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은 발칸반도의 잘못인가

2014-07-28     장 아르노 데랑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가 암살당했다. 이 사건이 1차 세계 대전을 촉발시킨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하지만 세르비아의 정치 상황을 1차 세계대전 발발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발칸반도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강화할 뿐 아니라 1,85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학살전쟁의 진정한 원인을 은폐하는 것이다.

진정 유럽의 운명이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결정되었는가? 그날 세르비아 군부가 지원하는 비밀결사단체 보스니아 청년단의 단원이며 ‘범슬라브’ 민족주의자 청년인 가브릴로 프린시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후계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처를 향해 총 두 발을 발사했다.

사라예보 사건은 시대가 바뀔 때마다 달리 해석되며 20세기 내내 유럽인의 기억을 지배했다. 1941년 사라예보에 진격한 독일 나치장교들은 암살 장소에 있는 추모석판을 뜯어내 히틀러에게 생일선물로 바쳤고,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수립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구 유고연방)의 공산주의 정권은 그 자리에 석판을 다시 세우면서 프린시프의 발자국도 시멘트 바닥에 함께 새겨 넣었다. 구 유고연방은 1918년 감옥에서 폐렴으로 죽은 젊은 혁명가 프린시프를 영웅이자 해방자로 추앙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의 시장은 암살당한 황태자를 추모하는 새로운 기념물 제막식을 지난 6월 28일 거행하였다. 반면 암살자 프린시프의 흉상은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있는 칼레메그단 성채로 옮겨질 예정이다.

사라예보 사건이 그렇게 중요한가? 영국의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클라크는 자신의 베스트셀러 <몽유병자들>(1)에서 “1차 세계 대전의 원인을 복기할 필요가 있다”고 기술했다. 클라크에 따르면, 1차 세계대전은 피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사라예보 사건은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한 구실이 되었을 뿐 아니라 주변강국들의 합종연횡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렇게 사라예보 사건의 중요성을 재평가하면서 클라크는 유럽을 전쟁터로 몰고 간 책임을 세르비아의 정치 상황에 물었다. 당시 남 슬라브 민족(‘유고’는 남쪽을 의미)을 통합하려는 민족주의 운동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호령을 포함한 발칸반도 전체에서 크게 확산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1878년 위임통치하고 1908년 합병한 후,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관계는 악화일로였다.

제국주의 열강은 뒷전, 세르비아에 책임 전가

하지만 클라크는 발칸반도에서 다 죽어가는 오스만왕국의 전리품을 차지하기 위해 제국주의 야심을 드러냈던 열강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축소했다. 그 대신 1903년 쿠데타로 세르비아의 오브레노비치 왕조가 폐위되고 카라조르제비치 왕조가 들어서는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많은 페이지를 할애했다. 오브레노비치 왕족 학살은 세르비아인들의 야만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얼마 뒤에 사라예보에서 벌어진 황태자 저격사건은 세르비아인들의 국왕 암살 성향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클라크의 시각에 대해 세르비아의 역사가들은 “역사적 수정주의”라고 비판한다. 몇몇 민족주의자들은 “90년대 발칸반도에서 있었던 전쟁에 대해 아직도 세르비아인들에게 값을 치르게 하려는 서방의 이데올로기 보복”이라고 주장한다. 민족주의자들만 비난의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다. 보스니아의 언론인 겸 작가인 무하렘 바줄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범슬라브주의에 대한 열망을 의도적으로 혼동하게 하는 새로운 역사 쓰기에 일침을 가했다.(2) 그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복권 움직임은 발칸반도에서의 범슬라브주의 운동의 정당성을 부인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럽의 심장 사라예보’는 지난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 발발 100주년 행사의 주제였다. 이 행사에서 범슬라브 공동체에 대한 열망은 묵과되면서 유럽연합의 화해와 통합이 찬양되었다.

“사라예보는 어두운 역사의 중심”

언론에 자주 인용된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시각은 발칸반도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했다. 1990년대 초 언론인 로버트 캐플런이 출간한 <발칸의 유령들>(3)은 미국인들의 발칸반도에 대한 시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책에서 이미 캐플런은 “1차 세계대전의 진정한 뿌리를 발칸지역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2차 세계대전은 1차 세계대전의 결과일 뿐이고, 20세기 유럽의 모든 불행은 발칸반도에서 시작되었으며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사상적 모태는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불가리아의 역사학자 마리아 토도로바는 “‘야만적인 발칸반도’(4)는 서구가 만들어낸 허구로, 현대적이고 서구 문명화된 유럽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크로아티아의 젊은이들과 세르비아의 젊은이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라는 명령을 받은 곳은 1차 세계대전의 참호에서였다. 세르비아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군복을 입었고, 크로아티아는 영불 연합국편에서 참전했다.

이탈리아 언론인 도메니코 키리코는 “사라예보는 어두운 역사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유럽의 양심은 100년 동안 사라예보가 만들어낸 잔해 속에서 허덕여야 했다. 유럽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편협한 이기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곳 발칸반도에 와야 한다”고 기사를 썼다.(5) 키리코의 말이 맞다면, 사라예보의 ‘어두운 역사’가 1세기 전부터 ‘유럽의 양심’을 흐리게 했고 발칸반도의 ‘편협한 이기주의’가 유럽을 ‘죽인 것’이다. 다시 말해 제국주의, 식민주의, 파시즘, 나치즘은 별반 중요하지 않는 한낱 세부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피로 물든 발칸의 땅이 20세기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글· 장 아르노 데렝

기자. 온라인 뉴스매체 <쿠리에 데 발칸> 편집장

 

번역·임명주 myjooim@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Chirstopher Clark, <Les Somnambules. Eté 1914 : comment l'Europe a marché vers la guerre(몽유병자들: 1914년 여름, 유럽은 어떻게 전쟁을)>, <Flammarion>, 파리, 2013년

(2) Muharem Bazdulj, ‘Attentat de Sarajevo: Gavrilo Princip, Hitler l'idée yougosalve, Entretien avec Vuk Mijatovic(사라예보 사건: 가브릴로 프린시프, 히틀러 그리고 발칸반도에서의 범슬라브주의)’, <Le Courrier des Balkans>, 2013년 11월 25일

(3) Robert D. Kaplan, <Balkans Ghosts: A Journey Through History>, Picador, New York, 2005년(1993년 초판)

(4) Maria Todorova, Imaginaire des Balkans(발칸반도의 허구), <Editions de l'EHESS>, 파리, 2011년

 

(5) Domenico Quirico, ‘A Sarajevo, la conscience de l'Europe râle sous les décombres(사라예보의 잔해 속에서 허덕이는 유럽의 양심)’, <La Stampa-Le Monde>, ‘유로파’ 특별판 2012년 1월 16일