 포위하고 정치실험에 재빨리 종지부를 찍었다. 브뤼노 들레 프랑스 대사가 중재에 나섰으나 소용없었다. 코피고흐 국무총리는 고립되고 어쩔 수 없이 정권에 협력한 후 사임했고, 군 출신의 독재자 냐싱베 에야데마의 집권여당은 폭력으로 민주화 이행의 대망을 짓밟았다. 코피고흐 전 국무총리가 민주야당공동체(Collectif de l’opposition democratique)가 주도한 총파업의 중지를 촉구하자, 민주야당공동체는 공개적으로 코피고흐의 의도가 모호하며, 독재정권에 너무 ‘협력적’이라고 비판했다.

갈수록 거세지는 야권의 결사적 반발에 부딪히자 집권세력은 허둥대면서 저명인사들을 영입하는 전략을 썼다. 출중한 경제학자 에뎀 코죠, 변호사 야워비 아그보이보는 둘 다 반정부세력의 희망이었으나 에야데마가 1994년 장관 자리를 제시하여 회유하였다. 2005년 2월, 에야데마가 심장마비로 사망해 그의 38년 장기독재가 종지부를 찍었으나, 같은 해 4월 대통령 선거에서 그의 아들 파우레 냐싱베가 다시 집권한 뒤에 통치방식이 더욱 교묘해지고 악랄해졌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토고 초대 대통령의 아들이면서 반정부세력의 고명한 인물인 질크리 올랭피오는 온 국민의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였지만 2010년 이후 정권에 협력하면서 그만 신망을 잃었다. 그는 여러 차례 냐싱베 대통령의 회유 끝에 거국 내각 참여를 수락했다. 그러자 그의 추종자 중 4분의 3은 당을 떠나 넬슨 만델라의 저항운동을 본떠서 전국개혁연합(ANC: Alliance nationale pour le changement)을 창당하였다.

2015년 대선을 ‘공정’하게 치를 목적으로 현재 장 피에르 파브르 ANC 당수와 정부는 교섭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회의적 분위기가 대세다. 파브르 당수는 독재정권에 대한 질문에 “아들(나싱베)이 아버지(에야데마)보다 더 심하다”고 탄식했다.

토고와 같은 마피아 국가의 힘은 특히 민병대에서 나온다. 카비에 종족 출신으로 구성된 정권의 돌격대는 불법을 자행하고 무지막지하다.(6) 모든 반정부세력의 주요인사들은 매우 활발한 전국규모의 조직에서 투쟁하는데 그중 대표적인 토고인권연맹은 서방세계의 시민단체들에게 전달되는 실태 보고서를 정기적으로 발간한다.(7) 냐싱베 정권은 그 보고서가 유럽에 전파되어 자신의 후원자들이 그것을 보고 동요될까봐 염려한다.

그러나 황당하게도 냐싱베 대통령의 후원세력들은 요지부동이다. 예를 들어, 전 유럽연합 집행위원인 벨기에의 루이 미쉘은 로메 시에서 오히려 파브르 ANC 당수를 비방하였다.(8) 그는 ‘유럽선거감시단’의 단장으로서 말리 대선에서 한 것처럼, 차기 선거들을 엉터리로 감시할 것인가? 전에 이미 에냐데마 세력은 프랑스의 샤를 데바슈와 같은 탁월한 국제적 법률가들에 의해 과거에 치른 선거들의 합법성을 인정받았던 적이 있다.(9)

토고의 시민사회가 발 벗고 나섰다. 로메 시에는 지역시민위원회들이 수없이 설립되어 비밀리에 지역을 관리하고 있다. ‘물에 잠긴’ 캉니코페 지역에서는 그 같은 위원회가 자발적으로 자원봉사에 나서 주기적인 홍수에 맞서 제방 축조와 펌프 사용 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위원회는 중학교, 축구장, 가림막 있는 시장 등을 담당하고 있다. 각각의 시민이 한 몫을 하는 것이다. 국가의 부재가 실험민주주의의 새싹학교를 만들어 낸 셈이 되었다.

그러나 주민들을 조직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정당들이다. 곧 창립 4년이 되는 파브르의 ANC는 해변과 각 지역 등지에서 주말마다 군중집회를 개최해 왔다. 그래서 2월 중순, 카비에 종족이 다수를 차지하는 ‘북군파’ 지역에서 대규모 군중대회가 열렸다. 사제, 목사, 회교지도자들이 개회사를 읽고 연사들은 땡볕에서 몇 시간 동안 미나 언어, 카비에 언어, 코토콜리 언어로 번갈아 가면서 연설하였다. 수개월 전부터 반체제 활동가들은 나라의 쇠락에 대한 놀라운 집단 의식을 갖고 산간벽지, 마을 등지에서 자기들의 지도자를 기다려 왔다. 그들은 유혈사태로 얼룩진 예전 선거 때의 열정을 되살려 때때로 메시아의 억양으로 자신들의 감정을 표출했다.

신진 반체제세력의 상징적인 전형은 카리스마적인 변호사 아자봉 제우스가 이끄는 놀라운 토고거국공동체(Collectif sauvons le Togo: CST)이다. 2012년 4월 창설된 토고거국공동체는 여러 개의 인권보호단체를 포함한 9개의 단체와 6개의 당과 정치조직으로 구성되었다. 이 공동체는 그 해, 공정 선거를 위한 개혁과 ‘독재정치 종식’을 내걸고 10만의 인파를 운집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타결된 협정이 정권에 의해 곧바로 파기되면서 성과는 미미하였다. 토고거국공동체는 토고재래시장 등지에서 일어난 연쇄방화범죄에 대한 실태 보고서(10)를 발행하여 2012년 1월, 체제의 하수인들이 반대진영의 이미지 훼손과 대중의 의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죄악을 저질렀음을 밝혀내었다.

이 야릇한 ‘미확인 정치적 물체’는 문자 메시지, 이메일, 벽보, 가두행진, 법정고발, 해외교포와의 협력투쟁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아랍혁명’ 모델을 명백하게 내세웠다. 반체제진영은 ‘프랑사프리카’의 독재정권 도미노들 중 한 개가 넘어지길 기다리고 있다. 불씨는 아마도 조만간 부르키나파소에서 튈 것으로 예상된다. 이 나라의 법률가들과 야당지도자들이 블레즈 콩파오레 대통령이 헌법을 위반하는 네 번째 임기를 엿본다고 의심하고 비난을 퍼붓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반프랑스 시위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 카메룬, 또는 자기 선친처럼 카리스마가 없는 알리 봉고 대통령의 가봉에서 불씨가 튈 수도 있다. 또 그곳이 토고가 아니라는 법도 없다.

2015년에 있을 대통령 선거가 정권을 타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까? 냐싱베 대통령은 원칙적으로 재출마할 수가 없다. 그러나 헌법학자 데바슈는 법적인 대응책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여당의 이름을 변경하여 재출마 금지를 우회하는 것으로 당명의 약자를 바꾸기만 하면 판세는 이미 결판이 난 거나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전보다 믿음이 줄어든 군대

반체제세력에 대한 지지를 미리 가늠해 볼 수 있는 지방선거는 원칙적으로 대선 전에 치르게 되어 있다. 그러나 선거인 명부, 국립선거관리위원회, 선거비용규정 등 그 어느 것도 준비된 것이 없다. 정당들 간에 합의된 협정들은 이미 준수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권에 유리한 종족, 사회적 기준으로 분할된 현 선거구에 대한 개정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만약, 투표 방식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야당은 범야권 통합 후보로 당연히 ANC의 지도자인 파브르 당수를 지명해야 승리할 수 있다. 그런데 야권에는 노동당의 트로츠키 노선의 클로드 아메강비, 무지개연합의 후보, 그리고 특히 최근 완강한 반체제인사로 돌아선 아그베요메 코죠 전 국무총리(2000~2002년 재임) 등이 있다. 상대진영에서는 냐싱베의 재출마, 야권의 부패, 유력인사 영입에 의한 야권분열, 선거비용조달을 위한 투자가들에 대한 갈취, 1998년과 2003년 Euro RSCG 광고기획사처럼, 파리의 광고기획사들과 맺은 초호화판 광고계약 등과 같은 독재체제의 ‘선거기술’이 착착 가시화되고 있다.

새로운 사건은 부정선거에 대한 반발을 피로 탄압해온 토고 군부가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하는 일부 군인사에 의하면 국가전복음모죄로 몰린 냐싱베 대통령의 이복형제 ‘크파차’에 대한 고문과 부당한 재판이 군부를 분열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메 시에서는 세계가 변하고 있고 프랑스도 궁극적으로는 이 사실을 인지할 것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토고 독립 후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토고 선거의 운명은 최후 파리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유엔개발계획(UNDP), 유럽연합의 대표들과 독일(프랑스처럼 식민지 통치국), 미국, 프랑스 대사관들로 구성된 비공식적인 ‘5자 그룹’이 정권과 민주적 야권 사이에 모호하고 신뢰할 수 없는 타협점을 모색하면서 정체된 정국을 연장시킬 수 있다.

2015년에는, 프랑스 외무부의 ‘아프리카 국장’ 장 크리스토프 벨리아르와 대통령의 두 비서 엘렌 르갈, 토마 멜로니오 등이 프랑수와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외무부 장관 로랑 파비우스에게 주는 조언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프랑스는 말리와 중앙아프리카에서의 군사활동처럼 아마도 ‘세력권’ 내에서 후견인 역할을 더 연장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았기 때문이다.

글·미쉘 갈리 Michel Galy

 정치학자로 분쟁연구소 연구원이며 <말리 전쟁>(라 데쿠베르트, 2013년 6월)의 저자이다.

번역·손종규

프랑스 렌느2대학 박사과정 수료

 

 

(1) 1999년 5월의 성명서. 유엔과 아프리카 통일 기구(1999)의 보고서는 반체제인사 암살사건으로 단정지었다.

(2) Zeus Komi Aziadouvo, ‘실바뉘 올랭피오, 범아프리카주의자와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Sylvanus Olympio, panafricaniste et pionnier de la Cedeao)’, L’Harmattan, Paris, 2013년

(3) 유엔활동 보고서, 유엔인권고등판무관, 뉴욕, 2005년 9월

(4) 유엔개발계획, 인간개발 보고서, 제네바, 2012년

(5) Godwin Tété, ‘토고 역사. 공포의 긴 밤(Histoire du Togo. La logue nuit de terreur)’, A. J. Presse, Paris, 2006년

(6) Lire Comi M. Toulabor, ‘토고, 공룡과 코트디부아르 증후군(Au Togo, le dinausaure et le syndrome ivoirien)’,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3년 3월호

(7) Gilles Labarthe, <토고, 노예제도에서 마피아식 자유주의경제(Le Togo, de l’esclavage au libéralisme mafieux)>, Agone, Marseille, 2013년

(8) Monique Mas, ‘유럽의회는 포르 냐싱베의 당선을 인정하지 않는다(Le Parlement européen ne reconaît pas l’élection de Faure Gnassingbé)’, Radio France Internationale, 2005년 5월 13일

(9) 데바슈 전 엑스 마르세이유 교육감은 바사를리 재단(la Fondation Vasarely) 사건에서 배임죄를 선고 받았다.

(10) ‘카라 시와 로메 시의 시장 연쇄방화범죄에 대한 조사보고서’, 토고거국공동체, 로메, 2013년 11월

 

(11) Denis-Constant Martin, ‘미확인 정치적 물체의 자취를 따라서(Sur la piste des OPNI.Objets Politiques non identifiés)’, Karthala, Paris, 200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